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March 8, 2013

Agora (2009) - 신념은 인간에게 무엇을 남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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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아고라 (Agora, 2009) 을 보고 한참동안 멍하니 화면에 멈추었던 기억이 난다. 영화를 본 것은 일년 전쯤이었지만 생각날 때마다 관련된 문헌과 역사 기록 등을 살펴보고 어떤 내용을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이 많이 되는 영화이다. 영화의 배경은 4세기 후반 로마 제국이 쇄락하던 때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이야기이다. 알렉산드리아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2개의 건축물이 있던 역사적 도시로 그 중 알렌산드리아 도서관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이 된다.

히파티아 -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이자 철학자

주인공 히파티아 (Hypatia; AD 350–370–March 415) 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관장 테온 (Theon)의 딸로 수학, 천문학, 물리학 등 다양한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 뿐만 아니라 뛰어난 미모로 유명했으며, 타원 궤도에 개념을 도입하였고 역사상 최초의 여자 과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몽주의 시대의 많은 학자들은 그녀의 업적과 죽음에 대해서 안타가워하며 진정 그녀의 죽음은 운명적으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몰락과 함께했고 그리스, 로마 시대를 이어온 과학과 철학의 시대도 상징적으로 그녀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기 시작하고 이후 기독교 [ 종교 개혁 이전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표현되는 기독교는 분화되기 전 정교회와 구교 (천주교)이다. ] 의 사상과 논리 이외 철학적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는 중세의 긴 역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 파티아 - 위키피디아 ] / [ Hypatia - Wikipedia ]

그녀에 대한 역사적 내용은 영화 아고라의 큰 중심이 되기 때문에 관련 내용을 읽는 것만으로도 영화의 큰 줄거리를 알 수 있다. 그녀의 명성과 지식에 비해서 그녀의 죽음은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영화 속 히파티아는 매력적인 여인으로 온정이 가득하고 인간적인 모습이 가득하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떠오르는 기독교 뿐만 아니라 이집트, 페르시아 등 다양한 곳에서 유입된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히파티아의 아버지 테온의 경우에는 종교적 배타성을 보이지만, 히파티아의 경우에는 과학과 철학을 나누는데 기독교인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의 참여를 인정했다. 사실 어떤 종교적 편향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을 논하는데 종교는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역사 속에서 그녀가 학문적 탐구를 했다는 무사이움(Musaeum; 현재의 Museum 의 어원)에서 토론하던 많은 동료, 제자들 중에는 기독교인도 많았다고 한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시네시오스 (Synesius) 주교가 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몰락과 과학, 철학의 다양한 서적들이 기독교에 의해서 파괴되어서 히파티아의 업적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 전해지지 않지만 시네시오스의 편지가 그녀의 뛰어난 능력에 대해 전해주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 주교

영화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주목할 인물이 한명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키릴로스 (치릴로) 주교 (Cyril of Alexandria; Cyrillus or Cyryl) 이다. 기독교의 역사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성인으로 그는 기독교 (구교) 의 정통신앙을 수호한 성인으로 기독교 (구교) 뿐만 아니라 동방교회에서도 성인으로 위대한 교회학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영화 안에서 키릴로스는 날카로운 비판과 논리로 이교도로 불리우는 사람들에 대한 반박으로 알렉산드리아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데 큰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내부에서도 교리 해석에 대한 논쟁에서 현재 기독교 (구교; 천주교)가 가지고 있는 신앙적 교리의 큰 뿌리를 만든 인물이다. 그중 가장 유명한 부분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성모마리아에 대한 교리 내용에 대해서 대립하던 네스토리우스 학파를 몰아내는데 중심적 역할을 했었다.

     [ 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 - 위키피디아 ]  / [ Cyril of Alexandria - Wikipedia ]

영화에서 키릴로스는 기독교에 대한 철저한 수호자로 등장하는 키릴로스는 역사적 비중이 크기 때문에 자주 나오고, 역사에서 히파티아 죽음에 실질적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고 전해지지만, 영화에서는 그에 대한 부분은 명확하게 표현되지는 않는다. 대신 히파티아의 제자들이였던 장관 오레스테스와 시네시오스가 기독교로 개종하기를 권하지만 히파티아는

Do not question what you believe 
신념을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라고 거절하면서 그 거절이 결국 키릴로스를 따르는 무리에 의해서 죽음을 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는 히파티아의 죽음은 잔혹하고 한시대 지식의 번영이 몰락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기독교인들에게 고문당하고 불태워 죽음을 당했다. 버틀란드 러셀 (Bertrand Russell; 1872-1970) 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버틀란드 러셀의 표현을 María Dzielska 의 「Hypatia of Alexandria」 을 통해 인용하면...

Bertrand Russell, expressing similar sentiments, opens his history of Western European thought with a characterization of Saint Cyril: "His chief claim to fame is the lynching of Hypatia, a distinguished lady who, in an age of bigotry, adhered to the Neoplatonic philosophy and devoted her talents to mathematics ... After this Alexandria was no longer troubled by philosophers."

버틀란드 러셀은 비슷한 심정을 성 키릴로스의 인성 특징 (성품)을 통해서 서양 유럽 역사에 대한 생각을 시작했다. "그의 명성을 향한 결과는 뛰어난 여성이었던 히파티아의 처절한 죽음(린치)이었다. 그녀는 편협한 시대에서 신플라톤 철학을 통해서 그녀의 재능을 수학에 기여했으며..  (중략) 이 이후 알렉산드리아는 더이상 철학자에 의해 시달릴 필요가 없었다. (철학은 죽었다) 


종교와 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성인이고 정통 신앙을 지킨 신이 내려준 인물이라고 평가받는 키릴로스도 히파티아의 죽음에 통해 살펴보면, 다소 잔인한 권력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부분이다. 과학이 이교도의 산물이라고 평가받던 당시의 기독교인들의 생각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책들과 지식은 공존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파괴하고 히파티아와 같은 역사적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뛰어난 과학자를 종교적 신념의 이유로 죽어도 당연한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화와 역사의 이야기가 섞인 내용은 여기까지이다. 이 영화를 다 보고 히파티아의 죽음을 보면서 단지 처첨하게 죽은 뛰어난 인물에 대한 아픔에 대한 느낌보다 내가 믿고 있는 것, 신념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강한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을 보면, 단순히 기독교가 가지는 폭력성이나 그 안의 사람들이 가지는 잔인함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의 폭력은 오히려 정당한 방어를 위한 투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느낌도 느낄 수 있다. 즉, 기독교가 과학을 어떻게 파괴했는지에 대한 흐름보다는 한때 히파티아의 노예였지만 히파티아의 과학과 철학을 잘 따르고 이해했던 다보스(Davus)의 눈을 통해서 기독교를 대변해주는 모습이 느껴졌다. 다보스가 기독교를 믿게 되는 과정를 그린 영상과, 파괴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편견에 의해 과학과 철학이 동시에 파괴됨을 느끼는 영상, 그리고 히파티아의 죽음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 더 슬퍼하는 영상을 통해서 기독교 안에서도 과학과 철학의 파괴에 대해 괴로워하는 개인의 모습으로 기독교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다보스가 처음으로 기독교에 눈을 뜨기 시작한 계기, 마치 성서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는 듯한 장면

사실 영화의 전반에 걸친 다보스의 고민과 갈등 그리고 괴로움은 종교를 가지고 철학과 과학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느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끝나고 느끼는 상당히 긴 혼란은 아마도 그런 느낌에 대한 공감이었을 것 같다. 영화가 끝나고 역사적 배경을 찾으면서 느낀 가장 큰 의문은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히파티아와 같은 인물을 죽게 만든 인물이 (직접적으로 죽이진 않았지만, 더 큰 범주에서는 더 큰 책임이 존재하지 않을까...) 성인이 되었다는 부분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아마도 천주교 신부님에게 키릴로스에 대한 평가를 부탁드린다면 지금의 기독교가 발달할 수 있는 역사적 흐름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는 점에 대해서 강조하겠지만, 히파티아라는 인물을 통해서 살펴보았을 때도 동일한 평가가 가능한지에 대해서도 궁금할 뿐이다.

기독교 넓게 보아서 종교가 인류 역사에 어떠한 기여를 했는지에 대해서 상당히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의미에서 히파티아의 죽음은 상당히 상징적 사건이다. 그녀의 죽음 이후 기독교의 교리와 신앙은 인간이 가져야 하는 당연한 사실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질문한 사람들 중에는 이단 혹은 마녀, 혹은 악마라는 이름으로 죽음을 면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 시대 과학적 사실에 대한 신념을 지킨다는 것은 종교적 신념을 지키는 것만큼 힘든 것이라는 것을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종교 재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종교적 신앙을 가진 입장에서 신학과 교리의 발전은 결국 새로운 방향의 철학의 발전이라고 보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다양성으로 발전하는 철학과 과학의 발전에는 좋지 못한 영향을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설적이지만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수많은 신들을 믿는 것에 대해서 신념적으로 거부하였고, 과학과 철학은 다양성을 먹고 사는 학문이다. 인간이 가지는 보편적 삶의 방향과 선의 추구를 위한 신념적 지지를 해주는 종교도 필요하지만 종교가 다양성을 포기하고 신념의 이름으로 편협함을 내세워 타협하지 않으려 한다면, 종교는 그 어떤 집단보다 가장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집단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종교와 과학은 대립하는 대상인가... 라는 오랜시간의 질문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다가 이 영화를 보고 느낀 한가지가 있다.

겸손과 수용이 없는 종교와 과학은 결국
신과 자연을 핑계로 자신의 우월함을 표현하고 싶은 도구일 뿐이다. 

결국 무엇을 믿든, 아무리 선한 것이라 할지라도 강요가 될 때, 그것은 폭력이 될 수 밖에 없다. 영화를 보고 나서, 그리고 히파티아에 대해서 알아보면서 끝까지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은 바로 성 키릴로스가 진정 성인일까 하는 것이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보류하고 종교와 과학은 참 유사하다는 결론을 느낄 수 있었다.

종교와 과학은 신념의 과정이다. 

최근 입자물리학의 부흥을 알리듯, CERN (유럽핵입자연구소) 의 힉스입자의 발견을 위해 돈을 쓰는 모습을 보면, 과학은 확신을 통해 이루어지는 과정이 아닌 종교와 같이 신념의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느껴진다. 힉스입자가 발견될지 아닐지는 신념의 문제이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그 입자에 대해서 아무리 수학적 물리학적 논리에 의해서 추측을 했다고 해도 존재의 여부에 대한 믿음은 어느 부분에서 결국 신념이 될 수 밖에 없다. 신념은 우리가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믿음이다.


그런데 이 신념에 이르는 믿음의 과정에서 한가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과학의 신념이든, 종교의 신념이든, 그 신념이 항상 깨어 자신의 신념의 과정이 바른 길을 향해 가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하지 않는다면 신념은 맹신과 편견이 되어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되고 자신에게는 집착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념은 항상 옳은 것이다가 아니라 신념의 작용이 옳게 작동하는지를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하는 명제는 "신념은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나쁜 길을 가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병원에 가서 "저만 믿으세요. 다 고쳐드릴께요..." 라고 이야기하는 의사보다 "글쎄요... 최선을 다해서 고쳐보겠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의사에 더 신뢰를 한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확신을 하는 믿음이 틀린 것이 아니라 틀린 방향으로 갈때 제동을 걸어줄 겸손이 없기 때문이다. 종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종교에 대한 믿음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믿음에 대한 맹신으로 더 이상 살펴보지 않고 그 믿음의 작용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아닌지도 모른체 맹신한다면, 신의 이름으로 테러를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가도 그 살인에 대해서 떳떳하고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영화를 다 마치고 긴 시간이 지나면서 느끼게 된 가장 큰 착각은... 신념은 마냥 좋을 것이라는 그 끝없는 믿음에 대한 호감이었다. 신념은 무조건 믿어야 하는 생각이 아니라 항상 그 생각이 옳은지, 다시 표현하자면 종교의 영역이라면 신의 뜻에 맞는 것인지, 과학의 영역이라면 자연의 원리에 맞는 것인지 항상 살피고 경계해야하는 상당히 불안정한 대상이라는 것이다.

신념이 확신을 먹으면 폭력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신념은 매 순간 틀릴 수 있다는 겸손의 옷을 입어야 부끄러움을 막을 수 있다.
종교와 과학은 이렇게 공통점을 가질 수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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