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October 28, 2013

신념 체계에 대해서 ─ 변화에 대한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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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은 매번 관찰을 통해서 진리를 추구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누군가 '만유 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고 했을 때 그 법칙이 사실인지 아닌지 믿지 않는다면 자신이 직접 실험을 해서 관찰을 하고 믿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만유 인력의 법칙이나 전자기장이 없다고 주장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과학이라는 신념 체계가 있기 때문에 직접 관찰을 하고 직접 경험에 의해 법칙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고 해도 다른 이들의 이론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고 바라보았을 때 그 이론에 위배되는 반대 증거 (count example) 만 찾아서 반박하면 되기 때문이다. 즉, 과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은 신념 체계에 따라서 믿음을 바탕으로 선배들의 이론과 주장을 검증하고 그 검증된 이론을 바탕으로 다른 부분에 응용 (apply)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연습하는 과정이다. 응용하다 (apply) 의 다른 표현은 적용하다 이다. 즉, 누군가 발견한 이론이 맞다고 믿는다면 그 믿음에 근거해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토대 (fundamentals) 가 되는 것이고 그 이론이 미덥지 못하다면 그것이 적용되지 않는 (not applicable) 내용을 찾아내는 과정이다.

학이라는 믿음의 세계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과학을 신념과 믿음의 영역이라기 보다는 논리와 검증의 영역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과학처럼 신념 체계가 강한 분야도 없다. 예를 들어 보자. 이제 약간은 대중적인 인기(?)를 가지게 되는 힉스 입자 (Higgs-boson) 은 그 존재가 이론적으로 제안되었을 때 많은 물리학자들은 반대하였다. 당시의 신념 체계로는 힉스 보존 입자를 부정할 수 있는 많은 이론들이 존재하였다. 그런 대세에 따라 힉스 입자를 더 찾아볼 시도를 하지 않았다면 힉스 입자가 인기(?)를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처음에 힉스 입자에 대한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중 힉스 입자가 설명하는 자연의 현상이 더 자연스럽다는 즉, 인간의 논리 구조보다 자연을 통해 보이는 현상에 더 적용이 잘 된 경우가 더 많이 보이고 이를 통해 적극적으로 힉스 입자를 찾아야 한다는 신념 체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힉스 입자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막대한 연구자금을 승인할 수 있었을까? 과학은 확실한 것에 대한 검증이 아닌 신념에 대한 도전이다.

결국 힉스 입자에 대한 신념, 믿음이 없었다면 시도조차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어떤 발견을 위한 시도를 위해서는 단순히 논리적 타당성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이론을 검증할 과학자들의 믿음 즉, 신념 체계가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후의 과정은 좀더 반복적 (routine) 이다. 이론에 반증되는 가능한 사례를 찾아보고 그런 반증의 사례가 적용되지 않는다면 지속적 신념으로 굳건히 만들 수 있고 그 신념 체계에 따라서 응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힉스 입자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있다면 그 이후 자연스러운 과정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하더라도 힉스 입자를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할 것이다. 여기서 힉스 입자를 설명하는 가장 직관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다.

당신이 마른 흙바닥과 진흙 길과 늪을 지나갈 때 당신이 느끼는 힘은 크게 다르다.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이런 저항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걷는데 아무런 저항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힉스 입자는 이처럼 자연에 어떤 물체가 더 무거운지 덜 무거운지 질량의 차이를 구별하게 만들어 주는 입자이다. 만약 힉스 입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연의 모든 물질은 광속으로 떠돌게 될 것이다. 

힉스 입자에 대한 초기 생각은 사실 우주의 탄생 초기 질량이 어떻게 만들어지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여러가지 이론과 다양한 자연의 현상에서 뛰어난 상상력의 물리학자들은 힉스 입자를 상상하게 되었고 그 상상이 신념이 되었다. 즉, 절대적으로 힉스 입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인간이 존재하든 아니든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문제는 존재를 인식하는 인간이 없다면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과학은 인간의 작업이고 그 작업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시작점은 결정적 증거가 아니라 마치 순간적 도약 (quantum leap) 과 같은 생각의 도약이다. 그리고 그 생각의 도약은 하나의 가설이 되고 그 가설이 맞다는 가정 하에 신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념 체계의 극단은 이념이 된다. 

한때는 누군가의 논리가 정확하고 설득력이 있다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득될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즉, 인간은 보편적으로 논리적 타당성 앞에 쉽게 수긍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의 모습을 생각하면 별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된다. 너무도 극단적 신념 체계는 많은 무고한 사람을 죽여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를 영웅으로 묘사하는 사람들도 보게 된다. 그들을 논리로 설득시킬 수 있다면 세상의 폭력과 테러는 크게 줄었을 것이다.


정의 (justice) 도 그런 맥락에서 생각해봐야 한다.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정의를 따르려 한다. 아니 적어도 따라야 한다고 그 당위성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정의 (justice) 를 정의 (definition) 하는 방법과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다. 무엇을 믿을 것인지, 무엇이 중요한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다른 이유는 각자가 믿는 신념 체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자신이 환경보호주의자라면 환경을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생기는 경제적 손해에 대해서는 감수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같은 입장을 두고 경제적 이익이 사람들의 삶의 질에 있어 중요하다고 믿는다면 환경을 좀 훼손해서라도 경제적 이득을 우선시 해야 한다. 이처럼 같은 사안, 상황에 대해서 다른 주장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각자가 생각하는 정의가 다르기 때문이다.

환경을 인간을 위해 자원을 채취하는 대상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 살기 위한 공간으로 볼 것인지는 신념에 따라 달라진다.

문제는 사람들 사이에는 이처럼 서로 다른 다양한 정의 (various justices) 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때문이다. 즉, 정의란 보편 타당하고 어떤 인간에 대해서도 동일한 마치 만유 인력의 법칙처럼 그 법칙에 예외를 가지는 존재는 없는 것 같은 일종의 보편법칙 (universal laws)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고요 속에서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주장하는 대부분의 정의란 자신의 신념 체계를 실현시키거나 주장하기 위해 정의란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개인적으로 기독교인 (Christian ; Roman Catholic) 이지만 그렇다고 불교의 교리가 '틀리다'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랜 시간을 거치고 많은 사람들의 지혜가 담긴 종교일 수록 종교의 본질과 내용은 거의 비슷하다 못해 동일하다는 사실은 조금 놀라운 사실이다.

인간의 심한 갈등과 문제는 대부분 이런 신념 체계의 대치와 갈등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종교는 아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근본적 문제가 종교의 이질성이라면 서로의 종교에 대해서 대화를 하며 무엇이 이질적인지 살펴보면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을 만들어 내는 (trigger) 신념 체계는 이미 형의상학적 개념의 뜬구름 같은 대상이 되어버리고 행동의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한 허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폭탄 테러를 하게 된 사람에게 "왜 폭탄 테러를 했냐는 질문" 은 별 의미가 없다. 자신의 행동을 유발시킨 신념이 종교라고 하더라도 막상 종교의 어떤 이유인지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종교가 제시하는 내용과 자신의 신념 체계는 이미 괴리된 상태라는 것이다. 즉, 어떤 종교도 '사랑'을 강조하지 않는 종교는 없다. 특히 이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자신과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고 죽일 수 있다는 것은 종교가 가진 근본적 모습은 결코 아닐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종교가 자신의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하는 (말도 안되지만 백만번 양보해서...) 내용이 있다고 하여도 그 신념 체계는 내제적 갈등 (intrinsic conflicts) 이 만들어진다. 만약 테러를 저지른 사람이 자신의 종교가 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죽여도 좋다는 규율이 있다고 해도 무분별한 불특정 시민을 상대로 테러를 일으켰을 때 그 테러의 피해자 중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이 없을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냐고 물어본다면, 결국 테러의 행동을 만든 신념 체계는 종교의 가르침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잘못된 신념 체계가 만든 결과일 뿐이다.

이념은 흔히 신념 체계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념이 강한 사람은 이념이 강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과학의 신념 체계를 통해 바라본 것처럼 신념 체계는 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가져야 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념은 이런 검증과 확증의 과정 (verification & validation process) 을 두려워 한다.

이념 인간을 파괴하는가?

이전 블로그 [ 이념이 인간에게 해준 것은... ] 을 통해 이념은 처음 인간이 문제 해결을 하기 위한 개념으로 도입하였지만 처음의 생각은 잊어버리고 인간을 손쉽게 제어하기 위한 인간의 욕심이 만든 산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인간을 위한 참된 이념이라면 옳바른 신념 체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 신념 체계는 본질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항상 검증을 받고 확증을 받지 않는다면 버리고 수정해야 한다. 즉, 자기 반성과 자기 변화를 만들어 내는 혁신이 존재하지 않는 어떠한 신념 체계는 결국 인간을 조정하고 사적 욕심이나 공명심을 이루기 위해 만들어진 불안정한 사적 사유 (private possession) 일 가능성이 높다.

즉, 신념 체계를 포장하며 사적 사유는 독단적이고 망설임이 없다. 옳고 그름에 대한 정확한 구별을 하고 그 세상에는 정의란 명확하다. 사적 사유를 하는 지도자 혹은 독재자의 경우 개인적 감정과 개인적 사고에 맞춰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틀린 것은 틀린 것이다. 그 이외 도전받는 반증에 대해서는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크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자신이 옳다는 것에 대한 강한 확신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공포와 불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증이나 검증에 대해서 수용과 타협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무시하고 강압하여 제거하려는데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신념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강조하지만 신념 체계는 변화할 수 있는 가변성에 대해서 얼마나 여유있게 수용하는가에 따라서 보편성을 가지게 된다. 수용성이 존재하지 않는 소위 개인적 신념 체계는 결국 이념적 편향성이 되고 그 편향성은 누군가를 억압하는 효과적 수단이 된다.

전체주의는 개별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양성이 가저오는 반증에 대해서 수용하지 않으며 두려워 한다. 그렇기에 반대 세력에 대한 억압으로 이루어진다.

사적 사유 [개인적 신념 체계] 보편적 신념 체계를 구별하는 첫번째 방법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바로 수용성에서 찾아야 한다. 수용성은 자신의 신념 체계가 언제든지 틀릴 수도 있지만 좀 더 보편적인 진실 (comprehensive truth) 에 접근한다는 즐거움을 찾는다. 두번째 특징은 앞서 설명한 내제적 충돌이다. 즉, 내제적 기준을 통해 평가를 하여도 자신의 행동이 그릇된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내제적 기준을 생각해보자. 내제적 기준이란 보편적 기준이 아니라 비록 보편적 혹은 대중적 기준에 의해 평가해도 조금은 이상한 행동이지만 그 행동이 개인적 가치관에 따라 행동된 것이라면 그 개인적 가치관을 그대로 인정해주고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그 가치관에 따라서 다른 행동을 평가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내제적 기준에 적합한 행동을 한다면 비록 사회적 대중적 이목으로 참 나쁜 사람이라고 해도 내제적 기준으로는 지조있고 자신의 가치관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올곧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2013년 대한민국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종북에 대한 신념 체계를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종북 세력이 대한민국에 많은 곳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가치관은 종북 세력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종북 세력이 사회와 국가를 망치고 있고 결국 대한민국을 망하게 하여 북한에 좋은 짓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 기준을 모두 인정해보자. 그리고 주장대로 우리 사회 곳곳에 종북 세력이 있다. 그렇다면 그 애국심에 그들이 해야할 첫번째 행동은 자신이 알고 있는 종북 세력을 끝까지 찾아내 그들을 고발하여 법의 심판을 받게 해야 하는 것이다. 즉, 실체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신념과 그들이 국가의 해라는 신념을 통해 살펴보면 종북 세력을 누군지 찾아내 그들을 밝혀 내는 것이 국가를 위한 길이다. 그런데 있다고만 이야기하여 불안을 조장하고 누구인지 실체를 밝혀 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라를 위하는 그들의 우국충정을 생각한다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 된다. 즉, 나라를 걱정하는 그 애국심이란 신념 체계에 비춘다면 구체적으로 밝혀내는 것이 그냥 "존재한다" 란 식으로 불안을 만드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하는 것이다. 종북 세력의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지 않고 불투명하게 발언하는 것은 결국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를 조장한다면 이는 대한민국을 위한 길일까? 결국 애국심의 신념체계와도 대치되게 되는 것이다.

념 체계의 형성과정을 생각한다.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신념 체계는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변해야 그 생명력이 유지되는 것이다. 과학의 신념 체계와 마찬가지로 내가 배운 지식을 모두 종합했을 때 내가 믿어야 하는 어떤 무엇인가가 생긴다는 것은 세상의 다른 대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의 방법을 제시해준다. 1900년대 초 물리학자에게 빛이 입자인지 파동인지 결정하는 것은 이러한 신념 체계의 한 과정이 되었을 것이다. 빛이 파동이라고 믿는 물리학자들은 그 신념 체계를 바탕으로 실험을 했고 입자라 믿는 물리학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현상과 실험 결과는 자신의 신념 체계를 강화시키기도 반증하기도 했다. 그중에는 빛이 파동이라고 굳게 믿는 물리학자도 있었다. 빛이 입자의 현상을 보이는 실험 결과가 나올 때 (예를 들어 광전효과) 그들은 자신의 신념 체계를 변화시켜 내용을 수정할 수 있거나 아니면 기존의 주장을 굳게 믿어 빛이 파동이란 입장에서 실험 결과를 해석하려고 할 것이다. 경우에 따라 그런 해석은 신선한 발견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억지나 억측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정치에 있어서 신념 체계도 비슷하다. 자신의 정책이 잘못되었을 때 그 잘못을 인정하고 수정하는 것은 현명함이다. 오히려 밝혀지는 사실과 상황에 수긍하지 않고 억지로 자신의 기존 생각을 끼워 맞추려고 할 때 억지와 억측이 생기고 그런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강인한 추진력을 박수치기 보다는 그 억지스러움에 실망하게 된다.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은 그 어떤 유연성보다 강하다. 그리고 자신의 사적 신념을 실현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즉, 사회적 인간으로 세상에 좀 더 도움이 되는 체계를 원한다면 신념 체계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용하고 항상 변화할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 한다.

념 체계는 왜 중요한가? 

신념이 중요하냐? 라고 물어본다면 중요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것처럼 신념 체계가 독단과 사적 사유로 변질되어 하나의 이념처럼 누군가에게 강요되는 구조가 된다면 그런 내용은 더이상 신념 체계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즉, 이념이란 이유로 사람들을 강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대부분의 내용들은 왜 신념 체계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의 내용일 가능성이 높다.

신념 체계를 과학에서 먼저 생각해보면 만약 어떤 물리학자가 빛이 입자라고 믿었다면 그 신념 체계에 따라서 실험의 설계와 시행이 달라질 것이다. 보다 빛의 입자성을 보여주는 실험을 수행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신념 체계를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태양열을 전기로 전환하는 기기를 만들게 된다면 그 기기의 설계 자체도 달라질 것이다. 즉, 입자인 빛이 광전효과를 일으킬 수 있도록 입사각과 광전효과가 크게 일어나는 물질을 사용할 것이다. 이와 같이 신념 체계가 무엇인가는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해주는 결정적 요소이다. 복지를 두고 생각해도 비슷하다. 복지 정책 결정권자가 가지는 '복지에 대한 신념 체계'가 무엇인가는 중요한 정책의 방향이 된다. 예를 들어 복지에 대해서 국민들에게 국가가 펼치는 시혜(施惠 ; 은혜를 배품) 이라고 생각한다면 보편적 복지는 그 은혜를 받을 필요가 없는 국민들에게는 불필요한 낭비가 될 것이다. 그러나 국민을 단순히 시혜의 대상이 아닌 국가의 운영에 있어 중요한 자원이고 그 자원이 가용자원 (능동적 경제 인구) 이 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인간적 장치를 마련하는 투자라 생각한다면 보편적 복지에 대해서 적극적 시행을 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대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기본적으로 그 대상이나 상황에 대해서 자신이 어떤 신념 체계를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스웨덴 복지의 정책은 오랜동안 변화를 겪었지만 가족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가족 중심의 신념 체계는 변화하지 않았다. 신념 체계의 중심은 무엇이 더 가치있는가를 결정해 준다.

아주 기본적으로 이런 경우 개인적 가치관 혹은 개인적 철학적 사유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가치관, 지식, 지혜 여러가지의 내용이 혼합되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인생관이 신념 체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역량과 위치에 따라서 이런 신념 체계의 적용범위는 다양해진다. 만약 정책 결정권자의 위치에 있다면 신념 체계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게 될 것이다. 짧게 생각하면 한 개인이 어떻게 많은 대중을 망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거나 요즘같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한사람의 독단이 어떻게 세상을 망칠 수 있을 것이냐? 라고 하겠지만 한 사람의 신념 체계가 지극히 사유화 되어 앞서 설명한 이념화되어 사적 사유가 된다면 그 잘못된 사적 사유는 잘못된 정책의 방향을 만들기 충분하다.

인적 신념 체계에 대해서... 

너무 많은 이야기가 정리되지 않은 체 마무리되면 글만 길어지기에 이쯤에서 개인적 신념 체계를 통해 마무리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그동안 많은 정보를 얻어가며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에 대해서 판단하는 것이 때로는 참 무의미할 수 있다는 생각을 만들었다. 가장 큰 이유는 강직되어 고정된 신념 체계에서는 결국 자신을 파괴하기 쉬워진다는 것이다. 풀어 설명하면 내가 어떤 신념 체계 혹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경우 그 신념 체계를 반증하는 별 것 아닌 예에도 쉽게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한때는 내가 가톨릭 신자로 중세시대 부패한 가톨릭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설명해 보라는 질문에 당황한 적이 많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교회도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잘못을 극복하며 더 보편적 신념 체계를 위해 변화하였다.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은 변화되지 않는 신념 체계가 아니라 '변화하는 힘을 가진 유연한 신념 체계'이다.

그런 변하지 않는 신념 체계를 만들지 않기로 다짐하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그래도 내가 앞으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며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떤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지 결정하는 기준이 되는 신념 체계에 대해서는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신념 체계 중 몇가지 중 하나는 '열역학 법칙'이다. 그중 비가역성 (reversibility) 과 상상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유한성 (fineness) 이다. 그리고 설명하기 힘들지만 종교적 신념도 있다.

열역학적 비가역성은 재활용, 재사용이 중요한지,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는 것이 중요한지 선택의 중요성을 부여한다.

비가역성과 유한성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세상을 바라볼 때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 무한정 사용할 수 있는가? 사고 실험으로 내가 무한의 자본을 가진 인간이라고 했을 때도 성립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또한 내가 그렇게 자원을 독식해서 사용하게 될 때 정말 나는 무한한 만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즉, 내가 살아가는데 얼마나 많은 자본이 필요한지에 대한 궁극적 질문을 단순히 자본의 무한성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자원의 유한성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신념 체계 중 열역학 법칙이 제공하는 비가역성, 사용 가능한 자원의 유한성에 그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의 신념 체계가 세상은 쓸 수 있는 무한한 자원이 있다고 본다면 그런 사람에게 세상은 아무리 써도 문제가 없는 세상이다.

사회 현상, 현안에 대한 시선도 신념 체계를 통해 바라보게 된다. 예를 들어 강정에 해군기지를 세워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한번 훼손된 자연을 다시 복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해군 기지가 꼭 강정 지역이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살펴보기 힘들다. 또한 해군기지가 만들어질 때 그 해군기지를 유지 보수하고 운영하기 위한 경제적 비용이 자연을 보존했을 때의 경제적 가치보다 얼마나 더 큰지에 대해서 비교하게 되었다. 그런 모든 문제를 살펴볼 때 단순히 감정적 판단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신념 체계에 비추어 무엇이 더 좋은지를 판단하는 것은 타인에게 더 멋진 결론을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아니라 바로 내제적 기준에 항상 적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은 것인가? 정통적 신념 (orthodoxy) 란 무엇인가? 고민하지 않은 정통은 그 자체로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스스로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물론 이런 신념 체계는 변화할 수 있다. 그러나 열역학 법칙이나 종교적 신념 체계가 아직까지 크게 배신하거나 큰 방향을 수정하게 만들어 준 반증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반증이 없는 한 커다란 확증이 없어도 계속 믿어가게 될 것이다. 고정된 신념 체계를 믿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변화할 수 있는 그 가능성에 항상 설레이고 항상 두렵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알게 되어 어떤 반증을 찾아내어 나의 신념 체계가 수정된다고 해도 그것은 나의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전되는, 항상 희미한 진실의 서막 중 한꺼풀을 벗기어 내는 과정이라고 믿으며 그 과정의 즐거움을 찾으려 할 것이다.

그런 변화에 대한 믿음이 만들어 가는 신념 체계가 인간 진보의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믿는다.
이것이 나의 세번째 신념 체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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