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부부가 있었다. 부부 모두 지역의 교장 선생님을 하셨고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혀 남부럽지 않은 가정이었다. 밖에서는 항상 인자하고 사람들을 위할 줄 아는 남편은 그러나 집안에서는 아내에게 폭력을 가하고 그 폭력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자신의 폭력이 잘못된 것을 알지만 습관이 되고 심지어 남들이 알지 못하게 얼굴과 같이 노출되는 부위는 때리지 않는 모습까지 보였다. 계속되는 폭력에 지친 아내는 늦은 나이였지만 견디지 못하여 이혼을 선택했다. 가정을 지키고 싶었지만 자신의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남편의 가정 폭력을 잘 알고 있던 대학생 딸에게 자신의 결정을 말했다. 그러나 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엄마가 이혼하면 제가 시집을 좋은데 갈 수 없잖아요. 그냥 참아주세요."
episode 2.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은 중년의 부부가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별 문제없는 가정처럼 보였지만 남편은 결혼 이전부터 만나던 여인을 결혼 이후에도 만나며 아내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아들을 포함한 집안의 모든 일들을 아내에게 맡기고 외도를 계속 이어갔다. 가정 폭력은 없었지만 오히려 가정에 관심을 쓰지 않고 단지 돈 벌어오는데 무슨 문제냐며 오히려 자신의 의무를 다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내는 마음먹고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고 경제적으로 남편으로부터 독립하기로 마음먹었다. 가정 안에서도 무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한 아내는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아들과 둘이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중학생 아들에게 아버지와 이혼했으면 싶다고 말했고 아들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엄마 아빠가 이혼하면 제가 학교에서 왕따당해요. 제가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기 바라시는거예요?"
개인적으로 최근에 들었던 가장 소름돋는 이야기였다. 이밖에도 믿기 힘든 실화를 들었지만 아주 짧게 요약해서 소개해보았다. 특정인물이 관련되지 않도록 여러가지 이야기의 구조와 등장인물을 각색한 부분도 있었지만 부모의 이혼에 대한 딸과 아들의 태도와 느낌은 가장 비슷하게 표현하도록 노력했다. 정말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선택한 엄마의 선택에 딸과 아들은 '당신의 그 선택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이 망칠 수 있으니 하지 마세요.' 와 다를 것 없는 그 말이 너무도 무섭고 이해하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딸과 아들이 말을 할 때의 목소리... 그리고 그 모습을 상상하면서 떠오른 한 단어는 바로 '괴물'이었다.
괴물이 사는 세상
괴물이라고 하면 인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고 때로는 협오스럽고 보자 마자 이질적인 느낌때문에 좋은 느낌을 가지기 힘든 대상 정도로 인식된다. 영화 괴물 (2006) 을 보면 그 흉찍한 모습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공격성 때문에 인간은 무서워하고 괴물이 죽어 사라지기만을 바란다. 영화에 의해 형상화된 것이 아니라도 괴물이라는 단어를 통해 우리는 충분히 나쁜 모습들을 많이 생각해낼 수 있다. 그리고 가까이 하기 힘든 존재이며 사람들은 그 협오와 두려움으로 존재를 제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결국 인간과 괴물은 대결의 구조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왜 죽여야 하는지 모르고 서로에게 공격하게 된다. 물론 많은 경우 괴물은 인간보다 생물학적 우수성을 가지고 있어서 쉽게 죽이지 못하고 반대로 인간은 괴물에 의해 쉽게 죽는다. 모든 경우가 그런 것은 아니다. 때로는 힘없고 나약하지만 단지 겉모습 때문에 인간의 편견에 사로잡혀 인간에게 쫓기며 사는 괴물들도 있다. 나름대로 괴물의 형상이지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진 영화가 슈렉 (Shrek, 2001) 이지만 잘 생각해보면 슈렉도 상당히 인간적 형상이다.
다양한 형태의 괴물이 존재하지만 괴물이라는 대상이 가지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바로 그것은 인간 사회의 다수 social majority 에 의해서 소외당하고 배척당하는 존재이다. 그들은 주류 사회에 소속될 수도 없고 심지어 외롭게 살아가도 인간의 폭력과 공포로 인하여 끊임없이 인간의 공격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괴물은 사회의 산물 product 이다. 영화 괴물은 인간이 버린 유해 물질에 의해서 한강에서 만들어진 존재이다. 그 괴물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사회에 의해 버림받지만 사실 그 사회의 잘못된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어쩌면 괴물을 설명하는 아주 짧고 역설적인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 우리는 괴물이라 부를까?
개인적으로 앞서 소개한 예와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단순히 몇명 소수의 이야기라고 놀라고 넘어가기 보다는 내가 듣지 못한 비슷한 이야기들은 얼마나 더 많을까... 그리고 이 사회에서 이런 실화가 얼마나 평범한 것은 아닌지 마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 재판소에서 언급되었던 '악의 평범성 banality of evil' 이 생각난다. 우리가 겉모습만으로 아무렇지 않고 평범할 것이라 생각했던 많은 대상이 어쩌면 악한 본성을 너무도 잘 나타내는 대상일지 모른다는 그 잔잔한 공포가 느껴진다. 지금 내가 사는 사회의 평범한 모습인데 내가 너무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어진다.
가끔 이런 순간 무엇이 문제일까 그리고 그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막막한 순간이 있다. 글로 표현하고 싶은데 더 이상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른 그런 순간이다. 그런 순간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글쓰기 방법이 하나 있다. 현상을 듣고 설명할 수 없지만 생각나는 단어를 찾는 것이다. '괴물' 가장 먼저 생각난 단어였다. 그리고 내가 왜라는 질문은 잠시 보류하고 내가 생각한 그 단어의 어원 word origin 을 찾아보는 것이다. 익숙하게 알고 있는 괴물이란 단어는 무슨 뜻일까? 영어로 괴물은 monster 이다. 라틴어 어원을 보면 monstum , monere 로 각각 뜻은 portent , warn 이란 뜻이다. 즉, portent 는 징후 전조이고 warn 은 경고(하다) 이다. 즉, 괴물 monster 는 단순히 우리가 제거해야 할 대상 혹은 우리가 싫어하는 대상만이 아니라 괴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경고하고 있단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이미 언급한 것과 같이 괴물은 많은 경우 사회의 잘못된 부분이 만든 의도하지 않은 결과물인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괴물 스스로도 원하지 않는 삶이고 그 삶을 위협하는 인간들의 공격에 혹은 스스로 공격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의해서 자신을 만든 그 사회와 대결하며 살아야 한다. 괴물의 어원이 뜻밖에 '경고'란 뜻은 새로운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괴물이란 사회의 잘못된 부분을 경고하고 있고 그 경고는 사회가 그 경고를 방치하면 다음 괴물이 될 수 있는 희생자는 바로 나 혹은 내 주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회가 만든 괴물에 대해서...
두 에피소드를 생각하면 딸과 아들은 엄마의 인생, 엄마의 행복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예전에 스웨덴에서 만는 가정이 생각났다. 원래는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만나 평범하게 자식들 3명을 낳고 잘 살고 있다가 남편이 갑자기 자신의 성적 정체성 sexual identity 가 이성애가 아니라 동성애임을 알게 되었고 아내와 논의 끝에 아내와 이혼을 하고 남편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자식들은 본인의 결정에 따라 엄마와 같이 살거나 두 아빠와 같이 살게 되었다. 당시 14살이었던 아들은 엄마에게 나머지 큰딸과 큰 아들은 두 아버지와 함께 살다가 대학생이 되면서 독립하며 살게 되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늦게 알게 된 아버지로부터 이야기를 듣는데 개인적으로 심한 혼란감과 많은 궁금증이 들게 되었다. 혼란감이야 익숙하지 않은 동성애에 대한 느낌이었고 심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궁금증은 당시 그런 선택에 대한 자식들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때 같이 있던 큰 아들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아버지도 아버지의 행복을 위해 선택을 해야 하지 않나? 저의 마음에 들지 않는 아버지의 선택이었다고 해도 저의 싫음때문에 포기하지 않기 바랬다. 아버지가 행복하기 바랬다."
자신의 '더 좋은' 혼인을 위해 어머니가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그 노력을 무시하고 자신의 '더 좋은' 학교 생활을 위해 어머니의 자존감을 가지기 위한 그 많은 노력들을 보지 않았다. 누구의 행복이 더 우선이고 많은 사람들은 자식들을 위해 부모의 한 사람으로서 희생할 수 있지 않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를 위해 희생하는 문제를 떠나 자신의 혼인과 학교를 위해서 어머니의 행복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에 더 가깝다고 본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위해 누군가 목적이 아닌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망치는 것도 불행한데 이 경우들은 자신의 미래를 담보로 타인의 현재를 망치는 것이다. 어머니의 불행을 보면서 그리고 어머니는 그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어렵게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식들은 어머니의 행복한 삶을 위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가 자신이 찾고자 하는 대상을 위한 것이고 심지어 그 대상들은 정말 본인의 행복을 정말 실현해줄 수 있는 대상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이런 자식들 (욕 아님...) 을 괴물이라 부르고 싶어졌다. 어쩌면 그들은 우리 사회의 잘못된 부분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가까운 사람의 불행마저 볼모로 잡으려고 하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 누구의 삶, 행복, 생명마저도 파괴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일화들을 들으면서 느낀 그 소름끼치는 느낌들은 괴물, monster 란 단어가 가지는 라틴어 어원처럼 우리에게 많은 것을 경고하는 것은 아닐까? 그 경고를 경고로 느끼지 않는다면 심지어 그들이 괴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사회의 잘못된 부분은 볼 수 없을 것이다. 때로는 잘못된 것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심각하지 않다거나 어쩔 수 없지 않나... 와 같이 순응하며 살게 된다면 괴물이 될 수 있는 다음 사람은 당신의 자식,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일 수 있다면 그냥 순응하며 살 수 있을까 모르겠다.
경쟁만이 강요되는 사회
우리 사회에서 잘못된 것들이 수없이 많겠지만 자신의 욕망,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 타인의 삶은 희생되어도 되고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가지지 못하고 타인의 생명이 사라지는 것도 괜찮다고 고민없이 사는 괴물이 왜 만들어졌는지에 초점을 맞춰 생각하게 된다. 사회의 어떤 잘못된 부분이 이들을 괴물로 만들었는지 말이다.
먼저 딸과 아들이 욕망했던 대상 먼저 생각하게 되었다. 결혼, 학교 ... 그리고 결혼은 '좋은데 시집' 가는 것, '왕따 당하지' 않는 것 둘 모두 조건의 문제였다. 두개의 에피소드 말고도 다른 이야기들 속에서 공통점은 바로 자신이 욕망하는 것은 겉으로는 대상 (결혼, 학교) 인듯 보였지만 사실 조건 (더 좋은, 왕땅 당하지 않는) 이었다. 조건의 속성 property 은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표현은 조건이었지만 항상 사회적으로 더 좋은... 덜 좋은... 때로는 가장 좋은... 과 같은 비교의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가벼운 사실을 너무도 무겁게 받아들인다. 인생의 경로는 대학을 통해서 결정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경쟁의 구조 속에서 대학이라는 대상과 '더 좋은'이라는 조건을 통해서 끊임없이 욕망하게 한다. 그 욕망 이외에는 중요하지 않다. 교육은 단순히 '더 좋은' 조건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한 기능만 할 뿐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이로움을 주는 사회 구성원을 만드는데 별 관심이 없다. 경쟁만이 강요될 뿐이다. 더 좋은 경로를 모두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 사람이 이 사회에 이로움을 줄지 온갖 해악과 더러움을 줄 수 있는지는 모른다. 왜 그토록 수많은 돈과 자원을 쏟아가며 괴물을 만들어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이려는 것인가. 이계삼 선생님의 [ 공부는 힘이 세다 ] 를 꼭 읽기를 권한다.
"공부를 잘하면 한수원 직원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자기보다 공부 못했던 하청 직원들에게 피폭 노동을 맡길 수 있다. ‘컨트롤 C에서 컨트롤 V’로 끝나는 보고서에 밀양 주민들의 생존권을 빼앗을 법적 권능을 부여해 주는 것도 바로 서울대와 미국 박사의 스펙이 엮어낸 전문가의 자격이다.
나는 지금껏 돈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실감을 갖고 살았다. 그러나 돈이 인간의 영혼을 주장하지는 못하리라는 믿음 또한 갖고 있었다. 나는 학교를 그만둔 지난 2년 사이 공부가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는 실감을 얻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공부가 인간의 영혼마저 주장하고 있다는 믿음을 얻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돈보다 공부가 더 힘이 세다.
국립묘지에 조성된 '정의의 상' 공부를 잘하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국민들을 속이고 억압했다. 그때 가장 분개하고 거리에 나온 많은 사람들 중 많은 수는 학생이였다. 지금의 경쟁 사회 속에서 가능할까 의문하게 된다. |
경쟁을 통해 잘 선발된 인재들이 우리 사회를 이롭게 하고 발전시키고 더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란 생각은 거의 반대이다. 경쟁 구조 속에서 누군가를 이겨야 하는데 타인에 대한 배려를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반대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공정한 과정보다 유리한 조건만 생각하고 같이 걸어가는 동료보다는 짓밟고 올라갈 수 있는 경쟁자만 생각한다.
인과관계의 희생자 casualty of causality
어머니의 희생을 강요하는 딸과 아들을 보면서 얼마나 교육이 중요한지 느끼게 되는 부분이 바로 인과관계에 대한 멍청함이다. 흔히 인간은 지금의 결과를 놓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분석하는 것은 잘한다. 그러나 지금의 원인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런데 쉽게 확신한다.
어머니가 이혼하면 딸은 더 좋은 결혼을 하지 못할것이라 믿고 있고 아들은 학교 생활에서 왕따 당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와 비슷한 믿음으로 많은 사람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면 서울대를 갈 것이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인성을 가질 것이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직장)을 가지고 자신이 바라는 삶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욕망의 사슬에는 건강으로 모든 것을 잃거나 한순간에 사고로 세상을 떠날 수 있는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과정의 목표들 중에는 왜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내용은 없고 '더 좋은' 조건을 위한 내용들만 존재한다.
특정 학원을 다녀야 시험 성적이 오른다 와 같은 이야기들은 인과관계를 너무도 쉽게 보기 때문일까? 인과관계가 명확하여 특정 대학을 가기 위한 조건들이 존재한다면 그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켜야만 할 것이다. 문제는 인과관계가 있다고 믿는 것도 있을 수 있지만 더 큰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의 공포와 미래의 결과가 원하는 결과가 성취되지 않을 때 과거의 그것때문에... 라는 결과론적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높다. .. 하지 않으면 .. 를 얻을 수 없다 와 같은 인과관계에 희생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인과관계를 단순화하여 바라보는 것은 앞으로의 일들을 예상하고 대비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다양성의 수용'이란 측면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특정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들이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단 하나의 원인때문에 결과가 이루어지는 것도 거의 찾기 힘들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특히 특정 결과는 특정 원인때문이야 라는 인과관계의 희생자들은 공통적으로 세상에 작용하는 다양한 원인들에 대한 수용을 하지 못한다. 어떤 학생이 중간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는데 좋은 성적을 받은 원인에는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했던 말을 기억해서 그럴 수 있고 휴식시간동안 우연히 보았던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알았던 사실이 시험에 나올수도 있고 다행히 자신이 공부한 내용에서 많이 나왔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런데 우연히 그 시기에 다녔던 학원이 있었다고 학원이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얼마나 어리석인 일인가. 하나의 결과가 만들어지는 것은 수많은 원인때문이고 원인의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목표하는 일들은 결코 우리고 원하는대로 정확하게 이루어질 수도 없고 때로는 부족하여 만족스럽지 못하게 때로는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으로 기대 이상으로 만족할 수 있게 된다.
인과관계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인간 사회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에게 가진 편견을 인정하고 자신이 가진 지식의 범위가 한계를 가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것은 확실한 인식이 아니라 관습이나 선례인 것 같다. 그러나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운 진리는 여러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한 사람에 의해 발견되는 법이다. 이것은 여러 사람의 동의가 진리의 타당성을 확보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 데카르트, 방법서설
주변 사람이 괴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어느 세상이나 괴물은 존재할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가 더욱 더 잘못되어 간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최근에 일어난 일이라고 보지 않는다. 많은 고위 정치인을 비롯한 사회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의 인권과 생명을 무시하는 예들만 보아도 우리 사회의 도덕적 윤리적 기준을 떠나서 얼마나 거대한 괴물이 되었는지 공감할 수 있다.
원자력 발전소 주변의 많은 주민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갑상선암 환자들이 있는데 전문가들은 원자력 발전소는 안전하고 직접적 원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인과관계의 전형적인 희생자들이다. 자신이 가진 전문적인 지식을 떠나서 다른 지역과 차별이 되는 주요 원인인 원자력 발전소를 정치적으로 제외하기 위해서 자신의 지식을 이용하는 것은 결국 지역 주민들의 아픔과 고통을 먹는 괴물이나 다름없다.
어떤 사람은 세상은 원래 그런거고 그런 괴물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은데 뭐가 문제냐고 말한다. 그럴때 대답하기 위해 만든 좀비이론 zombie theory 이 있다. 영화에서 좀비는 일정 수준이 넘어서면 그 감염 증가 속도는 조절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의 선한 의지를 믿는 착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은 선한 의지를 믿는 일부 사람이 아니라 대중의 모습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좀비가 되어서 세상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인간의 본성이 거의 사라진 상태의 존재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데 이들을 피해 다니는 일부 착한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사회가 제대로 된 모습이라 말할 수 없다. 괴물이라는 어원이 알려주듯 이상한 조짐이 보이는 좀비가 조금 보였을 때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경고로 받아들이고 이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좀비가 세상의 대다수가 되는 이유는 착한 사람들의 숫자가 적기 때문이 아니라 문제가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인 다수의 무관심이라는 점이다.
여기 앞선 이야기들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episode 1. 남편은 아내를 두고 다른 여인과 살림을 차리고 살았다. 전문직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아내와 아들의 생활비를 벌고 다른 여인과 사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남편은 아내를 인격적으로 무시하며 살았다. 여인은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지만 남편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들 키우는데 식모랑 운전기사는 필요하잖아. 근데 이혼하면 더 돈들잖아 그냥 지금이 더 싸게 들어... 어느날 아내를 무시하며 식모 취급을 하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빠 집에서 나가세요. 더 많이 배운 아빠에게서는 더이상 배울 것도 존경할 것도 없지만 덜 배운 엄마에게서는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도 아끼는 방법도 계속 배울 수 있으니깐요."
episode 2. 남편은 해외 지사로 발령받아 떠나야 했고 아내는 직장 생활 때문에 딸 둘을 데리고 살았다. 남편은 해외에서 다른 여인을 만났고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도 계속해서 만났다. 남편은 자신이 바람피는 이유는 당신이 나에게 성적 만족을 충족시켜줄 수 없기 때문에 여인과 헤어질 수 없다고 말했다. 심지어 예수를 믿는 아내가 용서하고 남편을 이해해야 한다 말한다. 오랜 결정 끝에 이혼을 결정하고 큰딸에게 말했다. 이혼을 거부하는 남편에게 큰 딸이 말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용서하는 것과 이혼하는 것은 다른 문제예요 끊임없이 어머니가 아버지를 용서해도 끊임없이 아버지는 잘못을 저지르고 아버지가 어머니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요"
괴물이라는 경고에 대해서...
원래부터 괴물이었던 존재가 무엇이 있을까? 괴물은 우리에게 사회의 잘못된 문제가 사회 구성원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스스로 괴물이 되어 알려주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내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괴물이 될 수 있을까 계산하고 싶어졌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는 얼마나 많은 괴물들이 존재하고 있을까 혹시 나 스스로도 괴물이 아닐까 걱정하게 된다. 두개의 이야기를 더 소개했다. 그러나 글의 처음에 소개된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아들과 딸이 있다. 이 둘도 부모의 이혼때문에 겪을 수 있는 어려움 등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이 이 불행을 만들고 있는지 그리고 그 불행에서 벗어나고 싶은 어머니의 모습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라 본다.
'더 좋은' 이라는 조건의 욕망은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만든다. 더 좋은 인간이 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더 좋은 조건을 이루기 위해서 덜 좋은 인간이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많이 배운 공부를 자신의 합리화를 위해 사용한다. 인간은 왜 사회를 만들었을까 생각할 때가 많다. 같이 모여 불편하기도 많고 짜증나고 수많은 스트레스를 만드는 이 사회는 왜 만들었까? 그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다운...' 이란 단어에서 느껴지는 희망을 전하고 싶다.
[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가치를 생각하다 ─ 클라우드 서비스 ] 에서 가치에 대한 정의 definition 를 설명했다.
"가치"란 능력을 가진 사람이 가지는 연민을 통해 구현되는 이로움이라 정의하고 싶다.
이렇게 정의를 한 이유는 어떤 일을 맡아 해야할때 선택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는 기준으로 만들고 이에 부합되는지 아닌지를 생각하고 싶었다. 우선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그 일을 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로움을 얻을 수 있으며 그 동기가 개인적 욕심이나 명예가 아닌 사람들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기를 바라는 연민에 기반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부도 연구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어떤 연구를 하는데 어떤 사람들이 이로움을 얻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이렇게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경쟁사회에서는 오직 나뿐이다. 타인은 어떻게 이길 것인지만 생각하는 대상이 되어버리고 같이 협업한다는 것도 결국 내가 잘되기 위해서 잠시 같이 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자신을 제외한 사회 구성원은 그저 배경일 뿐이다. 이런데 어떻게 타인을 위한 이로움을 생각할 수 있을까 싶다. 어떤 연구소에서는 많은 특허를 만들어 돈을 많이 벌어... 와 같이 욕망이 이끄는 전차처럼 운영하는 곳도 있다. 많은 이들을 위해 자신의 발명을 특허로 가지고 있지 않고 나누었던 루돌프 디젤 (Rudolf Diesel; 디젤 기관) 와 조너스 에드워드 소크(Jonas Edward Salk; 소아마비 백신) 들은 자신의 재능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릴 수 있던 환경, 사회의 덕이라 믿고 이로움을 혼자 소유하지 않고 다시 사회 구성원에게 돌려준 것이다. 조너스 소크는 '이 백신의 특허권자는 누구죠?' 라는 질문에 '사람들이죠. 특허라고 할 것이 있나요? 태양에도 특허를 낼 것인가요?' 라고 대답했다.
자기 자식들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기에... 얼마나 많은 문제를 풀 수 있냐고 물어보는 대신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사랑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생각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도와줬는지 물어볼 수 없는 것일까? 행복에 대해서 말하고 길가의 들꽃을 보며 아름다움에 대해서 물어보면 안되나 싶다. 무엇을 잘하는지 물어보고 그 무엇이 좋은 대학가는데 얼마나 필요한지가 아니라 그 재능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지 다양한 모습을 소개시켜줄 수 있는 부모가 될 수 있다면 아이들은 분명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던 숨겨진 괴물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공통적으로 설정된 남편들이다. 이야기의 편의상 남편으로 일관되었지만 부모이지만 자신의 욕심때문에 자신의 가정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만약 그들이 사랑이 가득한 아버지였다면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위해서 누군가의 불행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들도 사회가 만들어낸 어쩌면 역사가 생각보다 깊은 경쟁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과관계의 커다란 희생자 즉, 괴물일 것이다. 그러나 소개된 네개의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후반부의 이야기들은 어머니의 아픔을 느끼고 그 아픔을 통해서 연민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기 위해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지 많은 고민을 했던 이들이다.
괴물이 치유받는 사회를 꿈꾸다...
우연히 교육열이 높은 강남 지역을 지나다가 작은 캐리어를 끌고 가는 아이들을 보았다. 난 여행가는구나 싶어 보기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사실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에 배워야 하는 교재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책가방도 부족해서 캐리어에 넣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무심하게 넘어가면 상관없는 이들의 삶이지만 알 수 없는 씁쓸함이 느껴졌다.
SBS스페셜, 부모님. 당신의 선택에 따라 아이들이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중 한장면 |
무엇이 문제이다 속단하지도 못하고 너무 많은 문제들이 얽혀 있기 때문에 가볍게 해답을 제시하지도 못한다. 교육의 문제일까 싶어 교육의 원래 목적으로 돌아면 되지 않을까 싶어 화이트헤드 (Alfred North Whitehead) 에서 제시한 교육의 목적에 맞춰 교육을 설계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갑자기 든 생각이 어쩌면 지금의 사회는 인간다움을 배우지 않는 것은 아닐까 싶다. 단지 사랑하는 마음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미워하는 마음, 슬퍼하는 마음 ... 인간이라면 가질 수 있는 그 다양한 마음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박탈당하고 배워야 하는 것, 공부해야 하는 것... 해야 하는 것들을 하기에도 바쁘기 때문에 인간다운 감정을 제대로 느끼고 고민하고 그 고민을 통해서 무엇이 '더 좋은' 나를 만들 수 있는지 고민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학교에서 1등을 하기 위해서 반 학우의 노트를 훔치기도 하고 그렇게 훔쳤을 때 학우가 느끼는 감정을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이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결국 괴물은 타인의 감정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제대로 경험해볼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 무감각의 존재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연민의 가치에 대해서... ] 연민이 사라진 세상을 생각해본다.
젓먹이 아이가 배고파서 울어도 엄마는 먹이고 싶을 때 젓을 물릴 것이고,
누군가 쓰려저 죽어가도 내가 바쁘다면 신경쓰지 않고 갈 길을 갈 것이고,
지구 반대편 아이들이 기아로 힘들어 해도 더 맛있는 맛집을 찾을 것이고,
누군가 놀림과 오해를 받아 눈물을 흘려도 내 외모에 더 신경 쓰일 것이다.
괴물에게는 엄마의 슬픔도 느껴지지 않는다. 괴물에게는 자식들이 느낄 슬픔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나온 좀비와 무엇이 다를까? 영화에서는 좀비는 좀처럼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지 않고 몇 편에서 그런 시도를 했지만 많이 성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 우리 사회에 있는 괴물들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야 스스로에게 좀 더 위안이 된다...) 자신에 감정에 솔찍하고 타인의 감정을 수용하고 때로는 연민을 통해 내가 그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사명감도 가지고 오랜동안 그렇게 감정을 느끼는 연습을 한다면 괴물은 언젠가 타인의 아픔과 슬픔에 같이 울어줄 수 있는 인간이 되어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사람에게 상처가 있는 이유는 그 상처를 통해 타인의 약점을 알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상처의 아픔과 슬픔을 보고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고민하라는 의미일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의 상처는 차라리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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