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une 15, 2013

반성의 과학 (Science of Ref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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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학교 시절 선생님은 반 전체에 반성문을 쓰라 하셨었다. 그 얘기를 듣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반 전체가 합의해서 써야 하나요?" 라며 항의했고 결국 반 전체 반성문 대신 나 혼자 반성문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썼던 것은 반성문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성명서 (manifesto) 였다. 모든 표현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선생님의 주관적 감정으로 기분이 안 좋아 진 것이 이유인 것 같은데 왜 학생들에게 잘못을 강요하시는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 위해 학생 전체가 반성을 하기 전에 누구도 억울해 하지 않는 객관적 사실을 가지고 혼내시기 바랍니다." 

라는 내용으로 제출했었다.


성은 영어로 reflection 이라 한다. reflection 은 반성이란 뜻도 있지만 반사란 뜻도 가지고 있다. 좀 더 상세한 느낌은 빛에 의해 반사된 모습을 나타날 때가 많다. 즉, 거울에 반사된 내 모습을 보면서 내가 했던 일, 내가 생각한 것 중에 잘못되거나 내가 앞으로 살아가는데 고치면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다짐 하는 정도를 반성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반성을 많이 하는 나라도, 반성을 많이 요구하는 나라도 없는 것 같다. 어른들을 통해, 선생님들을 통해 수많은 반성거리를 접하고 생각하고 뉘우치고 그 잘못을 다시는 안하겠다고 마음 다진다. 그만큼 우리는 하지 말아야 할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반성이 얼마나 큰 효과를 가지는지는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실수하는 인간이다. 반성을 해도, 반성을 하지 않아도 잘못을 저지르고 그 중 많은 잘못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잘못들, 실수들도 많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반성은 상당히 이상적인 (idealistic) 과정이다. 현실적 반영이 아닌 최고의 모습, 완벽의 모습을 상정하고 그 모습에 반성해야 하는 기준들이 만들어 진다. 그러나 그렇게 이상적 조건에서 만들어진 반성의 기준들은 종교적 성인이나 진리를 깨달은 사람의 경지에 이른 사람 같다. 항상 완벽에 가까운 기준에 비추어 잘못된 것들을 들추어 보면 인간의 많은 행동들은 부족하고 반성해야 할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런 반성에 비해 마음처럼 고쳐지지 않거나 반복되는 행동들, 실수들이 보인다면 반성의 내용은 무덤덤한 습관이 되거나 '나는 정말 이 정도 밖에 안되나?' 싶은 자괴감에 빠질 수도 있다.

리학에서 설명하는 반사 (reflection, optics) 를 생각해 보자. 우리가 거울 앞에 있을 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정말 나의 진짜 모습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거울 앞에서 바라보는 방향만 바꾸어 조금만 움직여 봐도 알 수 있다. 정면에서 바라보는 나의 모습, 측면을 통해 바라보는 모습, 보이는 각도에 따라서 나의 모습은 조금씩 다르고 때로는 전혀 다른 나의 모습처럼 보일 때도 있다. 내가 서 있는 방향, 위치에 따라서 거울에 비치는 모습도 다르고 거울의 상태, 재질, 공기의 상태에 따라서 내가 거울을 통해 볼 수 있는 반사된 나의 모습도 항상 다르게 보인다. 거울과의 거리에 따라서 멀어지면 나의 모습은 작아지고, 가까이 다가가면 내 모습은 커지게 된다. 역설적으로 상황에 따라서 항상 다르게 보이는 내 모습은 현상일 뿐이지 내 본질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결국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상상의 '절대 거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모든 시선에 따라서, 심지어 내가 바라보는 상황에 따라서 반성의 내용도 달라지게 된다. 반성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평가하는 기회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을 적용할 수 없기 때문에 반대로 주관적인 평가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세상에 무조건 절재적으로 지켜야만 하는 '절재적 선'이란 존재하는가? 칸트는 이를 정언적 명령 (categorical judegement) 라는 항목으로 인간이 동물과 다르게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덕목이라 얘기했지만 그 덕목은 시대에 관계없이 변하지 않는 가치가 아니라 오히려 시대에 따라 심하게 변하는 내용도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우측 통행을 할 절대적 이유는 없다. 우측 통행이 다양한 이점이 있다고 해서 이런 이점이 지켜야 하는 당위성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오히려 예전에는 좌측 통행이 미덕처럼 여겨지다가 정부의 명령으로 우측 통행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정해진 기준은 때로 그것에 수긍할 수 없거나 무의식적으로 지키지 않은 사람들을 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로 만들고 만다. 어떤 기준도 아무리 합리적이고 우주의 보편적 질서를 표현하는 만물의 법칙을 따르고 있다고 해도 기준이란 그 기준에 부합되는 집단과 부합되지 않는 집단을 만들고 부합되지 않는 집단에게는 일종의 폭력이 되기도 한다.


성의 원리도 비슷하다. 아이들에게 반성을 요구하는 부모를 생각해보자. 공공 장소에서 아이들을 야단치는 부모들은 대부분 경우 아이들이 정말 잘못을 했기 보다는 아이들 행동이 부모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좀 더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아이들은 자신의 행동이 사회적 영향을 미치는지를 파악해서 행동하기 보다는 대부분 자신의 행동을 통해 당장 이루어지는 반응을 통해 습관화 되는 경우가 많다. 즉, 아이들은 사회적 체면이나 영향력, 명예 등과 같은 사회적 관계를 고려하며 행동하기 보다는 자신의 행동이 당장 어떤 이득을 얻을 수 있는지 체득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 아이들에게 부모는 사회의 엄격하고 이상적인 미덕과 예의를 이야기하며 훈육한다. 소위 아이들의 '버릇'을 위해서 수많은 항목의 기준을 마련해서 아이들에게 적용한다. 결국 그 기준의 합리성을 따지지도 못하는 아이들에게 기준을 명령한다. 그렇게 적용되는 기준은 결국 아이들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부모들은 별로 고민하지 않는다.

아이가 화장실 불을 안 끄고 나올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런 아이를 향해

"아니 화장실을 갔다 나왔으면 불을 꺼야지! 그래야 전기도 아끼고 우리나라가 잘 살 것 아니야! 잘못해서 잘했어!" 라며 거창한 대의 명분을 내세워 아이에게 반성을 요구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내가 아이에게 반성하라며 이야기하는 그 마음의 한 구석에 정말 한없이 정의로운 마음만이 존재해서 반성을 요구한 것인지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다른 표현으로 "불 켜진 화장실을 보고 엄마는 안에 누가 있는 줄 알고 계속 기다렸는데 그러다 엄마 오줌보가 터지면 엄마는 무척 아플 것 같아요." 와 같이 부모도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적 상태를 아이에게 표현하고 아이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알려주는 것도 다른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른이란 이유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있는데 도덕적 규범이나 그래야만 하는 당위성을 이야기하며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면 사회성이 형성되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더 혼동되는 상황일 뿐이다.

소한 인간 세상에는 '절대 거울'은 찾기 어려워 보인다. 그리고 상상 속 '절대 거울'을 통해 항상 자신을 반성하고 자신에게 실망하는 것이 때로는 자신에게 가하는 큰 상처가 된다. 자존감은 자기 신뢰와 자기 사랑을 통해 이루어진다. 신뢰와 사랑이란 자신이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란 오만의 믿음이 아니라 자신이 실수를 해도 짧은 시간동안 실망도 하고 후회도 할지 모르지만 큰 그림으로 볼 때 항상 선한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신뢰이자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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