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ne 28, 2015

공감의 미학 ─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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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 근골격계가 발달하지 않았지만 활발한 아이가 엄마를 돕겠다는 마음으로 그릇을 잡고 가다가 놓치고 말았다. 그릇은 바닥에 떨어져 깨지고 아이는 놀란 마음에 멈춰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릇 깨지는 소리에 엄마가 놀라 달려와 아이가 다치지 않았는지 살펴보고 다친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소 큰소리로 아이에게 말한다.

"다친데 없어? 그러니깐 조심성없이 이렇게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그랬지! 어디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이러는거야!" 


비록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라고 해도 이미 사건은 일어났다. 비록 깨진 그릇의 파편에 아이는 상처입지 않았지만 아이는 이내 엄마의 목소리에서 나온 파편에 찔려 상처입고 말았다. 믿고 의지하던, 아니 의지할 대상이 거의 엄마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아이에게 엄마의 그런 모습에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그저 더 멍하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엄마는 이제는 자신의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계속 말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이렇게 조심성없이 뭐 가지고 다닐거면 가지고 다니지마. 다 너를 위한거야 그러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려고 해!" 

엄마는 아이에게 아이를 위한 것이라며 이야기하지만 아이는 그런 엄마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엄마는 그렇게 아이를 위한 것이라면서 이야기했지만 대부분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놀라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자신의 감정 그대로 아이에게 내 뱉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자신의 그런 모습에 대해서 오히려 아이에게 이해를 구한다. 다 너를 위한 것이라고...

감의 능력은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판단하고 상황을 분석하는 능력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이의 입장에서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려는 것은 아닐까. 이미 사고는 일어났고 결론이 난 일에 대해서 잘못, 옳음을 따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아이를 공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같은 상황에서 다른 엄마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아이가 아직 신체적으로 발달하지 않았고 아이는 분명 나를 도와줄려는 좋은 마음으로 그런 것이지' 라며 아이에게

"그럴 수 있어 걱정하지마 그럴수도 있는 것이지 실수할 수도 있는데 이렇게 하면 너가 다칠 수 있으니깐 앞으로는 조심하면서 하는 것이 좋겠구나" 

라고 이야기한다면 공감의 능력이 뛰어난 것일까?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첫번째 경우보다야 훨씬 아이가 상처입지 않도록 아이의 입장에서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조심할 수 있도록 알려주는 착한 엄마일지 모르고 이해심이 많기에 아이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한번 더 생각할 수 있는 사려깊은 엄마일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순간 자신의 아이라고 해도 모든 행동에 이유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유가 존재하지 않아 이해할 수 없을 때도 공감은 작동할 수 있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감은 있는 그대로 아이(상대방)의 감정에 묻어 가는 과정일지 모른다. 어떤 반응이 적절한 공감의 반응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공감에는 나... 내 중심이 사라지고 나를 죽여야 가능한 것들이 많아진다. 아이가 지금 어떤 감정일까, 어떤 마음일까... 를 먼저 살필려고 노력하고 지금 아이의 상태는 나보다 더 놀랐을 것을 느끼며 아이가 더 이상 다치지 않도록, 안전하다는 것을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일어난 이 사건을 분석하고 아이가 다시는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깨진 그릇에 놀란 바로 앞에 있는 아이라는 존재이다.


아이들은 분명 감정적으로 다치기 존재이다. 그것은 어른들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단 한가지의 원리Principle 만 기억하자. 아이를 당신의 논리와 규칙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게 한다면 당신 아이의 감정은 점점 더 위선적으로 변할 것이다. 그것은 부모의 책임이다.

아이의 문제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공감의 문제로 확장해도 비슷하다. 인간은 자신이 이해하는 범위에서 상대방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는 사이에서도 그런 것이 공감이라 생각한다. 즉, 상대방의 상황을 다 알아야 하고 상대방의 심리상태 모든 것을 다 파악하고 그 파악된 논리 구조가 자신의 논리 구조와 합일해야 그때서 자신은 상대방을 공감해준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공감이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해도 자신의 전적인 이해를 조건으로 생각한다.

랑한다는 것은 정체를 알 수 없고,
결코 채워줄 수도 없는 상대의 고독을 어루만지는 것이다.

— 크리스티앙 보뱅 (Christian Bobin)


크리스티앙 보뱅의 이 말을 참 좋아한다. 상대방이 나를 이해시켜야지만 나는 당신을 공감할 수 있다는 오만스러움은 인간을 어떻게든 서로가 서로를 설득시켜야 인간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는 지옥으로 만들어 간다. 그래서 내가 상대방의 슬픔을, 아픔을, 고통을 극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오만과 상대방을 잘 알고 있다는 교만은 결국 '나는 너를 다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넌 왜...' 라는 공감의 폭력을 만들게 된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자신이 이해할 수 없어도 상대방의 모든 행동들과 감정들에 묻어 가며 그 사람이 힘들어 하는 그 부분을 어루만지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의 고독이 어디있는지 찾는 것이 서로를 아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상대방을 위해 내가 어떤 어루만짐을 해줄 수 있는지 끊임없이 생각하는 과정, 기도가 필요한지 모른다.

그리고 그 어렵고 힘든 ... 그 것을 크리스티앙 보뱅은 '사랑한다는 것' 이라 정의내렸는지 모른다.

Ama et fac quod vis.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라.

- 성 아우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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