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ugust 16, 2013

정치와 학문은 다르다. ─ 새정치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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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없는 주주의의 간적 처들” ─ 최장집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연례행사와 같이 대선에 맞추어 나오는 많은 시즌용 책이란 편견을 가지고 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나 책을 모두 읽었을 때 세상에는 같은 현실을 바라보아도 이야기하는 방법은 달라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간단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현실의 문제를 바라볼 때 현실 당사자들이 느끼는 현실, 관찰자들이 바라보는 현실, 방관자들이 지나치는 현실 그 모두가 다 다른 현실이라는 점이다. 학자는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과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과학이란 원리 안에서 우리에게 유익한 무엇인가를 찾아내어 그 원리를 파악하고 그 원리의 보편적 진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만의 리그 (their own leagues) 같은 폐쇄된 학문은 결국 과학을 잘 이해하는 집단과 과학에 무관심한 집단을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학자는 과학과 현실이라는 경계면에 적극적으로 나와 과학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도 과학이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는 사실에 대한 공유를 적극적으로 해야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경제학을 업으로 삼는 학자에게 이 시대의 현실을 보는지에 대한 생각은 무척 중요하다. 특히 자본과 욕망의 극대화를 통해 인간은 구조적인 억압을 받아오고 있는 순간에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고 자본에 의해 인간의 생명이 죽는 현실을 언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지금의 현실이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장집 교수는 그런 현실에 대한 잔잔한 이야기들을 전한다. 본인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이고 어쩌면 책으로 언급하지 않았다면 전혀 상관하지 않아도 사는데 별 지장이 없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 말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만 전했다면 아마 그 이야기는 학자의 이야기가 아닌 기자의 이야기 혹은 어떤 블로그 운영하는 사람의 이야기로 끝날 것이다.

자의 역할에 대해서... 

그러나 학자는 다르다. 이야기가 전해주는 인간의 소외, 비참함, 그리고 아주 기본적인 수준으로 바라보면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 왜 이런 현실이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 구조적인 특히 정치경제학이 제시할 수 있는 이론과 때로는 추론으로 이야기를 전한다. 상당한 통찰력과 때로는 비슷한 현실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개인적으로 보지 못했던 빈틈같은 원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전해준다.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흘러가는 이야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형이하학적 현실만을 그대로 전하지 않는 책의 내용에 한동안 세상을 바라보는 좀 더 다른 시각을 가져야 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노동의 가치와 인간의 소외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비교적 노동의 슬픈 현실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조차 정말 세상은 얼마나 관심깊게 바라보냐에 따라서 많은 것이 보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 지식인의 역할은 눈에 화려한 것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화려함 속에 보이지 않는 부조리와 위험의 요소를 찾아 말하는 것이다. 화려함을 찬양하는 지식인은 강도보다 더 경계해야 한다. 강도는 호주머니 돈만 훔쳐가도 눈먼 지식인은 당신의 머리마저 훔쳐가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이야기해주는 것은 학자가 가지는 가장 매력적인 역할이 된다.

An Old Scholar ─ Koninck Salomon

책에 대한 감상은 잠시 끊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서 작년 대권 주자였다 야권 통합을 위해 양보한 안철수 의원 (2013년 8월 현재) 이 조직한 내일 포럼의 이사장 직을 최장집 교수님은 사퇴하셨다. 처음 최장집 교수님을 삼고초려가 아닌 십고초려를 해서 수락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알 수 없는 작은 설레임을 가진 기억이 난다. 비록 안철수 교수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를 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정치를 새롭게 바꿀 수 있는 인물이 되기에는 충분할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안철수 의원이 현실의 통찰력이 멋지기에 학자의 역할까지 생각하게 만든 바로 '그 분'을 모셔간다는 사실. 그리고 그렇게 되어 최장집 교수님이 생각하는 현실적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정치적 힘을 안철수 의원을 통해 얻을 수 있다면 노동 문제로 눈물 흘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때문이었다.

반대로 포럼의 결성 초기부터 사람들 중에는 곧 헤어질 것이다. 마치 세기의 결혼식에 모여 두 사람이 언제 이혼할까 예상하고 내기하는 야바위 꾼같은 사람들이나 언론들도 있었지만 그들이야 현재의 결론만을 보며 자신의 예지력이 뛰어나다 자평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시선 속에는 항상 세상이 좋게 변할 수 있는 변화의 희망이 아니라 흥미거리가 될 가쉽 정치가 필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냉소적인 분위기에도 이론적 그리고 학문적 철학이 만들어가는 포럼의 성격만큼 안철수 의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정치 세력이 탈 정치화하여 무엇을 고민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 하나의 예가 된 것이 아닌가 싶어 다소 씁쓸하다.

인간인 자본주의의 구조 안에서 억압받게 되고 그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영속(永續)을 위해 어쩔 수 없는 희생 (collateral damages) 인지 아니면 자본이 인간의 시야와 판단을 흐려 놓아 만들어진 탐욕의 결과 (a fruit of greed) 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런 학문적 근거를 최장집 교수님을 비롯한 포럼 사람들이 중지를 모아 지혜를 제시하고 그 지혜에 맞춰 최대한 현실 정치에 적용하려고 노력하고 그게 어렵다면 조정하는 과정을 슬기롭게 하는 하나의 정치적 두뇌집단 (political think tank) 이 되기를 바랬던 것 같다.

현실적으로 아무리 이론적 배경과 논리를 제시한다고 해도 지금 고통받고 있는 많은 노동자들을 완벽히 대변해주어 노동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 발전과 자본주의의 결합 속에서 인간이 그리고 인간의 노동이 어떤 처우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에 집중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런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최장집 교수를 모셔왔을 것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새정치를 외치는 것에 대해서 불만이 없다. 새정치가 아닌 착한정치, 최강정치, 최고의 정치, 너의 정치가 들려 ... 등 뭐라고 부르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외적으로 표명하는 정치적 철학과 정치적 행보는 일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십고초려를 해서 모셔왔다면 분명 최장집 교수님의 정치경제학적 철학에 많은 공감을 하고 있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읽은 책이라 보여주었다. 그만큼 앞으로 가야할 정치적 방향에 대한 기본적인 철학을 공개한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안철수 의원의 정치적 행보는 노동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지금 현재 노동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얼마나 힘든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본의 탐욕적 구조에 의해서 많은 고통을 받고 있는지 직접 가서 보고 살펴야 한다. 여기에서 학자와 다른 정치인의 역할을 생각하게 된다. 학자는 때로는 뜬 구름 잡는 이야기에 즐거워하며 현실과 떨어진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 그런 부류이다. 그러나 정치는 철저하게 현실의 직업이다. 현실을 등지고 정치를 하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노동의 가치를 생각하는 정치를 말하며, 최장집 교수가 이런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보 정당이 필요하다는 입장에 동의를 했다면 최소한 노동자들을 살피는 정치 행보를 걸어야 했다.

언론 기사를 통해 살펴보면 안철수 의원이 노동문제로 고통 받는 사람을 찾은 것은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을 찾아간 작년 10월쯤이다. (대선 이전 10월에 집중되고 올해 2013년의 행보는 쉽게 찾기 어렵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집회에 노동자들이 고공 농성할 때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얼마나 달려갔는가 싶다. 심지어 노동 문제를 떠나 국민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여러가지 시국 문제로 국민들이 모여 촛불을 밝히는 순간에도 안철수 의원은 휴가를 떠나며 휴가에서 어떤 책을 읽을 것인지 밝혔다. 물론 정치인이라고 집회나 노동자들의 투쟁, 억압받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선 이전, 이후 가까이는 보궐선거 전후로 해서 민심을 찾아다니는 모습의 가시적인 모습의 차이는 개인적으로 참 실망스러웠다.

2012년 10월 24일 안철수 당시 무소속 대선 후보의 방명록 ─ 출처: 이명익 (@myung2gi) 님 트위터

문제는 노동의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하려고 학자를 모실 그 정성으로 진짜 노동자들을 찾아가 그들이 무엇이 필요한지 직접 들어보려는 노력이 그리도 어려웠냐는 것이다. 혹시나 남몰래 물 밑에서 열심히 노동자들을 위한 정치를 펼치나 싶어 노동 현장에 있는 분들에게 물어보아도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고 설령 그런다 하더라도 정치인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정치 활동을 알릴 의무가 있고 자신은 열심히 했는데... 라며 변명하는 것도 적절하지 못하다. 정치인은 복지가가 아니다.

동의 문제에 얼마나 관심을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그 관심이 강했다면 정말 그 현실의 주인공인 노동자를 찾는 것이 정치적으로도 학문적으로도 필요한 일이라고 믿는다. 어떻게 노동자들을 살피지 않고 노동이 중심이 되는 정치를 한다고 할 수 있을까? 비행기에서 티내며 읽었던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을 통해 그저 머리로만 이해하는 정치인이라면 차라리 새정치란 그 부끄러운 구호 (catchphrase) 를 말하지나 말았으면 좋겠다. 새정치의 본질이 무엇이고 정치의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 강령인지 이젠 솔찍히 관심도 없다. 마치 객관적 관찰자인 듯 양비론으로 모두가 잘못되었다 말하기 전에 노동자의 진지한 이야기를 공감하며 들어주기 바란다.

출처: SBS

여전히 오랫동안 회자되는 안철수 의원의 모 텔레비젼 프로그램에 나와 했던 이야기가 기억난다. 동정 (sympathy) 와 공감 (empathy) 에 대한 구별을 하던 모습이다. 정말 묻고 싶다. 안철수 의원은 노동자들을 동정하는지 공감하는지... 그리고 도대체 무엇을 위해 정치를 하는 것인지... 옳은 말을 하는 정치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을 위해 행동하는 정치인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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