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une 30, 2015

인격적인 상처에 대해서 ─ 누구의 편이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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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의 삶에서 다툼 quarrel, argument, fight 이 없이 살 수 없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모두 다 다르기 때문에 아주 중립적인 대상에 대해서도 서로의 시선이 다르고 생각하는 방법이 다르고 표현하는 방식조차 다르게 된다. 어떤 하나라도 같을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 비슷한 영역이 존재하면 그래도 마음이 맞는다 생각이 비슷하다 말하게 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사람 사이의 다툼은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면 오히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다툼이 어쩔 수 없다면 그 다툼을 어떻게 해결하는지도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묘안의 해결책이 존재한다면 인간 사회는 갈등이 없을 것이다. 그 수많은 갈등 해결은 결국 누구와 누구의 다툼인가 어떤 상황이 존재하는가와 같은 외부적인 요소 뿐만 아니라 다툼의 당사자들이 가지고 있는 입장, 성격 등 내부적인 요소에 따라서 복잡한 결과를 만들어 낼수 밖에 없다. 모든 다툼의 과정을 일반화시킬 수 없지만 개인적인 경험에서 느껴지는 몇가지를 통해 그 과정을 생각해 보고 싶다.

툼의 시작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라고 알고 있지만 대부분의 다툼은 다름은 곧 틀림이라는 순간적인 충동(?)에서 시작한다. 상대방의 사소한 생각, 말 그리고 행동 중 자신의 시선에서 알수는 없지만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상대방이 아무 생각없이 말을 했지만 '자신을 무시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변기 뚜껑을 내려놓지 않은 남편의 행동이 기분 나빠서 아내는 곧 신경질 낸다. 물론 상대방이 잘못을 하는 부분도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 다툼의 시작은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 상대방의 어떤 부분이 내 감정을 건드렸기 때문에 시작한다. 냉정하게 따지면 대부분의 다툼은 냉정하지 못한 감정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그 이후 감정의 발전 단계는 조금 이상하게 연결된다. 감정적으로 시작되었지만 상대방의 생각과 말과 행동 중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변기 뚜껑을 내리라고 말했잖아' 와 같이 약속혹은 서로간의 합의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며 계약의 위반을 통해 잘못을 설명하거나 하루종일 게임을 하는 맘에 안드는 자식을 보면서 '학생이 공부를 해야지 게임만 하면 어떻게 해!' 와 같이 신분이나 위치에서의 당위적으로 해야할 본분을 행하지 못함을 말하기도 한다. 그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아무리 시작이 감정적이라고 해도 그 이후 진행은 대부분 도덕적 당위, 윤리적 책임을 포함하여 불성실, 불이행 등과 같이 상대방의 잘못을 찾아내는 상당히 논리적인 과정을 거치게 된다.

구의 탓이어야 하는가

이제 다툼이라는 사소한 표현을 떠나 조금 더 큰 범위의 '갈등'이라는 말로 대신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대부분 다툼도 갈등의 한 부분이고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은 근본적으로 인간 관계에서의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다가 다툼과 같은 아주 사소한 계기로 불이 붙기 때문이다. 넓은 범위에서 결국 인간의 사화 활동은 갈등을 어떻게 관리하고 처리하는가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갈등의 진행과정에서 재미있는 현상이 있다. 결국 갈등이 있다는 것은 같은 대상에 대해서 바라보는 시선도 다르고 그 다른 시선때문에 지금 다툼이 있는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변기 뚜껑을 내려놓지 않는 남편은 부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항상 잘못된 습관과 자신 (부인)을 배려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남편의 입장에서는 어쩌다 실수한 부분을 너그럽지 못하게 받아주지 않고 따지는 것이고 때로는 남편의 권위를 무시한다는 생각까지도 해서 더 갈등은 깊어질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있다. 바로 상대방을 생각하며 그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과정이다. 즉, 이미 갈등의 시작에서 누구 하나가 자신의 잘못을 쉽게 인정하게 된다면 그 갈등은 깊어지기 어렵다. 결국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은 양쪽 모두 자신의 탓이라기 보다는 상대방의 탓이 더 크다는 생각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제의 원인을 찾는 전문가들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은 문제의 원인은 상대방에 있다는 조건에서 시작한다. 가끔은 갈등 자체를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자책하거나 혹은 상대방의 비난을 그대로 표면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갈등은 단지 물리적으로 다툼이 존재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쌓여 항상 갈등이 터질 수 있는 화약고 같은 상태도 포함되어야 하고 사실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결론적으로 갈등이란 문제의 원인을 상대방에게서 찾으려는 힘든 과정이다.


갈등의 순간 사람들은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지 상대방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서로 다투는 과정은 사실 많은 사람들은 피하고 싶은 과정일지 모르지만 사람을 더욱 더 알아가는 과정에서는 어쩌면 더 필요한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크게 두가지 유형의 사람들의 태도를 생각해본다.

1.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은 상대방에 있고 상대방의 인격, 성격 등 근본적인 잘못으로 인해 이 모든 문제가 발생했다고 생각하는 태도

2. 상황 situation 과 상태 condition 를 파악하려 노력하고 실수 mistake 와 오해 misconception 을 구별하고 원인을 찾으려는 태도

격적인 상처를 주다...

첫번째의 태도는 생각보다 많이 경험하게 된다. 아주 단적인 예로 '너는 이기적인 인간이야', '왜 이렇게 사람이 조급해', '너는 이게 문제야 항상 조심성이 없어' ... 와 같이 상대방은 어떠하다 와 같이 상대방의 근본적인 성격, 인격 등을 단정적으로 표현하는 태도이다. 일상의 갈등에서 잘 들어보면 이렇게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려고 하는 상대방의 태도를 들을 수도 있다. 이런 근본적인 판단을 내려버리면 문제의 원인은 아주 깔끔하게 상대방의 문제이다. '너는 이기적인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은 생각하지 않고 변기의 뚜껑을 내려놓지 않고 나온다' 라고 결론을 내려버리기 때문에 자신은 이 갈등에서의 피해자일뿐 문제의 원인은 상대방에 있다고 정리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상대방의 근본적 성격, 인격적 내용을 건드리는 것은 아주 효과적이다. 상대방을 아주 나쁜 사람을 만들어 버리면 문제의 원인 뿐만 아니라 다툼의 승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듣는 입장이라면 얼마나 기분이 나쁜가. 감정이 얼마나 상하는지 상상하면 아무리 가까웠던 사이라도 이런 말에 대해서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경우 한사람 이상의 이런 태도는 갈등을 완전히 다른 형태로 전환시켜버린다. 첫번째는 최초 갈등이 무엇에서 시작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처음의 변기 뚜껑은 아내의 경우 '이기적인 남편을 합리화하기 좋은 도구'가 되고 남편은 그런 사소한 변기때문에 자신이 이기적 인간이 되었다는 억울함과 분노의 아이콘이 되어버린다. 결국 갈등은 변기에서 인격의 문제로 승화(?)되게 된다. 즉,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남편은 성격을 싹 뜯어 고치고 남편 안에 존재하는 모든 이기적 요소를 버리기 위해 수많은 고행과 번뇌를 감수해야만 할 것 같은 소위 인격 개조 프로젝트로 발전하게 된다. 반면 남편은 자신이 이기적이 않다는 것을 해명하기 수많은 예를 들며 아니라고... 말하면서 더욱 더 알수 없는 스스로의 찌질함에 빠져들게 되어버린다. 인간적인 상처를 받은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상대방을 단적으로 성격이나 인격을 단정지어 말하는 태도이다. 아무리 상대방을 잘 안다고 해도 상대방은 무엇이다, 어떻다 말하는 것은 참 거짓을 떠나 한 사람이란 우주 cosmos 를 무시하는 것이다. 한사람의 역사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에 현재의 한 사람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고통과 아픔, 기쁨과 희열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복잡하게 만들어진 한 서사시같은 존재이다. 그건 금수저를 물고 나와 화려한 삶만을 살았던 사람이나 부모없이 어렵게 자라고 힘든 여정을 거친 사람이나 상관없다. 그 복잡한 우주를 지구의 시궁창만 보고는 '우주는 시궁창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의 진실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소위 함부로 말한다는 것 중 사람의 성격이나 인격을 함부로 규정하는 것은 갈등을 심화시키고 심지어 자신의 잘못도 존재하는 갈등의 문제에서 상대방의 근본적인 문제로 인해서 발생했다고 믿고 갈등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미는 무책임한 행동도 정당화시킨다.

개인적으로 이런 태도는 '인격적인 상처' 를 만든다고 표현하고 싶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한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어한다. 최소한 개인적으로 인간은 그런 존재일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인격적인 상처는 자신을 한순간에 규정해버리고 자신이 지향하고 싶은 모습이 아닌 지양하고 싶은 모습으로 공격받는다. 이타적이고 남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던 사람이 '이기적인 인간이다' 라는 말을 들으면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지만 아주 강한 정신력을 가져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라면 그런 인격적인 상처에 쉽게 빗장을 내려 공격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런 인격적인 상처를 주는 사람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그런 말들은 힘들고 아프게 다가오기 쉽다.

등 해결의 전문가가 되고 싶다...

첫번째와 다른 두번째의 경우를 생각해 본다. 인격적인 상처를 쉽게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인간은 정적인 존재가 아니다. 동적이고 하루에도 나쁜 생각과 좋은 생각이 혼돈을 이루며 사는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은 실수를 한다. 그런데 그런 실수의 원인이 원래부터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너의 그 삐뚫어진 인격때문이야 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자존감은 얼마나 흔들리겠는가. 결국 자신만 바라봐도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다양한 모습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상대방을 평가하고 바라볼 때는 아주 단순화시킨 명제로 단정해버린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 요소와 이타적 요소 때로는 그 어느 것도 작동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무조건 저사람은 '이기적 인간'이라 바라보는 순간 갈등의 해결은 '저 이기적 인간이 바뀌지 않는다면 해결책은 없어...'가 된다.

본 인물은 글의 내용과 관계없습니다. 그냥 고민하는 모습이 맘에 들어서...

개인적으로 만난 분 중 누군가의 실수에 대해서 가장 지혜로운 모습을 보여준 분이 계신다. 이분의 대화에서 갈등 해결의 지혜로운 대처를 생각해 본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태 situation 과 상황 condition 에 따라서 자신이 선택하는 말과 행동이 정해진다. 따라서 같은 행동이라고 해도 상태와 상황에 따라서 그 원인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사람의 말과 행동은 자신이 받아들이는 감정의 해석 analysis based on acceptant's emotions 이 아닌 상황과 상태를 통한 분석 analysis based on situation & condition 을 통해 먼저 이해하려고 하고 상대방 / 본인의 실수 mistake 가 무엇이고 오해 misconception 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수는 인정하고 오해는 풀면 된다."

정확히 전달받은 내용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핵심 내용만 파악해서 전달해본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실수도 하고 실수하지 않았다 해도 상대방의 오해때문에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는데 감정에 맞지 않는 부분때문에 갈등은 시작되고 심화되기 시작한다. 이때 맘에 들지 않는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을 자신의 감정으로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지 말고 상대방이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는 상태와 상황을 먼저 생각해 본다. 물론 이는 자신의 감정을 잠시 보류하고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할 수 있는가 돌아보아야 한다. 많은 경우 갈등은 비교적 가까운 관계에서 시작한다. 친밀한 관계도 포함되지만 직장과 같은 사회적 관계를 포함하여 정서적 거리 sentimental distance 만큼 업무적 거리 operational distance 도 포함한다. 결국 이런 갈등을 한번 잘못 판단하여 '인격적인 상처'를 바탕으로 상대방을 한번 판단하면 갈등은 점점 감정적 문제로 발전하게 된다. [ 미움이란 안경과 사랑이란 안경 ] 이런 경우 상대방은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사우론에 버금가는 절대악에 가까운 존재가 된다.

인간은 항상 옳을 수 없다. 이는 실수하고 잘못된 말과 행동 그리고 나아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사람을 판단하는데도 항상 옳을 수 없다. 오히려 많은 편견과 자신만의 좁은 경험과 식견으로 다양한 삶을 살고 있는 타인의 상태 situation 을 판단하지 못한다. 그리고 확실하지 않은 정보들에 의해 타인의 상황 condition 도 알 수 없게 된다. 결국 문제 해결의 시작은 '인간의 불완전성 faultiness of human' 를 인정하고 섣부른 감정적 판단에 한숨 쉬어갈 수 있는 지혜를 통해 시작한다.

실 세상에서의 상처들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알고 싶은 연구 주제 중 하나가 가족 구성원 들 사이에서의 언어 표현의 유사성 similarity of linguistic expression 이다. 단순히 자주 사용하는 어휘나 어투의 문제가 아니라 앞서 소개한 '인격적인 상처'를 줄 수 있는 단정적인 표현의 사용이 얼마나 자주 사용되는지 알고 싶다. 자식의 실수 혹은 잘못에 대해서 부모는 훈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무엇인가 조언을 하는 순간 부모의 말을 잘 들어보면 상당히 인격적인 상처가 많이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식당에서 아이가 어떤 실수를 하면 '너는 맨날 이래!' 혹은 '어디서 못된 짓'만' 배워서' 과 같은 표현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아이들은 자신에게 부모가 말하는 표현을 배우는 것도 있지만 부모들이 아이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언급할 때 더 많이 배우는 것도 인식해야 한다. 아이를 태우고 운전하면서 자신 앞에 끼어든 차량을 향해 욕을 하거나 전혀 모르는 상대에 대해서 표현하는 것도 아이들은 좋은 교본이 되기도 한다.


가장 쉽게 살펴볼 수 있는 예는 연인 관계일 것이다. 사소한 계기로 다툼이 일어나고 나면 감정적으로 나쁜 상태에서 상대방에 대한 쉬운 판단을 한다. '너는 너무 이기적이야' 라고 말하면 이기적이란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자신이 이기적이지 않은 근거를 들기 위해 그렇지 않았던 사건들을 열거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란 했던 이기적이란 말에 그렇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다. 이런 모습도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누군가 '너는 바보야' 라고 놀리는 말에 쉽게 상처받고 '나 아니야!'라고 소리지르는 모습이나 별반 다를 것은 없다. 문제는 가까운 사이일 수록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서로의 아픈 부분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약점인지 잘 알기 때문에 상대방이 쉽게 반응하는 부분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아버지의 가정 폭력 속에서 자란 남자 친구가 다툼에 여자 친구를 밀치게 되었을 때 여자 친구가 말한다.

"너는 아버지 닮아 왜 이리 폭력적이야"

이 말 속에는 서로가 가깝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개인적 트라우마 뿐만 아니라 너는 폭력적이다 라는 단적인 상대방에 대한 인격적인 상처를 포함하고 있다. 과거의 아픔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를 서로 이야기하고 공개하는 이유는 자신이 가진 상처를 이해해달라고 했지만 오히려 그 상처를 다시 찌르고 만다.

처를 만드는 다양한 무기들... 

"너는 무엇(나쁜 내용)하다" 와 같은 형식도 있지만 사실 좀 더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는 유형은 다음과 같은 형태이다.

"너는 맨날 그렇게 밖에 못해!" , "넌 너만 잘났지!" , "니가 뭘 안다고 그래!" , "너 같은게 할 수 있을 거 같아!" , "이것도 못하니!"

(※ 예들은 정신과 임상을 하고 있는 분의 도움을 받았다.) 대부분 가벼운 실수에도 상대방의 능력이나 가치를 무시하고 전체로 확대하는 인격적인 상처이다. 즉, 원래 너의 능력이나 가치가 제대로 된 인격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확정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직접 실수를 하지 않고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에도 화풀이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많다.


한 시어머니는 자기 아들에 대한 일방적인 사랑으로 자기 아들에 대한 자부심으로 며느리의 모든 부분이 부족해 보이고 심지어는 잘난 자기 아들과 결혼해 호강하며 산다고 생각하고 학벌도 능력도 부족하다고 여기면서 항상 무시하였다. 아들이 사업을 하다가 망하게 되어도 시어머니는 "너가 내조를 못하니깐 내 아들이 이렇게 되었잖아! 도대체 너는 하는게 뭐야 우리 아들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매번 모든 일을 이 화풀이 맞춰 끊임없이 며느리를 혼낸다. 바람에 쓰러진 화분도 며느리 탓을 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런 대접을 받는 며느리 스스로 어떻게 자신을 생각하게 되는가이다. 아무리 아닌 이야기도 계속 반복해서 듣게 되고 특히 위계 질서와 권위에 의해 강압적으로 듣는 입장이라면 스스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과 부딪치며 힘들어지고 이런 현실에 내성이 생기면 정말 스스로를 '별 것 아닌 존재'로 인식하게 되면 더욱 더 상처는 깊어지게 된다. 언젠가 자기 아들의 공부를 봐주는 엄마가 과학 문제를 설명하다가 한숨을 쉬고는 "너는 어떻게 이런 것도 못 푸니?" 라고 하길래 그 엄마에게 가서 "당신 로렌스 수축과 약한핵력과 전자기파가 어떻게 통합되는지 설명해봐!" 라고 소리지르고 싶었다. 정말 세상의 [ 어떤 진리도 상처보다 깊을 수 없다. ]

운 길에는 항상 함정이 있다...

자신의 감정대로 말하고 자신이 느끼는 대로 말하는 것에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많은 인격적인 상처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필요가 있다.

래서 사람의 말은
가볍게 할수록 상대방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무겁게 할수록 상대방의 마음을 가볍게 만든다.  ─ 道馬 垣俊

그런데 자신의 감정이 느끼는대로 하는 말들의 피해자는 누구일까? 앞의 예처럼 시어머니의 독설같은 이야기들은 일차적으로 며느리에게 상처를 주지만 결국 그 가족 구성원 특히 자식들은 그 언어 표현을 쉽게 받아들인다. 말을 무겁게 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상황과 상태를 알려고 노력하고 조금은 어렵지만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어려운 길이다. 그렇다고 모든 순간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것은 아니다.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감정적 무게에 실수를 할 수 있지만 그럴 때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면 된다. 문제는 감정의 단계에서 한 숨 쉬고 시간을 가지는 것과 실수를 인정하고 때로는 용서를 구하는 것 둘 중 어떤 것이 더 힘든 것인지 모를 뿐이다.


정신과 상담받는 청소년 들 중에는 표현이 짧고 단정적인 이야기가 많은 아이들이 있다고 한다. 가끔 그런 아이들의 부모들은 주변 사람들은 어떤 표현을 쓰는지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어떤지 확인해보고 싶다. '그런 행동은 나빠요' , '그 아이는 나를 미워해요' 와 같이 예외없는 단정적인 표현들로 그 외의 상황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가족 안에서 감정따라 쉽게 한 말들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다. "너가 할 줄 아는게 뭐야!" 라는 그 감정적 표현에 상대방은 무엇인가 하려고 하기 전에 '내가 이것을 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릴 수 있고 "니가 뭘 안다고 그래!" 라는 말에는 자신의 창의적인 생각들도 '내가 생각한게 뭐 맞겠어?' 라는 의구심만으로 포기할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을 단정하고 함부로 이야기하는 쉬운 이야기들에는 상대방이 무엇을 할 수 있는 희망보다는 해도 소용없다는 포기를 먼저 만들기 쉽다. 그리고 정서적 관계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 영향은 더 크게 받는다. 특히 가족 중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더 커질 것이다.

군가의 편이 되어준다는 것...

어느 커피 전문점에서 두 여인이 이야기를 한다. 자기 남자친구가 보낸 문자를 친구에게 보여주면서 "이거 대답하는 것이 나 사랑하지 않는 것 같지 않아? 하트도 없고 이거 표현도 ... "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쓰지 않는 메신저 서비스에는 자신의 감정을 바로 보여주는 기능이 있나 싶었다. 텍스트에 불과한 문자에서도 상대방의 의도 감정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다투고 정말 노래가 좋아 공유한 노래가 상대방의 감정을 대변한다고 생각하며 가사를 집중해서 듣고 상대방의 감정을 판단하려고 한다. 많은 경우 상대방의 감정보다는 본인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은지 부터 생각하게 된다.

같은 대상도 미움의 안경을 쓰면 똑똑한 사람은 잘난 척 하는 것으로 보이고 사랑의 안경을 쓰면 잘난 척 하는 사람도 똑똑해 보이는 것이다. 가끔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나쁜 absolutely bad 행동이 무엇이 있냐고 물어본다. 그럼 '살인하다' 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가족을 죽이려고 달려든 강도를 살인했다' 라면 어떻냐고 물어본다. 한 생명이 사라지게 했다는 것은 분명 나쁜 일이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살인하다는 말 조차도 사실 상황 situation 에 따라서 절대적으로 나쁠 수만도 없다. 생각보다 인간이 너무도 허술한 존재라는 것은 법정에서 억울한 누명으로 몇십년동안 감옥에서 살다가 진범이 늦게 나타나 그 세월의 억울함을 쉽게 보상받지 못하는 경우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며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쉽게 판단하고 비난하는 순간에도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백함을 믿을 것이다.

누군가의 편이 되어준 다는 것은 동시에 그 사람은 적이 아님을 먼저 아는 것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며 다투는 모습을 보면 재미있는 부분들이 많다. 서로 좋아하는 사이지만 다툼의 순간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에 맞지 않는 부분은 어떻게든 논리적으로 상대방을 끌어내리려고 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과거 행동 말뿐만 아니라 정황적인 추측까지도 포함하여 상대방이 이 다툼에서 잘못했다는 것을 결론내리려고 노력한다. 생각해보면 논리적 과정이 아니라 단순히 감정적 소모일 뿐이다. 그것을 모르고 어떻게든 상대방을 이기려고 한다. 그러나 끊임없이 말했지만 사람의 행동과 말은 시간이라는 차원 속에서 다른 상황과 상태를 가질 수 밖에 없고 심지어 완전하지 않은 인간은 실수도 때로는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것은 실수와 잘못을 하는 상대방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그럴 수 있다.

상대방이 적이라면 이겨야 하는 대상이라면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싸우라고 해주고 싶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인격적인 상처를 덜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내 삶과 내 주변의 사람들이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기회가 된다.

랑은 서로의 모순을 찾는 것이 아니라 모순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과 슬픔에 대해서 같이 이해하고 슬퍼해주는 것... 그래서 어떤 행동도 생각도 사랑 앞에서는 설명되게 된다. 억지로 해석하고 분석하려 하지 않아도 항상 그대로 자연스럽게 수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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