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October 26, 2013

물건에 욕심내지 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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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동안 쓰던 노트북이 있다. 컴퓨터와 지내는 시간도 많고 컴퓨터 가지고 하는 일도 많은 사람에게 6년동안 계속 쓴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당시 가장 고가의 노트북이고 지금 나오는 어떤 노트북보다 가볍고 성능도 떨어지지 않는다. CPU 의 컴퓨팅 파워 (computing power) 가 떨어지긴 하지만 서버 작업을 하는 워크스테이션 터미널 역할로는 충분히 강력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 지금까지 생각해보면 6년동안 운영체제를 딱 3번 깔았으니 상당히 오랜동안 잘 쓰고 대부분 기분 전환을 위해서 조금 다른 운영체제를 써보기 위한 시도였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어 다시 설치한 적은 없었기에 나에게 충분히 좋은 환경을 마련해준 놈이다. (본 내용은 2013년 8월 1일의 일상을 다시 펼치어 쓴 내용이다.)

노트북의 분해는 마치 오랫동안 목욕하지 않은 친구를 대중목욕탕에 보내는 기분이다.

그런 노트북이지만 가끔 분해해서 노트북 내부를 청소한다. 내부를 청소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어떻게 그리 큰 먼지 덩어리들이 그 안에서 자라고 있었는지 놀라울 때가 많다. 분해하는 것이 까다롭고 번거로운 작업이 많아 잘못 건드리면 부품이 손상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조심해서 분해했지만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능숙하게 가벼운 마음으로 분해하게 된다. 분해하고 상상 이상의 먼저 덩어리를 날리고 부품하나하나 기름칠하고 팬은 소리가 덜 나도록 조율해주고 이것저것 봐주고 다시 조립해주면 정말 팬소리도 부드러워지고 느낌인지 모르지만 터치패드도 민감해져 쓰기 편해지고 한결 깨끗해진 기분이다.

건에 욕심내는 것이 뭐 어때서? 

한때는 기기에 욕심이 많았던 적이 있다. 안드로이드 폰을 중심으로 애플의 제품 한두개 정도는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가지고 있을 때는 항상 무엇에 쓰겠다는 명확한 사용 용도와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비슷한 전자 기기 몇개를 들고 다니면 기기마다 추가되는 주변기기 뿐만 아니라 항상 충전하는 것도 신경쓰이고 막상 정보를 검색하려 어떤 한 기기를 선택해도 특별히 각 기기만의 아주 뛰어난 (outstanding) 기능을 경험하기는 어려웠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 어느정도 전자 기기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어떤 기기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점점 느끼게 된다.

그래서 한때는 안드로이드 전화기에 아이팟, 안드로이드 타블렛에 노트북도 13인치 하나에 작업용으로 쓸 수 있는 15인치 노트북도 같이 가지고 다녔다. 사실 이것들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하려고 할때 어떤 것을 가지고 작업을 수행할 것인가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6년동안 정든 노트북 하나면 거의 대부분의 작업이 가능했고 오히려 쓸데없이 다른 기기를 통해 작업을 하려고 할 때는 번거롭고 설정하는데 시간이 더 많이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잠자리에 누워 내 주변에 널린 전자기기를 보면서 도대체 내가 이것들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대부분 앱을 받아 앱 테스트하는 베타 테스터 역할만 열심히 하지만 정작 내가 필요한 내용들을 제대로 수행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노트북 하나와 안드로이드 휴대폰 하나만을 남기고 모두 다 처리해버렸다.

신제품 구매의 그 설레임은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 2년동안 그럴 수 있다면 분명 물건때문에 세상은 행복해질 것이다.

신제품이 나오면 사람들이 있는 어떤 인터넷 공간이나 현실에서도 신제품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이번에 무엇으로 바꿀까? 그리고 대부분 새로운 디자인, 새로운 기능에 만족하며 그런 내용들이 본인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 강조한다. 그리고 신제품이 출시되면 여기저기 사람 사는 이야기는 줄어들고 물건 사는 (live or purchase?)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광고나 인터넷 리뷰에 나오는 제품에 개인적으로 혹한 적도 많다. 그런데 몇년전부터 노트북 구매를 위해 나오는 지원금이나 특별히 개발을 위해 필요한 기기가 아니라면 가지고 다니며 사용하지 않는다. 노트북 하나에 핸드폰 하나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기기 (device) 가 우수하다면 일을 우수하게 처리할 수 있는가? 충분히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분명 대한민국은 전자 기기에 대한 상당한 애착이 형성되어 있다. 첫번째는 그 물건을 소유하기 위한 애착 뿐만 아니라 소유한 물건이 손상되지 않도록 쓰는 애착의 정도도 상당히 크다. 물건에 흠집이 날까 구매하자 마자 전신 (full body) 필름으로 보호하고 사용하고 혹시나 떨어뜨리거나 충격이 가해져 부셔지면 정말 진심으로 마음 아파한다.

문득 안젤름 그륀 신부님의 책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마라」중 한 부분이 떠올랐다.

인간은 내적으로 자유롭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상처 입히는 것을 허용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의 책임이다. 왜냐하면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있으면, 즉 자기 중심을 가지고 서 있으면, 어느 누구로부터도 상처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때 어느 누구도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

에픽테토스에게 고행은 “외적인 것들(일, 사물)이 본래의 자아의 신성한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우선 자기 인식(‘너 자신을 알라’)을 통해 자신의 참된 존재(Sein), 자기 자신(AUTOS)을 알고 한계를 정해야 한다” 에픽테토스는 우리가 이 내적인 참자아(Selbst)로 가려면 먼저 사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리의 표상들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적 자유로 가는 중요한 길은 사물에 관하여 올바른 표상을 형성하는 데 있다. 이 올바른 표상은 평상시에 우리의 행동을 조정하고 날조하는 관념과 구별될 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통용되는 표상들과도 구별된다.

에픽테토스는 “사람들이 사건 때문에 혼란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사건에 관한 표상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다”고 말한다. 죽음 자체가 끔직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음에 관하여 지니고 있는 표상이 끔찍한 것이다. 산산조각 난 꽃병 자체가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을 꽃병과 동일시하여, 꽃병이 깨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온 마음으로 꽃병에 집착하는 것이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돈을 잃어버렸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놓은 돈의 표상, 즉 돈은 꼭 필요하며 돈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상처를 입힌다.

인간이 올바른 표상을 가지면 더 이상 물질을 통해서는 고통받지 않고, 오직 하느님을 통해서만 고통받게 된다. …

물건에 욕심을 가지는 마음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물건에 욕심이 커지면 커질수록 안젤름 그륀 신부님의 글처럼 물건 자체가 가지는 가치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물건이 가지는 표상에 의해 물건에 집착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제품 발표회를 보며 "저 기능은 꼭 나에게 필요해" 라고 마음먹지만 사실 그런 기능이 왜 중요한지 내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에 대한 표상일 뿐 현실이 되려면 결국 인간의 현실적 사용이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즉, "저 물건만 가지면...!" , "저 물건을 통한다면...!" 과 같이 물건의 소유가 나의 삶의 새로운 혁명을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제품을 팔려는 회사가 만든 환상의 표상일 뿐이다.

자기기가 우리에게 주는 것들은? 

사람이 변하지 않았는데 물건을 통해 변화한다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즉, 물건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나는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대부분 물건에 의해 사람들은 점점 더 멍청해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세상의 모든 모바일 환경을 바꿀 것 같았던 아이폰을 보면 그렇다. 많은 사람들은 아이폰이 자신의 삶을 바꾸었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고 정보를 검색할 수 있고 좀 더 편리해진 자신의 삶이 향상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주변에서 바라본다면 언제 어디서나 아이폰 화면에 파묻혀 온 시선이 화면에 머무르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도 자신의 핸드폰으로 메세지나 소셜 미디어의 그런 저런 글을 넘기는데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핸드폰에 집중하며 막상 자신과 함께 하는 사람들과는 소흘히 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스마트폰에는 무엇이 그리도 많은 것들이 있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스마트폰에서 무엇을 찾는 것일까?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카페에서는 들어서는 순간 핸드폰을 비롯한 전자기기를 꺼내지 않는 것이 규칙인 곳이 있다. 혼자 있는 사람이라도 핸드폰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가야 하고 실내에 있을 때는 핸드폰을 확인하지 않는 것이 규칙이다. 특별히 이 규칙을 어긴다고 해도 특별한 벌칙이나 벌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강제된 "쓰지 않는 자유로움"을 억지로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불편해 하지만 그동안 핸드폰과 전자기기에 얼마나 구속된 체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지 않았는지 느끼게 된다.

트북을 다시 조립하며... 

새로 생긴 노트북으로 바꿔 좀 더 쾌적한 환경에서 작업하면 모든 능률이 높아질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막상 6년동안 쓴, 그래서 새 노트북을 받으면 그냥 먼지 쌓이게 놔두며 집안 구석에서 간단한 서버 역할이나 해놔야지 생각했는데 딱히 그렇게 바꿀만큼 나를 배신한 적이 없던 것 같다. 신촌의 모 카페에서 걸쭉한 라떼를 쏟아 자판 사이 사이 라떼를 먹어도, 하도 오래 사용해 입자광 가속기의 충돌된 입자가 방출될 것 같은 번쩍거리는 팜레스트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이렇게 오랫동안 내 곁에서 논문도 모든 발표 작업도 모든 문서도 모든 프로그래밍도 다 같이 해준 친구같아서 그냥 계속 쓸 수 있을 때까지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올해도 지역 빈민들 중 노트북이 필요한 아이들 몇명에게 주는 기회로 삼았다.

다시 조립한 노트북은 정말 깔끔하다. 조금 뒤틀린 것 부분도 조정해서 균형을 맞춰주고 묵은 떼도 제거해주고 항상 그렇듯 아침마다 일어나 일을 시작하며 경쾌한 시작 소리를 내면 나도 같이 인사를 해준다. 항상 노트북 내부 청소를 해주고 나면 느끼는 것이 있다. 생명을 가진 존재도 마찬가지지만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잘 관리해주느냐에 따라서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는 사실. 그리고 역시 관리해주지 않으면 먼지 쌓이고 녹이 쓰는 물건이란 점이다. 언제부터 우리들은 자본적 충족과 물건에 대한 욕심으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별로 고민하지 않게 되었는지 모른다.

세상은 소비와 폐기의 순환 구조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소비와 폐기의 주체는 분리될 수 밖에 없다. 소비의 주체는 버린 물건의 폐기에 거의 관심이 없다.

물건은 물건이다. 관리해주지 않으면 녹이 슬고 먼지 쌓이는 존재일다. 그 말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언젠가 부셔지는 (degradable) 대상이란 점이다. 그런 무너지는 것들에 욕심을 가지고 우리에게 필요한 표상을 적절하게 만들어 물건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믿게 되면서 물건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물건은 우리를 절대 변화시킬 수 없다. 만약 사실이라면 인간의 정신이 물질에 의해 좌우될 수 있는 슬픈 현실 속에 사는 것이다. 문제는 물건에... 결국 물질에 욕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점점 더 가난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구매할 수 있는 자본에 의해 구매하고 소비되고 폐기되는 현실의 이면 (裏面) 에는 물건을 생산하기 위해 착취되는 노동과 보다 첨단의 물질을 만들기 위해 희생되는 많은 자원의 부산물 (being by-product) 이 만들어 진다.

념의 마무리... 

노트북 하나 조금 더 써보기 위해 청소하면서 별 생각을 다 하게 되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이폰이 신제품이 나올때마다 기다리며 새제품을 사고 교체하고 그렇게 쓸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은지... 막상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소비의 형태가 별로 문제가 될 것 같지 않고 이왕 쓸 수 있는 삶이라면 소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누리며 사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라고 믿을 것이다.

"좋은 목수는 연장을 탓하지 않는다" 

인간의 생산성은 기계나 물질이 변화시켰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산업혁명으로 변화된 삶의 모습, 대량생산으로 가능해진 물질적 풍요와 소비에서 인간은 진보되었다고 믿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인간은 소비될 수 있는 물질의 양으로 발전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인간의 진보는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렇게 풍요로운 삶 안에서도 끊임없이 인간 본연에 대한 고민과 관심으로 발전했다고 믿는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한다. 인간을 좀더 편리하고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많은 물건들은 왜 이런 물건들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조차 하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인간은 연민을 그저 인터넷의 사진이나 글들로 배우는 존재가 되었다. 안타갑지만 인터넷에 연결해주는 물건이 없다면 그 연민의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콩고는 핸드폰에 필요한 콜탄(Coltan)을 채굴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력을 이용한다. 그들은 거의 누리지 않는 물질에 대한 노동이다.

잡념을 이제 마무리하려고 한다. 물질적 풍요로움이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충분히 네트워크의 존재이다. 인터넷이나 소셜 미디어에 소속된 네트워크가 아니다. 우리가 풍요로움으로 당연한 것들을 누리고 살아가는 동안 그 풍요로움의 댓가로 세상의 반대편에는 누군가 굶어 죽어갈 수 있다면 참 슬픈일이 되어버린다. 물건에 대한 욕심, 충분히 풍족한 소비의 모습이 꼭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지만 그렇지 않다고 장담도 할 수 없는 세상이다. 바로 네트워크의 세상에는 자원이란 한정되고 집약적 생산을 위해서 다른 세상은 착취가 생길 수 밖에 없는 세상에 더 가까울 것 같다. 요즘은 자주 생각하게 된다. 내가 사용하는 슈퍼컴퓨터나 막대한 자원을 좀 더 착취당하는 혹은 전혀 쓰지 못하는 세상의 이면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란 질문이다. 막상 그 연결점이 쉽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런 연결이 실현될 수 있을까 의문이 더 커진다.

그러나 잡념을 끝내며 노트북의 마지막 나사를 조이며 생각하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스스로 나 자신에게만이라도 "물건에 욕심내지 말기" 를 생각한다. 그런 개인적 노력이 깨어지지 않기 바라는 꽃병의 수를 줄여가고 결국 나를 위한 길이라는 아주 개인적인 잡념과 단상의 결론을 만들어 본다.

6년동안 같이 해준 노트북 몽달이 (MESO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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