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은 의심을 초래할 수 있다. 가정은 대개 친근한 경험들에 근거하는 법이다. 따라서 그동안 유지해 온 과정을 적용할 때만이 가장 좋은 글을 쓰고, 가장 명확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경우엔 박자를 조절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생각하고 글을 쓰는 일이 행복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순식간에 덧없이 사라지고 말 것들은 이런 신속함을 요구한다. 만일 행인이 갑작스럽게 우리 앞에 나타난다고 하자, 당신은 우선 놀랄 것이다. 잠시 후 그를 관찰할 준비가 되고 보니, 그는 이미 당신의 시야에서 사라진 후이다. 만일 당신이 이제부터 편안한 마음으로 그를 생각해 보리라 하고 뒤 쫓아간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인가? ─ 피에르 썅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中
피에르 썅소 Pierre Sansot 의 책을 읽는 순간의 느낌을 기억한다. 어렵지 않은 문장 속에서 내용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잠시 머물러 기다리면 그 내용들은 쉬운 내용도 아니고 오히려 우리의 삶에서 꼭 질문해야 하는 내용들이라는 것을 느끼고 나서 그의 모든 책들에 빠지게 되었다. 그의 문장의 또 다른 매력은 글의 내용과는 다른 문제의 해결책을 주는 것 같은 기분때문이다. 그의 대표작인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가정은 의심을 초래할 수 있다. 로 시작하는 이 내용은 우리의 의심에 대한 내용처럼 볼 수 있다.
그러나 점점 한문장 읽어가면서 어쩌면 이 글은 우리가 인생에서 항상 고민하는 '선택'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누구나 현재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만들지 고민하며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인생은 결국 선택의 문제이고 그 선택을 통해 무엇을 하고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에 대한 많은 고민들의 연속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지금 하는 일들이 잘 되지 않을 때 '과거 언젠가 그 선택을 하지 않고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회상하기도 하고 심지어 선택하지 않은 다른 선택 후보에 대해서 선택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사람들의 흔한 착각은 우리가 비교적 논리적이고 모든 결과 consequence 를 예측할 수 있을거라 믿는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이렇게 될 것이야'와 같이 1차원적 인과관계의 나열이 상당히 논리적이라 믿는다. 비교적 다양한 결과를 생각한다 해도 인과관계가 복잡하게 설정된 예측이라기 보다는 순열적 sequential 추측을 이어가고 결론이 어느정도 나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여 다른 순열적 추측을 만든다. 복잡한 인과관계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나리오를 생각하는 것도 상당히 신중한 사람이다.
인간의 선택은 아무리 1차원적이라고 해도 원인-결과를 생각해 가장 좋은 선택이라 생각하는 (믿는) 선택을 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정은 의심을 초래할 수 있다... 를 통해 문제는 인간에게 선택은 무엇이 가장 좋은지 찾는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철저하게 '가정'의 영역이란 점이다.
오랫동안 고민한 현상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좋은 소프트웨어를 소개해주고 어떻게 쓰는지 설명해주고 심지어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아도 몇일 후에 찾아가면 내가 알려준대로 편하게 사용하고 있겠지라는 기대와는 다르게 다시 옛날 방식으로 어렵게 쓰고 있는 것이다. 그때마다 왜 내가 알려준대로 사용하지 않는냐라고 묻지만 당연히 사용해야 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 또한 어색해지고 만다. 이와 같은 경험이 반복되면서 처음에는 '익숙한 것을 버리기 싫은' 이유라고 생각했지만 어느날 자기 표현이 강한 친구의 말은 다른 원인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원하는 기능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그 막연한 '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가정은 새로운 무엇인가를 선택하는데 큰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아무리 쉽고 좋은 것이라고 해도 그 선택을 통해서 내가 무엇인가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그 가정은 검증의 절차없이 선택에서 제외하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피에르 쌍소의 표현대로 '가정은 대개 친근한 경험들에 근거하는 법이다.' 모르는 영역은 친근한 경험일 수 없고 결국 자신에게 친근한 것들을 잃어버릴 수 있는 두려움은 자신이 모르는 새롭고 더 좋은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즐거움보다 항상 클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인간의 선택이 보여주는 새로운 특징이 있다. 복잡한 인과관계를 생각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모든 가능성을 두고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에게 친근한 경험에 근거한 가정으로 '선택하지 않음'을 더 자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정적 경험에 대한 트라우마는 인간의 선택을 축소시키고 무엇인가를 해도 좋을거란 희망을 가지기 보다 그렇게 해서 잘못되는 결과때문에 포기를 하게 된다. 그 가정의 올가미 속에서 우리의 언어는 참 신기한 작용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은 잘못되기 쉬워'라는 가정을 세우고 자신에게 친근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때 이 가정이 성립하는 것 같다 생각하면 곧 이 가정은 '모든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은 잘못되기 쉬워'라고 단순 가정은 모든이 포함된 절대 가정이 되고 이 가정은 '모든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은 잘못된다'라는 확고한 결론으로 이어지기 쉽다.
가정은 의심을 초래하고 그 의심은 우리에게 다가온 가능성의 다양한 세상을 아주 단순화 시킨다. 그래서 인간의 선택에서 가정은 필요하지만 그 가정이 자신의 직접, 간접적 경험에 제한된다면 그 이상의 가능성과 그 너머에 있을 수 있는 더 큰 기회는 이미 포기한 상태가 될 것이다. 항상 이야기하지만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영재일 수 있지만 천재일 수 없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기존의 지식과 체계에 잘 적응하고 그것을 잘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그렇게 잘 적응된 아이에게 가정은 창의적인 내용이 아니라 기존의 지식과 체계에 잘 들어맞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가정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세상을 바꾸는 새로운 인식, 철학, 체계를 생각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기존의 구조를 거부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끌어낸 사람들이다. 그래서 피에르 쌍소가 말한 가정과 아직 확신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구별해야 한다고 본다.
가능성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세상보다 더 멋진 세상이 있을거란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자신의 능력보다 더 뛰어난 것을 만들 수 있을거란 열정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모든 내 선택의 가정이 익숙하고 알고 있는 것에 한정된 의심의 범위에서 이루어진다면 그 가정은 인생의 선택에서 가능성은 제외하고 시작하게 된다. 결국 익숙한 것에 들어 맞지 않는 것은 쉽게 포기한다.
가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이렇게 행동하면 너는 이렇게 된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마다 불편함을 느꼈다. 단순한 인과관계가 사실이었다면 이 세상은 이렇게 복잡하게 구성될 필요도 없었고 사회갈등도 없었고 그 단순한 인과관계를 성립시켜줄 사회제도 (법, 제도) 등만 있으면 인간은 투명한 인과관계에 의해서 행복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만들어준 많은 사건들 속에는 가정을 통한 익숙한 것에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들이 전부라고 믿고 있다. 노예 제도가 당연하다고 믿고 있던 시절 노예도 주인과 동일한 인간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의 피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노예 제도는 사라진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희생과 끊임없는 행동이 존재해야 한다. 억압과 고통은 항상 익숙한 영역이다. 그래서 한 노예가 아무리 '같은 인간이지 않을까?'란 가능성을 생각해도 그 선택을 통해 얻어지는 고통과 아픔때문에 포기해버리고 만다.
많은 경우 '그거 해봤자...' , '그렇게 해봐도...' ,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어...' 란 말을 들을 때마다 인간의 가치는 무엇일까 고민하게 된다. 누군가 억압받아도 '그래봤자 소용없어' 라고 말하는 사람들, '그 놈 그렇게 했다가 결국 자기만 죽었잖아' 와 같이 한가지 결론을 마치 모든 당연한 결론처럼 말하는 사람들, 정말 가치있는 것을 이루기 위해 작은 가능성이라도 노력하는 사람들을 향해 비웃음 짓는 사람들... 인간의 가치는 그럴 수록 익숙하고 부조리한 굴레에서 더이상 벗어나지 못할 뿐이다.
예전에 항암치료를 받을 때 주사실에서 같이 항암제를 맞는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독한 항암제때문에 무엇인가 먹으면 토했다. 그러나 또 먹고 곧 토하고 계속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그렇게 토할 걸 먹지말자." 그러자 아이는 엄마에게 힘겹게 말했다.
할수 없다 될 수 없다는 희망의 포기는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
누군가 지금 어려운 선택의 순간에 있다면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인간의 선택에 포기에 의한 제외보다 새롭고 다양한 가능성을 그 많은 사람들이 선택했을 때 우리 세상이 더 다양해지고 좀 더 가치있는 일들이 많아질 것이란 희망이 있다. 그 누구도 안개가 자욱한 경계에 서지 않고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할 수 없다. 경계의 근처도 가지 않고 경계 넘어에는 나에게 나쁜 것이 있을거야 믿는 것은 한번 살아야 하는 인생에서 너무도 슬픈 선택이다. [ 경계에 서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자. ] [ 두려움의 현기증을 즐기자. ]
인생이 포기와 익숙한 것의 굴레에서 계속 돌아간다면 얼마나 슬픈일이 될 것인가. 같은 책에 있던 다른 글을 마지막으로 인용해본다.
그러나 점점 한문장 읽어가면서 어쩌면 이 글은 우리가 인생에서 항상 고민하는 '선택'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누구나 현재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만들지 고민하며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인생은 결국 선택의 문제이고 그 선택을 통해 무엇을 하고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에 대한 많은 고민들의 연속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지금 하는 일들이 잘 되지 않을 때 '과거 언젠가 그 선택을 하지 않고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회상하기도 하고 심지어 선택하지 않은 다른 선택 후보에 대해서 선택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사람들의 흔한 착각은 우리가 비교적 논리적이고 모든 결과 consequence 를 예측할 수 있을거라 믿는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이렇게 될 것이야'와 같이 1차원적 인과관계의 나열이 상당히 논리적이라 믿는다. 비교적 다양한 결과를 생각한다 해도 인과관계가 복잡하게 설정된 예측이라기 보다는 순열적 sequential 추측을 이어가고 결론이 어느정도 나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여 다른 순열적 추측을 만든다. 복잡한 인과관계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나리오를 생각하는 것도 상당히 신중한 사람이다.
인간의 선택은 아무리 1차원적이라고 해도 원인-결과를 생각해 가장 좋은 선택이라 생각하는 (믿는) 선택을 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정은 의심을 초래할 수 있다... 를 통해 문제는 인간에게 선택은 무엇이 가장 좋은지 찾는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철저하게 '가정'의 영역이란 점이다.
오랫동안 고민한 현상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좋은 소프트웨어를 소개해주고 어떻게 쓰는지 설명해주고 심지어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아도 몇일 후에 찾아가면 내가 알려준대로 편하게 사용하고 있겠지라는 기대와는 다르게 다시 옛날 방식으로 어렵게 쓰고 있는 것이다. 그때마다 왜 내가 알려준대로 사용하지 않는냐라고 묻지만 당연히 사용해야 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 또한 어색해지고 만다. 이와 같은 경험이 반복되면서 처음에는 '익숙한 것을 버리기 싫은' 이유라고 생각했지만 어느날 자기 표현이 강한 친구의 말은 다른 원인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편한 것은 알겠는데 혹시나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기능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사실 원하는 기능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그 막연한 '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가정은 새로운 무엇인가를 선택하는데 큰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아무리 쉽고 좋은 것이라고 해도 그 선택을 통해서 내가 무엇인가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그 가정은 검증의 절차없이 선택에서 제외하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피에르 쌍소의 표현대로 '가정은 대개 친근한 경험들에 근거하는 법이다.' 모르는 영역은 친근한 경험일 수 없고 결국 자신에게 친근한 것들을 잃어버릴 수 있는 두려움은 자신이 모르는 새롭고 더 좋은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즐거움보다 항상 클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인간의 선택이 보여주는 새로운 특징이 있다. 복잡한 인과관계를 생각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모든 가능성을 두고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에게 친근한 경험에 근거한 가정으로 '선택하지 않음'을 더 자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정적 경험에 대한 트라우마는 인간의 선택을 축소시키고 무엇인가를 해도 좋을거란 희망을 가지기 보다 그렇게 해서 잘못되는 결과때문에 포기를 하게 된다. 그 가정의 올가미 속에서 우리의 언어는 참 신기한 작용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은 잘못되기 쉬워'라는 가정을 세우고 자신에게 친근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때 이 가정이 성립하는 것 같다 생각하면 곧 이 가정은 '모든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은 잘못되기 쉬워'라고 단순 가정은 모든이 포함된 절대 가정이 되고 이 가정은 '모든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은 잘못된다'라는 확고한 결론으로 이어지기 쉽다.
가정은 의심을 초래하고 그 의심은 우리에게 다가온 가능성의 다양한 세상을 아주 단순화 시킨다. 그래서 인간의 선택에서 가정은 필요하지만 그 가정이 자신의 직접, 간접적 경험에 제한된다면 그 이상의 가능성과 그 너머에 있을 수 있는 더 큰 기회는 이미 포기한 상태가 될 것이다. 항상 이야기하지만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영재일 수 있지만 천재일 수 없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기존의 지식과 체계에 잘 적응하고 그것을 잘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그렇게 잘 적응된 아이에게 가정은 창의적인 내용이 아니라 기존의 지식과 체계에 잘 들어맞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가정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세상을 바꾸는 새로운 인식, 철학, 체계를 생각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기존의 구조를 거부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끌어낸 사람들이다. 그래서 피에르 쌍소가 말한 가정과 아직 확신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구별해야 한다고 본다.
가능성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세상보다 더 멋진 세상이 있을거란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자신의 능력보다 더 뛰어난 것을 만들 수 있을거란 열정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모든 내 선택의 가정이 익숙하고 알고 있는 것에 한정된 의심의 범위에서 이루어진다면 그 가정은 인생의 선택에서 가능성은 제외하고 시작하게 된다. 결국 익숙한 것에 들어 맞지 않는 것은 쉽게 포기한다.
가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이렇게 행동하면 너는 이렇게 된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마다 불편함을 느꼈다. 단순한 인과관계가 사실이었다면 이 세상은 이렇게 복잡하게 구성될 필요도 없었고 사회갈등도 없었고 그 단순한 인과관계를 성립시켜줄 사회제도 (법, 제도) 등만 있으면 인간은 투명한 인과관계에 의해서 행복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만들어준 많은 사건들 속에는 가정을 통한 익숙한 것에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들이 전부라고 믿고 있다. 노예 제도가 당연하다고 믿고 있던 시절 노예도 주인과 동일한 인간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의 피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노예 제도는 사라진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희생과 끊임없는 행동이 존재해야 한다. 억압과 고통은 항상 익숙한 영역이다. 그래서 한 노예가 아무리 '같은 인간이지 않을까?'란 가능성을 생각해도 그 선택을 통해 얻어지는 고통과 아픔때문에 포기해버리고 만다.
많은 경우 '그거 해봤자...' , '그렇게 해봐도...' ,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어...' 란 말을 들을 때마다 인간의 가치는 무엇일까 고민하게 된다. 누군가 억압받아도 '그래봤자 소용없어' 라고 말하는 사람들, '그 놈 그렇게 했다가 결국 자기만 죽었잖아' 와 같이 한가지 결론을 마치 모든 당연한 결론처럼 말하는 사람들, 정말 가치있는 것을 이루기 위해 작은 가능성이라도 노력하는 사람들을 향해 비웃음 짓는 사람들... 인간의 가치는 그럴 수록 익숙하고 부조리한 굴레에서 더이상 벗어나지 못할 뿐이다.
예전에 항암치료를 받을 때 주사실에서 같이 항암제를 맞는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독한 항암제때문에 무엇인가 먹으면 토했다. 그러나 또 먹고 곧 토하고 계속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그렇게 토할 걸 먹지말자." 그러자 아이는 엄마에게 힘겹게 말했다.
"엄마 이번에는 먹을 수 있을거야."
할수 없다 될 수 없다는 희망의 포기는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
누군가 지금 어려운 선택의 순간에 있다면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불가능을 믿지 말고 가능성을 믿어요.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모험을 했는가에 따라 행복해질 가능성도 높아진다고 믿어요."
인간의 선택에 포기에 의한 제외보다 새롭고 다양한 가능성을 그 많은 사람들이 선택했을 때 우리 세상이 더 다양해지고 좀 더 가치있는 일들이 많아질 것이란 희망이 있다. 그 누구도 안개가 자욱한 경계에 서지 않고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할 수 없다. 경계의 근처도 가지 않고 경계 넘어에는 나에게 나쁜 것이 있을거야 믿는 것은 한번 살아야 하는 인생에서 너무도 슬픈 선택이다. [ 경계에 서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자. ] [ 두려움의 현기증을 즐기자. ]
인생이 포기와 익숙한 것의 굴레에서 계속 돌아간다면 얼마나 슬픈일이 될 것인가. 같은 책에 있던 다른 글을 마지막으로 인용해본다.
미래를 만들어 가는 데는 두 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는데, 이들은 서로 다른 철학에 기초하고 있다. 우선 그 첫번째 형태. 이것은 의지적인 방식에 의한 것인데, 우리 자신의 도약을 통해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의 주도권을 이용하여 우리 자신의 모습을 앞에 투영해 본다. 이때 우리가 미래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되고 싶은 모습'과 '우리의 현재 모습' 사이의 거리를 말한다. 그리고 다소 시간이 걸리는 장기 계획을 세우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토막난 짤막짤막한 시간들 사이에 끼여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삶에서 기다림이란 단지 주문한 물건이 배달되는 시간, 혹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 지나가야 할 길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사용해야 할 방법들을 계산해 보는 시간 정도일 뿐이다.
두번째 형태. 이것은 첫번째 형태보다 덜 의지적인 방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수동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방식에 의하면 우리는 마음을 여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런 태도를 갖게 되면, 우리의 인생의 큰 흐름을 결정짓는 굵은 사건들이 삶 속에 들어오기까지는 다소 오랜 기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그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가 기다리던 미래라는 수평선이 활짝 열린 모습으로, 자유롭고 텅 빈 모습으로 눈앞에 펼쳐지게 된다. 드넓게 펼쳐진 빈 공간에서는 그동안 바라오던 수많은 사건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게 된다.
─ 피에르 썅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中 기다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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