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이렇게 쏟아지는 미디어의 홍수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서 쏟아지는 미디어의 양에 의해 많은 시간 가지고 생각해볼 기회가 별로 없이 바로 소비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 쏟아지는 미디어는 우리에게 나빠 보이지도 않고 오히려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좋은 정보원 (information source) 가 된다고 믿고 있다. 물론 초기 미디어의 기능은 충분히 그런 믿음을 충족시켜줄 수 있지만 우리의 삶이 점점 미디어의 사슬에 얽히는 동안 어쩌면 미디어가 우리에게 가하는 폭력의 그물 안에서도 우리는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하는 모습은 아닌가 싶다.
무엇을 미디어라 부를 것인가?
미디어 (media) 를 정확하게 해석하는 단어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나마 매체라는 말이 있지만 미디어의 속성을 정확하게 표현하기에는 매체는 너무 가치 중립적인 표현이다. 오히려 미디어라는 초기 방송 진입 장벽이 높았던 시절 소수의 공급자가 다수의 소비자에게 뿌려주던 (broadcasting) 방식의 매스 미디어 (대중 매체)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매스 미디어 (매스컴) 은 방송과 같이 제작자가 만든 내용물을 대중이 소비하는 형태를 이야기한다. 언론 (press) 은 기능적 영역이 시사와 보도와 같이 우리가 알아야 할 내용들을 모든 사람들이 각자 알아 내기 힘들고 효과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이를 대신 해주는 역할을 해주는 미디어의 한 영역이라고 생각한다면 넓은 의미의 미디어로 포함시켜 이야기해도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언론의 학문적 정의나 심오한 내용을 고려한다면 적절하지 않은 정의(definition)일 수 있지만 일단 큰 틀에서 언론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방송을 포함하여 모두 미디어라고 부르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매스 미디어라고 부를 때 앞의 매스 (mass) 는 대중을 뜻하고 수요층의 폭이 넓은 것을 뜻하기 때문에 요즘에 인터넷을 통해 방송되는 언론이나 방송 형태는 정확하게 매스 미디어라 부르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매스 (mass-) 를 제거하고 단순히 미디어라고 부르는 것이 인터넷 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미디어의 성격을 더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재미있는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한다. 심지어 개인들도 쉽게 방송을 만들 수 있는 다양한 환경이 가능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인터넷이란 기술과 조금은 더 생각한다면 개인이 쉽게 자신의 방송 내용을 올릴 수 있는 좋은 플랫폼 (기반시설) 을 서비스를 사용할 수 있게 되고, 소비자들도 스마트폰을 비롯한 모바일 기기로 쉽게 접근 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작은 범위로 보면 이런 개인 방송은 적절한 플랫폼이 제공되지 않았던 오래전부터 그 욕망을 다른 형태로 표현하고 지금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로 인터넷 사용자들은 자신의 관심사 등에 따라서 카페나 커뮤니티를 만들고 해당 공간에서 자신의 의견을 활발하게 게시하고 이를 통해 사람들과 대화하고 토론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점점 미디어의 영역은 단순히 방송이나 언론에 제한할 수 없으며, 이런 인간이 가진 미디어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이미 인터넷의 다양한 기술은 커뮤니티나 게시판의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런 욕망을 대변하여 등장한 대표적인 서비스가 바로 트위터 (twitter) 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트위터는 서비스 시작부터 개인 미디어(personal media)를 위한 좋은 플랫폼 (platform) 으로 소개했고 페이스북 (facebook)의 경우는 관계를 바탕으로 한 관계형 커뮤니티 (relationship based community) 를 추구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페이스북은 자신의 글에 대한 주변인들의 반응과 의견을 위한 형태로 발전했지만 트위터는 그런 반응과 의견을 위한 형태보다는 전파 (propagation) 과 확산 (expansion) 에 중심을 두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미디어의 기능 - 전파와 확산
미디어는 영어로 media 이다. 이는 medium 의 복수형인데 medium 은 물리학 용어로 매질(媒質)이란 뜻도 포함한다. 매질이란 예를 들어 소리가 확산되기 위해서는 소리가 가지는 주기적인 파형(wave) 압력의 변화를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는 물질을 말한다. 즉,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가 우리의 귀에 전달되는 것은 스피커가 만들어내는 압력의 차이를 전달하여 우리의 귀의 고막에 전달해주기 때문이다. 이때 전달해주는 물질을 매질이라고 부른다. 소리의 경우 대부분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공기이지만 꼭 공기일 필요는 없다. 수중에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물이나 액체의 물질도 매질로 작용할 수 있지만 매질의 특성상 공기 중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와 다르게 들리는 것이다.
즉, 우리는 스피커가 만들어내는 소리를 정확하게 듣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는 공기에 의해 전달되는 소리의 왜곡을 듣고 있다고 생각해도 된다. 즉, 스피커와 내 귀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공기의 상태 (온도, 습도, 구성 물질) 가 완벽하게 동일하지 않다면 중간의 매질의 변화는 실제로 스피커가 만들어 내는 소리를 조금씩은 왜곡시키면서 전달시켜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부분까지 걱정하면서 살아간다면 아마 정신질환에 걸릴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에 허용할 수 있는 범위의 매질에서 우리는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즉, 매질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은 전파(propagation)과 확산(expansion)이지만 이 전파와 확산은 꼭 우리가 원하는 대로 조절하기 쉽지 않고 다양한 매질을 통과할 때 그 전파와 확산은 더욱 더 예상하기 힘들어진다.
미디어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조금만 물리학 이야기를 한다면,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를 정확하게 듣고 싶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몇가지 없다.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것은 스피커에 최대한 가까이 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중간의 매질의 양을 줄여 매질에 의해 왜곡될 가능성을 줄이는 것이다. 두번째는 최대한 매질을 최대한 고르게 조절하여 스피커에서 만든 소리를 왜곡없이 전달 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즉,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합리적인 해결 방법은 다음과 같다.
확률 (매질에 의해 왜곡) 을 낮추기 위해서는 매질의 수를 최소화 & 매질의 양을 최소량
세상은 너무 넓고 사건도 많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세상의 일들을 제대로 듣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전문적으로 하는 직업이 생겼으니 바로 그것이 언론이다. 이제는 개인 인터넷의 활발한 활동으로 트위터 등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내용들을 포함하여 모두 미디어라고 부른다면 해당 미디어를 사용하는 사용자들 (언론의 기자, 트위터의 트위터 사용자 등) 은 전파와 확산을 바라며 미디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실제 일어난 사건, 사고 등 세상에 알려야 하는 내용, 언론학(jorunalism)이 이야기하는 소위 사실 (fact)가 바로 앞서 예를 들었던 스피커가 만들어 내는 소리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접하는 말 그대로 미디어는 바로 스피커와 우리의 귀 사이에 놓여 있는 다양한 매질에 해당한다.
소리는 매질이 없으면 스피커에서 아무리 소리를 만들어 내도 우리 귀에 전달되지 않는다. 즉, 우리가 어떤 소식을 듣기 위해서는 미디어가 없으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매질의 특징처럼 전파되고 확산되어 꼭 내 귀가 아니라도 내 주변에 같이 있는 사람들 즉 미디어가 미치는 영향권에 있는 사람들은 스피커가 만들어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매질이 만들어내는 왜곡도 우리가 현실에서 부르는 미디어에 의해 다양하게 만들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같은 공간에 있다고 해도 매질 사이에 방해물이 존재해 매질을 끊어버리거나 아니면 매질 사이에 새로운 스피커를 만들어서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 낸다면 같은 스피커를 통해 듣는 것처럼 보여도 전혀 다른 내용을 전달 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물리학의 매질이 가지는 특성과 같이 방송 / 언론의 미디어도 왜곡의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미디어를 바라본다.
다양한 미디어의 발달은 마치 우리가 다양한 사실을 더 정확하게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즉, 소위 상호조사 (cross check) 를 통해서 다양한 소스를 통해서 들리는 이야기를 들으면 사실에 더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일정 부분 맞는 이야기이다. 어떤 하나의 사실 (명제)를 검증하기 위해서 더 단순히 참/거짓을 알아내기 위해서 A라는 경로를 통해서 알아보고 B라는 경로를 통해서 다시 알아보아서 두 사실이 참이라면 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론의 이야기로 예를 들자면 BBC 에서 보도한 내용이 Independent 지에서도 동일한 내용으로 보도했다면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면 인터넷의 발달은 우리가 어떤 사실에 대해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믿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런 인터넷의 발달이 객관적 사실에 더욱 더 접근할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되어줄 것이라고 인터넷 초기 사용자로 상당히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인간은 그렇게 똑똑한 동물은 아니라는 점이다. 특히 우리가 얻은 정보의 신뢰(confidence)는 어디서부터 시작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즉, 내가 어떤 새로운 사실을 미디어를 통해서 알게 되었을 때 얻게 된 사실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순간이 언제인지 확인해보면 될 것이다.
1) 직접 확인해본다. : 이 방법은 사실에 접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절대 효과적이지 않다. 이런 일을 위해 인간은 별로도 직업을 만들었다. 바로 기자이자 언론인이다. 직접 사실 관계를 확인하여 무엇이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인지 판단하지 않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전달해줄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스피커가 만들어낸 소리를 가까이에서 듣는 것이고 기자의 양심이라는 정직한 매질을 통해서 우리는 사실을 믿게 된다.
2)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 앞서 언급한 것처럼 A 언론사에서 얻은 정보라면 B 언론사도 동일한 이야기를 하는지에 대해서 확인한다. 다른 방법으로 신문을 통해 얻은 사실이라면 인터넷에서 직접 검색을 통해서 알아보는 방법을 통해서 상호조사를 해보아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3) 대중의 의견을 수집한다. : 다수가 항상 옳지는 않지만 최소한 다수의 의견에 따르는 것은 심리적 안정감은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중의 의견이 참고가 아닌 사실에 대한 신뢰의 결정적 이유가 될 정도라면 앞서 1) 과 2)의 방식이 신뢰를 얼마나 주지 못하는 시스템인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국가가 국가의 정책에 반대하는 내용을 인터넷에서 보지 못하게 하고 (모두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다수가 보지 못하게 하고... 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언론을 포함한 미디어가 정부의 일방적 내용만을 보여준다면 사실상 직접 확인하고 다른 방식으로 접근을 해도 통제된 내용들을 신뢰하게 될 것이다.
더 많은 방법이 있지만 3)의 내용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전개해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특히 이 부분에서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언론의 신뢰가 중요하다. 언론은 가장 정확한 매질이 되어 최대한 왜곡없이 전달할 수 있어야 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만약 이 언론이 가장 왜곡하고 때로는 어떤 사실에 대해 편파적인 방향을 제시한다면 언론은 ⓐ 신뢰를 바탕으로 거짓을 전달하는 사기치거나 ⓑ 불신에 의해 언론의 근본적 기능조차 수행하지 않는 직무유기가 되는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 언론의 신뢰 정도는 각자의 판단에 따라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주로 1) ~ 3) 사이의 어떤 수준에서 사실에 대한 신뢰를 가지게 되는가 사건에 대한 의견을 가질 때 어떻게 믿는지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참고로 신뢰란 언론이 이야기하는 이야기를 궁극적으로 믿는다는 뜻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언론이 "아기 공룡 둘리 초식 동물로 밝혀지다" 라고 사실을 이야기할 때 언론의 보도만으로 믿는지, 아니면 스스로 뭔가 다른 검색 방법으로 알아보는지, 아니면 그 내용에 대해서 커뮤니티 등을 통해 사람들 (대중) 의 의견에 따라 믿게 되는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둘리는 아기도 아니었고 육식 동물이었다" 라는 새로운 명제에 도달하는 순간이 바로 신뢰가 생기는 순간이라 봐야 할 것이다.
언론은 조작될 수 없는가?
조작과 날조에 대한 궁금증을 만들게 해주었던 사건이 전직 언론인이자, 청와대 대변인인 인물 때문에 궁금하게 되었다. 조작은 manipulation 으로 뭔가 존재하는 사건에 의도를 가지고 유리한 방향으로 내용을 바꾸는 것이고 날조는 fabrication 으로 전혀 존재하지 않는 사건을 있는 것처럼 만드는 것이라는 차이점을 생각하게 했다. 누군가 언론은 조작될 수 있는가? 묻는다면 개인적으로 언론은 조작될 수 없다고 대답하고 싶다. 만약 조작을 하는 주체가 언론이라면 그것은 언론의 이름을 차용한 사기 집단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언론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런데 언론은 장악될 수 없다고 믿는 정치인이 있다. 일면 동의한다. 지금과 같이 인터넷이 발달하여 다양한 미디어가 발달한다면 장악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 이상하다. 왜냐면 충분히 인터넷은 우리에게 사실에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미디어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적 생각으로 언론의 장악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점은 바로 '여론의 장악'이다. 그래서 언론은 장악될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점점 가능성은 희박해질 것 같다... 라고 믿고 싶지만 여론은 장악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정치권이나 여권에서 제기하는 언론 장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론 장악이 더 문제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왜 인터넷은 과격해질 수 있는가?
이전 블로그에도 소개했지만 [ 정치적 프레임 ]을 소개한 적 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마! 라고 하는 청중들의 머리 속에는 이미 코끼리가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 프레임과 마찬가지로 미디어가 사용하는 프레임도 비슷하다. 사실 언론이 제대로 된 역할만 수행한다면 프레임이라는 패러다임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앞서 비유한 소위 '정직한 매질'이 된다면 사실의 객관적 전달자로 충분히 그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고 대부분의 언론은 자본의 논리에 언론 주주를 보호하거나 추앙해야 하는 불편한 언론이 될 수 밖에 없다. 물론 이 부분까지 부정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최소한 이런 언론의 행태는 친한 사람에 대한 인간적 연민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언론이 적극적으로 미디어 프레임을 통해서 사람들의 생각을 편향시킬 수 있다면 여론은 유리한 방향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유리한 내용만을 골라 내어 보도하거나, 불리한 내용에 대해서는 인간적 연민에 호소하다 유리한 내용은 사법적 정의, 공정 사회 등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여 사람들이 느껴야 하는 감정과 내용을 전달하는 방법이다. 즉, 언론이 특정 사실에 대해서 대중이 어떻게 신뢰하기를 바라는가에 따라서 내용의 강약을 조절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같은 사실에 대해서 A 언론은 유리하게 보도하고 B 언론은 불리하게 보도한다면 대중의 자연스러운 반응은 혼란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언론에 신뢰할 수 없는 대중은 다른 방법으로 검색하거나 다른 대중의 반응과 의견을 찾아보게 된다. 즉, 언론이 사실 보도에 대한 객관성을 잃어버리고 편파적 사실을 이야기하면 그 순간 언론은 스스로 신뢰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때로는 정치적 성향에 따라서 어떤 언론의 내용을 믿을 지에 대해서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즉, A 언론의 내용만 믿게 되는 사람도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개인적 신뢰의 지점이 어딘가가 아니라 같은 사실에 대해서 여론은 분열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각 언론마다 논조가 있고 성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만약 사실에 대한 분열과 대립으로 서로 상반된 내용을 이야기한다면 크게 두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첫번째는 ⓐ 언론이 객관적 시각을 잃어버리고 주관적 (사적) 관점에서 사실인 듯 이야기하거나 ⓑ 언론이 직접 확인한 사실이 아닌 타 미디어를 통해 재 생산된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쟁점이 되는 문제에 대해서 차분하게 사실을 알아보기 보다는 대중이 더 신뢰할 것 같은 이야기의 생산에 몰입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언론은 과격해질 수 밖에 없다. 무엇인가 주목을 더 끌고 싶은 사람은 과격해질 필요가 있다. 얌전한 언론은 대중의 시선을 쉽게 잡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론의 기본적 기능을 벗어나 언론이 과격해진다면 그 안에는 쟁점이 존재하고 분열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미디어의 소비자인 우리들은 현명하고 똑똑하기에 그런 과격하고 선정적 보도에 휘둘리지 않을 것 같지만 사실 우리는 미디어의 홍수 안에서 좀 더 자극적 언론에 호감을 떠나 보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언론은 이미 과격함을 통해 미디어에도 마케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결국 그렇게 어떤 언론이 더 선정적이고 과격할 수 있는가 경주하여 1등 언론이 주목받게 되는 경마식 저널리즘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질 수 있을 것이다.
분열과 분쟁을 통해서 무엇을 얻는가?
분열과 분쟁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극적이고 선정적 내용을 통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적 사실보다 자극적 부속에 더 관심을 끌게 한다. 그런데 사람의 호기심을 완전히 충족시키기에는 참 많이 부족한 것이 언론 미디어이다. 언론 미디어는 공공적 성격이기 때문에 사용되는 언어와 표현에 많은 제약이 가해진다. 반면 대중의 좀더 솔찍한 내용을 볼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인터넷 커뮤니티이다. 2013년 대한민국은 모 커뮤니티 사이트때문에 말이 많다. 개인적으로 그 사이트를 들어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의견도 없지만 너무 심한 내용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호감을 보이기 어렵다. 그리고 사실 그런 부정적 (negative) 이슈에 의해 매일 반복적으로 이슈화되기 때문에 그 자체도 하나의 대중화가 되어간다는 것을 인식하면 좋겠다.
더 자세히 보자면 앞서 코끼리를 생각하지마! 라고 듣는 순간 코끼리가 머리에 들어오듯이 "XX 사이트는 나쁜 사이트야!" 라고 많이 회자되어도 그 자체가 이슈가 된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은 나쁘다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사이트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렇게 인터넷에서 관심을 끌게 되면 그런 가치 판단을 하지 않았던, 인지하지 않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Don't feed the trolls.
인터넷에는 이런 표현이 있다. 트롤((인터넷 상에서 분쟁이나 자극적 내용을 생산하는 집단을 트롤이라 부른다.)에게 먹이지 마라. 토마스 그레샴(Thomas Gresham)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Bad money drives out good.) 은 단순히 악화가 양화보다 힘(power)를 가지기 때문에 자본주의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현상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가 빠르게 전달되는 상황에서 나쁜 소문이 좋은 소문보다 더 빠르게 전달되는 현상과도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다. 즉,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위협(threat) 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려 한다. 인터넷의 공간 상에서 정보를 취사하는 사용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다양한 미디어가 발달해서 다양한 언론 내용을 접할 수 있다고 하면 다양한 시선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지만 같은 사실에 대해서 한 언론은 공포를 심어주고, 한 언론은 안심을 전달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포를 피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점이다.
구체적인 과정을 생각해보자. 만약 허리케인이 다가오는데 한 언론은 가능한 피해가 예상되니 충분히 대피할 수 있도록 대비하라고 하고, 다른 언론은 이번 허리케인은 위력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보도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의 내용을 더 믿고 싶어 할 것이다. 우리가 어느 시점에서 신뢰하느냐라는 질문을 할 때 우리는 대부분 우리의 생존과 위협에 연결된 내용에 대해서는 보호적이고 나쁜 상황을 대처하기 방향으로 신뢰하려 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하나의 사실에 대해서 분열과 대립의 의견으로 싸울 때 한쪽은 자극적이고 선정적 내용, 검증되지 않은 의혹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보도하면 (소위 흑색선전) 이는 상당히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그 의혹들이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이미 미디어 프레임에 잡혀 반대측도 해명을 하기 위해 의혹에 사용되는 단어와 표현을 그대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공격적이고 선정적인 편은 항상 대중의 집중을 받게 된다. 그리고 반대쪽은 해명하는데 소진하게 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사실이 아니야!" 라고 이야기할 때 이미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분열과 대립이 강해질 수록 선정적이고 자극적 커뮤니티에 대한 관심은 집중될 수 밖에 없다. 한편으로 XX 커뮤니티는 문제가 심각하다. 라고 말하는 반대쪽도 결국 XX 사이트의 효과적인 전달자가 된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가장 좋은 것은 정말로 아무것도 먹이지 말아야 (Don't feed the trolls) 하는 것이다.
검색 엔진에 대해서 고민해보자.
이전 포스팅에서 소개했지만 우리가 접하는 검색 엔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잠시 접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 검색엔진의 진화 - 플랫폼을 통한 인식의 진화 ]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검색 엔진은 우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줄 만큼 정확하지도 않고, 우리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근거를 잘 제공해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검색 엔진을 통해 검색하는 모습을 한번 생각해보자.
대부분 검색은 키워드를 위주로 이루어진다. 즉, 우리의 관심사를 명사로 판단해서 검색하는 것은 쉽지만 우리의 가치판단을 위해 명제의 형태로 검색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또한 검색의 가장 큰 한계는 언론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언론이 제공하는 그 사실자체가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검색 엔진 조차도 신뢰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하루에도 몇천개의 글이 올라오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자유 게시판을 보고 있으면 재미있는 현상을 많이 보게 된다. 어떤 특정 이슈에 대해서 불타오르 듯 의견이 난무하는 순간 대부분 주장의 근거는 언론사의 기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언론사들도 사실에 대해 너무도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여 언론사에 따른 신뢰도를 사용자들이 표현한다. 예를 들어 "A 신문사는 믿을 것이 못된다." 그러다가 같은 사용자가 다른 사건에 대해서 A 언론사의 기사를 인용하며 자신의 생각을 주장한다. 즉, 언론사를 신뢰하여 주장하기 보다는 마침 자신의 주장에 맞는 기사가 있어 자신의 주장을 신뢰할 수 있도록 해당 기사를 인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개인적 의견과 다양한 분석이 등장한다.
집중하고 싶은 현상은 바로 다양한 커뮤니티의 등장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언론에 대한 신뢰를 가지지 못하는가에 대한 반증이다. 특히 정치적 이슈가 등장할 때 사람들의 반응과 의견은 사용자에 따라서 뿐만 아니라 해당 사이트의 성격에 따라서도 극명하게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떤 근거에 따라 자신의 주장을 만들었지에 대해서 생각하면 대부분이 미디어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위 돌고 도는 미디어의 재생산 속에서 사실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미디어에 의해 많이 돌았던 내용인가가 더 신뢰를 주는 요소가 되었다. 구체적으로 트위터에서 많이 RT (retweet) 된 내용이 사실에 가깝다고 이야기할 수 없지만 대중의 흐름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나에게 편하겠구나 믿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독수리의 관점 (eagle's view)를 통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착각하는 두가지는 ① 많은 사람들은 나만큼 옳고 그름을 판단할 이성적 인간이다 ② '내가 이렇게 격분하고 설명하면 많은 사람들은 이해할 것이다' 이다. 그러나 나 중심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내 주변의 사람들을 떠나서 하늘 높은 곳에서 독수리가 되어 바라보자. 그럼 세상에는 나의 가치관과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의외로 내 주변에 위치해 가치관이 강화된 영역에 존재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분개하고 화내는 사건에 대해서 전혀 모르거나 판단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는 점이다. 즉, 무관심했거나 가치중립적인 많은 사람들에게는 내가 화내며 올린 RT 나 공유가 검색엔진에 이슈를 더 강화시키는 역활을 하여 그들의 호기심을 먼저 자극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가치 판단을 해주지 않는 (해줄 수도 없는) 검색 엔진에 내가 올린 반박글은 가치 판단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오히려 나와 다른 가치관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더 마련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극적 내용이 더 관심이 끌리고 검색 엔진을 통해 정보를 알아볼 때 키워드로 제한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더 많은 트롤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마무리하며...
역설적으로 언론은 스스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신뢰를 얻지 못하게 되어 사람들이 떠나게 되면 더욱 더 다양한 형태의 미디어가 발달하게 된다. 그만큼 정론으로 신뢰를 줄 수 있는 언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제대로 된 언론이 있다고 해도 미디어는 다양할 것이고 현재와 같이 트위터도 그대로 그 기능을 수행할 것이다. 그러나 언론의 기능이 제대로 되지 않을 수록 분열과 분쟁이 가득한 미디어의 다각, 다색화의 정도가 심해질 것이다. 사회적 문제가 많아도 문제를 제대로 바라보는 시선이 다수의 여론이라면 문제의 해결 의지는 강하고 그에 따라 최대한 한 방향으로 해결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사소한 문제마다 분열이 만들어진 언론 / 미디어 생태계에서는 결국 그레샴의 법칙처럼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내용을 뿌리는 트롤들이 기승을 부리게 될 것이다.
그 상황을 비판하는 것조차 인터넷 생태계 특히,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 중립적 검색 엔진의 환경에서는 무관심했던 대중들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내용들은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아 문제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 특히 청소년 및 청년들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인 내용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반박하는 것조차 인터넷 생태계에서는 관심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개인 미디어의 주최로 개별 사용자들은 항상 수동적 재생산자가 아니라 적극적 감시자이며 때로는 사실의 전달자로 좋은 매질이 되어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다. 무시하고 대답할 가치가 없는 대상에는 철저하게 무관심하고 싶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고 나 하나가 그런다고 해도 대중의 심리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어느새 미디어의 성격도 거칠어지고 선동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위험이 많은 공간이다. 부작용이 발생하지 않는, 미디어의 표현 자유를 보호하면서도 거칠어지는 미디어를 막을 수 있는 묘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그냥 현상적 분석으로 마무리하는 것에 아쉬움은 남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가 없다면 어려운 일이라는 점이기에 이 부분에 대한 미완의 숙제를 남긴 체 글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때로는 우리가 옳은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잘못된 것을 언급해야 하는 그 역설적 광고에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지만 만약 사회의 분위기가 문제 해결을 위해 분열과 대립을 대신해 토론과 타협의 코드를 사용한다면 인터넷 트롤도 많이 사라질 것 같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12월 18일 윤여준 vs. 김종인 토론 내용을 들으며 잠시 미디어의 생산적 역할을 희망했던 기억을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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