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ugust 24, 2013

좋은 책은 무엇일까? ─ 좋은 글을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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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것이 좋다.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전자책 (ebook) 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책의 질감이 주는 느낌이 좋은 것이라 이야기한다. 교과서나 학교 공부하는 것은 싫었지만 관심있는 분야에 집중해서 책을 읽는 것이 좋았다. 중학교 시절엔 교양 과학 서적이 나의 주 관심사였던 것 같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문학이 주는 다양한 아름다움이 좋았고 다양한 책들을 가능하다면 읽으려고 노력했다. 워낙 잠이 없어서 그런지 새벽 3~4시까지 잠들지 않고 책 읽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버렸다. (수면 시간이 짧은 건 분명 건강에 좋지 않은 것 같다.) 그렇게 하루에 최소한 4시간 정도는 별 일이 없으면 책을 읽는데 시간을 보낸다.


지금도 그런다. 대학교를 들어가서 가까이 도서관이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정독보다는 다독을 거치며 책은 많이 읽었지만 책을 느끼는 통찰력이나 책을 통해 삶에 대한 깊은 이해와 같이 사람들이 독서를 통해 얻는다는 그 좋은 효과는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 솔찍한 느낌이다. 어떤 책은 읽는 순간부터 나에게 다가오지만, 어떤 책은 책장의 마지막을 넘기는 순간까지 내가 제대로 읽었던 것인가 여전히 책이 나에게 제대로 오지도 않은 그런 책들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책은 많이 읽는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떤 책이 좋은 책일까? 

이 질문은 상당히 주관적인 질문이란 것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대중적으로 많이 읽혔다고 해서 좋은 책이라고 평가한다면 한 나라의 독재자가 내놓고 거의 모든 국민들에게 보급되었던 히틀러의 「나의 투쟁; Mein Kampf」이란 책도 좋은 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어떤 페이지를 펼쳐 보면 글에도 격이 있고 좋지 못한 격을 가진 글을 볼 때 불쾌함을 느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당시 이 책을 읽고 깊은 감동을 느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좋은 책이란 대중적 인기와 별로 상관없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上士聞道,勤而行之;
中士聞道,若存若亡;
下士聞道,大笑之,
不笑不足以為道!

훌륭한 선비가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행한다.
평범한 선비는 도를 들어도, 긴가민가 한다.
못난 선비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는다.
웃지 않으면 도가 되기에 부족하다.

노자 ─ 「도덕경」제 41장

세상의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것에는 깊은 함정 (deep plot) 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지론이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런 저항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내면적 욕심; 논리적으로 잘못된 점을 파악하기 힘든 욕심이나 방어적 공포; 명백한 두려움과 위험이 나타나는 공포를 포함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통해 살펴보면 위대한 지성을 가진 시대를 뛰어 넘는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대중의 공격을 받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노자의 도덕경 41장에 나온 표현의 백미(白眉)는 네번째 문장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글이 대중적 인기를 얻는다면 오히려 이를 경계하고 못난 선비의 비웃음을 받지 않는다면 이를 더욱 더 정진해야 하는 하나의 표징(a sign; a mark)로 여겨야 하지 않을까? 그 어떤 시대도 훌륭한 선비가 대중이 되었던 시대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Walter Lambert's ‘Popularity’

그렇기 때문에 좋은 책이란 논의 자체가 잘 팔리는 책을 논하는 것은 크게 벗어난 생각이라 본다. 그러나 여전히 좋은 책은 무엇일까란 질문은 계속 되돌아온다. 좋은 책이 무엇이다! 라고 설명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에게 '다가오는' 좋은 책이란 무엇일까?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호기심이다. 다음은 어떤 책을 읽어볼까 하는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솔찍한 심정으로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 책을 잡고 끝까지 넘겨야 하는 것도 상당히 힘들고 때로는 고통스럽다. 그리고 그 무생물의 활자들이 나에게 고통을 준다는 사실만으로 지극히 불쾌할 때도 있다.

떤 책이 나에게 다가왔는가? 

질문을 바꿔본다. 좋은 책이란 무엇인가라는 일반적인 결론을 내리기 전, 내가 경험해본 내용들을 통해서 지금까지 나에게 어떤 책이 다가왔는지... 그것들을 기억해보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어떤 책이 가장 좋았냐고 물어보면 항상 먼저 대답하는 책은 '도덕경'이었다. 모바일 기기가 없던 시절에는 항상 작은 책자의 책을 가지고 다녔고 모바일 기기를 가지게 되면 우선 순위로 두는 작업은 예전에 옮겨 두었던 문서를 복사하는 것이다. 도덕경 이외에도 나에게 다가온 책들은 참 많았다. 그 책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지만 그 해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아마 평생 제대로 된 대답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공통점은 오히려 내 삶과 별로 상관없는 시대의 배경과 내가 이해하기 힘든 공간에 만들어진 책들이 상당수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이 다른데 왜 나에게 그렇게 다가오는가? 나를 자극하는 이 느낌을 오랫동안 간직하며 여전히 내가 추구하는 책에 대한 탐험은 계속 되어간다.

도덕경을 보면 볼때마다 같은 구절을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전율을 느낄 때가 있다. 문장에 질문을 하면 할수록 얻어지는 것이 많은 신비로운 문장들, 평소에는 별 생각없이 무관심하던 세상에 대해서 시선을 놓을 수 있는 힘을 가진 문장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옮겨 놓은 도덕경 11장의 내용을 다른 지인에게 보여주었다. ─ [ 존재의 이로움은 부재의 쓰임이 있기 때문에... ]


지인에게 이 문장을 보여주며 감탄하며 '어떻게 이런 멋진 표현이 있을까?' 라며 세상의 이로운 쓰임들은 상당수 비어있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그 조화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데 지인이 갑자기 질문을 하였다. "바퀴가 비어있지 않는다고 안 굴러가나요?" 순간 몇초간의 정적 이후 나는 그동안 이 문장을 보면서 바퀴에 대한 고정적 이미지이나 모양, 더 나아가 기능적 형태에 대해서 고정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구나 느끼게 되었다. 사실 바퀴가 비어 바퀴살이 있기 전에 바퀴는 통나무처럼 속이 비어있지 않은 형태가 먼저였을 것이다. 그러나 자체의 무게나 충격에 대한 깨지기 쉬운 여러가지 물리적 특징으로 바퀴살이 대체된 빈 공간이 되었을 것이다. 지인의 그 순수한 질문, 물리적 특성을 배제한 그 질문을 통해 도덕경 11장의 핵심은 어쩌면 비어있음이 존재의 이로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비어내는 작업'이 존재를 더욱 더 이롭게 만들 수 있다는 과정의 철학을 추가해주었다. 

...
그래서 나에게 다가오는 책은 항상 언제 어디서나 어떤 형태로든 다양하게 다가와준다.

만에 대해서

내가 감동하고 공감하는 소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아마도 내가 겪은 삶의 이야기를 적어 놓는다면 그것이 가장 감동일 것이다. 바로 나의 이야기때문이다. 소설은 그런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이야기, 개연성을 가지는 이야기가 나의 삶의 이야기와 겹치면서 (overlapping) 느껴지는 많은 감정들의 복합적 결과일 것이다. 아주 단적인 예로 세상에 태어나 '사랑'이란 감정을 단 한순간도 느끼지 않은 사람에게 로맨스 소설을 읽어 준다면 감동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책들이 가지는 수많은 이야기가 살아 숨쉬는 이야기는 바로 나의 이야기가 될수도 있고, 이야기였기도 했던 내용이기 때문일 것이다. 책이 생명력을 가지는 이유는 아마도 누구의 이야기가 될수도 있다는 그 보편적 서사의 함유이기 때문이다. 비단 현실을 그리는 책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공상과학 소설이나 SF소설이라 해도 내가 한번쯤 그려보았던, 그려 볼 수 있을 것 같은 상상력의 개연성까지도 확장해서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낭만을 이런 개연성에서 찾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개연성이 있지만 나이기에 다를 수 있는 그 사소한 차이가 낭만이 된다고 생각한다. 완벽하게 똑같은 나의 이야기는 낭만의 대상이 아니다. 그건 추억의 대상이다. 우리가 다른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낭만을 느끼는 이유는 개연성 있는 이야기 속에서 나이기 때문에 달라질 수 있는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기 때문이다. 같은 영화를 보아도 각자 느끼는 것이 다르고 각자 더 다가오는 장면이 다른 이유는 개개인이 가지는 서사 (personal narrative) 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낭만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다른 이야기지만 나의 이야기일 수 있다는 가능성의 심지와 내가 만들어 온 인생의 양초로 빛을 밝혀 그려보는 아주 조금 다른 이야기

라고 적어본다. 즉, 낭만은 많은 사람들이 같은 내용을 생각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비록 같은 것을 보아도 서로 다른 다양한 스펙트럼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그 차이는 빨간색과 보라색처럼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지만 빨간색과 주황색처럼 그다지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책이 가지는 기능적 아름다움은 지식의 측면도 무시할 수 없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가지는 낭만의 스펙트럼이 더 크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낭만은 단순히 사랑의 달콤함이나 연인의 이야기만에 국한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인간의 모든 고통, 슬픔, 기쁨, 분노 그 어떤 감정과 현실의 이야기들도 모두 낭만이다. 때로는 자식들을 위해 극심한 고통도 인내하는 어머니의 사랑도 더 큰 낭만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낭만은 지나간 추억을 기억하며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삶의 현장 그 자체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엇을 써야 할까? 

조금은 현실적 문제로 넘어온다. 아무리 낭만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다. 아무리 다른 누군가의 진솔한 이야기라 해도 나와 비슷한 경험이라고 해도 누군가의 이야기는 여전히 다가오지 않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고민하다 우연히 엘리너 루즈벨트 (Anna Eleanor Roosevelt, 1884-1962) 의 말이 보였다.

Great minds discuss ideas.
Average minds discuss events.
Small minds discuss people”

이 인용문의 원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그보다는 다룰 수 있는 이야기를 ideas, events, people 이라고 나눈 것이 더 다가왔다. '사고', '사건', '사람' 으로 해석해 본다. (생각이나 개념이 더 적절한 것 같지만 운율적 조합을 위해 사고 라고 해석했다.) 조금은 생각해보면 서점에 가서 책의 몇 페이지를 읽고 더 읽을지 말지 생각했던 나름 막연한 기준이 이런 내용이 아닐까 싶었다. 책을 살펴보면 세가지의 분류를 통해 일정한 규칙을 찾을 수 있다.

먼저 사람을 중심으로 서술된 책들이 있다. 단순히 개인적 서사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라 개인사적 업적과 행적의 나열이 주가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이런 책들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나와는 별로 상관없기도 하지만 그런 책들의 대부분은 사람이 죽고나면 잊혀지고 만다. 그 다음 사건에 초점이 맞춰진 책들이 있다. 지식적 측면이나 상식적 측면에서 도움이 많이 되기도 한다. 다큐멘터리나 역사에 대한 기록도 이런 사건을 중심으로 그려진 내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다큐멘터리를 좋아한다. 특히 역사나 문화 뿐만 아니라 과학 모두 처음에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받을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했지만 이 생각들은 다양한 다큐멘터리를 보거나 읽으며 그 기준에 대한 명확한 선호도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리 사건에 중심이 되어도 그 사건이 인간사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그 사건을 통해 인간이 어떤 변화를 겪게 되고 때로는 진보도 퇴보도 이루어지는 그 인과관계와 그 이면에 깔린 사람들의 철학과 생각이 더 중요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환경 다큐멘터리라면 현재 남극의 환경과 생태계가 변화하고 있고 그 변화하는 모습만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환경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생태계의 중요성이라는 기본적 철학적 골격을 가지고 있는 다큐멘터리는 단순히 남극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집중하지 않는다. 남극과 그와 연결된 생태계 그리고 우리의 현실적인 세상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환경을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적 자세에 대한 생각(사고)을 전달해준다.


마찬가지로 잘 쓰여진 한 사람의 일대기도 단순히 주인공이 무엇을 했는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오며 어떤 철학과 생각을 통해서 살아왔고 그 결과 어떤 삶을 살게 되었는지 단순히 성공뿐만 아니라 때로는 옳은 철학과 사고에도 세상의 부조리로 어려움에 겪을 수 있으나 이를 이겨낼 수도 있다는 내용을 전해주는 것이 더 끌리게 되는 것이다. 영웅적 이야기와 대비되어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이겨내고 힘이 인간의 의지와 용기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허레이쇼 앨저 (Horatio Alger)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 것은 한 주인공의 이야기 자체인지 아니면 앞서 설명한 낭만의 요소가 작용한 것인지는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시대의 유행처럼 나오는 경영서적이나 성공을 위한 책들을 보지 않으려고 한다. 그 책들 안에는 대부분 사건의 이야기들이고, 사람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그 내용 대부분은 당시 그 시대와 공간이 아니면 적용가능하지 않은 이야기들도 많다. 그래서 명작이라는 작품들을 생각해보면 시대의 배경을 지우고 공간의 그림자를 지워도 지금도 살아 숨쉬는 사고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본다.

이란 시대의 배경을 지우고 공간의 그림자를 지워도 여전히 살아있는 사고가 있는 작품이다. 

은 평론과 다르다. 

평론이란 시대의 흐름과 공간의 제한성을 그대로 담고 있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시대를 벗어나거나 다른 문화에 놓이면 전혀 상반된 판단을 하게 되는 경우도 많은 것이다. 평론은 결국 시대와 공간의 결과물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시대가 지난 후 옛날의 평론을 보면 너무도 어이없는 내용들도 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현대는 당연하다 생각하는 여성의 투표권 같은 것도 1920년대 미국만 해도 상당히 진보적인 주장이 될 수 있는 파격적 내용이 될 수 있다. 가끔 서점의 책들 중에는 평론의 내용인데 책으로 나온 경우도 많이 보게 된다. 물론 시대와 공간을 읽기 위해 평론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내용들이 책으로 출판되기에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개인적으로 책을 만든다면 (그린다면) 시대와 공간에 대한 생각은 한번쯤 진지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아마도 도덕경이 몇천년을 지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주는 이유는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사고(생각)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책은 만드는 것도 쓰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책은 그린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가 가진 많은 생각들은 시대와 공간의 산물이지만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내용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언어로 머리 속에서 그려내는 과정과 같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려낼 때 가장 쉽게 그릴 수 있는 것은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사건은 조금 복잡하지만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어렵다면 사람과 사건 사이에 숨어있는 원리와 개념의 구름같은 그림을 잡아 그려내는 것이 가장 힘든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라면 아무리 시대의 배경과 공간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어도 많은 사람들이 낭만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래서 '그리는' 사람에게 하나의 희망이 있다면, 
작가가 그린 책이 몇 세대가 지난 후 미래의 독자에게 낭만을 느낄 수 있고 더 바란다면 미래가 경험하지 않던 나의 시대와 공간을 이해할 수 있다면, 작가는 죽어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특권을 누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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