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uly 17, 2013

조삼모사 (朝三暮四) 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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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익숙해 더 이상 생각해 보지 않으려는 것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흔하게 알고 있는 사자성어인 조삼모사 (朝四暮三) 가 그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싶다. 단편적이고 흥미가 더 우선이 되는 해석이 더 쉽게 전파되는지 느낄 수 있는 이야기이다. 조삼모사의 이야기는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송나라의 저공(狙公)은 원숭이를 기르는 사람이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숭이를 잘 이해하고 원숭이와 함께 생활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생활이 어려워져서 먹이(도토리)를 줄이기로 했다. 그런데 아침에는 세개, 저녁에는 네개를 주기로 했는데 이에 원숭이들이 화를 냈기에 저공은 이에 고민하다 아침에는 네개, 저녁에는 세개를 주기로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 대한 교훈 혹은 의미를 인터넷에 찾아보면 재미있는 해석이 많지만 거의 대부분은 '원숭이의 어리석음' 혹은 '원숭이의 우둔함' 등과 같이 원숭이 같이 얕은 술수에 속지 말자의 교훈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고 때로는 그렇게 원숭이를 속이는 '기만하는 주인'으로 이야기한다. 대충 모아보면 원숭이처럼 어리석은 사람도, 주인처럼 나쁜 사람 (혹은 자본가)가 되지 말자 정도이다.


그러나 조삼모사처럼 인간의 몰이해를 보여주는 사자성어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더 많은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깊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겉으로 보이는 그리고 해석하고 싶은 내용에 집중하는 것 같아. 어쩌면 인간은 바보같은 내용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보지 않으려 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아래는 개인적으로 느낀 조삼모사의 이야기이다. 공감하는 내용도 있을 수 있고 공감하지 않을 수 있지만, 지금까지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되던 조삼모사에 대한 새로운 시선으로 봐주면 좋을 것 같다.


1. 문제는 이해득실이 아니라 생활양식이다. 

별 고민하지 않고 바라 본다면 원숭이들은 멍청하고 어리석은 존재라고 생각할 것이다. 총합은 동일한데 언제 4개를 주느냐에 따라서 화를 냈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먹을 것은 생존의 문제이다. 가장 기본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가장 빈번하고 항상 겪어야 하는 생활의 양식 (template) 이다. 원숭이 입장에서 아침과 저녁에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한다면 아침에 좀 든든하게 먹고 저녁에 좀 덜 먹어 생활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긴 아침에서 저녁시간 동안 먹이 네개를 취하는 것이 분명 현명한 선택이다. 활동량으로 보아도 저녁에 많이 먹는 것보다 아침에 더 많이 먹는 것이 더 유리하고 이런 생활의 양식에 맞지 않은 저공의 첫 제안은 원숭이에게 불편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숭이가 화를 낸 것은 자신의 생활 양식에 적합하지 않은 것을 거부한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점심은 간단히 먹고, 야식은 먹지 않는다 와 같은 자신이 지키고 싶은 생활 양식이 존재할 때 이를 깨기 위한 다양한 외부의 노력은 그리 좋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런 달콤한 유혹을 즐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원숭이도 마찬가지이다. 그들만의 생활 양식이 존재하고 그에 맞춰 적절한 먹이를 취하고자 한 것이 어리석은 일이었을까? 첫 제안이 조사모삼(朝四暮三)이고 이에 원숭이들이 화를 내어 조삼모사(朝三暮四)가 되어 원숭이들이 기뻐했다고 해도 사실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자연의 섭리에 조금은 맞지 않는 것 같지만 그래도 원숭이들이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2. 원숭이는 타협과 만족을 아는 존재이다. 

원숭이들은 총 7개의 먹이를 저공이 제시했을 때 더 많은 양의 먹이를 욕심내지 않았다. 인간들이 이야기하는 '어리석음'의 판단 기준은 저공이 제시한 첫 제안과 두번째 제안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 착각에서 시작한다. 결국 총합이 중요한 얼마나 얻었는가를 중시하는 물질주의적 관점에서 어리석은 것이다. 인간은 더 많은 것을 챙기지 못하는 것을 어리석음이라 단언한다. 그러나 원숭이들은 저공의 어려운 사정과 상황에 타협하고 7개로 제한된 먹이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인간의 판단에 의해 어리석지 않은 존재가 되려면 원숭이들은 '더 주지 않음'에 대해서 화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원숭이들은 자신들의 생활 양식만 제대로 지켜준다면 양에 대해서는 더 욕심내지 않았다.


인간이라면 더 소유하고 더 욕심냈을 것이지만 원숭이들은 하루에 정해진 양과 저공의 상황 안에서의 최선의 제안을 타협할 줄 아는 존재들이다. 만약 더 많지 않은 먹이에 대해서 화내고 원숭이들 모두가 욕심내었다면 저공은 더 많은 먹이를 주기위해 더 무리를 해야했을 것이고 그에 따라 원숭이들이 원하는 먹이량을 충족시키기 보다는 원숭이의 숫자를 줄이는 방법을 취했을지 모른다. 결국 욕심내지 않고 타협하여 모든 원숭이들이 모두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쓰지도 못하면서 생산하고 그리고 상당수를 쓰레기로 버리는 인간의 모습을 바라볼 때 원숭이들의 선택이 정말 어리석다고 이야기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현명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이 무엇인지 아는 존재라고 해야할까.


3. 저공은 이해심과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다. 

저공(狙公)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숭이를 잘 이해하는 주인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해석처럼 원숭이를 기만하거나 속이기 위해서 조삼모사에서 조사모삼으로 제안한 것이 아닐 것이다. 아마 처음 조삼모사의 제안을 했을 때 저공은 상당히 당황했을지 모른다. 원숭이들이 그렇게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은 원숭이 입장에서 생각하고 원숭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른 제안을 했던 것이다. 만약 저공이 인간미 없는 사람이었다면 화내는 원숭이를 향해 주인으로 가지는 생살여탈권으로 마음에 안드는 원숭이들을 제거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조금 더 원숭이가 원할 수 있는 다른 제안으로 원숭이를 기쁘게 했던 사람이다.


재 자본주의 재벌이나 탐욕적 기업가들은 저공과 같이 상대방을 위한 이해와 고민, 그리고 그에 따라 상대방이 더 필요한 것을 생각해보는 그런 과정조차 고민하지 않는다. 만약 저공이 탐욕적 기업가였다면 자기 편한대로 정하고 처음의 제안조차도 상당히 권위적인 태도로 강행했을지 모른다. 결국 타협하고 합의하려는 입장을 보이는 저공은 비록 원숭이라고 해도 존중하는 마음으로 원숭이를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해심과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번째 원숭이들에게 제안했을 때 저공의 태도는 지적으로 더 우수한 인간이 원숭이를 기만하며 사악한 웃음을 지었던 것이 아니라 원숭이들이 원하는 타협점을 찾았다는 기쁨의 미소를 지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4. 인간의 어리석음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인간의 수많은 어리석음은 여기에서 시작하기 쉽다. 조삼모사의 이야기를 조금만 생각한다면 더 많은 지혜와 우화가 가지는 인간의 속성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인간 - 원숭이의 관계에 집착하게 된다. 사실 이야기에 나오는 원숭이들은 사리 판단을 할 수 있는 놀라운 존재들이다. 하루라는 시간을 통해 자신들에게 맞는 생활 영역을 고려하고 그에 따라 자신들의 의견을 보여주고 그 뿐만 아니라 제한된 상황 안에서 욕심내지 않는 놀라운 존재이다. 그런데 이런 우화 속에서 인간은 '욕심내지 않음'을 어리석음으로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게 된다. 그리고 이를 좀 더 고민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단편적으로 인간의 자본적 욕심을 따르지 않는 원숭이를 바보라 놀린다.


실 우리가 비웃고 우리가 바보라고 부르는 많은 대상에는 우리가 살펴보고 생각해야 하는 우리의 많은 어리석음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너무도 당연하여 더 이상 판단하지 않으려는 구석 구석에는 우리가 얼마나 고민하지 않은 존재인지 보여준다. 그리고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자만에 빠지게 된다.

그 자만의 연장선은 자본주의 가지는 합리적 지성의 무 비판적 사유와 맥락을 같이 한다. 원숭이가 보여주는 타협과 만족으로 공생의 방법을 인간은 대립과 욕망으로 파괴의 방법으로 만들고 그것을 '합리적 경영' 등과 같은 미사려구로 사람들을 멍청한 꼭두각시인 소비자로 만든다.

한번쯤 너무도 익숙한 것들에 대해 낯설게 바라보는 연습을 하는 것은 어떨까?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단편적 이야기가 주는 흥미거리의 지식이 아니라 조금 더 냉철하게 통찰할 수 있는 과정(process)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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