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y 23, 2013

파괴와 폭력에 대해서 ─ 세상을 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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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할리우드 배우인 안젤리나 졸리(Angelina Jolie)의 유방 절제술이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녀가 유명 스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성성 및 모성을 상징하는 유방을 절제 했다는 것에 대해서 그녀가 가장 어려운 선택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해야 한다. 참고로 안젤리나 졸리가 유방 절제술을 선택한 이유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BRCA 돌연변이 유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BRCA1 과 BRCA2 돌연변이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때 비 보유자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높은 유전성 유방암 / 난소암 (HBOC; Hereditary breast–ovarian cancer syndromes) 에 발병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 때문이다. 즉, 돌연변이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서 유방암 / 난소암 발병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실제로 BRCA 돌연변이 유전자는 흔하지 않은 남성 유방암 환자의 경우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호르몬 치료를 비롯해서 여러가지 예방적 치료가 가능하긴 하지만 그래도 가장 좋은 것은 정기적으로 검진을 통해서 발병 초기에 찾아내는 것이다. Clinical genetics 차원에서 언급할 것은 많지만 일단 안젤리나 졸리의 유방절제술 (mastectomy) 은 BRCA 돌연변이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여성이 예방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외과적 방법(Prophylactic surgery) 중에 하나이고 젊은 가임기 여성의 경우 '상대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으로' 효과적인 방법인 것은 맞다. 효과적이란 뜻은 유방절제술을 통해서 앞서 언급한 유방암 뿐만 아니라 난소암의 발병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 그녀가 결정한 내용이고 그 결정의 결과도 본인이 용기내어 감수하겠다는 입장에 여러가지 생각과 의견이 존재해도 묵묵히 응원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본다.

안젤리나 졸리의 결정에 대한 인터넷의 반응을 보고 다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결정을 이해하고 그녀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많은 사람들을 이해하는 내용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유명 배우의 섹시한 몸매의 몰락 등과 같이 한 인간의 힘겨운 결정이 아닌 그녀의 외모에 집중된 내용을 보고 이 또한 인간의 폭력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유방절제술이 지금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유방암은 생각보다 흔한 질환으로 실제 유전성 유방암의 비율은 약 10% or less (정확한 비율은 논문과 통계 집단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인데 이는 비유전성 유방암의 발병 비율이 높고 돌연변이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 뿐만 아니라 전체 여성 인구가 정기적인 검진이 필요하다는 것이 강조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집단적 통계 발병률과 함께 한 개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 평생을 살아가며 발병할 수 있는 개인 발병 확률이 개인에게는 더욱 더 중요할 것이다. BRCA 돌연변이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80% 가 평생 발병한다는 확률이 있다고 해도 자신이 20%가 될지 80%가 될지는 정말 모르는 것이고 유방절제술을 통해 BRCA 돌연변이 관련 유방암 발병 비율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일반적 비유전성 유방암 뿐만 아니라 여전히 BRCA 돌연변이 유전자는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예상하지 못한 대사경로 (metabolic pathway)에 의해 발병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안젤리나 졸리의 선택을 보면서 가진 두가지의 생각의 흐름은

1) 인간의 폭력이란 무엇인가?
2) 근원적 예방이란 존재하는가? (근원적 제거란 존재하는가?) 

라는 의문이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해 드립니다. 

안과(ophthalmology)에서 모든 안과 질환을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는 수술이 있다. 안젤리나 졸리의 의학적 선택과 다르게 발병 위험을 5% 로 줄이는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0%의 경이적인 확률을 제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특정 질환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안과 관련 질환을 해결할 수 있는 수술이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사소한 안과 질환으로 고생했던 누구나 한번쯤은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 만병통치약 같은 수술은 바로...

구적출수술 (enucleation) 이다. enucleation 은 e- (밖으로 제거하다) + nuclea (핵) 으로 이루어진 단어로 실제로 핵심을 제거해버리는 것을 뜻한다. 안구를 제거하기 때문에 더 이상 제거된 안구가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의 극적으로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눈이 가진 기능과 역할도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안구에 관련된 모든 질환은 사라질 것이다.

핵(심)을 제거하다. 란 의미에서 연상할 수 있듯, 발본색원(拔本塞源)이란 말이 있다. 모든 폐단이 되는 근원을 제거하여 더 이상 폐단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모 개그 프로그램에서 공무원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공무원을 없애면 되고, 학생이 문제를 일으키면 학생을 사라지게 하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는 엉뚱한 개그의 소재가 있었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은 문제의 원인이 되는 대상을 사라지게 하면 되는 것이다. 영화 '나비효과 (The Butterfly Effect, 2004)' 의 감독판 (director's cut) 에서 주인공은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과거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자신이 생각해서 과거에 바꾸고 싶은 순간들을 떠올리며 그때로 돌아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바꾸려고 하지만 그의 의도와 다르게 미래는 더 엉망이 되어버리는 것을 반복하다 결국 마지막에는 자신의 존재를 제거하여 더 이상 태어나지도 못하게 하는 방법을 통해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결말낸다. 과거의 어느 순간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었다면 현재는 분명 좋을 것이라고 믿지만 인간의 인생 경로 (pathway) 는 상상할 수 없이 다양한 변수와 경우, 그리고 나와 관계된 사람들의 의지와 선택을 내가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더 나쁜 상황으로 변화할 수 있다. 대부분의 시간 여행을 하는 영화의 주제는 바로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미래를 바꿀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던져준다.


안젤리나 졸리의 선택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바라보고 싶다. 물론  확률적 위험성을 줄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확률적 위험성이 안젤리나 졸리 본인에게도 적용되는 확률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유방절제술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예상하지 못하는 문제점도 있을 것이고 또한 앞서 설명했지만 다양한 유전학 / 생리학적 변이성에 의해서 유방암이 아닌 다른 질환의 발병 위험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예방의학이 가지는 가장 큰 철학적 문제점은 내가 가진 잠재적 (아직 존재하지 않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예방적 선택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이다. 예방적 절제술의 다른 예로 반복적인 편도선염에 시달리는 경우 편도선제거술을 시행할 수 있다. 좁은 의미에서 일단 편도선이 제거된다면 편도선염은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0%이다. 이후 발생하는 다른 합병증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문제의 핵심을 제거하는 것은 가장 편리한 방법이다.

존재의 제거는 문제의 근본적 해결 방법 

안젤리나 졸리의 경우 가장 근본적인 해결 방법은 문제가 되는 BRCA 돌연변이 유전자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완벽한 예방은 아닐 것이다. 역설적으로 최고의 예방은 예방하고자 하는 사람의 존재가 사라지면 되는 것이다. 예방해야 하는 대상이 사라지면 더 이상 예방할 이유도 사라지고 완벽한 예방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안구적출수술과 마찬가지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의 의미도 사라지게 해야 한다는 것은 상당히 잔인한 결정이고 정말 어쩔 수 없는 최후 순간까지 보류해야 하는 결정일 것이다.


미국 중부는 상상을 초월하는 강력한 토네이도가 많이 발생해 한 도시를 파괴해버린다. 토네이도가 지나간 곳은 정말 흔적만 남기고 거의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한다. 토네이도가 오기 전 깨진 창문과 막힌 하수도, 삐걱거리는 문, 고장난 보일러 등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토네이도가 지나가 집 자체를 제거해버리면 창문, 하수도, 문 그리고 보일러 같은 문제들은 모두 해결된다. 문제를 만드는 대상이 사라지면 문제는 너무도 깔끔하게 해결된다. 그러나 누구도 이런 문제해결이 합리적이라고 보지 않을 것이다. 이런 합리적이지 않지만 문제 해결을 위해 존재의 제거를 시도하는 수많은 노력들은 없을까? 아주 간단하게 그런 시도를 '파괴'라고 부르고 싶다.

파괴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를 제거하려는 모든 행동 

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 아주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는 많다. 영화의 많은 소재로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려는 증인을 제거하려는 나쁜 악당과 증인을 보호하려는 법집행관(law enforcement)와의 한판 승부. 경제적 이익을 위해 마땅히 보호되어야 하는 자연을 파괴하여 더 이상 보호해야할 자연을 제거해버리는 사람.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문제의 손쉽고 빠른 해결을 위해 극단적 행동을 하는 거의 대부분을 우리는 '파괴'라고 부른다. 물론 아무런 이유없이 파괴를 행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무 이유없이 야생돌물을 죽이거나 산림을 파괴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그런 파괴의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분명 문제는 있다. 경제적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심지어 정신건강의 문제가 있어 그런 문제의 해결을 위해 그 문제의 직접적 원인이 아닌 야생동물이나 산림을 파괴할 수 있다. 다른 경우 소위 '묻지마' 범죄의 경우도 내부적으로 존재하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전혀 관계없는 희생자들을 파괴했던 것이라 본다.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려는 증인을 제거하려는 악당의 경우 문제의 해결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해주기 때문에 존재의 제거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 것이고 악당의 뜻대로 증인이 죽는다면 일단 증인에 의해 생길 수 있는 모든 자신의 문제는 해결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내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관계없는 희생자 (irrevelents) 는 자신의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무작위의 파괴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관계없는 희생자를 만드는 파괴는 무작위의 위험 뿐만 아니라 문제의 본질과 해결점을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더욱 더 위험할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부인과 불화로 인해 부인과 비슷한 나이와 외모를 가진 무작위의 여성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다면, 문제의 원인은 부인에게 있고 부인을 파괴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비슷한 상대를 희생자를 만들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문제의 해결을 위한 이성적 판단을 하지 못할 때 문제의 근본 자체를 잘못 판단하면 더욱 더 큰 파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파괴를 위한 행동 - 폭력 

서론에서 소개한 안젤리나 졸리의 결정에 대해 인터넷의 반응 중 인간의 폭력성을 느낀 많은 댓글들을 접하였다. 특히 그녀의 고민과 선택에 대한 이해보다는 그녀의 가슴을 중심으로 소위 교양없는 언어와 표현을 동원하는 것을 보았다. 이런 현상은 항상 존재해왔다. 악성 루머, 공인들에 대한 공격, 그리고 인격적 모독 등으로 인터넷 사용자들은 인터넷의 익명성이라는 장막 뒤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것이 진정 폭력일까? 그렇다면 폭력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괴는 항상 폭력을 동반한다. 파괴의 대상이 누구이든 그 대상은 항상 폭력에 의해서 파괴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파괴의 구체적 행동 양식은 바로 폭력이다. 그렇다면 폭력은 무엇일까? 간단하게 육체적 고통을 주기 위해 구타하거나 상해를 입히는 명백한 폭력이지만 인터넷의 댓글과 같은 사용자들은 스스로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을지 모르는 내용도 폭력이 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대부분 육체적 폭력뿐만 아니라 정신적 폭력에 대한 이해는 하고 있지만 폭력의 범위는 상당히 애매할 때가 많다. 성폭력도 이 중 한가지이다. 어떤 경우 성폭력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것도 생각보다 어려울 때가 많다. 피해자의 진술에 의존한다면 억울한 피의자를 만들 수 있는 것이고 피의자는 피해자와 사랑하는 사이였다 라고 말한다면 사랑과 폭력이 어떤 차이가 모호한 경우가 많다.


그 모호함을 쉽게 결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폭력을 인식하기 위한 하나의 기준을 위해서 폭력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폭력의 성격을 앞서 정의내린 파괴의 정의를 통해서 생각해보려 한다. 파괴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를 제거하는 행위라고 이야기했다. 즉, 파괴는 결국 존재를 제거하는 행동을 하는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행위의 집합을 폭력이라고 생각한다면 폭력은 존재를 제거하는 위한 행동의 구체적인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폭력을 당하는 대상은 폭력을 행하는 사람에게 존재론적 의미가 없는 대상이다. 예를 들어 성폭력을 생각해보면 성폭력 가해자는 성폭력 피해자를 상대방 인간의 존재가 중요하고 그 존재 자체로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문제의 해결) 을 위해 상대방의 존재보다 상대방의 성적 수단(기능)에 더 치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폭력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면...

폭력존재의 대상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다루는 행위 

라 본다. 그렇다면 파생되는 의문을 가진다. 첫번째는 인간에 있어 목적은 무엇인가? 두번째는 수단으로 다루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는 점이다.

노예제도는 인간을 수단으로 다루는 절대 정당화 될 수 없는 폭력적 제도

먼저 수단으로 다루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대상을 기능적 대체 (functional replacement) 를 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앞서 설명한 성적 수단으로 볼 때 가해자는 해당 피해자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대체를 해도 자신의 성적 욕구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은 상대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기능적 대체란 자신이 상대방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을 꼭 상대방이 아니라도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상대방은 '존재를 가진' 대상이란 것이다. 존재의 의미를 무시하고 그 존재가 가진 기능적 수단 만을 본다면 그것은 폭력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첫번째 질문은 자연스럽게 존재의 의미가 바로 인간에 있어 목적이라고 본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가진 보편적 목적이다. 인간이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 좋은 것을 즐기고 싶은 마음, 감정적 욕망이든, 이성적 즐거움이든 그 모든 것은 존재의 의미를 가지는 인간의 목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폭력은 존재의 의미를 부정하고 파괴하려는 과정이기에 이러한 존재의 의미에 중심을 두지 않는다.

폭력을 구별할 수 있을까? 

이것은 폭력이다 이것은 아니다 라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힘들 때가 많다. 인간의 근본적 한계는 사람의 모든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과 상대방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해서 제3자가 판단하는 것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너의 행동은 폭력이야" 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육체적인 상해나 눈에 직접 보이는 가시적인 폭력은 당연히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폭력에 대한 판단은 자기 자신의 행동을 단속하고 조심하기 위한 노력이지 누군가를 판단하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즉,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그 행동이 상대방에게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런 행동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있고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 나의 가치관에 비추어 스스로 진실하게 행동하기 위한 하나의 준거가 되기 위한 것이다. 확장하면 존재의 의미를 보편적으로 적용하여 타인이 있는 그대로의 목적성을 가지기 위해서 필요한 '인권'으로 확장할 수 있다고 본다. 즉, 폭력의 역사는 인권의 쟁취와 함께 대립해왔다는 사실을 보면 인간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최소한 인권의 범위에서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 인간의 존엄성 등의 인권의 문제로 연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즉, 인권은 풀어 설명하려고 했던 존재의 대상 특히 인간이 가지는 목적이 될 수 있다.


뚜렷하게 보이는 폭력은 판단하기 어렵지 않지만 폭력의 겉모습을 감추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을 파괴시키는 많은 일들이 있다. 노동 문제를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노동을 하지만 고용자들은 노동자들을 인격적 존재로 생각하지 않고 기능적 대상으로 생각하여 쉽게 해고하고 법적 이유와 경영 정상화 등 다양한 이유를 통해서 해고하고 비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경영 정책을 수립한다. 실제로 기업의 활동이지만 기업활동의 결정 주체는 고용자라는 점에서 이는 고용자들이 노동자에게 가하는 폭력이 된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고용자 입장에서 지금 고용되어 있는 노동자 각자의 인권이나 생존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산적 기능이 중요하기 때문에 대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회사 고용 구조에서 정규직을 줄이고 비정규직을 늘린다면 직접, 간접적 인건비를 비롯한 부담되는 비용은 당장 줄어들 것이다. 그 이면은 바로 인간을 하나의 부속화해서 언제든지 다른 인력으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만약 지금 노동자들이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회사를 추구한다면 불안정한 고용구조를 고집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국 넓은 의미에서 인간이 기능적 부속화되는 현대 산업사회의 단면에서 폭력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그런 구조적 폭력에 인간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마저 박탈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폭력이 합법화되는 세상에서는 파괴의 과정도 조직적, 구조적으로 이루어진다. 도시의 편의를 위해서 어떤 지역에 원하지 않는 시설이 들어서 그 주변 지역 사람들의 재산권 뿐만 아니라 원치 않는 환경에서 자신들의 건강권마저 빼앗길 수 있다면, 도시의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보자. 자본의 시대에서 가장 많이 목격할 수 있는 폭력의 형태는 바로 이런 일부를 위해 일부가 희생해야 하는 구조이다. 폭력을 구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기능적으로 대체 가능성 (functional replacement)를 역으로 생각해서 내가 그 폭력의 대상자가 되었다면 내가 관찰자나 가해자로 있을 때와 똑같은 생각을 가질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간단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원리조차 우리는 거부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소위 합법적 폭력을 행하는지도 모른다.

악은 섬세함에 있다. 

어린 시절 악(惡) 혹은 악마는 인간이 거부감을 느끼는 괴물스러운 존재가 가지는 속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악을 그리는 많은 형상들도 이런 우리의 보편적인 감정을 그대로 표현해주어 거북하고 추한 형태를 가진 존재라고 믿었다. 그런데 점점 세상의 보이지 않는 폭력들이 많은 사람들을 슬픔에 가두고 인간은 그런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도 누구 하나 제대로 알아주기 않고, 가해자는 오히려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시대에 정의는 살아있는가 생각하게 된다.


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바로 파괴에 있다고 한다. 인간을 파괴하기 위해 특별한 재주를 가진 악마가 중간에 이간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악은 인간의 욕망을 통해 인간 스스로 혹은 타인의 존재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악은 우리의 삶에 아주 달콤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피상적으로 돈이나 명예를 보면 그 자체가 악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돈이나 명예를 추구하는 인간 옆에서 악마는 인간의 욕망을 더 뚜렷하게 보여주고 그렇게 보여준 욕망의 구체적 실천 방법으로 폭력을 행하도록 합리화시킨다. 결국 그 과정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인간이지 악마는 중간에서 자신의 폭력을 합리화시켜 눈멀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영화 데블스 애드버킷(1997, The Devil's Advocate) 을 보면 인간의 삶에 인간이 욕망하는 돈과 명예로 인해서 인간 스스로 어떻게 자멸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주인공 변호사 케빈(키아누 리브스 분)은 거대 법률회사의 밀튼(알 파치노 분)에 의해서 화려하고 명성 가득한 삶을 살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그 모든 선택의 순간 밀튼은 케빈이 옳지 못한 선택으로 자신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폭력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고민하는 순간 항상 문제의 해결을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고 한다. 존재의 제거는 문제 해결의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렇기에 문제 해결을 위해 항상 우리들은 빠른 길, 그러나 그 빠른 길에는 파괴에 이르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 파괴의 과정에 피해자는 타인이 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악의 작용은 상당히 달콤하다.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런 쉬운 길은 대부분 파괴의 과정을 거치고 그 파괴의 과정에서 폭력은 동반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악은 파괴의 과정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악의 작용은 끊임없이 우리가 쉬운 길을 선택하도록 이야기한다. 쉽지만 존재의 파괴가 동반되어야 할 때 양심의 작용과 악의 작용은 항상 우리를 시험하게 한다.

The Dark Knight 에서 선의 대명사였던 지방검사 (D.A.) 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파괴의 모습을 보인다.

악의 작용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폭력의 가해자로 만들기도 하지만 너무도 뚜렷하게 보이는 폭력으로 이끄는 경우도 있다. 개인적으로 최고의 영화라 생각하는 다크 나이트 (2008, The Dark Knight) 는 뚜렷하게 보이는 악을 제거하기 위해 악마가 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 질문한다. 즉, "명백한 악을 제거하기 위해 악한 행동"에 대한 질문이다. 많은 영화 속에서 선으로 보이는 인물과 악으로 보이는 인물의 갈등을 통해서 시종일관 선과 악이 구별되어 끝까지 싸우는 영화는 아마 어린이 영화일 가능성이 높다. 분명히 악이라고 믿는 상대와 싸우면서 자신도 점점 악마가 되어가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악을 제거하기 위해 악이 된다. 는 명제는 하나의 숙제처럼 남겨두고 싶어진다.

사회적 비용에 대한 고민 

사회적 비용를 다양하게 정의내릴 수 있지만 파괴와 폭력을 통해 살펴본 결론으로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싶다. 사회적 비용이란 말을 많이 한다. 특히 복지 국가를 지향하면서 사회적 약자와 사회적 갈등에 소요되는 다양한 포괄적 비용을 사회적 비용이라 부를 수 있다. 개인적 추측으로 사회적 비용은 폭력의 양과 반비례 하지 않을까? 폭력이 가득한 시대는 사회적 비용이 많이 발생하지도 않고 사회적 비용보다는 법적, 구조적 억압을 통해서 파괴하려 할 것이다. 즉, 사회적 비용이란 우리가 서로가 서로를 파괴하지 않고 서로의 존재에 대해 인정하고 공존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이라고 본다.


폭력을 정당화 하는 사상이 있다면 그 사상은 파괴를 정당화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상은 공존보다는 구별과 차별을 통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려 할 것이다. 그런 폭력이 정당화된다면 그런 사회는 사회적 비용은 불필요할 것이다. 파괴의 과정은 아주 쉽게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이다. 마치 안과의 모든 질환을 해결하기 위해 안구를 적출하는 것과 같다. 당장은 안과 질환은 발생하지 않아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 같지만, 안구의 존재 자체를 제거했기 때문에 안구가 우리에게 주었던 기능과 역할 또한 파괴하게 된다. 우리가 사는 사회 구성원 중 문제만 일으키는 집단이 있다면 가장 좋은 것은 그 집단을 파괴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방법으로 인간은 격리라는 방법을 발명했다. 그러나 그 격리라는 방법도 결국 우리 사회의 한쪽 구성을 차지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비용은 발생한다.

회적 비용에 대한 접근은 단순히 비용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파괴의 행위, 폭력을 정당화 시키지 않기 위해 선택한 가치라고 바라볼 필요도 있다. 사회적 비용, 더 세련된 용어로 경제적 부담을 피하기 위해 폭력과 파괴를 선호하게 되어 파괴의 선례를 남긴다면 그 파괴의 대상이 내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마무리하며... 

우리 사회는 다수의 이익을 위해 (그 이익조차 사실 정말 다수인지 소수의 자본인지에 대한 정확한 판단도 안한 체...) 소수는 희생해도 된다는 폭력의 암묵적 동의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다수의 이익이란 대부분 경제적 이익인 가능성이 높다. 경제적 이유를 위해 암묵적 동의와 무관심을 가지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도 모른 체 사회의 규모적 파괴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주 사소하게 근거도 없는 악플도 분명 폭력이다. 언젠가 모 연예인이 자신을 향한 끊임없는 악성 댓글(악플)과 루머에 "이 문제는 본인이 죽어야 해결 될 문제다" 라고 이야기했다. 결국 한 연예인이 자신의 재능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존재의 의미, 연예인이 꿈꾸는 그런 행복한 희망을 다수의 폭력은 그를 하나의 상품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연예인의 존재보다는 연예인의 기능만 바라본다. 그렇기 때문에 인격적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상품의 하나로 바라보는 대중들은 누군가 사라지면 다른 연예인으로 대체하면 그만일 뿐이다.

혼도 어떤 의미에서 마찬가지일 수 있다. 서로의 의미와 존재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결혼이라는 목적을 위한 대상을 찾는 세상에서는 결혼 배우자는 하나의 상품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파괴의 과정에 많은 회사들은 돈벌이를 위해 악마의 유혹처럼, 사람들을 상품화하고 그 상품화를 통해 결혼의 본질적 의미를 파괴한다. 파괴와 폭력에 대한 개인적인 정의를 만들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했던 우리의 삶의 과정에 혹시 일어날 수 있는 폭력의 행위를 깨어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연예인이 나오면 악플을 달고 싶고 악을 이기기 위해 악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다 결국 파괴의 허용은 나를 파괴할 수 있다는 보편적 적용 가능성을 생각하며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바라보며 조금은 힘든 선택이라도 최소한 파괴를 피하고 폭력을 막으려는 의식있는 행동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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