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February 18, 2013

댓글의 동물 - 인터넷으로 우리는 진실에 접근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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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가 인간의 잔인함의 선율을 느끼게 된 계기가 있었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울랄라 세션의 한 멤버가 위암 말기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인터넷에서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나서 참 사람이 무서울 수 있구나 느끼게 되었다.

"제가 제약회사 다녀서 아는데, 위암 말기면 저렇게 활동 불가능합니다." (근래 가장 맘에 안드는 ...해서 아는데...)"위암 말기인데 어떻게 저렇게 활동해 인기 얻을려고 마켓팅용으로 거짓말하는 것 아니야?" "나보다 더 멀쩡해 보이는데 무슨 위암말기야" "위암말기면 저렇지 않고 말라버리는데 잘 살아 있네..." 

고 임윤택, 아픔없는 곳에서 편히 쉬시길... 출처: JOINSMSN

이밖에도 부정적인 내용의 댓글들이 올라왔었고, 오프라인 상에서 만난 지인들도 위암 말기에 대한 병리학적 근거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거짓 마케팅을 한다는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본인의 의료 기록(이미지)까지도 공개했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게 되는 경우는 그리 많은 것 같지 않았다. 심지어 전문의의 소견을 통해 심각성을 이야기해도 결과는 비슷했다. 그리고 충분히 설득하고 객관적인 자료를 통하면 믿을 수 있을거란 막연한 개인적 생각은 아닐 수 있구나, 아니 어쩌면 상당히 어려운 일이구나 느끼게 되었다. 결국 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금은 답답한 마음에 [ 가난한 마음은 계산하지 않는다 ] 란 글을 통해 머리가 허락해야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의 연민에 대한 슬픈 느낌을 이야기했지만, 어쩌면 머리가 허락하는 것조차 인간에게는 쉽지 않은 것임을 배워가는 것 같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제자 하나가 구걸하는 거지를 향해 “그대가 가난한 척하는 부자인지 아닌지, 그것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할때,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한 사람 앞에서 옷을 벗고 발에 입맞추며 용서를 빌라고 명하였다고 한다. 익명성과 사이버 공간이라는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되는 인터넷 세상에서는 누군가를 향한 공감은 더욱 더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다. 또한 미디어의 발달로 이야기는 빠르게 전파되고 그 과정에서 이야기의 다양한 소비자층에게 전달되고 다양한 소비자층은 같은 이야기도 다르게 해석하고 자신의 논리를 근거로 허구성을 이야기하거나 반론한다. 인터넷이란 공간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고, 공유의 가치가 확산되면서 지식이나 정보뿐만 아니라 사건의 진실에 더 근접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의 실 사용자로 관찰한 결과는 오히려 그 반대일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바라본다. 즉, 인터넷이 사건의 진실보다는 여론의 흐름에 따라서 인간의 논리와 감성마저도 압도할 수 있다는 작은 결론이다.

언적 인간 (Homo commentus) 

인터넷을 살펴보면 다양한 사람들이 한가지 주제에 대한 다양한 반응을 댓글(reply, comment)을 통해 볼 수 있다. 특히 연예인이나 공인에 관련된 내용은 첨예한 대립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각자의 호감에 따라서 그 반응은 엇갈린다. 울랄라 세션처럼 가수의 길을 걸으며 인지도를 얻기 시작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심하다는 표현을 포함하여 다양한 반응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런데 조금은 의외의 대상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반응이 흥미로운 경우도 발견하게 되었다.


이스북에서 감동적인 이야기,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올리는 페이지에서 [ 삼각지의 옛집 국수 이야기 ] 를 올렸다. 이야기는 오래전 노숙인으로 배고픔에 식당을 찾았지만 돈이 없던 그에게 밥을 주는 곳은 없었고, 분노의 마음을 가지고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찾아간 국수집에서 밥을 먹고 도망가는데 노숙인 뒤로 할머니께서 "그냥 가, 뛰지 말고, 다쳐!" 라고 외치셨고 할머니의 마음에 그 노숙인은 다시 일어나서는 계기가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직접 가보면 다 먹을 때쯤 항상 더 줄까? 물어보는 할머니의 인심과 그 무뚝뚝한 미소가 참 좋은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과 감동의 댓글을 올리는데 그 와중에 뜻밖의 댓글들이 올라오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어떻게 노숙인이 (파라과이에) 이민을 가느냐." 
"나만 논리적으로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 같다." 
"원래 이 이야기 거짓말이다." 
"원래 이 이야기는 그 이후에 더 내용이 있고 할머니가 잡아 경찰에 넣는 것으로 끝난다." 

이야기는 분명 따뜻한 감동과 아름다운 미소를 만드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허구성에 의해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기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허구성을 강조하면서, 논리적 모순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전에 들었던 이야기의 내용과 상이한 부분을 지적하기도 한다.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분석하거나 고민하는 것은 정신건강상 좋지도 않고 분석한다고 뾰족한 원리가 보이지도 않을 것이기에 현상 자체에 집중을 해보자. 연예인이나 공인에 대한 공격적인 댓글은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어 보였지만 이야기때문에 특별히 자신에게 어떤 손해가 가해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허구성에 상당히 공격적으로 매달리는 반응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주로 분류를 해보면, ⓐ 이야기에서 논리적인 모순과 잘못된 부분을 찾았다거나, ⓑ 전에 들은 이야기의 내용과 다르거나 ⓒ 단순히 믿음이 안가는 반응을 볼 수 있었다.


진실의 여부를 떠나서 감동적인 이야기를 대할 때 그냥 그 이야기가 전해주는 내용을 받아들인다면 특별히 허구성을 강조하는 댓글을 이해할 수 없지만, 현상적으로 보이는 댓글에 대해서 살펴보면, 이야기에서 논리적인 모순과 잘못된 부분을 찾는 경우에 그 논리와 잘못된 부분조차도 비약적이거나, 보통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동일하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가정을 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노숙인이 어떻게 이민을 가는가?" 라는 반문을 하지만, 딱히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반문을 제기한 사람에게는 '돈조차 없는데 이민을 가는 것은 불가능'이라는 가능성에 대한 검토가 아닌 자신의 논리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전에 들은 이야기의 내용을 통해서 이야기의 허구성을 강조할 때, 대부분 사람들은 개그의 소재가 될 법한 감동에서 코믹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얘기하며 허구성을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가끔은 그 코믹적 이야기가 원래 이야기이고 사람들이 감동적 이야기로 바꾸었다고 주장한다.

설쓰는 동물 (Homo fictionius) 

글들에 주목하면서 흥미로운 내용 두가지를 더 볼 수 있었다. 첫번째는 앞서 이야기한 ① 허구성의 반론은 서사적 이야기에 더 많이 몰린다는 것이다. 명언이나 문구의 인용 (Quotes) 에 대해서는 냉소적 반응의 댓글은 볼 수 있어도 허구성에 대한 반응은 거의 볼 수 없다. 누군가 레미제라블의 대사를 인용하면 반응은 공감한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지만, 누군가의 이야기, 누군가 역경을 극복한 이야기 등 실제 이야기를 전해도, 내용의 허구성에 대해서 주장하는 비율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사실 감동적인 이야기에 공감을 하고 감동을 받는다고 해서 자신에게 특별히 문제가 되거나 손해가 되는 경우는 특별히 없다. 그런데도 유독 허구성을 강조하며 논리적 모순점 (사실 주장하는 논리적 모순점조차도 모순인 경우도 많다.) 을 강조하거나 자신이 알고 있는 다른 각색(version)의 이야기를 비교하거나, 이야기의 감동적 요소를 유머나 엽기적 결말로 끝내 이야기의 진실성을 반증하는 경우가 있다.


다양한 반증으로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런 반응에 대해서 특별히 나쁘다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리고 허구성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나 반응을 비판하는 것보다 왜 내용이 있는 이야기에서 이런 허구성에 대한 논란이 발생하는가에 더 생각해보고 싶다. 본질적으로 명언의 인용과는 다르게 이야기는 서사적 요소와 극적 요소가 항상 존재한다는 차이점을 볼 수 있다. 사실 할머니의 정확한 워딩(wording)이 "그냥 가, 뛰지 말고, 다쳐!"  였을지 사투리가 섞였을지 아니면 "뛰지 말고, 다쳐!" 만 하셨을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듣고 글로 전해지든, 말로 전해지든, 정확한 문장 표현(text)이 전달될 가능성이 더 적다. 왜냐하면 인간은 솔찍히 멍청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멍청함은 오히려 더 창조적인 작업을 만들어 간다. 처음에 들었던 이야기의 줄거리와 내용은 알겠지만 이야기의 세부내용(details)은 문장 표현과 시간 순서의 배열 등을 통해서 극적 감동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주목할 만한 두번째는 바로 이런 각색에 의해 이야기는 변화하고 그 변화는 실제 ② 사건의 진실성보다 우리 삶에서 일어날 법한 허구성에 의해 각색되어 간다는 것이다. 옛집 국수에 대한 오래전 블로그 내용을 먼저 보고 페이스북에 올라온 내용을 비교하게 되었다. 사실 페이스북의 내용을 보면서 내가 알고 있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내용이 많이 각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노숙인이 할머니의 따뜻한 외침에 감명받아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고만 알았지만 어느새 이야기는 노숙인은 파라과이로 이민을 가서 성공했고 TV 프로그램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 내용을 조금 더 찾아보면 파라과이 이민에 대한 내용은 누군가의 각색이 아니었을까 싶다. 즉, 누군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외국에서 성공하고 먼 훗날 할머니를 찾아뵈러 갈때 대구나 부산에서 KTX 타고 용산으로 올라오는 것보다는 파라과이에서 비행기 타고 오는 것이 더 극적이고 더 감동적일 것 같다는 마음에서 첨부된 각색이 아닐까? (TV는 사랑을 싣고를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인터넷은 사건적 진실을 때로는 감동적 요소로 각색하기도 하고 때로는 호의적인 표현으로 미화시키기도 하고, 반대로 악의적인 표현으로 나쁜 이미지를 만들기도 한다. 객관적 사건의 내용만을 전달한다고 하면서도 단어 하나의 표현과, 문장의 배열 등으로 충분히 우리는 중립적 입장 혹은 아무런 입장이 없는 인터넷 사용자들에게 자신이 의도하는 감정의 각색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터넷은 쉽게 빠르게 공개(publication)할 수 있어 이러한 각색은 더욱 쉽고 빠르게 진행되게 되는 것이다. 각색은 때로 각색자가 추구하는 바에 따라서 다양하게 변형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코믹적 요소나 엽기적 요소로 발달하는 것이다. 앞서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는 결국 감동을 하고 멈춘 노숙인을 잡아 경찰에 넘기는 이야기가 원래 이야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각색의 과정은 원본 글이 그대로 보존이 되어 전달되지 않는다면 항상 존재하고 그러한 각색의 결과로 우리는 다양한 이야기의 내용을 얻게 된다. 즉, 이야기의 본질적 줄기는 존재하지만 세세한 표현의 방법과 진행 내용을 통해서 이야기는 전혀 다른 목적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각색은 결국 실체적 사건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개연성을 가지는 허구성을 통해 각색하게 된다. 그래서 허구성을 강조하는 댓글들의 내용또한 이러한 각색의 부분에서 지적하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도 흥미로운 내용이다.

쉽의 동물 (Homo gossiprinus)

주 자연스러운 명제이지만 "잘못된 준거에 의한 명제는 잘못될 가능성이 높다" 준거가 잘못되었다고 해도 명제가 참일 가능성도 있지만 문제는 아무리 참이라고 해도 그 참인 값은 우연에 의한 값이지 소위 인간의 논리적 과정에 의한 논거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대부분 우리는 우리가 판단하고 무엇인가 결정을 내리는 많은 준거들, 근거들을 인터넷을 통해서 찾게 된다. 그리고 이유는 알수 없지만 진실에 대한 집착만큼 진실을 열심히 찾으려고 하지도 않는 것 같다. 대다수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의 내용들이 잘못된 내용이 인터넷을 통해 퍼지고 어떤 계기를 통해서 (예를 들어 방송을 통해 전달되거나...) 진실이 아니라도 사실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 검색의 시대 - 섬세함은 기술을 발전시키는가 ] 을 통해 우리가 섬세한 검색을 통해 검색에 조금 공들인다면 우리가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좀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한가지 놓친 부분은 바로 인간이 가지는 허구성의 각색력이다. 사실 옛집 국수와 같이 극적, 감동적 이야기가 꼭 진실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허구성에 의한 각색으로 좀 더 우리에게 감동을 극대화 한다고 해도 별로 손해될 것은 없다. 그러나 확장시켜 언론의 기능을 통한 각색은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최근에 발생한 모 대기업의 화학물질 증기 유출 사건을 보면, 사건 발생 직후 몇몇 언론에서는 화학물질이 유출되었고 이에 따라 방제작업을 하던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는 내용을 보도한 반면, 모 신문사의 내용은 사망한 사람이 제대로 안전장비를 착용하지 않은 개인적 과실을 중심으로 이야기했다. 즉, 화학물질 유출에 대한 사건적 진실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인명 피해라는 중대 사안을 어떻게 이야기하는가를 각색한 것이다. 문제는 이 각색에서 적용된 허구성의 정도가 문제가 된다. 만약 안전장비를 모두 착용한 상태인데 인명피해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기 위한 '목적성'이 존재했다면 분명 그 각색은 사건의 진실을 떠나서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마저 각색하려는 위험한 시도가 된다는 것이다.

[ 당신의 확신 얼마나 확신하십니까 ] 비록 인터넷을 통해서 진실에 접근한 많은 정보들을 얻었다고 해도 그 이후 인간의 판단은 새로운 문제를 만든다. 인간의 확신은 생각보다 체계적이지 않으며, 상당히 감정적이면서도 스스로는 논리적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덴마크 영화 "더 헌트 (Jagten, 2012)"는 이러한 인간의 확신에 대한 경고를 한다. 영화는 유치원 아이 하나의 거짓말을 통해 한 남자가 철저히 비난받고 논의의 여지도 없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게 되는지 그리고 회복되지 않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별로 근거없는 논리로 남자보다는 유치원 아이의 말을 더 믿는다.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이 말을 통해 집단 최면이 걸린 것처럼 아이는 진실이고 남자는 거짓에 변태 성욕자라는 비난을 하며, 그 비난에 어떠한 반증도 생각하지 않는다. 유치원 아이는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내용을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구성하여 각색하며 허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발달 심리학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아이는 상당히 거짓말을 잘하는 존재이다." (어쩌면 인간은... 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인간은 믿고 싶은 것만 본다" 

간의 허구성, 그리고 그 허구성에 의한 각색의 효과는 우리에게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각색되지 않은 진실인지 찾아야 한다는 의식을 주기 보다는 사용자에게 "너가 맘에 드는 것을 골라 봐~" 혹은 "너가 믿고 싶은 것만 골라 봐~" 라는 선택권을 주게 된다. 옛집 국수 할머니의 이야기가 각색에 의해 다양한 이야기가 존재하게 되고 자신의 경험, 자신이 이해하는 세상의 범위만큼 자신이 고르고 싶은 이야기를 고르게 된다. 너무 진지하고 너무 감동적인 이야기를 믿기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코믹하고 엽기적인 결론을 가지는 이야기가 더 보고 믿고 싶은 것이고 그 믿고 싶은 것만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여기에서 생각해봐야 하는 중요한 점이 있다. 엽기적인 결론이 되어 할머니가 경찰서에서 노숙인에게 한마디 하는 이야기가 믿고 싶은 것은 개인의 자유이지만 이것이 사실인 것처럼 주장하게 된다면 자신은 잘 알지도 못하는 할머니의 품성을 그정도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울랄라 세션의 멤버가 자신은 위암 말기가 사실이기 때문에 솔찍하게 고백했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믿고 싶은 부분만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프지도 않으면서 동정심을 유발하며 마켓팅에 활용하는 상업적 가수"라며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진실에 집착하는 만큼 사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본다면 어떤 부분이 각색이고 어떤 부분이 실체인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 수 없다고 해도 적어도 그런 주장을 확신을 가지며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I would never die for my beliefs because I might be wrong.
- Bertrand Russell
나는 내가 틀릴 수 있기에 내 믿음을 걸고 죽지 않을 것이다.
- 버틀란드 러셀

뜻한 인간(Homo empathicus) 을 꿈꾸며... 

각색된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믿음을 확신하며, 결국 누군가를 쉽게 판단하고 평가하는 사람들의 모습, 허구를 주장하며 자신의 주장에는 허구가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은 인터넷이란 공간이 펼쳐지며 더 가속화되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인터넷 공간은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기 보다는 비록 누군가가 자신의 잘못된 주장으로 상처받을 수 있음을 알면서도 '진실이라는 정의의 이름으로' 허구를 주장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이켜 보면 개인적으로 진실이라고 믿었던 대상에 맹신하기도 하고 그 맹신으로 결국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잘못된 사람'으로 판단하는 경우도 많았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 것은 최소한 나의 댓글과 소문에 의해 누군가 마음의 상처를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줄이는 적극적 노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뜻한 이야기를 들으면 따뜻하게 반응하고, 뜨거운 이야기를 들으면 뜨겁게 반응하면 좋겠다. 언젠가 지하철에서 프로포즈하는 동영상이 인터넷을 떠들석하게 한적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지하철에서 연출된 것을 누군가 동영상으로 촬영한 것이고, 감동을 전하기 위한 극적 효과를 위해 다양한 각색도 되었을 것이다. 대부분 연출된 것을 알게 되고 수많은 사람들은 허구성에 대한 배신감을 표출하는 것을 보았다.

2007년 노숙인에게 목도리를 전해주는 사진. 연출이다, 낚시다.. 주장하는 사람들의 마음엔 언제 감동이 전해질 수 있을까?

허구성도 사실 우리의 삶에서 가지는 개연성의 연장선 상에 존재한다. 만약 그 짧은 순간 연기자들의 연출력과 각색력으로 우리의 마음이 잠시라도 찡했다면, 그 찡한 가슴의 여운을 가지며 연기자들이 우리 삶에 이런 멋진 프로포즈도 가능하다는 즐거운 상상을 주었다는 것에 오히려 감사한다면 특별히 분노와 화를 내며 흥분상태에 놓는 것보다는 훨씬 정신건강에 좋지 않는가. 언제부터인가 너무 많은 정보들과 지식 (정확한지 검증도 되지 않은...) 들은 우리의 감정을 머리가 이해해야 반응하는 부속품으로 만든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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