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수도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냐고... 사실 어떤 직업의 기능적 설명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수 있어도 본질적 의미를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때가 많다. 조금은 넓은 의미로 불교의 스님들이나 많은 종교의 수도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살펴볼 때 정말 그들이 어떤 의미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해주는 것은 어렵기에 항상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데 조금은 읽은지 지난 책의 한 부분이 떠올랐다. 사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그 부분이 내 머리 속에서 두둥실 떠다녔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같다.
애태타가 어떤 주장을 내세운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는 항상 타인들과 화합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는 군주의 지위도 없고, 타인의 배를 채워 줄 수 있는 재산도 없으며, 게다가 그의 추함은 이 세상을 놀라게 할 정도이다. 타인과 화합할 뿐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으며 그가 아는 것도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국한된 것인데도, 남녀들이 그의 앞에 모여들고 있다.
— 「장자, 덕충부」
애태타는 세상 사람들이 선호하는 미의 기준으로도 추한 편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도 않고 권력도 정치력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맞이한다는 것을 형상화할 때 항상 그리는 그림이 있다. 마치 故 김광석의 '너에게' 의 가사처럼...
♬ 나의 정원을 본적이 있을까 / 국화와 장미 예쁜 사루비아가 /
끝없이 피어있는 언제든 그문은 열려있고 / 그 향기는 널 부르고 있음을
누군가를 맞이해줄 정원을 꾸미는 것처럼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은 마치 정원을 꾸미는 일 (※ 정원 일의 즐거움: 헤르만 헤세) 처럼 누가 올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손이 가고 신경써야 하는 일이지만 누군가 내 정원의 영역에 왔을 때 기쁨을 간직하고 돌아가기 바라는 그 마음이 바로 사람을 내 마음으로 초대하는 마음이라고 형상화한다.
누군가를 (정원이든 마음이든) 초대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자신을 먼저 보아야 하는 것이다. 안타갑지만 깊은 내면의 성찰이나 혼자만의 고독으로 자신을 알기란 너무도 어렵다. 그래서 같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 우리는 다른 이를 거울삼아 나 자신을 바라보려고 한다.
문제는 내가 바라보는 거울이 더럽거나 제대로 반사하지 못해 나의 진짜 모습이 아닌 왜곡된 모습을 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 누구도 자신의 모습을 보려고 흐르는 강물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려고 하지 않는다. 맑고 고요한 그리고 멈추어 잔잔한 물에 비추어 일그러진 모습을 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아마도 수도생활은 누군가를 맞이해 자신이 열심히 가꾼 정원에 초대하여 그 정원에 담긴 맑고 잔잔한 물가에서 우리들이 자신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정직하게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비유가 얼마나 수도생활의 본질에 가까울 수 있는지 어쩌면 전혀 잘못된 본질을 전달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되지만 그래도 수도생활은 분리되고 격리된 요소가 아닌 우리의 삶에 맑은 거울과 같은 존재는 아닐까 싶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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