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잘해 좋은 대학을 나와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이 있었다. 안정적 직업에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지만 유흥을 자주 즐기고 부인에게는 성병까지 옮긴다. 그러나 부인에 대한 최소한의 미안함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행동이 무엇이 잘못인지 모른다. 남자들이라면 좀 더 수식어를 붙이자면 대한민국 남자들이라면... 조건을 붙이며 별로 큰 잘못을 느끼지 못한다.
다른 이야기는 좀 더 충격적이었다. 선후배 관계가 중요한 것을 이용하여 명문대 출신의 전문직 선배가 후배에게 성적 관계를 요구하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자신의 후배마저도 도구로 만들어 버리지만 이런 요구를 하는 명문대 출신의 인물은 상대방도 원했다 심지어 후배가 자신을 유혹했다는 이유를 통해서 자신은 큰 잘못이 없음을 강조한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잘해서 항상 1등을 놓치지 않고 명문고등학교를 진학한 학생이 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실력이 상당하였던 그는 소위 아르바이트로 불법 인터넷 도박사이트를 위해 프로그래밍을 해주었다. 그러나 학생은 자신은 능력있는 것을 잘 활용해서 학비도 벌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고 강조하며 어떤 죄책감도 가지지 않았다.
뉴스를 보면 공부를 잘하고 똑똑했기 때문에 좋은 대학 나오고 좋은 위치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일하라고 주어진 자리를 가지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혹은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함부러 남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이들에게는 몇십만원에 감옥을 가야하지만 소위 높은 자리의 사람들은 수많은 범죄와 악행들로 수많은 사람들을 불행으로 몰고가도 오히려 떳떳하게 살아가며 심지어 자신처럼 살라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럴때마다 많은 이들은 마크 데스메트 Marc Desmet 가 표현한 '용기를 꺽는 모순들'에 좌절하고 희망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쉽게 말해 인간이 쉽게 믿었던 보편 타당한 윤리, 도덕의 문제는 항상 꺽기고 모든 법과 윤리를 지키고 살려고 하는 이들에게는 왜 지켜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서두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통해 가정, 사회 그리고 아주 사소해 보일 수 있는 개인의 규모가 가지는 규범적 요소들의 파편성 fragmentation of regulations 을 생각하게 된다. 왜 누군가에게는 옳은 내용들이 다른 이들에게는 쉽게 깨도 되는 대상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 범법 행동에 대해서도 쉽게 합리화를 시키고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제점이 없는 행동들은 외부적인 훈육에 의해서 쉽게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훈육의 강도가 높지 않거나 때로는 알리지 않게 은밀하게 행동해도 그것은 떳떳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알렸을 때 예상되는 훈육의 짜증때문에 숨기는 것이다. 즉, 무엇이 문제이다라고 아무리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해도 심지어 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해도 스스로의 똑똑함으로 무장한 이들에게는 그 법마저도 제대로 된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서 합리화를 쉽게 할 수 있다.
정치적 타락이 만드는 눈뜬 정의의 여신 |
분명한 피해자들이 존재하고 심지어 그들의 잘못된 행동들에 의해서 피해자는 결국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있다. 선배의 강압적인 관계를 요구하던 후배는 결국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하였지만 가해자는 오히려 그것이 자신때문이라 생각하지도 않고 강하지 못하게 자란 피해자를 탓하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다. 부인에게 성병을 옮기고 유흥을 즐기는 사람도 비슷하다. 자신이 하는 일이 힘들기 때문에 일 이외의 시간동안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즐길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누구나 부러워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을 도박 중독에 빠지는 것에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다.
도덕과 윤리는 우리를 항상 즐겁게 해주는가?
많은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공통적으로 들었던 질문은 정말 그들의 행동은 문제가 없는데 사회가 괜한 문제로 만드는 것은 아닌가 질문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업을 가진 것만으로 도덕 윤리 의식도 높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 명제는 지금의 사회가 이미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고 심지어 높은 도덕 윤리를 요구하는 고위 공직자들은 오히려 적절한 범법 사실이 필요 조건이 되었다. 심지어 그 중 명백한 현행법 위반이라도 자식들을 위한 노력이 보인다면 어느정도 괜찮지 않는가 공직자 후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도덕 윤리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은 더욱 더 어렵다.
사전적 정의로 도덕이란 사회의 구성원들이 양심, 사회적 여론, 관습 따위에 비추어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 준칙이나 규범의 총체. 외적 강제력을 갖는 법률과 달리 각자의 내면적 원리로서 작용하며, 또 종교와 달리 초월자와의 관계가 아닌 인간 상호 관계를 규정한다. 영어로는 a lesson, especially one concerning what is right or prudent, that can be derived from a story, a piece of information, or an experience. 이라 나와 있지만 이처럼 정의하기 싫어 내리는 정의도 없는 것 같다. 아주 간단하게 생각하고 싶다. 도덕이란 자신이 다치지 않기 위해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나와 공동체가 지켜야 할 행동 요소라고 말이다. 결국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신체의 외상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까지) 나와 내 공동체가 지키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윤리란 도덕을 통해서 공동체 전체가 예상하고 살아가기 위해 지켜야 할 요소라고 정의하고 싶다. 쉽게 말해 도덕이란 개인적 감정의 보호막이고 윤리(倫理) 는 공동체가 굴러가기 위해 (輪; 바퀴 륜) 혹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한 공동체의 보호막이라 생각한다. 도덕 혹은 윤리가 이성적 작용이라고 많은 이들이 말하지만 상당 부분 동의하기 어려운 이유는 앞으로 설명할 것이다. 누군가 길거리에 소변을 본다고 해도 사실 나에게 물리적 직접적 피해는 없을 가능성이 더 높다. 다만 누군가 그렇게 하는 행동을 보는 것 자체가 불쾌함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불쾌함은 어디서 왔는가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반대로 자신이 소변이 급한데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한 경우 자신이 지키고 싶은 도덕의 기준은 스스로를 더욱 더 불쾌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당장 목격자들이 없다면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의 슬픈 이야기를 생각하며 자신의 노상방뇨를 적극 합리화할 것이다. [주: 티코 브라헤 (1546-1601) Tycho Brahe 는 방광파열로 사망했다는 전해진다.]
도덕 moral 의 어원은 라틴어의 mores 에서 유래된다. mores 는 행동이란 뜻이다. 즉, 도덕은 지극히 행동과 그 행동이 가지는 영향을 이야기한다. 이런 측면에서 도덕은 사회적인 개념일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물론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도덕의 이야기는 공동체를 떠나 성립하기 어렵다. 혼자 사는 이에게 도덕이란 상황극일 뿐이다. 혼자 사는 무인도에서 노상방뇨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중요한 점은 행동이 어떻게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가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인 정의를 '상처받지 않기 위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이다. 주변에 목격자가 없어도 끝까지 노상방뇨를 하지 않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일까 아니면 도덕 의식이 너무 높아서 혹시나 갑자기 나타나 기분 나빠할 수 있는 목격자를 생각한 것일까? 행동 자체로 보았을 때 자신의 참는 불쾌함을 해소하는 것이 좀 더 이성적일 수도 있다. 오히려 도덕이라는 구조 안에서 힘들게 고통을 참는 이유는 누군가 나의 행동을 보고 '감정적으로' 불쾌할 수 있다는 생각혹은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도 수치스러워 스스로도 불쾌할 수 있다는 감정의 문제로 생각해보는 것이다.
Moral 의 어원은 라틴어 mores 행동이란 뜻에서 유래된다 |
도덕 윤리를 모두 잘 지킨다고 그래서 모두가 행복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충동적 욕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행동에 대해서 사회가 도덕 윤리라는 이름으로 하지 말라고 하면 더욱 더 짜증날 것이다. 유흥업소를 즐겨 다니는 이에게는 적절한 거래에 의해서 내 돈 가지고 내가 그렇게 쓰는데 무엇이 문제인지 합리화시킬 것이고 후배에게 강요하는 선배는 자신의 권위는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성인 남녀의 개인적 문제라 해석할 것이다. 철모르는 고등학생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할 것이라는 것, 즉 영향을 준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할지 모른다. 정말 인간은 누군가에게 피해주지 않고 싶어할까 묻고 싶을 때가 많다. 가학적 인간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올바른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특히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행동이 직접 간접으로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도덕 윤리는 점점 변화하고 다양한 욕구의 충족을 위한 유혹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더 귀찮고 필요없는 대상이 되어버린다.
행동의 문제인가 인식의 문제인가?
뉴스는 많은 경우 시청자들의 귀과 눈을 끌기 위해 다양한 상황 circumstances 을 제시한다. 대기업 회사원, 치과의사, 한의사 등과 같은 직업적 요소뿐만 아니라 재벌집 아들, 강남 명문고 출신, 명문대 졸업자 등과 같은 부분이다. 예를 들어 명문대 졸업생이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소위 명문대가 아닌 졸업생이 살인을 저지르는 것보다 더 주목받는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높은 교육 수준은 높은 도덕 수준을 예상한다. 그러나 그건 심각한 일반화의 오류이다. 만약 사실이라면 명문대 캠퍼스 안은 거의 천국에 가까워야 한다. 현실은 반대이다.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에게 높은 도덕 수준을 예상하는 것은 사실 자연스러운 느낌이다. 교육 수준이 높다는 것은 현 시스템에 잘 순응하고 잘 따라와서 좋은 성과를 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렇다면 세상이 요구하는 일반적인 도덕적 요소를 잘 따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지옥에 가깝다. 높은 교육 수준을 이용해 타인에게 고통을 주거나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탐욕을 챙기는 등 오히려 높은 교육 수준이 가져다 주는 다양한 기회를 통해 자신의 실속을 챙기면 도덕에 어긋나는 때로는 반사회적 anti-social 행동들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명문대 출신이라면 사람들은 더 충격을 혹은 더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높은 교육 수준을 받은 사람이 저렇게 살인을 저지를까 하는 예상 밖의 결과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뉴스가 만든 상황적 분위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시선을 다른 부도덕성에 비추면 재밌는 현상이 일어난다. 높은 교육 수준의 사람들이 경제 범죄를 일으켜서 많은 이들 심지어 가족이라 생각한다는 회사 구성원들에게 피해를 주어도 사회 지도자, 경제 지도자라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무척 관대하다는 것이다. 경제사범들이 회사 경영자라는 이유로 다양한 불법 행위들을 통해서 많은 노동자들을 힘들게 했다면 분명 그들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수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로는 경제사범들을 경제 발전을 위해 노력한 영웅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놀라운 일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궁금하는 생각보다는 많은 경우 사라지는 희망같은 무력감마저 들때가 많다. 결국 힘없는 노동자들은 소수의 자본가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해결책은 정말 없는 것인가 이런 생각들이 떠돌기만 한다.
기업적 부도덕의 예를 보여준 엔론 회계부터 경영 거의 전반적 비리가 존재했다 |
그래서 문제를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싶었다. 인간의 도덕이란 행동의 문제인가 아니면 다른 문제인가 말이다. 현실의 복잡성때문에 만들어지는 다양한 문제들은 단순히 개인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조직과 개인 때로는 조직과 조직의 충돌 안에서 개인들은 다치게 된다. 많은 과정에서 결국 상처입는 것은 개인에게로 돌아간다. 가끔 인류가 만든 가장 악덕한 제도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개인적으로 '법인 corporate body' 라고 말한다. 법인이란 '자연인이 아니면서 법에 의하여 권리 능력이 부여되는 사단과 재단'을 말한다. 즉, 인간은 아닌데 법에 의해 마치 인간처럼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기능적으로 이런 법인은 다른 법인을 죽이기도 (망하게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때로는 결합하기도 분리하기도 한다. 가장 중요하지만 마치 인간처럼 (자연인처럼) 다른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때로는 해치기도 한다. 결국 인간대 인간의 대결에서 인간은 상상하기 힘든 규모의 기업이나 단체와 같은 법인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법인은 정말 대단한 존재이다. 자신이 피해를 주어도 그 책임은 상당히 제한적이고 때로는 그 피해의 책임을 물을 대상도 사라지기도 한다. 그리고 인간 세상에서는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많은 도덕적 내용들을 따르지 않아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해도 아무렇지 않은 존재이다.
결국 행동의 관점에서 살펴본 도덕이지만 도덕이 문제가 아니라 도덕이라는 항목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초점을 맞춰야 한다. 도덕적 기업 (법인) 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런데 그 예외의 대상은 인간을 가장 괴롭히는 대상이다. 그런 이유에서 법인의 활동은 많은 제도적인 안전 장치가 필요하다. 그것을 인간의 사회는 도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강하게 지켜야 하는 것은 법이지만 법의 차원이 아니라도 규제 regulations 라고 부른다. 개인의 차원에서 생각해도 규제란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데 해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내부적 기준이 될 수 있다. 돈이 넘치고 넘치는 욕정에 유흥업소를 다니며 돈으로 성을 매매할 수 있다고 생각해도 그렇게 하는 것이 가정을 생각했을 때 한 가정의 가장으로 해도 되는 것인지 아닌지 먼저 생각할 것이고 아무리 하고 싶고 할 수 있어도 '하지 않음'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내재적 규제 immanent regulations 가 된다. 결국 행동은 표면적인 문제이지만 그 행동을 옮기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그 행동을 평가하는 인식의 문제이다. 자신의 성욕이 후배의 존재보다 더 중요하다고 인식한다면 후배라는 인격은 그저 도구적 가치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능력이 돈을 벌 수 있고 그 돈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고 인식한다면 인터넷 도박이 아니라 돈보다 덜 가치있다 생각하는 어떤 것도 쉽게 행동할 것이다.
종교는 내재적 규제를 제시한다 |
결국 도덕을 행동의 문제이지만 그 원인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행동보다 '가치에 대한 인식'이 무엇인지가 더 중요하다. 설명이 길었지만 이 문제는 다른 질문으로 '시대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도덕'이란 존재할까? 란 질문으로 환원하고 싶다. 사회는 끊임없이 무엇이 가치있는지 인식을 요구한다. 그리고 개인도 끊임없이 무엇이 가치있는지 생각하고 가치를 인식한다. 노예 제도가 합법이었을 때 주인이 여성 노예에게 성관계를 요구한다면 현대의 시선을 모두 벗어 당시의 사회가 요구하고 인정하는 가치에 비추어 주인이 비도덕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도덕은 사회의 산물이라는 아주 간단한 결론을 내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도덕적일 것 같은 인간들의 비도덕적 행동 그리고 그로 인해 사회가 병들어 가는 것으로 연결짓기 어렵다.
역사의 서사에서 침몰하는 개인
괴물이란 화두는 아주 강하게 다가왔다. 괴물 monster 는 경고하다는 뜻의 라틴어 monere 에서 유래되었다. [ 괴물을 만드는 사회 ─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서 ] 괴물이란 세상의 잘못된 부분을 알려주는 일종의 경고라 생각했던 것이다. 우연히 벨기에의 정신분석학자인 파울 페르하에허 Paul Verhaeghe 의 책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 를 읽게 되었다. 책의 모든 내용을 소개할 수 없지만 가장 인상적이고 오랫동안 고민했던 문제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높은 교육 수준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 수준을 지키지 못하는가?
사회에 피해를 주는 행동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문제라 생각하지 못하는가?
인식하지 못한 부도덕한 행동들은 어떤 방법으로 해결이 가능한가?
와 같은 질문에 책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했다. 어쩌면 현재는 폭풍처럼 지나간 (혹은 지나고 있거나 머물러 있는) 신자유주의의 희생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다양한 부분에서 나치와 같은 전체주의와 거의 비슷하다는 내용이다. 즉, 경제적 전체주의가 바로 신자유주의의 핵심이라는 점이다. 조금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몇가지 신자유주의의 특징을 생각해보면 그 유사성을 느낄 수 있다. 핵심은 신자유주의의 능력주의 meritocracy 이다. 특히 전체주의가 좋아하는 사회진화론에 근거하여 나치가 저지른 수많은 학살의 내용도 사실상 유전적 우수성에 가치를 두고 인식하여 유대인 학살의 인식적 근거가 되었다. 사회진화론은 궁극적으로 진화된 존재와 덜진화된 존재를 규정하고 그에 따라서 어떤 요소가 우수한지를 평가하게 되었다. 그 과정은 객관적 과학적 과정이 아닌 독일 아리아 혈통의 우수성을 결론내리고 유대인 및 타 인종에 대한 협오까지 만들었던 것이다.
사실 사회진화론의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공감이 가기 시작했다. 능력을 키우고 그 능력에 따라서 보상받고 얼마든지 능력만 좋다면 좋은 대우 받으면서 살 수 있다고 신자유주의는 선전한다. 아주 건전해 보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능력은 이미 이루어진 기득권 사회의 평가에 의해서 철저하게 규정되어야 한다. 즉, 무엇이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내 위에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이 구조적 문제를 떠나 단순히 '어떤 곳에서나' 능력만 있다면 출세할 것이라는 말은 능력주의를 가장한 인생을 두고 펼치는 보이스피싱이나 다름없다. 인간이 실수할 수 있거나 때로는 상황이 힘들어 자신의 제대로 된 역량을 펼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할 것이냐 물어보면 무엇이라고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은 말할까 궁금하다. 뿐만 아니라 부도덕한 지도자 및 경영자들의 부도덕한 요구가 있을 때 능력좋은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지 생각하게 된다. 결국 상위 10%는 승진하고 30%는 그대로 남게 되고 나머지는 해고된다는 규칙을 만들게 된다면 (그 규칙은 법인이라는 법이 정하는 인격체에 의해서 정해진다.) 구성원들은 어떤 행동을 해야할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다양한 기능적 역할을 수행한다. 대표적으로 사유화 [ 공공 부분의 사유화 ─ 민영화에 대한 생각들 ], 규제완화, 사회복지 축소, 복지제도의 해체 등이 있다. 이와 같은 국가 정책의 방향이지만 더 중요한 부분은 그 사회 구성원이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부분이 된다. 예를 들어 의료에 대한 복지가 줄어든다면 의료 부담이 걱정되는 사람들은 사보험이나 목돈을 마련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규제완화의 한 부분으로 사업자 측 혹은 사용자 측에서 노동자들을 해고할 수 있는 요건을 완화한다면 노동자가 사용자를 향하는 태도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심지어 사용자들이 부도덕한 행동을 요구한다면 회사에 남기 위해 노동자는 부도덕한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미 그런 다양한 예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이 목격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고 극대화할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하려고 한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살아가는가에 따라서 그 자유의 폭과 깊이는 제한될 수 밖에 없다. 이런 모순을 마르텐 판 로섬 Maarten van Rossem 은 "현대 사회의 자유는 공포와 생존이라는 두가지 사슬에 묶여 이름만이 자유인 부자유의 다른 이름이 되어간다." 로 표현했다. 또한 이러한 모순을 마이클 영 (1915-2002) Michael Young 은 "지옥으로 가는 길은 항상 최선의 의도로 포장되는 법이다" 라고 신자유주의의 성격을 설명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신자유주의의 많은 결과들은 이미 많은 나라에서 문제점을 만들어 냈다. 능력주의에 따른 소수가 자본을 독식하는 구조 그리고 그에 따른 심각한 부의 불평등뿐만 아니라 노동의 가치가 생산을 위한 하나의 비용으로 인식되면서 인간의 노동은 쉽게 대체될 수 있는 아주 쉬운 부품이 되어버렸다. 그런 가운데 어떤 국회의원은 최저임금을 외국인 노동자에게는 "외국인 근로자들 40%에 숙식을 제공하는데 숙식비에 최저임금까지 하니 외국인 근로자의 임금 수준이 높다, 선진국도 숙박비가 최저임금에 삽입이 되고 있다. 이런 얘기하면 국제 감각이 떨어진다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에 외국인 근로자들의 후생복리가 지나치게 좋아지는 것 아닌가" 라는 주장을 하며 적용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장을 한 국회의원은 환경노동위원회의 의원이었다. 이 뉴스 속에서 해당 국회의원은 노동에 대한 어떤 인식을 하고 있는지 상당히 궁금했다. 그렇다면 외국에 나가 일하는 한국사람들도 똑같은 차별을 받아도 된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속 시원한 해답을 얻을 수 없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개인적인 의문은 '국회의원까지 할 수 있는 지적 수준과 품위를 가진 분께서 왜 이런 인식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런 인식을 하게 만든 원인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의 인식을 바꾸는 요소들
무엇이 옳다 잘못됬다는 판단은 인간이 가지는 정상적인 그러나 상당히 비이성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이성이 옳다 잘못되었다는 판단은 이성적 작용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감정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이 더 편리하고 더 잘 맞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옳고 그름은 차라리 좋다 나쁘다로 설명하는 것이 잘 맞는 경우가 많다. 조금 학술적으로 표현해서 이것을 신념 faith 이라 부르지 않을까? 신념 faith 은 라틴어의 fides 에서 유래되었고 이 말은 믿음, 충성, 신뢰 등의 뜻이지만 이 모든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면 즉, 호의를 가지지 않는다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인식을 만드는 많은 것들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다.
병신년 새해를 맞이하여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하셨다.
"전체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위협은 진실의 힘"
전체주의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진실이라 생각한다. 전체주의는 무엇이 옳은지 명확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전체주의의 힘이 하나로 모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체주의는 무엇이 진실이다 라는 명확한 명제가 많아야 가능하다.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하는 역사학계의 의견은 단지 이견일 뿐 전체가 따라야 하는 진실은 명확하게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 그래서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그리고 다양한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 사회는 쉽게 전체주의가 되기 어렵다. 따라서 전체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위협은 진실의 힘이 아니라 무엇이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는 다양성이 되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전체주의 역사 속에 묻힌 개인들은 자신들이 좋아할 수 있는 다양한 의견들을 접하기도 전에 전체주의 국가가 제공하는 진실의 힘속에서 살아야 했다. 나치 독일의 전체주의는 개인들이 유대인을 숨겨주면 자신도 범법자가 되기 때문에 혹시 유대인도 같은 인간인데 라는 양심의 외침에도 유대인은 죽어 마땅한 존재라고 주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무엇이 진실이라 말하는 사회에서는 개인이 가지는 다양성을 숨죽이게 만든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지만 심각하게 보면 개인 생존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계되기 때문이다.
비슷한 상황을 조금 작은 규모의 공동체에도 적용할 수 있다. 사실 공동체란 말을 붙일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단순히 기관이나 이익집단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기업의 경우에 적용해보면 부도덕한 행동을 하는 재벌 총수를 도와 횡령을 하고 불법을 행하는 사람은 회사에서는 살아남을 수 있지만 이를 고발하는 내부고발자는 오히려 회사에서 살아남기는 어렵다. 그리고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내부 고발자가 양심적이라고 말해도 그래서 그 결과로 회사를 떠나 직업을 잃어버려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당연하다 생각한다. 문제의 원인은 내부 고발을 하고 양심을 지킨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도덕한 행위가 해도 된다고 인식한 높은 인간의 인식 수준이라는 것에 대해서 공론화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부도덕한 행동을 해도 부자로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을 사람들은 더욱 부러워할지 모른다. 이미 재벌 총수는 재벌 기업을 운영하는데 있어서 진실이다. 무엇이 양심적이고 합법적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혹은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가 중요하다. 우리가 기대해야 하는 희망은 오직 '그'들 혹은 '그녀'들이 정의롭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기를 바랄 뿐이다. 아니 최소한 죽어가는 생명 앞에서 무감각한 괴물만 아니기 바랄 뿐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싱가포르란 나라는 전체주의 국가에 가깝다고 느낀다. 지하철에서 음식물 먹는 것도 벌금, 화분 받침대에 물이 고여 있어도 벌금이다. 이런 다양한 벌금을 통해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 할 수 있는 행동들이 다소 심하게 구별되는 나라이지만 두가지 측면에서 이런 통제의 기능을 생각하게 되었다. 첫번째는 그런 규제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한다는 점이다. 지하철에서 음식을 금지하는 것은 어느정도 이해가 되지만 화분 받침대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말라리아와 뎅기열때문에 보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모기를 퇴치하기 위한 이유라는 점을 듣고 어느정도 수긍할 수 있었다. 실제로 싱가포르에서 모기를 보기는 쉽지 않다. 두번째는 이런 통제에는 예외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고위 공직자라도 비리를 저지르면 그에 따른 조사와 처벌은 피해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얼마나 엄격한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국민들이 그런 사법체계에 대한 신뢰는 상당히 높다는 점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런데 통제 및 규제의 이유가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합리성을 가지고 소수의 권위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즉, 국가의 통제 기준이 절대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도덕적 수준이라면 개인이 느끼는 양심적 갈등은 줄어들 것이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우리의 인식을 바꾸는 요소들을 생각해본다. 싱가포르의 경우 아주 소량의 마약만으로도 사형을 당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싱가포르 사람들은 옳다고 믿는다. 그러나 정말 마약 밀반입을 하려고 한 사람인지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 그리고 한번 사형을 내린 사람들은 다시 살릴 수 없는 문제를 이야기하면 그때는 조금 머뭇거리지만 항상 마약이 가지는 사회적 문제를 떠올리며 계속 주장한다. 이런 인식은 어쩌면 마약은 무조건 나쁜 것이야라는 인식을 교육을 통해서 그리고 법을 통해서 전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상당히 자율적으로 스스로의 가치관을 결정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아닌 예들을 많이 찾을 수 있다. 내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는지는 내가 태어나기 이전 부모님이 정해주신 유전적 형질보다 어쩌면 태어난 이후 어떤 환경 안에서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냐에 따라서 더 많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경제유전학과 교육유전학
유전학 genetics 는 인간의 질환이나 이해할 수 없던 다양한 증상에 대해서 다양한 설명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유전자의 실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시절에는 의학적 설명의 폭이 좁았던 것이다. 특히 유전자질환 genetic disorder 은 많은 부분을 설명해준다. 내과적 질환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방사선이나 약물에 의해서 특정 유전자가 기능을 하지 못해서 외형적인 부분에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도 존재한다. 유전자는 인간이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기능을 제공하는 일종의 청사진이기도 하지만 그 청사진이 변경 (변이 variation) 되는 경우에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고 그 현상이 인간 생명 활동에 치명적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유전자는 단순히 생물학적 의미에서 생명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역할을 수행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범위를 정하기도 한다. 아무리 인간 유전자에 새의 유전자 특히 날개의 기능을 하는 유전자의 일부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날개를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심지어 날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전자를 인간에게 주입된다고 해도 해당 유전자가 전체 인간 유전자 안에서 실제 형태를 만들고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거라 생각할 수 없다. 즉, 우리가 추구하는 기능이 있다고 해도 인간 유전자가 단순히 몇개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실현하기 어렵다. 유전자는 생명체가 죽을 수도 있는 치명적인 변이를 만들어 유전병을 만들 수도 있지만 가능한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필수적인 부분은 다양한 안전 장치와 보완 장치를 마련해 놓았다. 이런 의미에서 유전자란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들을 제한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을 제공하기도 하는 것이다.
Econogenetics 경제유전학
생명 활동의 규모, 범위 그리고 실체적인 행동들을 결정하는 요소로 유전자를 이야기 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안에서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이다. 이미 말한 것처럼 신자유주의의 서사 안에서 구성원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것에 더 집중해야 하고 생존을 위해서는 경제적 활동을 할 수 밖에 없다. 반대로 제대로 된 경제적 활동을 하지 못하면 삶의 질뿐만 아니라 생존의 문제까지 위협받게 된다. 신자유주의는 더욱 더 나아가 개인을 결과로 판단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정도를 평가하여 이를 통해 능력을 평가한다. 따라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거나 사고 등으로 얻게 된 경우 능력을 공정하게 평가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어떤 국회의원의 인식대로라면 자신이 선택하 수 없는 출신 국가에 따라서 최저임금을 보장받지 못할 수도 있게 된다. 같은 결과를 보여 능력이 동일해도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이처럼 인정하기 싫지만 자신이 결정할 수 없는 경제적 환경, 여기에는 자신의 경제적 능력이나 자본의 크기뿐만 아니라 자신이 태어난 곳 등과 같이 경제적 기회에 영향을 주는 다양한 요소들까지도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주게 된다. 다시 돌아가면 인간의 행동은 결과적인 문제이지 원인적으로 인간의 인식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즉, 물려 받을 수 있는 자본이 얼마나 있는지 어떤 나라에서 왔는지와 같은 자본적 환경은 내가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에 영향을 주고 행동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상품이 되어버린 인간 그리고 인간의 노동 |
이처럼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요소이지만 분명 우리의 인식 및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요소들을 유전학의 유사성을 생각해서 경제 econo- 유전학 genetics 이라고 부르려 한다.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표현이지만 대한민국 사회에 통용되는 소위 금수저 흙수저와 같은 인식은 결국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있는 범위는 정해져 있다는 한계적 요소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능력을 주장하지만 이미 시작점부터 다른 부의 불평등은 이미 경제적 조건조차 중요한 능력이 되었다는 사실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단순히 주어진 자본뿐만 아니라 자신의 경제 활동을 얼마나 쉽게 활동할 수 있는가와 같은 국가 안에서의 규제, 법률 등도 중요한 경제유전학의 요소이다. 예를 들어 아무리 프로그래밍 능력이 뛰어나도 인터넷 도박을 개발하는 행위는 제한되어야 한다. 능력이 뛰어나 쉽게 돈 벌 수 있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주기 때문이다. 능력과 기회가 충분하다고 해도 공동체 안에서 같이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들이 존재한다. 이처럼 공동체의 균형을 위해서 법이나 개인적인 차원의 양심은 할 수 있지만 그 행동이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고 하지 않는 과정도 경제유전학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단순히 경제가 자본을 많이 모으는 목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균형된 조직 안에서 공생이 더 가까운 의미일 것이다. 생리적 인간도 비슷하다. 간세포들이 자신들은 기능이 뛰어나다고 끊임없이 자기 조직의 세포를 분열 복제한다고 한다면 그것을 일반적으로 암세포라 부른다. 암세포 자체는 끊임없는 세포의 증가로 인해 정상적인 세포가 살아갈 여유조차도 만들지 못해 정상세포의 기능마저 할 수 없게 하여 결국 생명을 잃게 하는 것이다.
이런 경제에 관련된 활동 경제 구조에서의 생존을 위해서 어떻게 적응하고 어떻게 행동하는가는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는가를 통해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적응을 위한 행동을 통해서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재벌 총수가 횡령을 하겠다고 했을 때 회사 회계를 담당하는 한 사람이 부정한 방법의 내용을 모두 알고 있지만 재벌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불법을 저질렀을 때 자신을 불법을 저지른 범법자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이해해주길 바랄 것이다. 그러나 그 불법의 과정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피해에 대해서 보상을 제대로 해줄 것인가 의문이다. 결국 자신이 속한 다양한 사회의 구조가 가지고 있는 유전체가 무엇이고 그 유전체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어떤 기회를 줄 수 있고 심지어 자신이 원하는 행동들이 제한받게 되는가에 따라서 사회 안에서 한 개인의 행동과 인식은 변화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재벌 구조의 불법과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이 잘 맞는다면 지속적으로 공동체에 해가 되는 많은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다. 유전자가 단백질을 합성하는 과정에서도 잘못된 단백질을 생산하면 이를 중단하고 되돌리는 과정이 존재한다. 이를 유전자 발현 및 조절 gene expression & regulation 이라 부른다. 유전자의 조절을 regulation 이라 부르는 것과 유사하게 사회 구조의 환경 및 기회 등이 하나의 유전자라고 가정한다면 사회 공동체가 지속적으로 영속하기 위한 규제 regulation 의 기능도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Gene expression and regulations |
Edugenetics 교육유전학
인식이란 개인이 얼마나 많은 것을 접하고 얼마나 느끼고 얼마나 생각하여 어떤 가치관을 가지는지에 큰 관련이 있다. 가치관은 유전자처럼 이미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유전된 inherited 부분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비슷한 환경에서도 다양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나온다는 것을 보아도 가치관이란 단순히 외부로 받은 자극을 수용하는 과정이 아니라 수용이후 반응하고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편견의 명제들은 우리의 사고가 얼마나 생각하기 싫은지를 반증해주고 있다. '엄마없이 자라서 성격이 나뻐', '고아로 자라서 독립적이야' 와 같이 주어진 환경 혹은 상황에 따라서 편견의 결과를 쉽게 내리는 경우가 많다. 편견이 최소한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가설이 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경우 cases 를 경험 혹은 수집해야 하지만 대부분 자신이 가진 한두가지 내용으로 사실이라 믿어버리거나 아니면 자신이 믿고 싶은 방향대로 해석하고 진실이라 믿는다. 그래서 대부분 진실이란 수식어 안에는 증명되지 않거나 증명될 수 없는 인간의 수많은 편견이 고착화되어버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강제 성노예 위안부를 기억하기 위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집단의 논리를 접할 때가 있다. 가장 가까운 예가 일본의 지도자들이 일본 식민지 시절에 대한 해석 특히 최근 '강제 성노예'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입장이다. 일본 국민들 중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강제 성노예 문제에 대해서 일본의 아베 총리와 비슷한 입장을 가진다. 무엇이 이렇게 생각하게 만들었을까? 역사의 사건은 존재하지만 그 사건을 해석하는 그리고 해석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적절하게 감춘다면 역사를 인식하는 방법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철저하게 당시 일본 군의 직접적인 개입이 없었다 혹은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심지어 돈을 벌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위안부에 왔다는 식의 거짓 정보를 제공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현장을 목격하지도 않았던 학생들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교육이란 가르치는 사람이 가르키는 방향을 보게되어 일단 그것을 수용하기 쉽다. 즉, 교육이란 선생님의 권위를 통해서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인식을 주입하기 쉽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은 인간의 인식에 큰 영향을 주는 요소임에 틀림없다. 이런 의미에서 교육이 만드는 인식의 틀과 내용은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눈을 만들어 준다. 경제유전학 econo-genetics 와 대칭적으로 이를 교육유전학 edu-genetics 라 부르려 한다.
대다수 일본 사람이 강제 성노예에 대한 일방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아무리 일본의 교육 과정이 일방적인 인식을 강요하고 있고 교육자도 강요한다고 해도 무엇이 사실인지 알려고 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가르쳐 주지 않은 다양한 내용과 외부의 다양한 지식인들이 전하는 인권의 일반론을 접하게 되는 학생이라면 자신이 배운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이 부분이 가장 어렵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기준은 상당히 어렵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옳은지 아닌지 검증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교육은 배우는 이들이 수용하는 과정이 아니라 질문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 교육이 학생들에게 질문한다 ─ 교육의 역할에 대해서 ] 무엇이 옳다는 것을 전달하는 과정이 아니라 세상에 나아가 쏟아질 문제들을 해결하고 가치판단을 하기 위해서 최소한 자신이 이것만은 간직해야 겠다고 믿는 가치관들의 기본 요소들 fundamentals of principles 을 얻기 위한 것이다. 수학이나 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 등의 다양한 학문은 시험점수를 잘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필요한 해석의 도구들을 배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환자가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했을 때 기적의 생수가 있다고 팔려는 사람을 보면서 물이 건강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일지 모르지만 치료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거짓이며 경제적 탐욕을 위해서 자신의 양심마저 속이며 환자들의 절박한 상황을 이용한다는 심리학적 분석을 하게 된다면 정말 치료될 수 있는 확률보다 사기꾼일 확률이 엄청나게 높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Glycosylation Process |
결국 교육유전학은 세상의 세부적인 문제들을 모두 해결해주고 정답을 주는 과정이 아니라 인간이 접하게 될 수많은 문제들의 본질과 해결방법을 찾아줄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 인간의 생리학에서 면역이 담당하는 기능과 비슷하다. 즉, 외부의 셀수 없는 물질에 대해서 어떻게 방어하고 어떻게 수용할지를 선택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수많은 물질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간직하고 이에 대응하는 1:1의 반응을 하게 된다면 인간 유전자는 지금보다 확실히 큰 규모가 되거나 어쩌면 대응하지 못한 물질은 인간이 적극적으로 피해야 하는 물질들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전자는 유전자의 부분요소들을 적절하게 조합하여 당단백질과 같이 다양한 당류의 조합과 가지치기 glycosylation 를 통해서 면역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게 된다. 이런 대응에는 가급적 다양한 재료가 가지는 다양한 조합을 통해서 더 많은 기능을 수행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교육의 기능과 유사성을 가진다. 이런 이유로 교육은 좀 더 다양한 접근이나 세부적인 문제의 풀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문제도 유연하게 풀거나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괴물이 사는 세상
첫 부분으로 시작한 이야기들은 공동체의 선을 위해서 살아가야 할 것 같은 사람들이 왜 작은 공동체인 가정부터 경계가 무한에 가까운 공동체까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왜 해가 되지만 스스로 문제가 아니라고 인식하는 개인은 어떻게 생길 수 있을까 그리고 점점 그런 존재들이 증가하는 것만 같은지 궁금했다. 사실 그저 문제이고 그들의 문제의식을 탓하며 공동체에서 철저하게 단절시키면 되지만 근본적인 문제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결될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좀더 문제의 원인을 다른 시선에서 접근해 보고 싶었다. 부도덕한 일들을 하고도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심지어 정당화하려는 시도들은 오랜 시간 인간이 지키려고 했던 윤리 또는 인권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도 역행하는 모습이었다. 초등학교 등하교 길에는 유흥업소들이 가득하고 누구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그런 어른들의 모습을 하나의 문화처럼 수용하기도 한다. 마치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유전적 정보인 것처럼 그런 환경이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연쇄 살인범같은 살인자들이 뉴스에 나올 때 항상 나오는 단어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사이코패스 psychopath 이다. 살인을 하는 그 행동에는 분명 유전적으로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계속해서 묻는다. 그래서 살인자들은 원래 그런 유전적 특징이 있기 때문에 심지어 그런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쉽게 살인할 것이라는 끔찍한 결론을 내린다. 사실이 아니라고 믿지만 사회 대다수 혹은 소수라 할지라도 국가 기관의 지도자들이 진실이라고 믿는다면 전 국민들에게 '살인 유전자' 보유 사실을 검사하고 이를 통해 특별 감시를 할수도 있을지 모른다. 특히 후생유전학 epigenetics 을 알고 있다면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유전자가 원인이 되어 행동의 결과가 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기 더욱 어렵다. 그래서 경제유전학 econogenetics 나 교육유전학 edugenetics 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주어진 환경이나 교육의 조건에 따라서 인식이 결정되거나 행동이 정해진다는 결정론적 허무맹랑함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인간의 인식이 좀 더 합리적으로 공통선을 향한 일반적인 정의가 수립되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교육적으로 어떤 요소들이 필요한지 유전자의 유사성과 비교하면서 생각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Hannibal (TV Shows) as known psychopath |
누군가를 판단하는데 있어 항상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원칙중 하나가 '존재와 행동'은 분리해서 생각하자이다. 이미 정해진 존재가 항상 정해진 행동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이유에서 자신의 행동을 정할 수 없는 요소를 통해 전적으로 변명하는 것도 모든 이유가 될 수 없다. 살인자의 이유가 (정말 있다고 해도) 살인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는 모든 이유가 될 수 없다. 비슷한 이유로 자신이 속한 회사의 환경 등과 같은 경제적 환경때문에 자신의 부도덕한 행동들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이 모든 이유가 되어서도 안된다. 회사 상사의 부당한 요구에 수용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경제적 손해를 주면서 회계 부정을 하는 사람의 상황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행동마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홍수에 빠져 있는 많은 현대인들은 이런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한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월급은 적어도 도덕적 경영을 하는 회사가 인기를 얻는 이유인지 모른다.
주입식 교육이란 마치 세상의 모든 물질들을 대응하여 면역 단백질을 만들려고 하는 시도와 비슷하다. 시험에 나오는 모든 문제들을 풀어서 해당 문제가 나오면 어떻게 풀줄은 알지만 그런 수학문제에 필요한 미적분이나 확률이 우리가 앞차와의 안전거리 유지해야 한다거나 광고에 혹하여 손해만 보는 보험에 가입한다거나 주식을 제대로만 하면 돈을 항상 벌 수 있다는 멍청이가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은 모를 것이다.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행동이 내가 속한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그 인과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속한 경제구조 환경의 특징을 알아야 하고 내가 배워왔던 교육의 다양한 요소들을 통해서 이를 해석하는 능력이 필요할 것이다.
특별히 경제유전학과 교육유전학으로 구별해서 생각하고 싶었던 이유는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존재도 경제유전자 econogene 이 바뀌고 교육유전자 edugene 이 지속적으로 접촉될 수 있다면 존재의 행동은 좀더 바람직한 공동선을 추구하고 개인도 만족할 수 있는 방향이 있을 것이란 믿음 때문이다. 풀어 설명하면 경제유전자의 기업 활동이 좀더 투명하고 다양한 참여자들이 의사결정을 하고 자본의 흐름으로 좌우되지 않는 공정성을 강조한 규제들이 확립된다면 우리 몸의 유전자들이 제 기능을 하고 잘못된 기능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조절하는 과정처럼 좀 더 체계적인 경제(환경)시스템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교육유전자는 교육기관의 교육뿐만 아니라 다양한 의견과 이론들이 전달될 수 있는 정보의 접근성 및 여론의 투명성이 보장된다면 공동체 구성원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다양한 교육유전자를 접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반복되는 부도덕한 일들에 대해서 공정하지 못한 처리 과정으로 법 체계가 모든 이에게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스스로 방어를 하기 위해 다양한 경제유전자들을 포기하고 개인대 개인이 투쟁하는 정글의 모습이 되어버릴 것이다. 결국 제대로 이룩된 경제유전자의 요소들은 우리가 불필요한데 쓸 에너지를 아낄 수 있는 효율적인 요소가 될 수 있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데이비드 흄 (1711-1776) David Hume 이 능력에 기초한 사회는 어쩔 수 없이 해체된다는 주장으로 마무리한다.
"이성을 지녔지만 인간의 본성에는 무지한 어떤 존재가 있어서, 가장 공적으로 이로우며 평화와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정의 justice 및 사유재산 property 의 규칙들이 무엇일지 고민한다고 가정해보자. 틀림없이 덕 virtue 이 많은 이들에게 가장 많은 재산을 소유하게 하고, 각자 자신의 성향에 따라 선을 행할 힘을 주려고 할 것이다. (중략) 그러나 인간들이 그런 법을 시행한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이 지닌 본래의 모호함과 각 인간들의 자만 때문에 우수함 merit 이란 지나치게 불확실한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부터 아무런 확고한 행동 규범이 나올 수 없고, 당연히 사회는 즉시 전부 해체될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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