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어느날 뷔페 식당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인 '다양한 선택'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먼저 이것이 정말 다양한 선택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식욕을 위해서 맛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라는 불안한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쯤 문득 뷔페 식당의 구조는 마치 현대 사회의 직업 시장 (jobs market) 과 비슷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겉으로는 시대가 발전하고(?) 다양한 인간의 욕구가 생기며 다양한 직업이 생겼다고 말하지만 정작 한 개인 (individual) 이 바라보았을 때 가지는 직업의 의미도 마찬가지로 다양화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비유의 시작
구조적 유사성 (structural analogue) 을 찾기 위해서, 즉 처음 들었던 의문 ─ 뷔페 식당이 직업 시장과 비슷한가? ─ 을 생각하기 위해서 뷔페 식당의 구성요소가 직업 시장의 어떤 구성요소와 비유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친숙한 뷔페 식당의 모습을 통해서 조금은 큰 규모이기 때문에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직업 시장의 특징을 살펴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조금은 어색할 수 있어도 비유의 대상을 연결해보는 것 (metaphorical matching) 이 필요할 것 같다.
A. 뷔페 식당 입장 ─ 자격 조건 (requirements)
어떤 곳이나 구인을 할 때 (position open) 적절한 조건을 갖춘 사람을 요구하게 된다. 자격 조건에 맞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 자격 조건 (requirements) 라고 한다. 병원에서 환자를 보는데 의사 면허가 없다면 이는 법적으로 문제가 되기 때문에 이런 자격증이나 면허 등은 직업을 선택하는데 있어 조건이 된다. 이밖에도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많다. 학력, 경력 등 직업의 조건과 특성에 따라서 요구하는 조건은 달라지게 된다. 뷔페 식당도 사실상 마찬가지이다. 우선 경제적인 조건, 식사비를 지불 할 수 있는가가 우선적인 조건이 될 수 있지만 이밖에도 비경제적인 조건도 고려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특정 드레스 코드 (dress code)를 요구한다던지, 회원제로 운영하기 때문에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다는 것과 같이 직업 선택의 조건과 비슷하게 다양한 조건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듯이 비싼 가격을 요구하는 곳일수록 까다로운 조건이 붙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자본주의에서 가격 자체가 가장 까다로운 조건이 된다는 것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어느정도 비례해서 가격과 식당에 들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의 가격, 질, 종류 등도 더 좋을 것이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싼 가격을 지불하고 갔는데 제공되는 음식이 김밥, 떡볶이라면 사람들은 가려하지 않을 것이다. 직업 시장이 원래부터 이런 구조였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지금의 구조는 대체로 특정 뷔페 식당에 들어가기 위해서 (구체적인 직업이 선택되기 전에) 조건을 맞춰야 하는 구조이다. 즉, 구직을 위한 조건을 맞추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은 그 조건을 맞추기 위해서 시간, 경제적 투자를 해야 하는 것이다.
B. 선택할 수 있는 음식 ─ 직업 (job)
결국이 직업은 생계를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식당에서 먹는 음식과 기능적으로는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일단 뷔페 식당에 들어가고 자신이 원하는 음식을 마음껏 선택할 수 있지만 맛이 없으면 더이상 안 먹고, 때로는 음식 하나에 집중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가지 음식만 먹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지만 그런 다양한 시도에는 그만큼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실패도 존재할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뷔페 식당에서는 여러번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지만 시도할 수 있는 그릇의 수가 세번 정도라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에 더욱 더 신중을 기하게 될 것이다.
가장 어색한 비유이긴 하지만 그래도 강조하고 싶은 핵심은 바로 우리가 정할 수 있는 직업은 생각보다 상당히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뷔페 식당의 음식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한정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이라면 더욱 더 선택의 폭은 줄어들게 된다. 즉, 직업의 종류는 다양해지고 직업의 숫자는 늘어난다고 해도 문제는 개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뷔페 식당에 입장한 손님 한명)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의 수는 이미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직업은 이미 만들어진 상태이다. 내 입맛에 따라 소스를 가미하거나 거부하는 음식재료를 빼낼 수 있어도 음식 자체를 자신이 원하는대로 설계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미 음식은 다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은 직업들은 '기성품'이다. 더 좁은 의미로 보면 사회의 요구나 자본이 필요한 생산을 위한 수요를 채우기 위한 기성품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뷔페 식당에 입장한 입장에서 아무리 원하는 것이 없다고 해도 선택하지 않으면 식당을 나가야 할 것이다.
C. 식재료 (ingredients) 는 무엇일까?
직업을 생각하는 하나의 시선이 필요하다. 직업은 개인의 능력을 최대화 할 수 있는 업무를 통해서 사회가 필요한 생산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인지, 아니면 이미 사회가 원하는 생산품은 정해져 있고 그 정해진 생산 과정에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인간 (의 노동) 이 추가되어야 하는 것인가? 의 물음이다.
이미 직업 시장을 뷔페 식당으로 비유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개인적으로 지금 현재의 직업 시장은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즉, 인간의 노동은 생산에 필요한 하나의 규격화된 (standardized) 자원이지, 주어진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창의적 주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한가지 질문을 하게 된다. 뷔페 식당에서 선택할 수 있는 음식이 직업이라면 식재료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즉, 직업 시장에서 식재료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이다. 이 부분에서 많은 고민을 할 수 있다. 가장 먼저 식재료이기 때문에 사회적 요구에 필요한 자원 (resource) 를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자원이란 우리가 직업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직업을 통해서 사회적 필요성이 있는 상품 / 서비스를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에 자원은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 느껴진다.
그렇다면 식재료는 무엇일까? 음식이 직업이라면 식재료는 직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재료이다. 그리고 재료는 상당히 기본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보인다. 즉, 재료가 한정되어도 음식의 종류는 상당히 다양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 우리가 접하는 음식의 종류가 적은 것은 일반적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직업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대중적으로 알려진 조리법 (recipe) 가 아닌 창의적인 방법으로 요리를 해서 새로운 요리가 만들어진다면 재료는 같아도 전혀 다른 음식이 만들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다양한 직업을 만들 수 있는 식재료와 같은 것은 무엇인가?
이 부분이 가장 중심이 되는 생각이라고 본다. 개인적으로 식재료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소위 대학의 학문을 포함하여 다양한 철학, 과학, 신학 등 다양한 인간의 지적 활동, 그리고 그 결과물들이 바로 식재료가 아닌가 생각한다. 학문적 개념들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어 보일 때도 있다. 물론 학문 자체로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이는 식재료가 요리로 만들어지면 전혀 새로운 맛과 경험을 제공해주지만 필요에 따라서 식재료 그 자체도 좋은 음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의 복잡한 요구, 특히 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문제들의 해결책을 위해서 학문은 다양한 시도를 통해서 사회가 요구하는 요리를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인구가 급증하는 문제를 발견하고 농업과 생명과학이라는 식재료를 통해 대량 생산이 가능한 유전공학을 만들어 냈고 이를 위해 유전공학자라는 음식을 먹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만든 것이다. 도시가 복잡해지고 원할한 통신이 요구되자 물리학과 기계공학 등 다양한 식재료를 통해 통신 전문가를 만들었다.
이처럼 직업의 창조는 결국 기초학문부터 시작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지적 호기심에서 시작했던 수많은 학문들의 조합과 통합, 때로는 분리 (마치 달걀 노란자만 사용해 요리하듯) 를 통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 나라가 양질의 직업을 추구하면서 기초학문을 등안시 하는 것이 얼마나 사상누각(砂上樓閣) 의 결과를 만들어 낼지 예상할 수 있다.
직업을 구하기 위한 대학 교육의 암울함
대학이 학문 자체가 아닌 직업을 위한 직업 교육의 전초 기지가 될 때 직업의 다양성은 줄어들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사회적 심각성은 이뿐만 아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직업은 사회적 문제 ─ 환경 문제, 인구 문제, 교통 문제 등 ─ 가 발생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그 필요성이 부각되고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다양한 학문적 참여를 통해서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공학적, 기술적 문제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한가지 학문적 영역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그 부작용은 심각하게 크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대부분의 나라가 전기,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원자력 발전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고 이를 위해 물리학, 기계 공학자, 토목 공학자 등 다양한 기술적 합의가 이루어지고 원자력 발전은 인류에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을만큼 안전한 방법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 순간 인문학자 특히, 이를 반대하는 많은 사회 경제학자나 방사능의 위험을 경고하는 의학자들의 의견에 조금 더 귀를 귀울였다면 문제 해결 방법은 달라졌을 것이다.
즉, 우리가 지금 만들어 놓은 직업이 최선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적 오만이다. 원자력 발전을 위해 원자력 공학자, 원자력 발전소 직원들, 핵방사능 안전 관리사 등과 같은 다양한 직업이 생겼지만 정작 이것이 인간의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는지는 적절하게 질문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음식을 만들기 전에 적절한 식재료가 갖추어졌는지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자력 관련되어 생각나는 비유적 예가 하나 생각난다. 열대 지방의 두리안이란 과일이 있다. 그냥 먹기도 하지만 그 특유의 고약한 냄새 (시체 썩는 듯한 냄새) 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다. 그런데 이 두리안으로 샐러드를 만드는 요리가 있는데 이 요리를 먹을 때 주의점은 맥주와 함께 먹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열을 내는 두리안의 성질과 맥주의 성질이 합쳐져 심장질환을 악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 열을 내리는 성질의 식재료를 같이 섞어야 한다. 이처럼 잘못된 식재료의 선택, 편중된 식재료의 선택은 오히려 인간에게 독이 되는 직업을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원자력 관련된 직업이 독이란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그러나 원자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너무 기술 공학적 접근, 개념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 경제학, 의학적 접근을 가미한 직업적 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의 내용 ─ 과일 소스 탕수육인가? 토마토소스 탕수육인가?
직업은 앞서 말한 것처럼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인간의 노동력이 결합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요구라는 점이다. 사회적 요구는 너무 광범위한 개념이 될 수 있지만 좁은 의미에서 수요이다. 그렇다고 경제에서 얘기하는 수요만으로 국한되는 것은 또 아닐 것이다. 즉, 인간 활동에 필요한 모든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인간의 활동을 나타내는 명찰같은 것이다. 즉, 직업이란 일 자체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실질적인 일의 행위는 우리는 다른 말로 부른다. 바로 '노동'이다. 당신 직업이 무엇이냐? 라고 물었을 때 대답하는 직업은 실제로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는 변호사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때 이는 그 사람이 하고 있는 노동의 내용 (contents of labor) 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변호사는 억울한 사람들의 인권을 위해 싸우는 '인권 변호사'일 수 있고, 어떤 변호사는 악덕 기업가의 검은 돈을 비호하기 위해 일하는 '잘 나가는 변호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둘 모두 사회적 요구를 해결하기 위한 수요에 의한 것이라는 것은 동일하다. 억울함에 호소하는 사람들의 수요도 있지만 분명 검은 돈을 지키기 위한 비리 집단의 수요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요란 상당히 가치 중립적이다. 그 수요를 어떻게 쓰냐에 따라서 달라질 뿐이다. 따라서 직업은 노동의 내용에 따라 달라지고, 노동의 내용은 수요의 성격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인권 변호사가 되어도 비리를 위해서는 일하지 않으려 하는 것인가? (물론 둘다 모두 하는 변호사도 있을 수 있다...)
뷔페 식당으로 다시 돌아오면 어떤 식당에서는 탕수육을 과일 소스로 만들어 내놓지만, 다른 식당은 토마토 소스로 만들어 내놓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탕수육이라 부를 것이다. 이처럼 뷔페 식당에 놓여지는 일반적인 이름은 탕수육이라 불리워져도 맛과 질은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직업이란 입장에서 볼 때 변호사란 직업은 같지만 노동의 내용이 달라지는 것은 바로 식재료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식재료가 달라진다는 것은 어떤 학문의 내용을 바탕으로 노동을 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어떤 변호사는 인권에 대한 책과 인간의 가치에 대한 깊은 고뇌를 했을 수 있고 어떤 변호사는 자본의 가치 그리고 성공의 중요성, 돈, 권력에 대해 공부했을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것을 배우고 익혔는가에 따라서 직업은 같아도 노동의 내용은 전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식재료를 중요시 여기는 사회
음식이 맛을려면? 이란 질문에 거의 대부분의 요리사들은 "식재료가 좋아야!" 한다고 말한다. 식재료가 좋으면 그 자체가 훌륭한 요리가 된다고 자주 듣는다. 사회적 요구가 가장 많은 부분은 의외로 간단하다. 인간의 많은 문제들은 인간의 근본적 문제조차 헷갈리기 때문이다. 자본에 밀려 길거리로 내 쫓아질 때 인간은 고민하게 된다. "인간은 정말 자본보다 우선시 될 수 없는 것인가?", "인간의 생존권은 어디까지 인정 받아야 되는 것인가?" 이런 근본적인 질문들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 사회에서 요구된다. 물론 이런 질문이 필요없는 집단들도 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돈과 권력으로 타인의 생명과 인권을 제거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고민은 사치일 뿐이다. 이들의 직업은 무엇인지 중요하지 않다. 결국 이들이 행하는 노동의 내용은 '인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라는 아주 중요한 식재료는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섭취하지도 않았고 결국 그런 내용이 무엇인지 필요성조차 느끼지 않는 것이다.
우리 시대 인문학은 사라진다. 대학은 취업이 되지 않는다고 학과를 통폐합하고 없애기도 하며, 모든 대학의 평가 기준은 대학 졸업 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가지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좋은 뷔페 식당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조건을 맞춰주기 위해 개인의 특성이나 개인에게 필요한 학문적 수요는 제공하지 않고 자본과 생산에 필요한 조건만을 맞추도록 강요한다. 그 누구도 아닌 대학이 말이다. 이런 대학의 미래에는 별 희망이 없다는 것에 오백원 건다. 문제는 대학이야 자멸하면 그만이지만 그 대학을 나온 학생들은 얼마나 슬픈 존재가 되는 것인가. 인문학이란 바로 이런 인간의 사회적 요구, 특히 일시적인 것이 아닌 지속적이고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문제를 풀기 위한 다양한 시도이다.
인간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다시 말해 인간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해 조금 더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등을 조금이라도 줄여가려는 그 노력이 심리학을 만들고 신학을 만들고 심지어 신경학 등과 같은 다양한 직업군을 만들어 갔다. 따라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어떤 직업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식의 직업 교육은 개인적으로 반대이다. 어린 아이들일 수록 이미 만들어진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다양한 식재료가 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시선에서 어린 나이부터 연기 수업이나 연애인을 지망하여 직업 세상에서 일찍 뛰어드는 것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다. 왜냐면 자신이 능력이 아무리 연애인에 잘 맞는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자신의 능력이 최대로 발휘되어 만들어지는 노동의 내용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떠오르는 예는 어린 시절부터 연애인이 되어 돈과 명성을 얻게 되지만 그 사람은 다양한 인문학적 판단 능력(식재료)를 가진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유혹에 대해서 제대로 판단할 수 없어 파멸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운동 선수라 해도 일정 학점과 학위를 요구하는 미국의 대학 스포츠 제도는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고 본다.
다양한 직업의 탄생
다양한 직업이 만들어지기 위해서 다양한 학문적 배경뿐만 아니라 다양한 경험이 바탕으로 되는 다양한 사람들의 시도를 장려해야 할 것이다. 실업률을 줄이는 방법은 여러가지 있다. 뷔페 식당의 예를 통해 설명한다면, 저렴한 (조건이 까다롭지 않은) 뷔페 식당을 많이 만들어 제공하는 음식의 질은 고려하지 않고 놓여 있는 음식 중에서 무조건 먹으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다른 방법도 있을 것이다. 다양한 뷔페 식당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각 식당마다 다양한 특징과 변화를 제공하면서 어떤 음식이 좋은지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이 바로 다양한 음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이다. 다시 비유를 벗어나면, 다양한 직업은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식재료를 준비해야 한다. 다양한 학문적 다양성이 만날 수 있는 공간, 시간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요리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많은 실패와 실수가 있을 것이란 것이다. 즉, 버려지는 식재료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음식이 만들어지고 나면 식재료가 낭비되는 비율은 급격하게 줄어들 것이다. 그런데 초기의 버려질 식재료 즉, 실패로 버려질 식재료에 집중하면 두려움에 어떠한 시도도 쉽게 하지 못한다.
사회의 분위기가 이렇게 버려지는 식재료, 새로운 직업을 만들기 위한 시도를 실패로 바라볼 것인지 아니면 다양한 능력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새로운 직업이 만들어질 수 있는 하나의 훈련 과정이고 그에 따른 훈련 경비라고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결과는 달라질 것이다. 누군가 복지사회가 무엇이냐? 고 물었을 때 개인적으로 이렇게 대답한다.
“실패가 경험이 되는 사회”
사회 구조적으로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구조라면 다양한 식재료를 가진 (학문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도전하고 실패도 할 것이다. 만약 한번의 실패로 다시 재기하기 힘들다고 할 때 사회는 절재적으로 보수적으로 변하고 도전을 제대로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직업의 탄생은 사회의 구조가 실패를 얼마나 너그럽게 인정하는가, 그리고 다른 이야기로 복지 사회의 정도에 따라서 상당한 연관성을 가질 것이라고 믿는다. 국가가 복지를 지향하는지 아닌지는 단순히 복지 지출이 얼마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자원을 아까워하면서 다양한 개인들이 자신의 학문적 창의성보다는 사업적 안정성과 수익성만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겉과 속이 다른 복지 국가일 뿐이다. 개인의 창의적인 시도에 대한 자본을 아까워 하지 않는 것이 복지 국가를 위한 첫 발걸음이라 강하게 생각한다.
나의 동료 (research colleges) 들 중에는 열심히 생물학을 전공한 후 컴퓨터 계산을 통해서 인간관계와 사회적 네트워크 관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사회 네트워크 분석에 대한 진화생물학적 컨설턴트'라는 직업을 가진 친구가 있다. 자신이 가진 학문적 배경과 사회적 요구,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로움에 대해서 고민하고 스스로 만든 직업이다. 다른 친구는 자신의 의료 지식과 행정 정책에 이론을 바탕으로 소외 계층이 의료 서비스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정책을 만드는 NGO (Non-Governmental Organization) 이 아닌 이해 집단이 아닌 정책적 압력만 수행하는 PGO (Push-Governmental Organization) 을 만들어 지역 공동체를 통해 시작했다. 이 모두 자신의 학문적 배경 (식재료) 를 통해서 세상의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해결해 세상을 좀 더 이롭게 하기 위한 실천이다.
직업과 뷔페 식당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생산 노동에 대한 내용을 포괄적으로 포함하지는 않은 것 같다. 즉, 생산 공장과 특별한 조건이 필요없는 단순 노동 등과 같이 고용 불안을 포함하는 노동의 문제까지 포함해서 생각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생산 구조가 기계를 포함한 자동화 공정에 의해 많은 인력이 단순 생산 노동으로 바뀌고 일용직이나 단기 고용 노동직에 대해서 앞서 설명한 학문적 기초에 근거한 직업의 창출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생각의 범위가 여기까지 확대되면 복잡한 변수들과 생각할 문제들이 많아지기 때문에 여기에서 다룰 수 있는 범위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기술 노동자의 경우 어느 정도 현장 경험을 쌓고 관련 교육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과정은 상당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법무법인이나 컨설팅 회사의 경우 몇년간 재직하면 연수 및 교육을 지원해주는데 오히려 이런 교육의 효과는 현장 기술을 익혀오던 기술 노동자에게 더 필요한 측면이 강하다. 이런 교육의 투자를 하나의 비용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며 노동의 질은 떨어지고 숙련된 노동자가 아닌 임금이 싼 대체 가능한 미숙련 노동자로 교체되면 실제 기술과 교육이 만나 현장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런 현장의 문제점을 지속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에서 기술 부품, 기술 장비 들이 발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무시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마무리하며...
이 시대는 직업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소위 스펙(spec; specification) 이라는 제품에만 붙이는 용어를 붙이며 직업의 조건을 요구한다. 결국 더 좋은 뷔페 식당으로 들어가기 위한 치열한 노력을 하지만 결국 뷔페 식당에 들어가도 자신의 적성과 능력을 발휘하기 보다는 그저 기성품처럼 판에 박힌 업무에 자신은 하나의 부속품처럼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정말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통해 무엇인가 이로움을 펼치고 싶은 희망을 거세하며 제대로 행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대학에서 배운 것들을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 과정 속에서 대학은 그저 조건을 맞추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 대학의 교육은 아무 의미 없다고 느끼게 된다면 진정 그 안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직업이란 사회의 다양한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말하고 싶다. 그 사회적 요구에는 우리가 관심을 가지면 충분히 우리가 배운 것과 우리가 느낀 것으로 이로움을 전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다양한 식재료를 가지고 다양한 도전을 통해 뷔페 식당의 음식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만의 요리법으로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 세상의 다른 이들에게 맛있는 요리를 전해줄 수 있는 청년이 많아지는 것이 직업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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