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uly 31, 2013

국격의 시대 - 격(格)에 대한 격한 단상

Leave a Comment
격(格)이란 ─ 마땅한 분수 혹은 품위를 뜻하는 말이다. 격(格) 은 한자로도 "격식 격(格)" 으로 '격'이란 뜻이 그대로 설명하는 자가 순환적인 형태를 가진 단어이다. 쉽게 말해 격(格)이란 단어만으로는 적절하게 격을 이해하기 힘든 단어일지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식처럼 알고 있다. 대부분 어떤 존재가 그 존재의 명예나 평가 (reputation) 을 저하하지 않을 충분한 관습이나 형식 등을 이야기할 것이다. 즉, 격식이란 말은 social rules 혹은 formality 와 같이 사회적 위치에 대한 충분한 평가를 포함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개인에게 있어 격이란 표현처럼 광범위하고 광의적인 것도 없다. 영어로는 standing 이란 표현으로 사회적 지위나 상황, 시대에 따라 계급(class)적 의미를 포함하기도 하고, rank 혹은 grade 와 같이 평등한 인권의 사회에 사는 세상에도 자본이나 다양한 차별적 기준을 통해서 등급을 나누기도 한다. 익숙한 표현이지만 어떤 모임에 맞는 의상 등을 'dress code' 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또한 '격에 맞는...' 을 함유한 표현이다.

이 가지는 사회성에 대해서... 

이처럼 격(格)은 동양의 언어로는 아주 간단하게 그리고 광범위하게 사용되지만, 서양의 언어로는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지만 그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격(格)은 사회적 인간을 위한 표현이란 것이다. 만약 개인 혼자만 사는 무인도라면 스스로 지키려는 인간의 격을 제외한다면 거의 대외적인 관계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스스로의 만족이란 측면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관계에서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생각하는 표현이라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조금 더 생각하면 무인도의 개인이 지키고 싶어하는 인간으로의 격도 결국 사회적 존재로 익숙해진 습관에 의한 것이 아닐까 싶다. 즉, 사회성을 전혀 가지지 못한 인간으로 야생에 자란 사람이라면 그런 격이 지켜져야 한다고 필요성을 느낄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백악관 내부 만찬

국 격(格)을 따지기 위해서는 격을 따지려는 주체가 가지는 관계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 인간의 관계는 항상 경계에 서 있는 자아를 설정해야 한다. 즉, 격의 문제는 결국 격의 주체가 되는 대상과 그 대상의 외부에 놓인 세상(surrounding) 에 대한 구분과 그에 적절한 '꾸밈(adornment)'과 '차림(dress)'의 노력이다. 인간은 경계에 서 있지 않는다면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지 확인하지 못하는 생명체이다. 즉, 경계의 변화를 통해서 비교할 수 없다면 격을 따질 이유도 없단 것이다. 경계에 놓이지 않은 존재에게 격의 문제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소위 '우물 안 개구리'는 관계 안에서 무엇을 배우고 습득한다는 의미보다 경계에 놓이지 않아 스스로의 격을 차릴 필요가 없는 경계에서 벗어난 존재를 말할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명확하고 더 이상 구별할 필요없는 사회 속에 동화되어 더 이상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이나 호기심보다는 안정적인 생활의 반복 속에서 만족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물 안 개구리'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갈등과 사회적 관계의 필요성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때로는 우물 안 개구리가 가장 좋은 천국이 될 수도 있다.

국가의 격(格)을 따져 국격(國格)이란 말을 사용한다. 국격에 맞지 않은... 국격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지만 앞서 설명한 격에 대한 이해를 통하자면 국가와 국가라는 경계 안에서 각 국가가 가지는 관계 속에서 적절한 지위와 품격 혹은 적절한 태도를 의미한다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이 아닌 무생물에도 격을 따질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생각이다. 인간의 다양한 공동체는 개별의 인간 이외 단체에 대해서도 개별 인간과 비슷한 사회적 정체성 (identity)를 부여한다. 이런 예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단법인, 법무법인 등과 같이 법인(法人)이란 법이 해당 단체에 정체성을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법인도 한 개인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대표성을 가지고 그 대표성은 그에 적절한 인격적 권리와 의무가 법의 테두리를 통해 보장된 예이다.

따라서 확장된 범위로 국제 사회가 인정한 국가도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은 억지스러운 주장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국격(國格)은 어떤 것이어야 하고 어떤 논리와 전략으로 세계의 다양한 국가들과 관계를 가져야 하는 것이 바람직한 모습이 될 것인가? 국가에 대한 직접적인 모습을 찾기 어려우니 격(格)을 논하는 오래된 기록들로 잠시 돌아가 생각하고 싶다.

에 대해서 격해본다... 

관계(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격(格)이란 중요하다. 격에 대한 내용은 공자의 예기(禮記) 를 통해 먼저 살펴볼 수 있다.

言有物而行有格 - 언유물이행유격 : 말에는 실체가 있어야 하고 (내용이 있어야 하고) 행동에는 격이 있어야 한다. 즉, 말에는 실체가 있어 맹목적 발언을 하지 않고 그 말을 통해 군자는 행동하는 데 있어서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격이란 우리가 생각하듯 품위나 위치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말에 책임지고 불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인격이란 말도 상당히 최근에 나온 말이다. 소위 personality 를 생각하기 전에 person in a society 를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개인의 삶과 활동이 보장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다. 농노나 노예 들에게 개인이란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는데 그 개인을 바탕으로 인격이란 말이 나오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공자의 이야기를 통하면 격이란 행동에 관한 이야기이다. 행동에는 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격은 흔히 격식, 품격 등과 같은 단어로 의미가 전달된다. 그러나 이 또한 해야할 행동과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때와 장소에 맞게 처신한다는 의미에서 앞에서 이야기한 격의 원래 의미와도 통한다고 할 수 있다.



런데 어느새 이런 격이 사람과 만나 인격이 되고, 나라와 만나 국격이 되면서 마치 '자존심'이란 뜻으로 변질되어버린 것 같다. 개인의 자존심, 국가의 자존심처럼 행동에 격을 포함하여 행하는 것이 중심이 아니라 격에 맞지 않는다면 '하지 말아야 하는' 내용으로 의미가 강해진다. 물론 하지 말아야 할 적절하지 못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 ─ 격이 없는 행동 ─ 을 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자존심의 개념이 되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것인데 감정적 이유로 일부러 하지 않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감정적 이유로 행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은 격을 핑계삼아, 격의 진정한 개념을 포기한 '실체가 없는 말'이나 뭐가 다르겠는가.

공자는 격에 대해 다른 표현으로 말씀하셨다. 공자의 논어의 위정(爲政)편 을 보면...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 (나라는) 덕으로 이끌고(혹은 길을 만들고) 예로 다스려야 한다. 이에 (백성들은) 염치를 알고 격을 찾는다. 

나라가 덕과 예를 통해 다스려 백성들은 무엇이 잘못된 길이고 무엇이 옳은 길인지 본보기로 찾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알게되어 백성들도 격을 구해 바르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국가는 격을 요구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백성들이 스스로 격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솔선수범하는 것이다.

국가가 국민들을 향해 폭력을 사용하며, 잘못된 권력의 남용과 사적 이익을 위해 국가의 세금을 낭비하는 짓을 하면서 국민들에게 격을 차리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오답표를 제시하며 100점을 맞으라고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국민과 대립하여 "국민이 폭력적이다. 국민이 어떻다 저렇다" 이야기하기 전에 제대로 된 격을 보여주지 않은 자책을 해야 마땅할 것이다. 국가가 찾아야 하는 것은 격이 아니라 덕(德)과  예(禮) 이다. 국가의 격을 챙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는 국가가 덕과 예를 다한다면 백성들은 스스로 염치를 알고 (쪽팔림을 알고) 격은 자연스럽게 찾아지는 것이라 한 것이다.

렇다면 덕(德)과 예(禮)는 무엇일까... 

지금 시대에 비추어 본다면 덕(德)은 연민이고 예(禮)는 정의가 아닐까 생각한다. 덕이란 국가가 마땅히 연민을 가지고 항상 자신들보다 어려울 수 밖에 없는 국민들을 향해 측은(惻隱)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예란 마땅히 서로 같이 살기 위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의로운 시비(是非)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비싼 비단 옷을 입어도 길거리에 굶어 죽어가는 사람을 보며 측은의 마음을 가져 비단 옷이 더러워져도 배고픔의 고통 속에 있는 인간에게 내미는 온정을 보고 격에 떨어지는 일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격을 핑계로 덕을 죽이는 것이고, 보이지도 않는 격을 위해 눈 앞에 당장 보이는 인간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격은 무엇일까? 


"명한 머리를 가지고 법률 고관이 되어 억울한 일을 당해 법에 호소하는 사람들을 두고 자신의 명석함에 비하면 별 것 아닌 일이지만 억울함을 없애기 위해 도와주는 것을 보고 격에 떨어진다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격을 핑계로 예를 죽이는 것이고, 보이지도 않는 격을 위해 눈 앞에 당장 보이는 인간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인간의 상처보다 더 강력한 격은 무엇일까? 

국가의 자존심은 필요할 지 모른다. 그러나 그 자존심이 좋은 말로 국격이 국민들의 생명과 국민들의 고통을 전제로 성립되어야 한다면 그 격은 덕과 예를 죽여 만든 거짓 격일 수 밖에 없다. 덕과 예를 버리는데 국민들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따를 수 있겠는가.

시 경계에 서서 격을 생각하자... 

대한민국은 격이란 뜻을 자존심이라 생각하며 대외적인 외교 정책, 특히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서 격을 차리려 한다. 그리고 격에 맞지 않는다 하여 개성공단에서 철수해 사실상 조업 중단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 경계에 서보자. 누가 가장 경계에서 고통받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개성 공단의 기업인들은 그들의 경제적 상황 뿐만 아니라 다시 앞날이 보이지 않는 아픔을 겪고 있다. 국가는 그들에게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개성 공단을 수년간 꾸려온 기업인들은 분명 국민이다. 그리고 그들의 썩어들어가는 마음과 아픔에 대해서 얼마나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그런데 그 앞에서도 국가는 격을 챙기고 있다. 그리고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제대로 된 사법적 판단보다는 외압과 정치 논리로 자신들의 사익을 챙기기에 무엇이 정의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렇게 법의 테두리 안에서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억울함의 눈물을 흘려도 신경쓰지 않는다. 덕도 없고 예도 없다. (空德不禮) 그런데 어떤 격식을 챙겨 국가의 위상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국가에 국민은 죽어가고 억울한데 국가는 격식에 맞게 금빛 휘장을 두루고 자랑한다. 그런 빈 국가를 두고 대한 가 (Magnus Nationality) 이라 누가 부를 수 있겠는가.


가의 경쟁력은 국가의 가치는 덕과 예를 구하는데 있다. 국가가 국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덕을 행하고, 억울한 아픔을 보듬어서 예를 행한다면 경제적 이득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국가는 수익 구조를 만드는 기업이 아니다. 국가의 가치는 국민을 연민의 마음으로 감싸고, 정의의 이름으로 지키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외국인 친구들은 분단과 휴전이라는, 유일한 분단 국가의 상황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친구들이 있다. 분단을 이 시대에도 겪고 있는 유일한 민족으로 가장 큰 동기부여가 되지 않느냐는 이유때문이다. 극단적, 대립적 정치, 경제 체제이 존재하는 한반도는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 어떤 정치, 경제 시스템이 더 도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학문의 살아있는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예로 만약 어떤 사람이 백신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백신이 부족해 영유아 사망률이 높아지는 북한의 현실을 보면서 그들에게 보급될 수 있는 저렴한 백신의 개발이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보통신 기술은 정부 차원이 아닌 민간인의 활발한 교류를 위한 소통의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지극히 대립적인 그래서 때로는 갈등과 불안의 요소로 존재하는 경계에 서 있는 한반도에 사는 대한민국 국민이 연민의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다양한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다. 단순히 자본이 목적이 아닌 이처럼 좁게는 민족, 넓게는 인류를 향하는 연민의 마음은 충분한 가치를 만들어 준다.


남북 대화를 하나의 자존심 싸움으로 보고, 누가 잘했네, 잘못했네 공방만 하는 모습을 보면 그 어디에서 덕을 찾고, 예를 구할 수 있을까. 국가는 격을 찾기 전에 국민들의 생명과 아픔을 위해서 덕과 예를 먼저 구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단순히 개성 공단의 문제 뿐만이 아니라 사실상 더 시급한 이산가족의 문제는 얼마나 급한 문제인가. 이별의 아픔과 분단의 아픔을 왜 국가의 격으로 더욱 더 깊은 상처를 만들고 씻을 수 없는 고통을 만들려고 하는 것인가. 왜 국가는 그들의 눈물을 국격이란 색안경을 통해 보면서 보이지 않는다 이야기하려 하는가. 자존심을 세우며 국가의 격을 찾으려 하는 것은 경계에서 벗어나 문제의 중요성도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우물안 개구리가 되고 싶단 비겁한 모습일 뿐이다.

격(格)찾고(尋) , 심(心)막지(隔) 않기 바랄 뿐이다. ─  尋格 隔心 (심격 격심)

0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