Wednesday, February 6, 2013

연민에 대하여 ─ 구조적 범죄에 대한 생각

Leave a Comment
“If the soul is left in darkness, sins will be committed.
The guilty one is not he who commits the sin, but the one who causes the darkness.”
 Monseigneur Bienvenu in Les Misérables
만약 불쌍한 영혼이 어둠에 놓이게 된다면, 죄는 저질러 질 것이다.
그 때 유죄인 사람은 죄를 저지른 사람이 아니라, 어둠을 만든 사람이다.
― 레미제라블, 미리엘 주교

레미제라블은 제목 그대로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 빅토르 위고가 시대를 뛰어 넘는 대작들을 많이 만든 이유는 여러가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연민'의 마음을 들고 싶다. 작가는 불우한 환경을 겪지 않았지만 힘든 상황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사회 구조가 낳은 불쌍한 사람들을 통해서 사회의 변화가 필요할 때 혁명의 태동과 성공을 보여주면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사랑 이야기(로맨스)도 잘 그려냈기 때문에 명작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토르 위고가 그리고 싶었던 "불쌍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리고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에서 미리엘 주교를 통해 이야기한 어둠은 무엇일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불쌍한 사람들과 어둠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거듭할 수록 역설적으로 어둠 속에서 저지를 수 밖에 없는 죄란 무엇일까 하는 질문으로 회귀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죄들은 정말 죄를 저지른 사람이 아니라 그 어둠을 만든 사람들의 죄일까? 그렇다면 이런 생각에 동의한다면 어둠 속에서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질적으로 법률적 해석에서도 이러한 반영이 가능한 것인가 하는 수많은 질문들이 스쳐지나갔다. 대부분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제대로 답변할 수 없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 우리 이웃의 삶을 통해서 잠시 생각해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한다.

도시  자본의 생태학

도시는 참 신기한 생태계를 가진 곳이다. 사람들의 대부분 생계의 수입의 얻고 있으면서 한편으로 도시는 가장 수입을 얻기 힘든 곳 중에 하나이다. 그래서 도시는 상위 계층의 부유함과 동시에 하위 계층의 생계 조차 어려운 삶이 공존하는 신기한 생태계이다. 도시를 생각하기 앞서 인간이 자본이라는 실체적 존재인 '돈'을 만들고 나서 인간의 기본적 반응 기재(response mechanism)라 생각하는 공포와 탐욕(fear and greed)때문에 썩지 않는 돈을 축적해 가는 본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화폐가치가 실제 곡물과 같은 1차 생산물인 시절에는 아무리 축적해도 소비하지 않으면 썩어(degradable)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인간의 욕심이 아무리 무한대라고 해도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지만 점차 썩지 않는 금이나 은과 같은 광물로 넘어가며 축적이 훨씬 용이해졌지만 이또한 한계를 가진다. 똑똑한 인간은 점점 자본의 축적이 용이한 방향으로 발명해 가며 이제는 단순히 종이 혹은 플라스틱 재질일 뿐 화폐로 대체를 하고 지금은 더이상 실체적인 화폐를 가지지 않아도 거래가 가능한 숫자만이 존재해도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즉, 자본주의의 용이성은 자본 휴대의 용이성과 더불어 성공하기 시작했고 실제 화폐를 전혀 가지지 않아도 거대 자본의 소유자가 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랑스 혁명의 시절과 비교해 보면 경제 극빈층의 삶은 더욱 더 구조적인 굴레에 속박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경제 극빈층은 실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자본을 구하는 직업을 구하지 않으면 방법이 생존의 방법이 희박한 도시 구조를 가지고 있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직업을 선택하기 보다는 어쩔 수 없이 직업을 생존의 수단으로 찾아야 하는 계층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더이상 예전의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해서 구황작물을 깨서 연명하거나 직접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희박해져서 자본이 없으면 의식주 모두 해결하기 힘든 상황이 되어버렸다. 도시의 생태계는 자본이 없으면 어떤 것도 자급자족하기 힘든 상태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입는 옷이나, 자는 공간을 떠나서 당장의 먹을 것을 해결하기도 힘든 상황이 되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의 극빈층은 생계(生計)의 문제를 떠나서 생존(生存)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도시에 적당한 지위와 경제적 위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본의 소진이 생존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듯 싶다. 대부분 자신들과 비슷한 경제 활동과 학력 수준을 유지하고 살기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런 현실을 인식하기는 쉽지 않다. 『이상한 나라의 경제학; 이원재 저』에 묘사된 성안의 사람들, 성밖의 사람들은 경제 활동의 구조를 잘 설명해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성안의 사람들로 묘사되는 소위 대기업 회사원을 포함한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한 사람들 입장에서 성밖의 경제 활동이나 삶이 다가오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아무리 물가가 오른다 살기 힘들다고 해도 사실 성안의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가 쉽게 체감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따라서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에 놓여 있다고 해도 성안의 사람 / 성밖의 사람 에 대한 개념은 여전히 현대의 도시 경제활동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성밖의 사람들은 노동의 강도는 높지만 소득 구조는 낮은 활동을 통해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지만 외부 환경의 요인에 쉽게 흔들린다.

예를 들어 식료품비나 식재료비가 조금만 올라가도 그 부담은 크게 다가온다. 마치 성밖의 사람들은 메뚜기 떼가 한번 휩쓸고 가면 먹을 것이 없어 죽는 사람들은 성밖의 사람들이 된다. 그리고 나서 성안의 사람들도 성밖의 사람들의 생산활동 (1차 생산) 에 의존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어느정도 영향을 받겠지만 바로 그 영향이 다가오지는 않는다. 이 순간에 흥하는 사업은 외부의 성에서 물건을 가져오는 일이 될 것이다. 자본의 풍부함은 비록 내수 경제활동이 침체되겠지만 먹고 사는데 필요한 물품들은 외부 경제 영역에서 가지고 올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도 마찬가지이다. 성안의 사람들은 국내 양돈 농가가 구제역 등에 의해 망해가도 돼지고기 사먹는데는 별로 큰 저항감을 느끼지 못한다. 국내 양돈 농가가 망해가고 다시 자립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돼지고기 수입상은 더 열심히 수입하게 된다. 그런데 본격적인 문제는 국내 양돈 농가가 수입 돼지고기에 충분한 경쟁 구조를 가지지 못할 때부터 시작한다. 돼지고기의 수입 의존도가 높아지면 점점 시장에 의한 가격 결정이 아닌 수입, 유통에 의한 가격 결정이 되기 시작한다. 그 이후는 국가의 정책적인 지원이 아니라면 쉽게 자립하기 쉽지 않은 구조로 진행하게 된다.


...

연민은 사전적인 의미로 "(남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 깊은 동정"이라 나오고 다시 측은은 무엇인지 알아보면 맹자의 사단설에서 유래된 측은지심, 즉 인간이 본래 가지는 감정이며 선을 싹틔우는 근본이 되는 4가지 인간의 근본적인 마음이라고 설명을 한다. 그리고 이를 인(仁)이라 표현한다. 누구나 자신보다 못하고 불쌍한 처지와 상황을 보면 그에 대한 말그대로의 연민, 측은의 마음이 생긴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탐욕으로 이기적인 세상에서도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마음으로 살피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기 쉽다. 바로 상대방의 상황을 보아야 한다(see; perceive)는 것이다. 시각을 통해 본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이해하고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서 인식해야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연민도 결국 인간의 인식을 통해서 시작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제는 앞서 언급한 성안의 사람들은 쉽게 성밖의 사람들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의 망루를 통해 보아도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보다는 넓게 펼쳐있는 숲과 자연의 아름다움이 더 다가올 것이고 혹시나 알게 된다고 해도 자신의 삶을 일부 혹은 전부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 연민의 마음으로 시작되는 어떤 행동도 쉽게 시작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즉, 인식의 큰 장벽은 사실 이미 존재하고 있던 자본에 의한 성벽이라는 사실을 쉽게 눈치채지 못한다. 모 재벌 그룹의 후계자가 장례식장에서 조의금을 얼마내야할지 모른다는 사실이 히해하기 힘들지 몰라도 재화의 유용성과 활용가치는 자신이 한계를 느끼는 자본의 크기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에 의해 나누어진 성안의 삶과 성밖의 삶은 근본적으로 풍요로움의 문제보다 삶을 살아가는 재화의 유용가치가 다르다. 예를 들면, 성안의 부유한 부자 한명은 자신의 옷을 사는데 필요한 금화 5개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금화 5개가 성밖 사람들 10가구의 일주일 먹는것을 해결한다면 부자는 쉽게 옷을 사지 않고 성밖의 사람들 10가족을 위해 줄 수 있을까? 쉽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그 금화 5개의 가치를 몰라서가 아니라 부자에게는 그정도 대단한 가치를 가질 것이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소유한 자본의 크기가 크기 때문에 금화 5개가 가지는 비율은 참 보잘것없고 그런 보잘것 없는 자본이 누군가에게 생계 유지를 위해 큰 돈이라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정말로 성밖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생계가 생존의 문제로 변하는 시점이 언제인지, 그리고 어느정도의 돈때문에 사람들의 삶이 파괴될 수 있는지, 그리고 아무리 자본을 가져도 구조적 (법률, 행정) 문제로 어쩔 수 없이 생존의 문제가 된다는 것은 충분한 삶을 유지하는 사람들에게, 더 좁혀 이야기하자면 안정적 직장과 생계수단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쉽게 다가오는 문제가 아니다. 더 추상적으로 이야기하면 연민을 느낄 인식조차 어려운 상황이 많다는 것이다. 먹을 걱정보다 맛있는 것이 더 고민이고, 입을 걱정보다 멋있는 것이 더 고민인 사람들에게는 길거리 지나가다 우연히 보게 되는 노숙인들에 대해서 그들이 거리로 갈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한 여러가지 고민과 이해의 시도가 없다면 거부하고 싶은 대상이 되기 쉬운 것이 사실이다.


겉으로 평등해 보이는 현대 사회에도 분명 자본에 의해 계급은 존재하게 되고 그 계급은 유동적이고 변화할 수 있다고 해도 자본의 대물림은 점점 그런 계급이 세대를 통해 고착화되어가고 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본이 결국 인간이 활동할 수 있는 범위와 기회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비록 기회가 평등하다고 해도 자본에 의해 활동 범위가 제한되는 상황은 자주 발생한다. 그런 상황은 사회적 구조를 통해서 더 강화시킨다. 신용불량제도가 가장 대표적일 것이다. 좀 더 많은 기회가 주어져야 더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질텐데 신용불량자가 되면 금융적 혜택부터 제한이 되어 더욱 더 생계를 위한 자본의 획득이 더 어려워진다. 역설적으로 신용불량제도가 전혀 상관없는 성안의 사람들은 더 많은 기회를 가지게 되고 결국 사회 구조가 인간은 자본에 의해 설계된 것 같은 철학으로 움직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성밖의 사람들은 더욱 더 생계의 수단도 어려워지게 된다. 결국 계속 끊임없이 일해도 그 자본의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더욱 더 빨라지는 바퀴의 속도에 못이겨 생존을 포기해야하는 경우도 흔하게 일어나게 되어버린다.

가난은 범죄를 만드는가?

언론은 참 재미있는 존재이다. 언론의 순수한 참 기능이 무엇인지 점차 잊혀지는 요즘에 강력범죄, 살인이나 성범죄와 같은 보도를 보면 혼란스러운 경우가 많다. 한편으로는 그런 짐승같은 범죄를 저지른 그 인간에 대한 혐오를 들어내다가도 다른 한편으로는 범죄자가 그런 범죄를 저지르기 까지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온 것은 강조하거나 정신적 문제를 포함한 사회적 문제로 확대 해석하기도 한다. 다양한 시각을 전해준다는 것에 대해서는 언론에 감사하지만 그런 범죄의 원인이 마치 그들이 겪어야 했던 성장 배경과 환경에 있다고 전달해주는 것에 대해서 큰 유감을 느낀다.

묵적으로 동의하는 결코 성립하지 않는 명제는 "부자들은 강력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이다. 나는 이 명제에 대해서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만약이라는 가정은 소용없지만 만약 어떤 살인범이 부유한 삶을 보냈다면 그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다른 방법으로 질문하면, "부유한 삶을 살면 강력범죄를 저지르지 않는가? 혹은 그 범죄율이 줄어드는가?" 이다.

이 질문에 적절하게 대답하기 위해 자본에 대한 분노를 제대로 표현한 말로 시작하자.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

단순히 사법부에 범죄여부를 재판받을 때 돈있으면 무죄받기 쉽고 돈없으면 유죄받기 쉽다는 사법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라 생각할 수 있지만 범죄를 저지르는 순간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돈이 없고 불우한 사람이 성범죄를 일으키면 그들은 비난받고 흉악범이 되고 여론과 사법부의 신속한 결정에 유죄 확정 판결 받게 된다. 그들의 죄에 대해서는 명명백백한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자본의 풍요로움에 있는 사람들은 성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인가? 여기에서 합법적이란 말은 도덕적이란 말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이해할 것이다.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만약 성범죄를 저지른 흉악범이 우연히 복권으로 10억을 받게 되었다면 범죄가 될 수 있는 성범죄를 저지를 것인지 아니면 유흥업소를 통해서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고 할 것인가? 돈이 없기 때문에 성범죄를 저지른 것이냐! 라며 반문한다면 오히려 그 반대이다. 보통 흉악범이라는 사람들의 범죄 패턴은 돈이 없기 때문에 생존의 문제가 아닌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데 자신의 충동적 선택에 의해 결정된 범죄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런 상황에 언론이 성장 배경과 환경이 마치 그런 범죄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는 뉘앙스의 보도 태도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다. 소위 거짓 연민 (false compassion)만 만들어 낼 가능성이 더 많다는 것이다.


다시 넘어오자면 대자본가들도 그들의 도덕적 결단에 살아가지 않는다면 비리, 탈법, 조세포탈, 합법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생존의 문제로 몰아넣는 많은 추악한 범죄를 저지른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범죄는 흉악범만큼 범죄라고 인식되지 않거니와 오히려 그런 범죄의 당사자들은 자본주의의 영웅처럼 존경을 받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조직적이고 법의 그물을 피해갈 수 있도록 수많은 사람들은 도와주며 그들과 같이 성안에서 살아기로 마음먹는다. 만약 화학 회사가 화학물질의 위험성을 알고도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무지한 노동자들을 화학물질에 노출시켜서 그들이 결국 죽게 했다면 살인죄가 적용되어야 하는가? 비록 법의 테두리 안에서 집행해서 현재 생계의 터전이 되는 공간을 강제로 밀어내고 그들이 거리로 내몰리게 되는 상황을 알고 있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 강행한다면 그것은 범죄인가 아닌가? 사업주라는 이유로 적절한 이유도 없이 해고를 강행하고 그 해고에 대해서 법이 보호해줘서 복직시켜줘야 한다고 해도 법마저 무시한다면 이는 위법이 아닌가?

그래서 흉악범을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라는 시선은 조금 더 넓게 바라봤으면 좋겠다. 오히려 가난 그 자체에 문제로 귀결하기 보다는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드는 사회, 경제 구조적 문제에서 발생하는 생존의 문제를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어둠은 죄를 만들어 내는가? 

빅토르 위고가 말하고 싶었던 어둠 안에서의 죄는 지금 언론이 말하는 가난과 불우한 성장이 만들어내는 범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기엔 이미 충분히 부유한 자본가들도 너무도 많은 합법적 범죄(?)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아프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빅토르 위고의 말은 그냥 문학적 표현에 지나지 않았을까? 여기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인식의 스펙트럼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 경제 구조적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은 존재한다" 

의 명제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개인적으로 더이상 어떻게 설득할 수 없다. 가난은 개인적 노력에 따라 모두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 보수와 진보에 대한 지난 블로그 ] 내용에 비추어 가난의 문제도 결국 개인의 문제가 더 크기 때문에 보수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지금은 진보의 이념이 더 필요하다고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가 더 크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의 명제에 상당부분 공감한다.

더불어 개인의 문제로 귀결된다면 앞서 이야기한 연민의 문제도 사실 큰 의미가 없을 때가 많다. 지금 사회 시스템의 문제가 크다는 생각이라면 지금 사회 시스템의 혜택을 보는 사람들은 분명 그 시스템에 의해 가난하게 생존의 문제가 되어버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마땅한 연민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여러가지 생각할 수 있지만 가난을 만드는 사회 시스템, 빅토르 위고가 말하고 싶었던 어둠은 크게 두가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1. 사회, 경제적 구조로 인해 빛조차 새어 들어가지 않는 동굴 안 
  2. 그 어떤 것도 보고 읽을 수 없기에 무지한 상황의 빛없는 공간 


첫번째는 앞서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희망조차 없어 회생이나 자립할 수 있는 기회보다 오히려 사회 구조적으로 분류되고 자본의 약자로 더욱 더 몰리는 경우일 것이다. 두번째는 무엇이 제대로 된 것인지 알 수 없는 무지의 상황으로 몰린 경우일 것이다. 빅토르 위고가 다른 용어가 아닌 어둠이라 표현한 것은 어쩌면 이런 상황에 대한 묘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두가지 경우 모두 그 어떤 경우든 어둠을 막아 빛을 보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첫번째 경우 금융권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달려드는 사금융 업자들, 그들은 대부분 선한 마음으로 어둠에서 꺼내어 주기 보다는 더욱 더 짙은 어둠으로 몰고 가려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두번째 경우는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배우지 못하고 힘없는 상태를 이용해 성매매에 이용하는 사람들도 생각해볼 수 있다.

구조적 범죄에 대해서...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지만 이런 구조적 문제에 의해서 발생하는 범법자들의 죄를 '구조적 범죄'라고 편의상 부른다면, 정말 우리 사회에서 그들을 격리시키고 교정해야 하는 것인가? 빅토르 위고가 판사라면 오히려 그들은 어둠에서 꺼내어 주고 그 어둠을 만든 사람들에게 죄를 물어야 할 것이다.

제는 어떤 범죄에 대해서 구조적 범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똑똑하고 지혜로운 판사들을 위해 우리들은 세금을 내는 것이다. 법리적 판단의 유연성이 존재한다면 앞서 빅토리 위고가 이야기한 어둠에서 저질러진 죄에 대한 처벌에 대해서는 연민의 마음으로 한번쯤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단순히 성문법의 법리 해석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피의자의 범죄가 구조적 범죄인지 아닌지, 그들이 어둠속에 존재해서 일반 사람들처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당한 것은 아닌지, 그리고 구조적 문제로 생계의 문제에서 생존의 문제로 되어버렸다면 이런 부분에 대해 인간의 연민의 마음은 충분히 발휘되어도 좋지 않을까.

진보의 이념이 개인적으로 멋지다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잘 살기 위해'라는 목표와 더불어 '함께 잘 살기 위해'라는 한단어만으로 전혀 다른 세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에 있다. 우리가 비록 성안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다고 해도 연민을 느끼는 누군가를 위해 스스로의 시간과 공간을 희생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고, 행동하기 위해 때로는 성밖으로 나와서 성밖의 사람들과 함께 해야하는 모험도 해야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연민을 느끼는 사람들, 특히 구조적 범죄(어둠 속의 죄)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 대한 시선도 가져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연민을 느껴야 할 대상에 분노를 느끼고 분노를 느껴야 하는 대상에 연민을 느끼는 인지부조화의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사법제도가 진보적이라면 좀더 구조적 범죄에 대한 판단도 지혜로와야 할 것이다. 공정한 판결을 위해 연민은 더욱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 구조적 억압 속에 생존과 생명의 위협 그리고 그에 대한 방어로 만들어진 죄, 
  • 죄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범죄에 이용당해 만들어진 죄. 

에 대해서는 충분히 법이 테두리에서 관용과 용서의 지혜를 선물해주는 것이 그들이 다시 어둠 속에 들어가지 않는 방법이라 믿는다. 마치 미리엘 주교가 장발장에게 베풀어준 용서와 연민의 마음처럼...

¶ 마... 

왜 이런 글을 쓰기 시작했는가 물으면 그냥 우리 시대에 연민은 마치 자신의 머리를 이해시켜야만 가능한 인간의 조건적 마음이 되어버린 것 같은 마음이 씁쓸했다. 4년전 용산 참사를 통해서 사실 가장 크게 놀랐던 것은 그들은 생존을 위해 그렇게 목숨을 내놓았는데도 상당수 (성안의 사람들) 는 그렇게 사람의 목숨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돈 몇푼 더 받겠다고..." , "저렇게 싸워서 목숨만 버렸지..." 등 더 심한 표현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이 시대는 연민은 하나의 장식품이 되어버린 것인가 싶어 마음이 아팠다.

생존의 문제와 생명의 절박한 순간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머리를 이해시켜줄 정보를 찾는다. 물론 그 대부분은 연민에 의해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보다는 그들을 이해하지 말아야 하는 거짓 정보들까지 풍성해진다. 연민은 충분히 우리를 "함께 잘 살기 위해" 필요한 가치라고 믿는다. 그 믿음을 따라 글을 마친다.

0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