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November 1, 2013

재능에 대한 단상 ─ 다양성에 대한 생리학적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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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inflammation) 의 원인이 무엇인지 몰랐던 시절, 염증에 발생한 환자들은 염증 부위에 대한 치료 이외에는 다른 방법을 사용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염증 부위를 물리적으로 제거하거나 혹은 심하게 변형된 염증 부위에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비상식적인 방법도 포함해서 다양한 시도를 했다. 그러나 치료 효과는 좋지 않았기 때문에 보통은 상처에 염증이 발생하면 치료하기 힘든 대상으로 생각하고 운에 맡기는 치료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항생제 (antibiotics) 에 대한 개념이 도입되기 이전에는 염증이 발생한 부분에 집중하는 치료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증상이 나타나는 부위와 실제 그 증상이 나타나는 원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일어날 수 밖에 없었고 원리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부족하다면 항상 이런 시도는 그래도 가장 합리적인 선택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염증에 대한 이해를 가지면서 인간은 '염증은 왜 생기는가?'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흔히 염증은 좋지 않은 대상으로 인식된다. 생물체는 적절한 반응을 통해서 외부의 물질이 우리에게 심하게 노출되는 것을 막도록 노력한다. 염증도 그런 생리학적 결과 중에 하나이다. 즉, 외부의 생물, 물질이 우리 몸에 들어와 발생할 수 있는 부적절한 현상을 막기 위해서 여러가지 방어 기재로 염증을 일으킨다는 이론도 존재한다. 그러나 염증과 발암 관계, 노화 등과 연관 관계를 연구하면서 염증은 일단 좋은 대상보다는 좋지 못한 대상으로 인식되어진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염증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염증 반응에 의해서 문제가 생기는 것보다 더 빨리 생명이 끊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염증 반응이 일어남에 따라서 염우리 몸에서 무엇인가 조치가 필요하다는 경고를 주고, 그에 따라서 생명체에게 적절한 도움을 청하는 하나의 인터페이스 기작 (interface mechanism) 이 된다. 또한 염증 반응 자체가 반응을 일으킨 원인 물질의 적극적인 확산을 막을 수 있는 역할을 수행한다. 즉, 외부에 노출되어 뭔가 문제가 발생한 세포에 제한되어 염증 반응을 만들어 놓으면 그 주변의 세포에 더이상 확산되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염증 그 간단해보이지만 복잡한 생리학적 과정들

염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증상과 적절한 원인을 알아낸다는 것의 의미, 그리고 우리에게 귀찮고 불필요한 작용으로 보이는 내용들은 왜 우리에게 일어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싶은 것이다. 즉, 우리에게는 전혀 쓸모없어 보이는 대상들이 이 세상에는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궁금증이다. 조금 과격하게 확장하자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소위 '인간 쓰레기'들이 있어 차라리 없는 것보다 못한 세상은 왜 만들어져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생각하다 염증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편 우리에게 '절대적 좋은 것' 과 '절대적 나쁜 것'에 대한 인식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인가? 라는 일련의 질문들을 하게 된다.

욕에 대한 질문을 한다. 

인간은 누구나 욕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가끔은 아니 많은 사람들은 그런 욕심은 인간의 경제활동을 적극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만드는 원동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인간의 욕심이 필요한가 아닌가에 대한 질문은 별 소용이 없다. 이미 인간의 욕심은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그 욕심의 작용, 반작용으로 세상은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욕심을 아예 버리라는 식의 해결책은 그리 현실적이지 못하다. 다만 이미 존재하는 그 욕심이 지나칠 때 인간이 소위 탐욕이라고 부르는 상태가 될 때를 살펴보면서 탐욕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된다.

탐욕은 그차제가 원인인가? 아니면 인간의 욕심을 비롯한 다양한 원인들이 만들어 낸 결과인가?

탐욕에 대한 질문은 아주 간단하다. 앞서 염증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우리 눈에 거의 보이지 않는 개념에 대한 이해를 하려고 노력해야 가능할 때가 많다. 우리 눈에 거의 무시되는 미생물, 바이러스, 곰팡이 등 존재자체가 무시될 수 있는 그 대상이 '존재한다' 라고 인정하는 순간 우리가 싸워야 하는 대상이 정해지는 것이다. 마찬가이다. 인간의 욕심은 어느정도 인정한다고 해도 서로를 죽이고 자신의 욕심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는 탐욕의 정신은 어디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 원인을 찾기 위해 다른 질문을 해본다.

탐욕원인인가? 아니면 결과인가? 

만약 탐욕이 원인이라면 자본주의 사회 구조 아래에서 탐욕의 칼날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무자비하게 생존을 힘들게 하는 소수 자본가들의 탐욕을 줄이는 것이 원인이 되어야 한다. 즉, 탐욕을 가진 사람들이 그 탐욕을 버려야 한다는 개인적 변화와 결단이 해결책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탐욕은 결국 사회를 병들게 하는 원인이라는 것을 알리고 계몽하는 방법이외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탐욕이 결과라면 조금 문제는 달라진다. 결과라는 표현이 조금 광범위하기 때문에 마치 염증이 발생한 극소 부위로 비유한다면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탐욕이 발생하게 되는 근본 원인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개인마다 이에 대한 생각은 다를 것이다.

욕의 존재를 생각한다. 

염증도 나쁜 존재로 주로 인식되지만, 결국 우리의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전달했다. 이는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악을 정하는 순간 인간은 이분법적 사고의 희생자로

절대적 선으로 보이는 대상에 대한 적절한 경계를 풀어 결국 피해를 보게 될 수도 있고,
절대적 악으로 보이는 대상에 대한 적절한 관심을 끊어 결국 지혜를 얻지 못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바라보는 시선이 고정되고 절대적으로 변할 때 우리는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늪으로 빠지기 쉽다. 마찬가지이다. 염증이 우리에게 그다지 좋지 못한 대상이라는 것은 알지만 앞서 설명한 것처럼 ① 경고의 역할 ② 방어의 역할 을 적절하게 하기 때문에 결국 우리를 지켜주려는 하나의 작용이라는 점도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즉, 염증이 생기는 것이 싫다고 해서 "앞으로 몸에 염증이 생기지 않게 해주세요!" 와 같은 소원을 빌고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염증이 꼭 나쁘기만 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게 될 것이다. 비슷한 시선으로 탐욕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탐욕을 그 자체로 원인으로 바라본다면 탐욕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인의 입장에서 탐욕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어느정도 효과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도 복잡한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리 선한 개인이라도 사회에 소속되거나 집단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때 꼭 그 집단이 선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익히 잘 알고 있다. 극단적으로 절대적 선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만 구성된 집단이라도 그 집단의 행동이 항상 선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구조적 한계와 구조적 결함으로 집단은 충분히 나쁘게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은 어느정도 동의하게 될 것이다.

절대악, 절대선이란 존재하는가? 아니면 그렇게 구별하고 싶은 인간의 편견인가?

그런 의미에서 탐욕 자체가 원인이라는 시선에서 조금 확장해서 탐욕은 어쩌면 인간의 결과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물론 개인적인 이견 (異見) 이 가능하다는 것은 알지만 현재의 이야기 진행을 위해서 오히려 탐욕을 원인이 아닌 하나의 결과로 바라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국 염증 반응을 사회의 탐욕과 비슷한 비유 대상 (metaphorical object) 로 생각해보자. 이유는 간단하다. 탐욕을 원인으로 바라본다면 끊임없이 탐욕을 줄이는 금욕주의가 유일한 해답이지만, 탐욕을 원인이 아닌 염증과 같은 하나의 증상 (결과) 로 바라본다면 우리의 해결책은 단순한 금욕주의가 아닌 어떻게 예방하고 어떻게 치료가 가능한지에 대한 구조적인 대응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명은 다양성과 희생의 작품이다. 

염증과 탐욕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잊고 염증과 탐욕이 없는 소위 건강한 생명 (사회) 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생명은 왜 생명인가? 2013년 새로 시작하는 TV 드라마 중 블랙리스트 (the Blacklists) 란 드라마가 있다. 그 드라마에 the Stewmaker 란 에피소드가 있는데 주로 청부 살인을 하고 그 시체를 없애기 위해서 화학약품으로 사람을 녹여 죽이는 잔인함을 보이는 살인자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때 살인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상당히 자신감을 보인다. 단지 자신의 행동은 '에너지의 이동일 뿐이다. [ It's the transference of energy. ]' 라고 이야기한다. 결과적으로 살인자도 에너지가 이동했다. 그에게 단지 인간의 몸은 생명을 제거한 물질적으로 자연의 구성 원소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생명은 아무리 그 구성원소와 요소가 동일하다고 해도 다른 한가지가 있다. 바로 생리적 현상을 한다는 점이다. 무엇이 생리적 현상이냐고 묻는다면 다시 생명현상이라고 반복 회귀하는 대답을 하게 되지만 생명 현상의 두가지 큰 특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생명은 다양성을 보장한다. 큰 범위에서 살펴보아도 자연계의 생명들은 다양성을 가진다. 다양한 종, 다양한 형태의 생명을 가지기도 하지만 같은 종 안에서도 서로 다른 다양성을 가진다. 이는 아무리 같은 인간이라도 모두 다 다를 수 밖에 없는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개체의 수준에서 바라볼 수 있는 다양성 이외에 한 생명체, 인체를 바라볼 때도 생명의 다양성을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의 근육은 심장을 이루는 근육과 팔을 이루는 근육은 다르다. 기능과 형태도 다르다. 즉, 같은 생명체 내에서도 생명체가 생명을 유지하는 가장 큰 특징은 모든 신체 기관과 더 세분화하여 각 세포들이 모두 다 다르기 때문에 생명을 유지하기 유리한 많은 장점을 가지게 된다. 만약 인간의 모든 세포가 모두 동일한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면 세포가 취약한 환경에 놓이게 되었을 때 모든 세포가 기능을 하지 못해 결국 전체 생명체가 죽게 될 것이다. 우리가 다양한 환경 조건에서 항상성 (consistency) 를 유지하는 것은 이처럼 우리를 구성하는 모든 세포들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세포사멸 (Apoptosis) 도 세포의 다양성, 세분화때문에 가능하다.

두번째 생명은 자기 희생을 통해 생명을 유지한다. 이는 참 역설적이지만 세포는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 세포가 구성하는 생명체가 생명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혈액 안의 다양한 혈액 세포들은 일정 기간 (3 ~ 4개월) 이 지나면 죽게된다. 다른 세포들도 비슷하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계속 유지하는 세포들은 특별한 이유를 가진 세포가 아니면 자기 사멸 (apoptosis) 의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세포가 자신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도록 해준다. 즉, 생명을 구성하는 세포는 계속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죽게 하여 결국 생명을 더 길게 유지할 수 있는 역설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만약 세포가 욕심을 부려 계속 살아갈려고 한다면 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질환이 된다. 바로 암 (cancer) 이다. 암세포는 자기 분열을 끊임없이 하거나 자기 성장을 계속하여 새로운 세포가 자신을 대신하지 못하게 하여 결국 신체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만드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두가지의 큰 특징은 염증 반응과도 적절하게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만약 우리가 감염이 된 부분이 있다면 인체는 염증 반응에 의해서 과감하게 해당 부분의 세포가 빨리 사멸할 수 있도록 돕는다. 만약 다양하지 못한 세포를 가진 생명체라면 이렇게 세포에게 사멸을 유도하는 과정조차 전체 세포가 사멸하는 과정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제한적인 영역에서의 사멸을 유도하기 힘들 것이다. 즉, 다양성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환경에서 미치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대해서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인의 재능에 대해서 생각하다. 

미국 드라마 레볼루션 (Revolution) 을 보면 전기가 사라진 세상의 모습을 그린다. 전기가 끊어졌기 때문에 당연히 전기가 없으면 무용지물이 되는 컴퓨터 엔지니어들은 직업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 반면 사람들에게 굽신하고 사람들 눈치를 봐야 했던 영업사원의 경우 전기가 없어진 세상에서 사람들의 심리를 잘 파악하고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구글에서 돈 잘 버는 엔지니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예전에는 보잘 것 없던 사람이 능력 좋은 사람이 되고 무엇보다 예전과 다르게 권력은 얼마나 사람들과 잘 싸운는가에 따라서 서열이 정해지게 된다. 드라마를 보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가 가진 재능도 항상 절대적 재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내가 가진 재능은 항상 그 가치를 상대적으로 평가받을 수 밖에 없게 된다. 즉, 절대적 재능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지 모른다. 재능이란 능력과 조금 다르게 어떻게 쓰이는가가 중요하고 그 쓰임이란 사회적 수요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손재주가 좋은 목수나 대장장이들이 분명 좋은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최소한 현대 사회보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제 대량생산이 기계를 통해서 가능해진 사회에서는 목수나 대장장이는 예전보다 그 재능의 쓰임이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물론 자신이 스스로 개척해서 좀 더 좋은 제품 고부가가치의 상품으로 자신의 재능으로 만든 상품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는 경우가 있지만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에 보다 일반적 내용으로 접근해보자. 요즘 시대에 요구받는 재능이 무엇이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상당히 어려워진다. 예전처럼 어떤 기술의 우수함을 평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요즘은 대부분 사회적 요구 혹은 주류 (the majority) 의 요구에 따라서 재능이 평준화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간지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건축 설계를 하는 재능을 발휘하기 보다는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좋고, 수리 능력이 좋아서 수학적 재능이 뛰어나도 결국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좋아진 세상이다. 세상이 요구하는 재능이란 그저 안정적 직장에 잘 자리잡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취직한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재능은 각자가 가진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필요한 기능적 요구에 따라 제대로 수행하는지 못하는지가 중요하다. 대부분 사무적 기능에 충실하게 얼마나 잘 결과를 만드는가가 중요하다.

사회적 환경, 조건을 무시한 절대적 재능을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즉, 개인은 점점 각자의 재능을 가진 존재로 다른 이들과 다른 재능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기업이 요구하는 기능 (function) 을 잘 수행하는 하나의 부속품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내가 그 자리에 있을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다른 어떤 이로도 대체가능한 (the replaceable) 대상이다. 이런 상황이 되면 개인의 재능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개인의 재능은 오히려 일치된 생산력을 만들어내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개개인은 기업이나 사회에 필요한 하나의 노동 요소가 되고 그렇게 노동 시장의 하나의 상품이 되어간다.

가면역의 고통을 생각하다. 

자가면역은 다양한 형태로 질환을 만든다. 대부분 자가면역은 유전적 요인으로 유전적 결핍 (genetic deficit) 혹은 면역 기능의 과잉 반응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요즘은 이외에도 후생유전학 (epigenetics) 의 의견을 받아들여 생명체가 발생한 이후 접하게 된 환경에 의해서 유전적 제한 (Methylation in Gene Expression) 이 발생할 수 있음도 이야기된다. 즉, 유전자는 그대로이지만 유전자의 일부분이 기능이 표현되지 않도록 제한이 되는 환경에 놓일 때 기능을 해야 하는 유전자가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때 외부 물질로 오인되지 말아야 하는 대상이나 세포들이 자가 먼역에 의해 공격을 받아 질환이 걸리는 경우도 발생한다고 본다.

자가면역은 조금 흥미로운 대상이다. 이미 같은 유전자에서 발생한 세포들인데 왜 외부 대상으로 인식하는가이다. 즉, 분명 자신의 일부분이지만 외부 대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그만큼 내부적으로는 필요가 없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체의 면역 반응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생각할 것이 많지만 결론적으로 이렇게 자신의 세포를 공격하여 염증 반응을 포함한 다양한 증상이 일어나게 된다. 즉, 무엇인가 기능하고 생명활동에 무엇인가 기능을 하는 세포를 공격하여 제거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마치 사회의 어떤 활동을 하는 재능을 가진 개인에게 '너는 필요가 없다'는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고 이에 의해 제거하는 과정과도 비슷하다. 이 부분에서 재미있는 것은 제거하려는 면역 기능이나 살아남으려는 세포의 입장 모두 무엇이 잘못이다. 무엇이 잘한다고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에서 이를 확장하여 생각해보자. 만약 어떤 집단의 사회적 기능 ─ 예를 들어 노동조합을 생각해보자 ─ 을 하기 위해 역할을 수행하는데 이런 기능이 필요없다는 사회적 규정을 만들고 이를 제거하려고 한다면 그 과정에서 충돌과 함께 사회적 비용, 사회적 갈등이 발생할 것이다. 노동조합이 정말 있어야 하는가 아닌가의 논의를 떠나서 필요없다 혹은 심하게 사회악이라고 규정하는 과정은 마치 생명체가 자신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 필요없다고 제거하기를 바라는 것과 비슷하다. 혹자는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만약 그 세포가 암세포와 같이 누군가에게 해를 주는 존재라면 외과수술을 통해서 제거하듯이 제거하는 것이 더 좋지 않는가? 라고 말이다. 그러나 암세포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은 세포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만약 해를 주었다면 어떤 해를 주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해야 한다.

자가면역 반응은 왜 존재하는 자신의 신체 기관을 인식하지 못하는가를 통해 생리학적 인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된다. 결국 면역 시스템도 대상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상당히 역설적이지만 암세포라고 모두 제거해야 하는가는 조금 깊게 생각해봐야 하는 내용이 될 수 있다. 때로는 암세포를 제거하기 위해서 희생해야 하는 일반 세포들에 의해 삶의 질은 달리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진단 기술의 발달로 갑상선암이 증가했다. 그런데 갑상선압이 발견되어 갑상선을 일부 혹은 전체 절제하게 되면 갑상선에 관련된 호르몬은 평생 약에 의존해야 한다. 해부학 의사에 의한 흥미로운 내용 중 하나는 자연사로 죽은 사람들 가운데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갑상선 암조직을 가진체 자기 수명을 다하고 죽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판단은 개인에게 맡기겠지만 세포의 구분과 분류는 때로 세포가 가진 특징과 성격이 아닌 편견에 의해 결정해서 지나친 반응을 가지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넓게 생각이 넘친 범위같아 다시 염증과 탐욕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요한 재능, 필요없는 재능을 만드는 사회 

인간의 행복은 사회적 필요성이나 중요도에 따라 비례하지 않는다. 즉, 중요한 자리에 있다고 해서 사회적 명예가 보장되는 위치라고 해서 개인의 행복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자신의 재능이 잘 발휘될 수 있는 곳에서 적절한 곳에 위치할 때 행복이 늘어날 것이다. 사회도 비슷할 것이다. 모두가 중요도가 높은 대통령을 해야 행복해진다면 모든 국가는 불행의 늪 속에 국민들은 살아야 할 것이다. 심장근육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심장근육이 아닌 팔이나 다리에 붙은 근육들이 자신의 기능에 소흘한다면 우리는 심장만 잘 뛰고 팔 다리는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즉, 각자의 기능과 재능은 각자가 놓인 위치에서 '무엇을 하는가' 가 중요하다. 무엇을 하는가는 결국 자신이 무엇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가의 문제이다.

조혈세포는 혈액의 다양한 세포로 분화할 수 있다. 만약 혈액 세포중 그 필요성이 인식되지 않는다면 혈액세포도 공격의 대상이 될 것이다.

요즘 각광받는 줄기세포 (stem cell) 이 있다. 자세한 얘기는 건너뛰고 줄기세포 중에는 어느정도 운명이 결정된 줄기세포들이 있다. 이는 어느정도 분화가 이루어져 혈액세포가 될지, 신경세포가 될지 대충 그 방향이 정해진 세포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물론 역분화... 라는 주제가 있긴 하지만...)  예를 들어 혈액에 관련된 줄기 세포 (hematopoietic stem cells) 은 분화 조건에 따라 백혈구가 되기도 하고, 적혈구가 되기도 한다. 만약 생명체가 백혈구를 너무 사랑해 백혈구만 많이 만들어내고 다른 혈액 세포를 너무 적게 생산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결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비슷하게 사회에서 필요한 재능과 필요없는 재능을 구별하는 순간, 인간 활동은 자신이 가진 재능을 통해서 어떻게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재능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바뀌게 된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다 가진 재능이 아닌데 사회가 요구하는 재능만을 추구하기 위해 인간은 모두 동일한 조건과 동일한 능력을 쟁취하려고 경쟁을 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회 구성원은 별로 환영받지 못한다. 그리고 사회가 필요하지 않다고 규정한 재능을 가진 존재들은 마치 자가 면역의 공격 대상처럼 제거되기를 원하는 사회가 된다. 그렇게 사회는 마치 온 몸 구석 구석 염증이 가득해진 신체처럼 뭔가 이상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강한 사회를 그려본다면... 

어려운 문제이지만 사회의 구성원이 모두 자신의 위치와 자신의 역할에 행복할 수 있는 사회는 불가능한가? 라는 질문을 하게된다. 이상적이지만 그 질문의 해답을 건강한 신체를 가진 생명체에서 찾아보고 싶다. 각자 주어진 재능은 다르다. 그러나 그 재능은 불필요한 것들이 아니다. 즉, 우선 불필요한 재능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 믿음이 신념적 (종교적) 믿음이든 아니면 다양한 경험적 귀납적 결론이든 상관없다. 그리고 각 기관에 존재하는 다양한 세포들, 그 세포들은 비슷한 기능은 존재하기에 비슷한 재능을 가진 세포들은 한 곳 (기관) 에 모여 각 세포의 기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집단을 이루고 있지만 자신의 영역 이외에는 욕심내지 않는다. 즉, 간세포가 괜히 근육세포가 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정도 근육의 단단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고 신장세포가 폐조직에까지 영역을 확장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폐의 기능도 신장의 기능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 전체도 심장 기능만 필요하다고 주장하지 않고 다양한 재능에 대한 필요성과 조화를 인정하고 불필요한 재능에 대한 편견을 버릴 필요가 있지 않을까? 혹자는 불필요한 재능을 마치 암세포와 비유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암세포의 특징을 생각한다면 어떤 기관이든 자신의 재능이 최고이고 다른 재능보다 자신의 기능이면 충분히 다 가능하다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세포가 가장 암에 가까운 존재가 아닐까 싶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생명은 다양성과 희생을 통해 가능하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도 마찬가지이다. 다양한 재능을 가진 존재 모두 개개인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가 욕심내며 탐욕의 결과로 획일화된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이 보장되며 서로의 삶의 영역을 지켜주며 자기 희생을 통해 사회의 구성원이 서로 조화롭게 살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회 구성원이 원하는 것이 한 두가지인 사회, 예를 들어 학생들에게 장래희망을 물었을 때 법조인이나 의사 혹은 돈많이 버는 기업가 (요즘은 연애인도 있겠지만) 등과 같이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가 돈과 명예에 한정되는 사회라면 다양성은 점점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런 다양성이 줄어든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개개인들의 다양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회가 탐욕하는 구체적 대상에 관심이 모이게 된다.  그렇기에 행복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추구하는 몇 안되는 가치만을 가져야 (소유해야) 한다고 믿게 될 것이다. 마치 우리 몸에 필요없는 대상이라면서 자가면역으로 공격해서 제거하려는 것과도 비슷하다.

다양성이란 다양한 사람들만큼 다양한 재능과 다양한 희망과 다양한 꿈을 가진 것을 말한다. 다양성이 인정된다면 재능의 상대적 서열과 비교는 줄어들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사회의 암적인 존재는 사회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우월함에 빠져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내가 아니면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내가 많이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가치가 옳다고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서 독단과 강요는 폭력을 만든다. 겸손과 타협의 미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 전체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존재한다면 세상은 발전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아마 암세포도 우리 몸에서 자라날 때 비슷한 생각을 하며 자라날 것이다.

든 세포가 건강한 생명체가 건강한 생명체이다. 

모든 세포가 건강하다는 것은 어떤 한 세포가 우수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어떤 특정 세포가 상대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다양한 세포들은 다양한 자리에서 다양한 기능을 위해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조건으로 이루어진 생명체라면 그 생명체는 건강할 것이다.

사회의 다양성은 그렇기 때문에 중요하다. 만약 국가를 포함한 사회가 하나의 생각을 주장하고 그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억압하고 그런 생각을 제거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심장만 뛰는 식물인간을 만드는 가장 빠른 길이다. 생명체를 구성하는 세포에는 중요도가 정해진 것이 아니다. 그 결정은 인간의 주관적 가치에 의해 정해지는 것일 뿐이다. 전체주의는 조직적이고 빠른 실행력을 가지는 좋은 이념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가장 큰 문제점은 다양성이 존재하기 않기 때문에 사회에 닥치는 수많은 경우에 대해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이미 하나의 사상 체계 (이념) 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문제 해결에도 한부분만 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적 본성으로 발생하려는 다양성의 씨앗을 제거하고 그 과정에서 다양성을 표현하는 구성원은 사회의 구조적 폭력과 억압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국가가 창의력있는 경쟁력 있는 재능을 많이 요구한다면 그에 따라 다양성도 보장해야 한다. 창의력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만들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는 다양한 잉여 (surplus) 를 만들어야 한다. 만약 모든 국민들이 대기업에 소속되어 모두 사무를 보느라 정신이 없다면 언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잉여력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인간이 창의적인 이유는 역설적으로 인간의 뇌(신경)세포 중 극히 일부분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인간의 뇌가 80% 정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면 인간의 다양성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뇌가 1% 씩만 사용되는데 각자 주로 사용하고 발달한 부분이 각자 다르기 때문에 그만큼 더 다양하게 된 것이 아닌가. (확률적으로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80% 를 사용하는 인간 집단과 1%만을 사용하는 인간 집단을 비교해보자.)

무리하며... 

결론은 아주 간단하다. 다양성을 존중해야 하는 많은 이유가 있고, 그 다양성을 개인의 재능이란 측면에서 살펴보았을 때 우리 사회가 소수 집단의 욕심을 위해 얼마나 많은 탐욕이 사회 곳곳에서 발생하는지 알 수 있다. 결국 탐욕은 사회의 욕심이 만들어 낸 하나의 증상이고 그 증상의 피해자들은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간다. 다양성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는 심장만 뛰고 근육은 다 기능을 하지 못하는 식물인간 상태가 아닐까? 생명을 유지하는 특징으로 다양성과 희생을 이야기했듯이 사회에도 다양성과 희생이 필요하다. 다만 소수의 욕심을 위해 다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 구성원은 '왜 자신들은 희생하면 안되냐는 질문' 에 자신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면 그런 주장과 강요는 폭력이고 결국 암적인 존재라는 것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다양성 (diversity) 에 대한 가치를 강조했던 미국의 전 대통령 클린턴은 다양성은 국가의 가장 확실한 원동력이라고 이야기했다.

개인이 가진 다양한 재능을 어떻게 찾아내고 어떻게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찾아내는 것은 조금 다른 시각으로 교육의 시스템과 같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우리가 지키고 노력해야 할 중요한 사회적 가치로 '다양성'이 있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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