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February 26, 2013

정상에 대한 강요 - 교육의 목적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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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正常) [정ː상]  : normality, , normalcy
[명사]
1. 특별한 변동이나 탈이 없이 제대로인 상태.
2. [북한어] 있어야 할 상태에 바로 있는 것. 또는 그런 상태. 

히 정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일반적이고 평범한 그리고 대부분 평균의 집단이 수행하는 정도를 기준으로 해서 정상이라고 표현한다. 코 하나에 입 하나, 눈 두개, 귀도 두개에 별로 특별한 것 없으면 그냥 외형적으로 정상이라고 이야기하고 주목할 만큼 특별하거나 모자라지 않은 상태를 정상이라고 표현한다. 상당히 정상적인 교육의 과정을 겪어 왔던 사람들에게 정상적 교육이 무엇이냐 라고 물으면 일단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상의 범위를 설정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만약 모든 부모들이 자식의 교육에 있어 보통 남들이 하는대로 돈을 쓰고 대학에 보내는 것을 정상이라고 표현을 하고 일반적으로 학교 교육만 받아서는 모자라기 때문에 추가적인 학원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교육이 바로 현재 대한민국의 교육이 가지는 정상의 범위이다.

모든 부모들은 겉으로 일반적인 상태를 말하는 정상 (normality) 를 이야기하지만 속으로 의미를 파악할 때는 아마도 정상(top, summit)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정상 (頂上)   : top, summit
[명사]
1. 산 따위의 맨 꼭대기.
2. 그 이상 더없는 최고의 상태.
3. 한 나라의 최고 수뇌. 

그렇게 부모들은 동음이의(同音異義)의 정상을 외치면서 아이들에게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필요한 학력과 기준을 강요하고 있다. 그렇게 강요된 교육이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흥미롭고 즐거울 일이 되기 힘들 것이다. 그렇게 정상에 대한 강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일찍 시작하게 된다.

상 범위에 대한 고찰 

한때 고혈압(hypertension) 에 대한 정상 범위는 80 (이완기) - 120 (수축기) 였다. 일반적 상식처럼 80 - 120 의 범위에서 비슷하게 혈압이 나오면 특별히 치료나 관리를 받지 않아도 되는 정상 범위라고 생각했다. 고혈압에 대한 정상 범위 그리고 치료 대상에 대한 논의는 JNC ( Joint National Committee ) 를 통해서 가이드라인이 매년 권고되고 추가되는데 그 기준이 변경된다. 2014년 기준으로 140/90 미만을 치료 목표로 정하고 있다. 물론 고혈압에 취약한 식사와 생활에 좀더 강화된 기준이 필요하긴 하고 전문가들의 임상 경험과 회의를 거쳐 고민의 결과이기 때문에 가이드라인이 엄격해지는 것에 대해서 특별히 반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가이드라인에 의하면 예전에는 특별히 약을 먹지 않아도 되는 경계선상의 사람들도 환자로 분류되어 치료를 받는 것을 권고하게 되었다.


가지 불편한 내용은 이런 의학적 기준과 가이드라인에 가장 영향을 많이 주는 요인은 환자들의 질병 경향성(pattern)이나 치료의 어려움 과 같은 임상적 내용도 있지만 제약회사의 영향력도 무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제약회사는 세상의 질병이 사라지는 아름다운 세상을 절대로 바라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업을 하거나 기존의 약들은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기는 쉽지 않지만 마케팅의 힘으로 진단 기준을 변경하여 정상 범위를 완화하는 방법으로 잠재적 환자와 약의 수요자를 창출해내고 PR (public relations)을 통해서 약에도 must-take 의 인식을 넓히는데 열심히 홍보를 하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진통제 시장이다. 사람들에게 아프면 참지 말고 얼른 먹으면 좋다는 인식을 넓히기 위해서 세계적으로 진통제의 TV 광고에 대한 투자는 거대해졌다. 아팠다가 마치 마법처럼 괜찮아져 금새 뛰어다니고 밝게 웃으며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과 장밋빛 데이트도 하는 광고를 통해 사람들이 약에 대한 거부감보다는 긍정적 효과와 이미지를 증대하였다.

결과적으로 상업적 활동의 소비자로 대중이 필요한 시대가 다가오면서, 기업의 이익을 증가시키기 위해 잠재적 소비자를 증가시키는 활동 (마케팅 및 시장 창출) 과 필요성에 대한 판단을 흐리는 활동 (PR) 을 통해 지속적 소비층으로 만들어 갔던 것이다. 즉, 정상에 대한 강요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정상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 라고 설득당하며, 비정상에 대한 두려움과 필요성에 대한 욕심을 적절하게 이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상에의 강요 & 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트 쥐스킨트 ( Patrick Süskind; 1968-1974 ) 의 「깊이에의 강요 (Drei Geschichten und eine Betrachtung)」 를 보면 인간이 가지는 내면적 욕망의 구조와 흐름을 아주 간단하지만 치명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은 추상적이고 때로는 주관적이어서 그 실체가 존재하지도 않는 '깊이'라는 단어에 집착하게 될 수 있고 그 집착은 결국 자신을 힘들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쉽게 빠지는 늪과 같은 것 같다. 정상도 마찬가지이다. 부족하거나 특별하지 않다고 하지만 특히 경쟁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의 시스템에서 평균을 받는다고 정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참 모순투성이다. 학생이 생각하는 정상도, 부모가 생각하는 정상도 모두 다 다를 뿐만 아니라 그 기준조차도 모호할 뿐이다. 어떤 아이가 평균 점수를 받았다고 해서 부모는 아이의 성적표를 보며 "와! 우리 아들은 평균점수를 받았네? 와 평균이니깐 정상이구나..." 라고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부모에게는 아이들은 정상(top)의 점수를 받아야 정상(normality)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평균 이하의 점수를 받는 아이들은 정상이 아닌 것인가?


본적으로 경쟁의 논리로 아이들의 교육을 바라보는 그 시작의 시선부터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시선이 잘못되었음을 이야기하기 위해 우선은 앞선 질문을 다시 물어본다.

"평균 이하의 최저점을 받는 아이들은 정상이 아닌가?" 

이 질문을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게 "정상이 아니다!"라고 이야기 하기 어려울 것이다. 뭔가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 아이들은 단지 학습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단지 시험에 나오는 부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을 뿐인데 그것을 통해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정상에의 강요가 깊이에의 강요와 절묘하게 만난 부분이 하나 보이기 시작했다. 부모의 입장에서 평균 이하의 점수를 받는 아이가 심적으로는 정상이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정상이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 심한 것 같고..." 그런 부모의 마음과 제약회사의 실리(profit)적 만남으로 ADHD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attention-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 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다. 사실 ADHD 는 선천적 장애 (disorder) 이기 때문에 원인은 구조적인, 유전적 원인이 강하고 사회성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집중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기 때문에 그 결과로 한 행동에 집중을 하지 못하게 되고 그로 인해 과잉행동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ADHD 가 학교에서 학습장애와 연결이 되고 ADHD 대한 범위와 학생들의 학습 부진의 주요 원인을 ADHD 의 발병기전(pathogenesis)적 원인을 슬며시 연결시키는 것이다. 즉, 평균이하 점수를 받는 아이들에게 정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는데 그 원인을 ADHD의 기준으로 판단해서 정상의 범위가 아니라는 진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평균 이하의 점수에 대한 논리적 수긍을 할 수 있는 비정상의 원인을 찾은 안도감을 느낄 수도 있을지 모르고 제약회사의 입장에서는 ADHD 치료제 (disorder 에 대한 근본적인 치료제는 증상에 대한 완화일 뿐이다.) 를 학습 부진을 극복해 학습 증진으로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상당히 놀라운 사실은 실제로 ADHD 약을 지극히 정상인 아이들도 단순히 학습 집중력을 증가(?)시킨다는 목적으로 처방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이고 시험기간이 다가올 수록 그런 요구는 증가한다는 것이다. 정말 믿기지 않아서 실제 고등학생인 사람들을 표본으로 질문을 했을 때 복용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정상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학생의 말도 들을 수 있었다. 제약회사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부모들을 상대로 강연회를 하며, ADHD 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치료하는지에 대한 내용만 이야기를 해도 귀가 솔깃해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주의력장애를 넘어서 학습 증진으로 포장하여 더 시장을 넓힐 수 있다는데 경이로운 마케팅의 힘을 느낀다.

상에 대한 가이드라인

우리나라에서 학생으로 산다는 것은 학원은 기본으로 당연히 다녀야 하는 곳이고 학교 교육의 가장 큰 목적은 시험에서 살아남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라고 대한민국 교육부 교육 강령 비슷한 곳에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요즘이다. 정상에 대한 강요는 심지어 의학적 진단과 내용까지도 섞어 설명하며 사람들에게 정상에 대한 갈망을 주었고, 그 정상에 대한 갈망은 일반적인 학생이라면... 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학생들이 배워야 하는 내용을 정해주기 시작했다. 즉, 시험에 나오지 않는 내용을 읽거나 배우거나 알려고 하는 것은 상당히 비효율적인 방법이고 언제부터인가 배움이라는 그 자체보다는 배움에도 효율을 따지며 요령과 기술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험에 나오지 않는 내용은 교육의 범위가 아니라는 무서운 상식을 만들어 가고 있는지 모른다.

인적으로 학창시절에 책 읽는 것을 좋아했었다. 지금도 책장에는 거의 500여권의 과학 교양서적으로 가득 차 있고 중학교 시절부터 시간날 때마다 책을 읽는 것이 그렇게 좋았다. (지금은 열정이 식었나 싶기도 하다...) 그 시절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을 읽으면서 놀라움과 새로운 과학에 대한 경외심도 최고였다. 당시 노벨상 수상자의 강연을 듣기 위해 고등학교 수업도 빼먹었다면 요즘 시선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학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보았던 책의 내용들은 자연과학이나 공학을 떠나 심리학, 심지어 언어학에 관심이 있어 볼 때마다 그 원리의 유사성(analogue)에 그때의 책들이 큰 도움이 된다고 느낀다. 그 당시 맨날 '이상한 과학책'만 보는 학생에게 선생님은 한마디 충고를 했다. "그렇게 해서 대학이나 갈수 있겠어? 맨날 이상한 책만 보지 말고 문제집 좀 풀어봐..." 교과서보다 더 많은 흥미와 흥분을 주었던 책이 이상한 책이 되어버리다 상당히 낙담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집에서는 그런 이상한 책을 사서 보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좋아하셨다.


정상 교육의 가이드 라인으로 보면 정상이 아니었지만 교육의 목표는 시험에 나오는 내용에 대한 답습이 아니라 학생들이 생각할 대상을 찾고 생각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그 생각이 맞는지 검증하는 과정을 배우는 과정이라고 믿는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TED ]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일과 그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가 어떻게 실제의 현실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을 전달해준다.  TED의 아주 초창기부터 즐겨보면서 느끼지 못했던 한가지가 있다. TED 의 슬로건(tagline)은 IDEAs worth spreading 이다. 즉, 널리 공유될 가치가 있는 '아이디어'이다.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나와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모두 그렇지 않지만 거의 대부분은 바로 이 아이디어에 집중해서 내용이 전달된다. 초반은 이 아이디어가 왜 생겨났는지 시작해서 아이디어의 내용 그리고 그 아이디어로 기대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국내도 이런 TED를 따라하며 여러가지 비디오 강연들이 나온다. 그런데 몇 개의 비디오를 보고 더 이상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결정적 이유는 어쩌면 TED가 가지는 아이디어 전달자 (idea conveyancer)의 역할을 찾기 힘들다는 느낌이었다. 국내의 비디오 강연을 한번 살펴보면, 대부분이 시대의 아픔 때문인지 힐링 혹은 자기 개발에 대한 내용이 많다. 소위 사회적, 경제적 성공을 이룬 사람들 아직 취업을 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일을 찾지 못한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나와 계속 진행되어야 하는 인생의 1막의 사람들이 나와 연극을 끝낸 것처럼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기에는 어떤 아이디어가 있을까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사람들이 추천하는 꽤 많은 강연 영상을 보면 대부분 자신의 성공담(벌써 성공이라 이야기하는 것도 참 이상하다.)과 인생 역전기를 소개하는 자서전 프리뷰 (preview) 라고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개인적으로 힐링의 요구도 어쩌면 정상에 대한 강요가 만든 하나의 유행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미 성공에 대한 계량적인 (quantitative) 기준이 마련되어 어떤 직장, 어느 정도의 경제력 등이 성공의 기준이라 생각하고 그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ADHD 와 마찬가지로 성공이라는 기준조차도 추상적이고 명확하지 않은데, 어느새 사회는 성공에 대한 정상도 적정하고 사람들이 욕심내는 기준을 통해 정상 범위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정상 범위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ADHD 치료제를 파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진통제를 선사해준다. 그것이 어쩌면 추상적이고 명확하지 않은 대중적 힐링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인간에게는 치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치유의 과정은 자신의 상처를 살피고 보기 싫어도 직시(直視)해야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상당히 개인적인 여정이어야 한다. [ 힐링의 대중화 ] 는 진통제일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상이기 바라나요? 재이기 바라나요? 

부모로 자신의 아이가 정상이기 바랄까? 아니면 천재이기 바랄까? 그러나 앞서 설명한 것처럼 정상이란 말은 상당히 추상적이고 그 추상적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정상에 대한 다양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간다. 교육에 의학적 내용을 통해 학습의 정상 범위를 알리고, 인생에 자본적 내용을 통해 성공의 정상 범위를 알려준다. 그런데 부모가 자신의 아이를 보며 생각하는 첫번째 착각이 "우리 아이가 천재가 아닐까?"라고 한다. 세상을 바꾸는 아이디어는 그 아이디어를 만든 사람 이전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천재는 세상의 교육과 제도에 익숙한 사람일 가능성이 낮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현 시대가 공감하는 천재들은 시대를 순응하고 현재의 논리와 감성 안에서 잘 교육되고 평가된 아이가 아닐까? 그래서 오히려 지난 과거의 천재들을 살펴보면 시대의 부적응자나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미있는 사실이지만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1879 – 1955)은 ADHD 환자의 대표적인 예이다. 당신의 아이가 천재가 되어서 세상의 부적응자가 된다면, 즉 세상이 정한 학습의 정상 범위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것을 수용하고 당신의 아이를 천재로 자라게 할 수 있는 지원을 할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든 정상에 들어올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해볼 것인가? 문제는 자신의 아이가 천재인지 아닌지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정상에 더 집중하기 쉽다는 것이다. 가장 기본적으로 정상이 존재한다는 것이 가장 큰 장애물이 된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시험 성적이 학습 능력, 인지 능력과 창의력의 척도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학생들의 창의력을 모두 인정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오히려 틀린 것이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학생들의 엉뚱한 생각이 때로는 창의력이 될 수 있고, 비논리적인 설명이 뛰어난 상상력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틀린다는 기준과 정상이라는 기준을 모두 제거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약 어떤 것이든 기준이 존재해서 그 기준의 잣대로 아이들을 판단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의 창의력은 새로운 기술이 되어 삶을 발전시킬 수 있을지 모르고, 상상력은 새로운 문학이 되어 삶을 윤택하게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Salvador Dalí - ADHD 였는지 의견은 분분하지만, 그의 독특하고 엉뚱한 행동들은 그의 다양한 예술 작품을 통해 보여졌다.

Do not fear to be eccentric in opinion, for every opinion now accepted was once eccentric.
- Bertrand Russell (1872 - 1970)

엉뚱한 의견을 내는데 두려워하지 마라, 현재 받아지는 모든 의견들은 한때 엉뚱했던 것들이다.
- 버틀란드 러셀 (1872 ~ 1970)

그래서 천재로 키울 것인지, 정상으로 키울 것인지에 대한 고민조차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만약 교육의 목표가 기준을 세우고 서열과 경쟁을 하지 않는다면 모든 학생들의 생각 (아이디어)는 좀더 빠르게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는 다양한 탐구의 기회, 직업을 미리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교육의 제도가 마련해준다면 어떤 분야의 천재인지 적어도 어떤 재능을 가지고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느새 만들어진 성공의 정상 범위에 들어가기 위해서 수많은 경쟁을 계속 하면서 지쳐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육의 제도가 바뀌기만을 바랄 것인가? 

진보의 가치를 믿기에 시스템이 변화해야 교육의 방향과 정책이 정상의 범위를 깰 수 있다고 믿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바뀌기까지 넋놓고 기다리거나 그때까지 아이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조금은 창의적일 수 있지만 비현실적 대안일 것이다. 그래서 사실 진보의 가치는 시스템에 대한 적극적 변화를 요구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영역에 그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실천적 대안을 행동해야 더 가치가 증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요구하는 교육의 정상 범위를 무시하며 산다는 것은 보통 담력을 가진 부모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에 학원도 보내고 여러가지 시도할 것이지만 최소한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서 실천할 수 있는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일상에서의 아이와의 대화를 통해 바라보자.

승현: 엄마 엄마! 나 오늘 시험에서 백점맞았어! 
승현의 엄마: 우리 승현이 잘했네~ 그런데 너희 반에서 몇 명이나 백점 맞았니?

종서: 엄마 오늘 도시락 하나도 안 남기고 다 먹었어요! 
종서의 엄마: 와~ 잘했네 근데 평소에 시금치도 이렇게 잘 먹으면 좋겠는데 그치? 

분명 아이들은 자신의 행동이 부모를 기쁘게 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다가왔을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인정받아서 안정감을 찾고 싶어하는데 나이가 어릴수록 자랑하거나 자신을 내보이고 싶기보다는 부모를 향한 일종의 본능일지 모른다. 문제는 이런 아이들에게 부모는 아이가 시험 하나에도 소위 성공의 범주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정상의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아이가 백점을 맞은 사실보다 몇등을 했는지에 대한 경쟁의 논리에 비추게 되는 것이고 아이는 자신이 백점을 맞아 기분이 좋은 그 감정을 엄마도 공감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인데 엄마의 관심은 실질적으로 몇등인 것인지에 있기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는 내용과 엄마가 좋아하는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생각하게 될 것이다. 두번째 경우도 비슷하다. 다만 지금 도시락을 다 비워 엄마를 기쁘게 하려고 노력했다는 아이의 마음은 중심이 아니고 평소 엄마가 생각해서 아이가 해주었으면 하는 평소의 생각을 갑자기 꺼내어 아이는 그래도 먹어보려는 시금치가 더 맘에 안 들지 모른다. 두가지 경우 엄마는 아이의 행동과 마음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찾게 된다. 조금 다르다면 첫번째 경우는 아이가 잘한 것을 다른 기준으로 비추어 아이의 마음을 실망시킨 것이고, 두번째 경우는 평소 생각하던 바램이나 당위성을 직접적 관련이 없는 행동에 개입시켜 아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것이다.


어린 나이의 아이들과 대화를 통해 생각해봤지만 나이가 들어간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이의 행동에 집중해서 대화하는 습관'은 엄마를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아이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엄마에게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엄마도 원칙을 가지고 아이의 행동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좋은 행동, 발전된 행동 등 아이가 좋아하고 행복해 하는 행동들에 대해 별다른 첨언(코멘트; comments)하지 않고 그 행동에 대한 아이의 태도를 반복해서 리뷰해주고 비평을 할 필요는 없단 것이다. 예를 들어 매주 토요일마다 병원 소아 병동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아이에게...

"와 우리 명준이는 좋은 일을 매주 하고도 기분이 참 좋은 것 같네? 매주 갔다오면 얼굴이 밝아지네? 힘들지는 않고? 가장 재미있는 일은 뭐였니? ... " 

"병원 봉사활동도 좋지만 학원 빠지지 않도록 시간 조절 잘해야 해 그리고 이왕이면 다른 봉사활동을 찾아보면 어떨까? 아픈 아이들보다는 안 아픈 아이들에게 봉사활동 갈 수도 있고 봉사활동 하고 꼭 확인받아 봉사활동 점수 챙기는 것도 잊지말고..." 

전자는 아이의 행동과 아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했다면, 후자의 경우는 봉사활동을 하는 아이보다는 봉사활동을 통해서 점수와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아이... 기준에 부합되고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행동을 하는 아이에 집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실 조금은 과장한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가끔 엄마와 아이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들었던 내용을 틈틈이 메모했던 내용 중 요약한 것이다. 경쟁과 입시에 집중이 된 부모에게는 아이의 행동에 집중하지 않고 아이가 기준에 부합되는지, 더 좋은 조건인지에 대한 분석과 비평이 주를 이룬다. 아무리 부모가 보기에 입시에 불리한 행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아이가 웃음지을 수 있는 작은 행동들을 관찰하고 서두르지 않고 지켜볼 수 있는 조금의 여유를 가지는 것은 아이가 좀 더 자신이 행복하며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는데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적극적 지지자로 학교 공부를 조금 소홀히 해도 하고 싶은 것을 찾기 위해 무엇인가 다양하게 시도하는 것을 도와주지는 못한다고 해도 적어도 아이의 행동과 도전에 경쟁의 논리로 평가하고 하지도 못하게 하지는 말고 아이의 행동에 집중하며 관심있게 지켜보면서 소극적인 지지자가 되어준다면 아이가 자신의 천재적 재능을 찾던, 소위 시대적 정상 범위에서 평범하게(?) 공부하며 입시를 준비하든 마음은 편할 수 있지 않을까?

즉, 아이가 천재든 아니든 아이의 행동에 조금 더 관심있게 바라보며, 부모의 감정의 기호(嗜好)나 판단의 기준을 버리고 아이의 행복에 더 집중한다면 아이는 경쟁의 전쟁터 같은 교육 제도 안에서도 자신을 존중하며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는 주체가 되어 줄거라 믿는다.

상의 모호함을 버리고 구체적 다양성을 기대한다. 

보통 어디가 아파서 병원을 찾으면 병의 원인을 찾기 위해 검사를 한다. 검사 결과 별 이상이 없을 때 자주 듣는 이야기가 "정상인데요..." 라는 말이다. 정상이라도 사실 기분이 좋지 않은 경우도 존재한다. 바로 이런 경우이다. 정상이라는 규정은 상당히 모호하다. 정상이라는 표현에는 무엇인가 기준이 있고 상당히 객관적인 표현같지만 사실 그 실체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상당히 추상적인 표현이다. 쉽게 말해 어디까지가 정상이고 어디까지가 정상이 아닌 것에 대한 명확한 구분도 없이 '정상입니다'라는 표현으로 퉁 치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원인을 찾지 못했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면 될 것인데 검사 결과만으로 정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상이라는 말이 가지는 추상적 표현력을 이용해 원인을 찾지 못한 변명을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래서 미국의 임상의사들 사이에서는 표현에 대해서 추상적이고 명확하지 않은 표현보다 좀 더 구체적이고 환자들이 이해하기 힘들어도 대상과 기능을 표현하는데 연습한다. 예를 들어 복부 초음파를 찍고 나서 원인을 찾지 못하면 "현재 초음파로 (도구) 본 결과 간의 기능상 정상 (functional) 으로 보이고 초음파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추가적으로 검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혹은 초음파 결과 간에서 문제가 발견되었으니 치료를 위한 추가적인 검사가 필요합니다. 와 같이 대상, 기능, 검사 방법, 추가 행동에 대한 구체적인 명시를 해준다는 것이다. 환자가 들어서 무엇을 알겠는가 하는 마음에 정상이라는 표현을 쉽게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상의' (normal) 이라는 표현 대신 '기능이 수행되는' (functional) 로 대체해서 표현하고 그 한계성에 대해서 설명해준다.


아이를 대하는 부모들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이 무엇을 알겠어... 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모호하고 추상적인 말로 퉁치면 될 것이라고 생각부터 버릴 필요가 있다. "좀 잘해...", "그렇게 잘못할줄 알았어!" , "최선을 다해야지" 그리고 "사랑해" 라는 말까지도 사실 이중에는 일상처럼 해주면 좋은 말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표현에 아이들에게 더 구체적으로 "준현이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아침일찍 준비하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고 자랑스럽다." 와 같이 아이의 구체적인 행동을 관찰하고 표현해준다면 아이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더 의식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주의해야할 것은 아이가 하지 않은 행동인데 부모가 원하는 마음에 조건을 달아 표현하는 예를 들어, "미현이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더 사랑스럽고 좋을텐데 그치?"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부모의 욕심을 표현하는 것이 될 것이다.

아이의 진솔한 관찰자가 되어 아이의 행동에 욕심과 기준없이 (정상 범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아이에게  좀더 구체적인 표현으로 다가간다면 아이는 자신의 행동이 존중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하는 모든 과제와 학습 그리고 모든 배움에 있어서 자신을 얻게 될 것이다.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에게도, 평범한 일반 학생에게도 적극적 관찰자인 부모의 모습은 아이를 더 많이 웃게 해줄 것이다.

육의 목적을 생각한다 

가장 작은 규모의 교육은 바로 가정이다. 그래서 부모가 가지는 아이에 대한 원칙과 가르침은 국가가 가지는 교육 정책과 교육 내용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철학이라고 믿는다. 철학은 비록 현재의 모습이 대중의 눈에 마음에 안들어도 장기적 안목에서 추진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반대로 철학이 없는 교육 정책은 결국 어떤 이익집단에게도 쉽게 휘둘리게 된다.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는 뉴스와 학자들의 모습을 보면 한숨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관심은 학습 능력, 학업 성취도와 같은 무엇인가 기준을 가지고 그 기준에 부합되는 학생들은 몇명이다 그래서 교육이 잘된다 못한다 평가한다. 마찬가지로 고등학교의 위상은 몇명을 대학에 보내고 명문대에 진학시키는가이다. 그리고 그런 교육에 잘 적응한 사람들은 철학이 우리에게 어떤 힘을 주는지, 인문학이 우리에게 얼마나 뜨거운 가슴을 전해주는지, 과학이 세상을 보는 명석한 눈을 주는지에 대한 가슴떨리는 경험도 없이 그냥 사회가 만든 또다른 '정상의 범위'에서 그럭저럭 살게 된다.

교육의 목적은 바로 배움에 기준과 정상의 범위를 제거하는 끊임없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교과서, 그리고 상당히 우울한 현실을 조금 반영하면, 학원 교재까지가 우리 교육이 제시하는 배움의 기준과 정상의 범위안에 있는 것들이 되어버렸다. 문학작품도 시험에 나오는 범위가 아니라면, 심지어 시험에 나오는 내용이 아니라면 배움의 범위가 아닌 것이다. 교육이 가지는 정상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한번쯤 조금은 냉정하게 생각해야 하는 한가지는 교육의 목적은 대학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가진 청년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부모들이 아이들의 적극적 관찰자가 되어주어야 하지만 자신의 욕심과 기준을 반영시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듯이, 국가의 교육도 학생들이 무엇을 하든 나쁘지 않은 범위에서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지지해줘야 할 것이다.


엇을 배워야 하는지 국가가 정해주고, 학습과 배움을 시험으로 판단하고 기준을 세우게 된다면 정상에 대한 강요는 합법적인 폭력이 될 수 밖에 없다. 국가가 이야기하는 가장 큰 폭력은 역설적으로 "국민 행복"일지 모른다. 이정도 경제 수준과 이정도 복지 예산과 얼마 정도 벌면 국민들은 행복할 것이라는 기준을 제시하고 "이정도 국가가 해주면 국민은 행복해야지 않아" 하면서 강요하는 것은 추상적 표현이 가지는 보이지 않는 폭력성이 될 것이다. 부모와 국가는 아이와 학생들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들을 이용해서는 안된다. 그렇기 위해서는 아이와 학생들이 추구하는 것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어 주어야 할 것이다. 적극적인 지지자큰 입(big mouse)이 아닌 큰 귀(big ears)가 되어야 함을 항상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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