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날이여, 그대의 귀한 가치를 깨닫게 하여라. - 매리 J.아이리언
친구들과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항상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에휴...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다." 얘기 들어보면 지극히 평범한 삶을 지내면서 결론은 마치 상당히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 평범하지 않은 것이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의 삶, 타인의 삶이 어떤지 살펴보고 평범함을 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보통은 자신의 삶은 자신에게 특이하고 험난한 삶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들, 연애를 하고 있는 사람들, 이별을 한 사람들... 어떤 상황의 사람들도 자신의 연애 이야기는 항상 드라마 소재같은 삶이라고 생각하면서 역시 "뭐 큰것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평범하게 연애하고 결혼하고 그냥 그렇게 살고 싶다..." 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평범함이 어느정도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평범을 이야기하고 싶기 보다는 "무탈한 삶"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침마다 약을 한가득 먹는다. 그중에는 혈중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약이랑 혈전 용해제라고 해서 쉽게 말해 혈액을 덜 찐덕거리게 만드는 효과를 하는 약들이 있다. 복용하고 나서부터 눈에 띄게 달라지는 현상은 작은 상처에 나는 피도 예전같이 쉽게 지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적게는 몇시간 길게는 하루 이상 피가 멈추지 않고 흐르는 것이다. 지혈이 되었을거라 생각하고 생활하다 보면 이곳저곳에 묻어나는 피들도 불편하고 얼굴이라도 무심코 만지고 나면 얼굴엔 피범벅이 되어서 마치 응급실(ER)에서 외상환자 곁에서 사투를 벌리다가 온 것 같이 되어버린다. 작은 상처 하나에 지혈이 안되던 어느날, 작은 상처하나 이렇게 지혈이 안되는데 혈우병(hemophilia) 환자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며 마음 속으로 그들을 내심 이해하는 것처럼 내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고 그런 생각에 내가 마치 혈우병 환자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이해할 수 있을 거란 "이해심의 자만" 속에서 있다가 하루가 저물기 전에 문득 스치는 생각에 부끄러워졌다.
사실 혈우병 환자들이 평소에 느끼는 두려움의 정도는 내 손가락에 난 상처에서 흐르는 피와는 비교가 안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일반적 상처에도 조심해야 하지만 병원에 들어와 수술이나 시술도 문제이지만 관절이나 내부 장기의 내부 출혈에 의해 위험이 높아지기 때문에 항상 자신의 상태를 관찰하고 살아야 하는데 어쩌다 난 작은 상처에서 혈우병 환자에 대한 이해심을 생각했다는 것이 부끄러웠을 뿐이다.
인간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자신이 경험한 내용에 대해서는 큰 의미부여를 하고 그 의미를 자신의 좋은 부분으로 확대 해석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존재하는지 모른다. 그런데 타인에 대한 이해심에는 그런 경험과 생각이 오만과 편견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은 분명 소중하다. 그리고 자신이 겪은 삶의 이야기는 분명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 그런데 그 의미있는 자신의 삶만큼 타인의 삶도 분명 의미가 있고 소중하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가끔 사람들의 대화에 귀기울이면 다음과 같은 상황을 많이 들을 수 있다.
첫번째 경우: A는 근래의 힘든 삶을 하소연하고 싶어서 B 를 만나서 이야기한다. 직장 안에서 힘든 일들 그리고 가정 안에서 부인과 자식들과 관계가 바쁜 직장 생활에 시간이 없어 항상 소흘해지며 원하는 삶의 행복을 느끼지 못해서 위로를 받을까 B 를 만났다. 한참 자신의 어려움과 고민을 이야기하는데... B 는 자신의 이야기로 선회한다. "야! 그런거 별거 아니야 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도 다 겪어 봤는데 그땐 힘들고 그래도 다 괜찮아져 난 말이지... (라며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계속 펼친다...)
A는 무엇인가 해답을 얻으려고 누군가를 만나기 보다는 자신의 입장을 알아주는 누군가를 만나기를 바랬는데 오히려 자신의 입장보다 상대방의 과거 이야기만 들으며, 인생의 후배로 더 노력하는 방법밖에 없음을 깨달고 마음은 여전히 무겁다. 사실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때는 상대방의 고통와 아픔은 먼저 들어주고, 인정해주고, 마음 깊이 받아주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가 상대방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재료가 되기 위해서는 그 고통과 아픔을 나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을 거란 공감대를 위해서 필요할 뿐, 내가 이정도 경험해봤으니! (해봐서 아는데 말이야!) 나는 너를 이해한다고 이야기하는 순간 상대방의 아픔은 사소한 것이 되기 쉬워진다. 사실 모든 이들의 아픔과 고통은 모두 다르고 상대방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마음의 태도는 개인적으로 혈우병 환자에게 가졌던 "이해심의 오만"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끝까지 상대방의 아픔을 이해하려고 기다려줘야 한다.
두번째 경우: C는 사람들 사이에서 똑똑하고 사교성도 좋은 사람이다. 분석적인 그는 항상 사람들의 태도를 분석하며 상대방이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상대방의 무의식이 표현하고 C 가 해석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C 는 사람들과 술자리에서 와인을 권하는 주인과 이야기하다가 주인이 자리를 떠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좀전에 그 와인을 권할 때 내 질문에 대해서 천장을 보면서 대답했어... 거짓말이야 그냥 속는셈 치고 마시자" C는 사람들이 가지는 태도와 어휘에 집중해서 상대방의 의도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렇게 자신감에 가득차 있었다.
C는 항상 자신감이 넘친다.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분석하지 못하는 것이 없고 그 분석은 항상 결론이 명확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C와 만나면 항상 자신의 고민과 아픔은 논리적으로 해석되기 마련이다. 직장안에서의 갈등을 듣고 상대방의 직장 안에서의 사람들, 자신은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상대방을 통해 들은 이야기를 통해 분석하고 그럴 때는 어떻게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논리적 처세"에 대해서 이야기해준다. 항상 C 의 입장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에 분명하게 구분이 되어 있다. 상당히 이해가 깊은 것처럼 보여도 대부분 C가 판단하는 기준에 따라서 사람들은 마녀가 되기도 하고 천사가 되기도 한다. 그런 명확한 구별 속에서 사람들은 더이상 판단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불편한 논쟁을 이끌기 보다는 암묵적인 인정을 통해 C에게 동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C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인지, 결국 C에게는 자신의 깊은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워지고 만다.
결국 누군가의 아픔을 들어주기에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은 "가슴으로 이해하고 머리로 판단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상의 도메인(domain)이상으로 공감하고 수용하지 않으려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표현의 한계성을 느낄 때가 많다.
"난 너를 이해하는데 말이야! 넌 그만큼 노력하지 않는 것 아니야?"
"내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너가 이상한데 내가 어떻게해?"
사람들이 평범하게 사용하는 "이해한다..."는 말은 정말 이해를 할 때보다 이해하기 싫을 때 더 많이 사용되며, 대부분 이해하는 과정을 추상적으로 받아들이며 실체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은 결과일 때가 많다. 그렇게 추상적으로 얻어진 이해는 사실 자신의 노력에 대한 주장이라기 보다는 상대방의 한계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하나의 변명이 될때가 많다는 것이 흥미롭다. 그런데 한가지 살펴볼 것은...
가슴으로 이해하고 머리로 판단하는 모습을 살펴보면 오히려...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판단하는 태도일 때 더 강해진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해한다... 는 말 자체에서 느껴지는 것은 전적인 감정의 작용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해한다는 그 작용에는 항상 내가 생각해서 합리적이고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 [ 이해는 공감과 다르다. ] 누군가의 고민을 받아주다가도 상대방의 태도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이야기를 멈추게 한다. 만약 상대방의 아픔을 공감하려 한다면 상대방의 말실수나 상황에 대한 축약에서 오는 조금은 이상한 부분도 일단은 수용해야 하지만 우리는 아무리 고통 속의 상대방이라도 자신의 논리에 근거해 적절하지 않거나 받아지지 않는 부분을 찾으려 한다. 쉽게 말해 상대방의 아픔에 대한 관심보다는 상대방이 아프게 되기까지의 스토리(plot; story)가 더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해한다는 말에는 상당히 역설적으로 상당히 머리를 아프게 하는 작업일 수 밖에 없다.
판단한다... 는 말은 상당히 객관적이고 머리만을 아프게 하는 작업같아 보이지만 판단을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부분 판단의 근거, 특히 자연과학의 자연원리에 바탕을 두고 논리적 해석을 취하는 경우에도 신념의 문제로 어떤 이념을 선호하냐에 따라서 해석은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종교를 가지는 과학자와 무신론의 과학자 사이의 대립을 보면 대표적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와 클린튼 리차드 도킨스 (Clinton Richard Dawkins)가 가지는 진화와 유전자에 대한 신념을 보면 같은 현상과 증거에도 서로 다른 해석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판단이란 사실 자신의 감정을 다치지 않기 위한 적극적 방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즉, 자신의 감정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충분히 객관적인 태도에 의해 해석된 결과임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이해하다 는 표현은 충분히 공감하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의 머리를 통해 변명하는 과정이 될 수 있고,
판단하다 는 표현은 충분히 수용하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통해 주장하는 과정이 될 수 있다.
공감은 이해보다 감정에 더 집중해
상대방을 바라 볼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되어주고,
수용은 판단보다 논리에 더 집중해
상대방을 받아 줄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되어준다.
문제는 공감이나 수용 그 어떤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어쩌면 이해와 판단은 생각의 주체가 자신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지만 공감과 수용은 상대방의 생각이 주체가 되는 것 같은 기뿐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즉, 이해와 판단은 적극적이지만, 공감과 수용은 수동적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시 평범함의 이야기로 넘어오자. 사회가 복잡해지고 인간관계도 복잡해지지만, 인간 관계를 이어주는 수많은 기술들이 등장했다. 그렇지만 현대의 통신기술이 인간의 관계와 소통에 큰 영향을 주었지만, 향상시켰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리고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평범함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아무리 관찰해도 상당히 평범하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도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 왜 자신이 평범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일까? 통신의 발달은 인간이 서로 이야기해줄 수 있는 환경의 확장은 이루어주었지만 분명 그런 것들은 상당히 피상적(superficial) 확장일 가능성이 높았다. 앞서 설명한 내용을 통해 보면, 대화의 양은 절대적으로 늘어났을지 모르지만, 이해를 위한 자료수집을 위한 도구가 되었을 뿐, 서로의 공감을 얻어내기 위한 좋은 환경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터넷이 발달하면 대화의 기회가 많아지고 그렇게 되면 더욱 서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어쩌면 그대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데 좋은 도구가 되어 주었다. 상대방의 글을 통해 상대방의 정치적 성향도 알 수 있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평소에는 어떤 맛집을 가는지 등 다양한 정보를 통해서 상대방을 이해하는 대역폭은 넓어졌지만 공감을 얻을만한 자신의 이야기를 쉽게 꺼내기 좋은 공간은 아니라는 점이다. 너무 열린 공간은 그만큼 자신의 아픔이 때로는 어떤 이들에게는 무기가 되어 되돌아 올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기술적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아졌지만 상대적으로 나의 삶과 슬픔, 아픔 등을 공감해줄 수 있는 상대방은 쉽게 찾기 어려워진다. 그리고 본인이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이해가 넓어지면서, 사람들은 무엇이 평범한 것인지에 대한 자연스러운 기준이 마련되는지 모른다. 자신과 생활 수준이 비슷하고 자라온 환경이 비슷한 인터넷 네트워크 안의 사용자들의 삶을 바라보며, 그들이 추구하고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상당히 촘촘하게 형성되고 이러한 내용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평범함"이라고 표현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잘 다니고 좋은 성적 얻어서 좋은 대학 가고 대학가서 소위 스펙(개인적으로 상당히 싫어하는 표현이지만...) 쌓고 좋은 직장 얻어 결혼하고 자식들 낳고 사는 것이 "평범"의 범주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가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 평벙이 아니라 상당한 결단을 가져야만 가능한... 그래서 그렇게 경제적으로 성공을 하는 경우에는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이다. 주목받는 이유는 "평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삶의 고단함과 힘든 여정을 표현할 때는 "평범함"을 강조하고 바라면서도 그런 평범함을 외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그렇게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라는 점이다. 소위 명문대를 나온 많은 지인들도 평범함을 그렇게 외치지만 그들의 삶의 트랙은 정규분포의 평균에 놓여 있기 보다는 상위 몇%의 영역에 존재하는 경우가 많고, 대기업 직장을 다니며 소위 5% 안의 성안의 사람들로 살아가면서 삶에 대한 만족보다는 불평이 더 가득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 신기할 때도 많다. 삶에 대한 감사보다는 불평이 많아서일까 성안의 사람들에게도 평범함은 지금보다 좀 더 바라는 모습을 원하는 평범함을 넘어서는 것을 이야기하면서도 항상 "평범함"으로 이야기한다. 그런 평범한 비범함을 원하면서 항상 미래에 대한 욕심으로 현재에 대해서 감사함은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그런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우선 친구들의 수많은 하소연과 평범하지 못한 삶 속에서 평범하고 싶다는 외침을 끝까지 들어주고 이야기가 끝날 때쯤 물어본다.
"오늘 하루 감사한 것은 무엇이 있었냐?"
그런 뜬금없는 질문에 친구들은 항상 평범하지 못한 삶에 대한 불평을 더 늘어 놓기 마련이다. 개인적으로 아프고 나서 (신체적으로), 그리고 아팠던 경험을 통해서 내가 "오늘도 눈떠서 살아 있다는 그 평범함에 참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저녁이 되었을 때 내가 하루동안 작성한 글들과 문서들 그리고 나의 생각의 흐름이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어 감사하고 그리고 길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전혀 관계없는 누군가가 또다른 나와 전혀 관계없는 타인에게 베풀어주는 선행의 모습을 볼때마다 감사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런 것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게 할 수 있다는 그 평범함에 무척이나 감사한다.
남들이 보았을 때 어린 시절 임파선암으로 항암치료를 받으며 시간을 보내야 했고, 뇌종양으로 치료도 받고 심근경색에 당뇨 소위 사보험 시장에서는 철저한 제외 대상이 되어야 하는 평범하지 않은 상황이지만 무척이나 평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들이 가는 쉬운 길을 다 버리고 다들 뜯어 말리는 바보같은 길을 가야 해서 사람들의 이해를 얻지 못하고 판단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열망과 지키고 싶은 것에 대한 신념으로 사는 것은 상당히 평범하다고 믿는다. 그렇게 우여곡절은 나에게 결국 평범함 하나만 남겨주었다. 그런 평범함은 오히려 세상엔 수많은 평범함이 존재하고 그 평범함을 인정할 때 평범함의 일상이 주는 수많은 감사해야하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도 많은 순간, 누군가를 공감하지 않고 이해하려고 하고, 수용하지 않고 판단하려 하기도 하지만, 나의 평범함을 인정하듯이 상대방의 평범함도 담백하게 공감하고 수용하려 한다. 세상의 모든 삶은 모두 평범하다. 누군가 특별하고 비범해 보이는 삶도 자신에게는 평범하게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삶이 평범하다고 인정하는 것은 비범해지고 싶어지는 세상의 욕심과 욕망에서 벗어나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일지 모른다. 그래서...
모두의 삶은 평범할 뿐이다.
평범한 은 영어로 ordinary 이다. 평범하다는 것은 그대로의 일상의(ordinary) 삶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인터넷이 보여주는 삶과 비교해서 결정되는 뜻이 아닐 것이다. 평범함을 원하지만 감사하지 않는 평범함은 비범한 미래에 대한 욕심을 표현할 뿐이다. 처음 인용한 매리 J. 아이리언 (Mary Jean Irion) 의 문단 내용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Normal day, let me be aware of the treasure you are. Let me learn from you, love you, bless you before you depart. Let me not pass you by in quest of some rare and perfect tomorrow. Let me hold you while I may, for it may not always be so. One day I shall dig my nails into the earth, or bury my face in the pillow, or stretch myself taut, or raise my hands to the sky and want, more than all the world, your return.” - Mary Jean Irion
평범한 날이여, 그대의 귀한 가치를 깨닫게 하여라. 그대를 통해 배우고,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를 축복하게 하여라, 그대와 떨어지기 전에. 가끔 드물고 완벽한 내일을 추구하기 위해 그대를 지나치지 않게 하여라. 가능한 그대를 붙잡도록 하여라, 항상 그렇게 평범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어느날 나는 땅파며 소일거리 하거나, 베게에 얼굴을 파묻거나 기지개 쭉 피거나, 하늘향해 두손 뻗겠지만, 그 무엇보다 그대가 돌아오기 바라오. - 매리 J. 아이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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