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종교가 나누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뜻하는 것이 아닌 나누어져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보편적 인식이 옮겨갈 때 대중은 이를 하나의 가치 근거 (a yardstick for judgement) 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런 가치 근거는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 준다. 예를 들어 정치인이 종교 행사를 개인적 신분이 아닌 국가 원수로 혹은 지도자로 수행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정교분리' 원칙을 삼아 그런 행동이 적절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많은 경우 그런 판단이 옳을 수 있다. 그리고 정교분리를 포함해 많은 경우 역사적 전통과 여러가지 후유증의 산물이라면 득실보다 손해가 더 클 수 있다는 경험적 산물이기에 따르는 경우가 옳을 확률이 높을 뿐이다.
관습적 언어의 문제점
이렇게 여러가지 이유로 대중들에게 마땅한 내용으로 받아들여지고 그것을 지키지 않을 때 대중적으로 옳지 못하다는 평가를 많이 받을 수 있는 것을 '관습적 언어 (conventional language)' 라고 정의내려 본다. 그런데 이런 관습적 언어는 그 시간이 오랫동안 지나면 어느새 '언어적 관습 (linguistic practice)' 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언어적 관습이란 자주 사용하고 충분히 그 뜻은 이해를 하지만 그 언어의 기원적 본질 (originated fundamentals) 과 역사적 흐름 (chronological tendency) 은 잊혀지고 그 언어가 가지는 직관적인 용법 (instinct diction) 에 치중하게 되기도 한다. 정교분리가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아닐까 싶다. 그 누구도 정교분리를 대하며 정치와 종교는 분리될 수 있다라고 해석하지 않고 분리되어야 한다고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 언어적 관습이 만드는 첫번째 문제는 '왜 정교분리가 맞는가?' 란 질문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쓰는데 집중하기 때문에 그리고 적당히 현학 (衒學 ; pedantry) 적으로 보일 수록 본질적 뜻을 탐구하기 보다는 쓰기에 급한 경우가 많아지는 것이다. 두번째 문제는 그렇게 관습적으로 쓰인 언어가 어느새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왜' 라는 질문을 하지 않고 쓰는데 집중하기 때문에 그렇게 받아들인 언어적 용인 (acceptance) 은 당위성으로 바뀌게 된다. 정교분리가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 고 용인하고 연습하면서 어느새 사람의 의식 속에서는 '분리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질문에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have no toleration ; [note] 용인하다, 받아들이다는 영어로 accept 도 있지만 tolerate 도 있다. 둘다 받아들이다 용인하다란 뜻이지만 tolerate 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내용에 대한 관용, 참고 허용하는 것을 포함한다. 프랑스의 똘레랑스는 '다름에 대한 너그러운 관용' 을 뜻한다.)
안타갑지만 이렇게 관습적 언어에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도 좋은 쪽으로 흘러가는 것보다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나 하지 말아야 하는 타부 (tabu) 의 내용이 많다는 것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내용들은 인간의 대중적 인기에도 상당부분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런 인간의 관습적 언어만 잘 사용하면 대중적 선동 혹은 여론의 조작은 가능할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대북 문제에 있어서 상당히 민감하다. 민감하다는 것은 이미 의사 결정의 방향이 정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정교분리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학문적, 철학적 담론 (discourse) 는 사라지고 정교분리는 '항상 진리'가 되어 버리면 이에 비추어 조금이라도 어긋나 보이는 모든 것들은 옳지 못한 것들이 되어버리는 세상이 된다.
정치란 무엇인가?
항상 그렇지만 짧은 질문이 가장 어려운 질문이다. 정치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대답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그만큼 정치가 우리에게는 이미 공기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생명 유지를 위해 필요한 다양한 요소들이 존재하듯 우리가 사회를 살아가는데 피할 수 없는 개인 및 집단의 사회 유지를 위해 필요한 요소 중에 하나가 정치 (政治 ; politics) 이다. 그리고 정치에 대한 다양한 어원적 기원은 많은 참고 자료가 있으니 생략하고 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하기 전에 인간은 왜 동굴을 나와 이처럼 복잡한 사회를 만들려고 했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먼저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조금은 광의 (廣義) 의 의미로 정치에 대해 생각해본다.
정치란 인간의 한정된 자원을 분란없이 쓰기 위한 규칙과 권력이다.
물론 개인적 정의 (definition) 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뭐라 이견을 이야기해도 별로 할말은 없다. 그러나 문제의 시작은 도대체 인간은 이 복잡하고 머리아픈 정치를 만들었는가? 생각하며 반대로 정치를 통해 인간은 도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를 찾아보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아마도 한정된 자원이 아닐까? 아마 신학적 원죄와 같은 존재일지 모른다. 만약 지구에 무한의 자원이 존재한다면 인간은 궁극적으로 그 자원에 대해 욕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애심보다 자비심이 더 커지고 나누어 쓰는 것에 익숙해질지 모른다. 헛된 가정이지만 인간의 무한에 가까운 욕심이란 역설적으로 자원은 코딱지 만큼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무한으로 발산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자원은 한정되었고 그 한정된 자원을 모든 사람들이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경제의 개념이 발전하게 되고 어떤 사람이 어떻게 쓰는 것이 옳은 것인가? 정의로운가의 문제를 접하면서 정치가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문제를 접근하며 만들어진 경제와 정치는 마치 쌍둥이가 아닐까 싶다. (일난성인지 이란성인지는 언급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따라서 정치는 누가 어떻게 쓰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서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에 따라 사회 구성원이 움직이고 이를 어길 때는 적절한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상위의 조직이 필요했고 그 조직은 당연하게 모든 사회 구성원의 동의와 합의에 의해 만들어지고 비록 개개인은 자유로운 영혼(?)이지만 사회의 한정된 자원을 올바르게 쓰기 위해서 구성원의 권한을 정치라는 제도를 통해 맡기는 것이다. 이는 현대의 민주주의, 혹은 공화정 등에 국한되는 내용은 아니다. 왕이 통치하는 시절에도 이는 동일하다. 비록 자신이 이집트에 사는 신분이 낮은 계급의 사람이라고 해도 민주주의를 꿈꾸며 왕이 물러나기를 바랬다면 처형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와서 보면 아주 심하게 시대를 앞서가는 생각을 했을지 모르지만 (그때문에 저세상도 앞서 갔지만) 당시의 정치 제도 즉, 사회 구성원이 동의하는 시대의 정견 (dogma) 에 비추었을 때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즉, 당시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효과적인 통치 규칙이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정치가 시대의 흐름과 시대의 정신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두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첫번째는 충분히 고립된 (isolated) 사회인 것이다. 자원이 충분한 나라에서 어느정도 가능할 것이다. 예전에 만난 브루나이 (Brunei) 출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면 정말 딴 세상에 살고 있구나 할 정도의 느낌이다. 오일 머니로 국민들은 충분한 생활비와 모든 교육비가 무료 등등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제도들이 있다. 그런 이유로 브루나이 국민들은 자신들이 별 걱정없이 살 수 있게 만들어 준 왕을 진심 존경한다. 그런데 브루나이 사람들의 특징은 그다지 시대의 흐름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두번째 경우는 사회 구성원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정치 권력이 통치 권력으로 강력해지고 사회 구성원의 요구를 왜곡하고 통치 권력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거대한 정치 세력화를 만들 때이다. 가장 대표적이고 극단적인 경우가 전제 정치이자 독재 정치가 될 것이고 역사상 가장 큰 아픔은 아마도 독일나치가 될 것이다. 이렇게 정치 세력이 전제 정치 (전체주의) 화 될때 다양성이 존재하는 어떤 사회나 반대 세력이 발생한다. 만약 전제 정치 세력이 좀 더 강하다면 어떤 방법을 쓰던 반대하는 세력을 숙청 혹은 제거하려 할 것이다. 만약 반대하는 세력이 조금 더 우세하다면 그 정체 세력은 물러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종교란 무엇인가?
이또한 어려운 질문이다. 왜냐면 짧기 때문이다. 정치란 무엇이다 라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전달했지만 종교란 무엇인가란 질문은 이처럼 쉽게 접근하기가 너무 어렵다. 왜냐면 보이는 것을 설명하는 것조차도 어려운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할 때 대부분 과정되거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기 힘든 내용이 되거나 아니면 믿음에 근거를 하기 때문에 극적으로 거의 광적으로 대중적인 사람들의 동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극과 극의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 극단의 결과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기 위해 아주 사소한 내용으로만 이야기를 전개하고 싶다. 어짜피 정교분리라는 주제를 통해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야 하는가? 혹은 분리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다.
대표적인 무신론자인 리차드 도킨슨 (Clinton Richard Dawkins) 은 증명되지 않은 신의 존재, 과학적 증명이 존재하지 않는데 종교에 빠지는 모든 인간의 믿음, 행동 등은 인간의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종교가 만든 신학의 그럴듯한 내용으로 사람들을 빠지게 한다고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천주교 (로마 카톨릭) 신자이지만 그렇다고 정면에서 무신론을 강변하는 리차드 도킨슨을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책을 탐독하고 그의 이야기를 즐겨 듣는다. 심지어 종교로 인해 인간의 악이 만들어지는 '악의 근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종교때문에 일어나는 많은 분쟁, 살인, 테러 그리고 무엇보다 무의식적 무비판적 행동들로 만들어지는 수많은 자원의 낭비를 이야기한다. 리차드 도킨슨의 이야기에 모두 동의한다면 정교분리와 같은 논의는 별로 필요없을 것이다. 어짜면 정교분리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어 정교분리 때문에 갈등을 만드는 사회에서는 좋은 해결책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항상 '제거'는 확실한 문제 해결 방법이지만 곧 제거되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폭력'이 되기 때문에 이또한 적절한 방법이 아닐 것이다. 물론 강력한 전제 국가는 권력의 힘으로 충분히 몰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톨릭을 믿는 이유는 그리 큰 이유가 아니다. 가장 결정적 이유는 어느 순간 느끼게 되었던 인간의 한계성이었다. [ 글쓰기에 대한 소회(所懷) - 의도에 대해서 ]
삶에 대한 한계성... 먼 이야기같았던 죽음이 어느 순간 다가올 수 있다는 두려움과
인식에 대한 한계성... 내가 생각한 세상은 나와는 다르게 돌아간다는 공포로 인해,
[ 신을 믿는 사람들은... ]
할 수 없음에 안타가워 해도 실의에 빠지지 않으며
할 수 있음에 자만하지 않고 유혹에 빠지지 않음은...
유한한 삶에 대한 겸손함과
죽음에 대한 무한한 희망이
교체해 흐르는 그 교차점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공감한다.
종교가 무엇이냐고 사전적 의미를 이야기하면 죽음 이후 영원과 내세에 대한 약속을 이야기하지만 이는 죽고 나서 이야기일 뿐이다. 삶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한계들 속에서도 인생이 좌절과 포기가 아닌 다른 방법을 제시해준다는 의미에서 종교는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유한하기 때문에 허무해질 수 있지만 겸손해질 수 있고, 죽음 (끝) 이 있기에 두려울 수 있지만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용기를 얻을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종교를 통해 '같은 상황이라도 다르게 볼 수 있는 좀 특이한 시선'을 얻게 된다. 즉, 허무와 두려움을 택하지 않고 겸손과 용기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종교가 있기 때문에 좀 더 수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겸손과 용기는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 숨쉬는 공간과 시간에 있는 것이다.
출처: 평화방송 |
종교가 무엇이다 정의내리기는 어렵다. 그래서 개인적인 느낌을 다소 감상적으로 전달해 보았다. 그러나 결론은 아주 간단하다. 종교는 겸손과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생각보다 좋은 내용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신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유신론자의 입장에서...) 인간의 불완정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완벽할 수 없다. 겸손과 용기가 때로는 변질되어 신의 권능을 배경으로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이를 통해 무엇인가 사적 이익을 얻기 위해 이용하거나, 용기가 너무 과하여 맹목적으로 변해서 타인의 생명을 사라지게 하는 그 어떤 종교도 옳다고 말하지 않는 살인조차도 종교의 이름으로 저지를 수 있게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종교가 악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핵폭탄과 총기류를 만든 과학 기술이 있기 때문에 과학 기술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과 비슷하다. 결국 인간의 잘못된 선택이 근본적 이유가 되어야 한다.
- 겸손은 자신을 낮게 만든다. 낮게 만든다는 것은 비천하거나 천박해진다는 것이 아니다. 한계를 모르는 사람은 쉽게 겸손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한계에 부딪치는 경험은 인간을 좌절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겸손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렇게 겸손해진 사람은 낮은 곳에 있는 소외받은 사람들, 아파하는 사람들, 그리고 한계에 부딪쳐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를 낮출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 용기는 인간을 넓게 만든다. 용기는 무모하거나 높아지기 위해 만드는 탐욕이 아니라 보다 넓은 곳으로 자신이 두려워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신발과 같은 존재이다. 가야할 길이 가시밭길이고 거친 돌밭이라도 무서워하지 않고 돌진할 수 있어 경험하지 못한 낯선 곳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용기는 나와 다른 환경에 있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만들어 준다.
종교가 겸손과 용기의 미덕 (virtue) 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깨어있을 때 종교는 항상 사람들을 위로하고 힘을 주는 세상의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였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당연하지만 종교의 이름으로 온갖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 마찬가지이다. 이는 단순히 종교이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 이유로 종교는 더욱 더 겸손과 용기의 미덕을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점점 이런 미덕이 어려워지는 세상에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의지하고 기대하기 때문에 성직자, 수도자들의 생활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세상에 뿌려진 많은 현상중 종교와 관련된 사건들을 접하면 두가지 키워드로 분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바로 '겸손' 과 '용기' 라는 두가지 기둥을 통해서 말이다.
정치와 종교는 분리해야 하는가?
관습적 언어라고 하더라도 일단 정교분리를 믿고 따라보자. 정교분리,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당위에 맞춰보자는 것이다. 우선 주중에는 정치적 활동을 하고 주말에는 종교적 활동을 하고 정치 활동은 극명하게 정치적으로 행동해야 하고, 종교적 활동에서는 극명하게 종교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음... 가능할까? 이에 앞서 왜 정교분리가 나타나게 되었는지 잠시 물어보고 싶다. 정교분리는 상당히 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 모든 이야기를 다 서술할 수 없지만 그리고 역사적 내용이기에 직접 찾아보는 것이 더 필요할테니 결론적으로 정교분리는 역설적으로 종교, 정치 두 분야의 극명한 분리를 통해 무엇인가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강한 신념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역사적으로 정치와 종교가 만든 갈등의 요소를 합의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고 해야할 것이다.
미국은 공식적으로 정교분리를 이야기하지만 일상의 삶과 대화에서도 종교적 표현은 가득하고 사실상 많은 경우 정교분리라고 말하기 참 이상하지만 너무도 자연스러운 관습적 부분들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법원에서 증인 선서를 할때 성경에 손을 올리고 증인 선서를 한다. 증인이 이슬람 교도라고 코란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물론 주에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서 바뀌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그저 관습적 요소로 전통처럼 계속 사용한다. 이외에도 정치적 행사에도 종교적 발언도 많고 엄격하게 이야기하면 정치인들이 그처럼 외쳐대는 'God bless America' 는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관습적 언어는 때로는 모순된 행동에 모순된 논리를 만들기도 한다. 다시 넘어와 미국의 정교분리는 독립 전쟁이후 영토 확장하는 시절 주마다 종교적 색체가 달라서 이를 조정하기 귀찮아 내린 일종의 정치적 해결책이었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이미 종교를 통해 사적 이익을 얻던 성직자들의 부패와 왕권의 대립 과정에서 특히 조세 및 다양한 노동력의 갈등이 심해 이미 사이가 안좋아진 상황에서 일종의 협상의 결과 혹은 왕권이 강해진 상황에서 종교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정교분리를 주장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정치 세력이 종교의 배경을 가질 때 정치 세력이 절대화 혹은 우상화가 되는 결과 혹은 그 반대로 종교 지도자가 정치 세력화 되어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타 종교를 배척하는 인권의 문제를 만들어낼 때 종교와 정치의 결합은 그리 좋지 못한 결과를 많이 만들어 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정교분리를 경계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많은 경우 이야기하는 정교분리의 타당성으로 정치는 현실의 문제, 종교는 영원의 문제로 그 문제해결 영역 (domain) 이 다르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렇다고 정교분리를 철저하게 따르려는 사람들이 주중에는 현세에 주말에는 내세에 왔다갔다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는 너무도 비현실적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어떤 것이든 이 세상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문제일 뿐이다.
정치와 종교 각자의 분야에서 각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다면 사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야 한다 말아야 한다 그런 주장 자체가 별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가장 의미있는 역설처럼 정치와 종교 그 어느 누구도 각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때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가장 최고의 정치가 무엇일까? 장자(莊子) 외편인 천지편(天地編) 에 나오는 계철(季徹) 의 말을 인용하면,
季徹曰:「大聖之治天下也, 搖蕩民心, 使之成敎易俗, 擧滅其賊心而皆進其獨志, 若性之自爲, 而民不知其所由然. 若然者, 豈兄堯舜之敎民, 溟涬然弟之哉? 欲同乎德而心居矣!」
계철이 말했다. “위대한 성인은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서 백성들의 마음을 풀어주어 그들로 하여금 가르침에 따라서 풍속을 훌륭하게 만들도록 합니다. 백성들의 악한 마음을 완전히 없애어 모두가 도를 얻으려는 뜻을 밀고 나가도록 합니다. 사람의 본성이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과 같아서 백성들은 그렇게 되는 까닭을 알지 못합니다. 이와 같은 정치를 어찌 요임금이나 순임금이 백성들을 가르치던 경지에 견주겠으며, 아무 생각 없이 모두가 같은 정치라고 하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같은 덕을 지니고 마음이 편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최고의 정치는 백성들이 정치가 이루어지는지 조차 모르는 정치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이유로 정치가 혼란스럽고 부정하면 그 직접적 피해는 백성들이 가져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 구성원이 동의한 이란 단순히 다수결에 의해서 과반수의 지지를 얻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과반수의 지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공정했는가? 부정이 없었는가도 중요하다. 정치 세력이 가지는 정당성이란 따라서 다수결의 지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이 위임한 정치 세력을 제대로 쓸 수 있어야 하고 사회 구성원 각자의 보이지 않는 희생과 의무를 통해서 만들어진 권력이기 때문에 그만큼 도덕적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철은 "도을 얻으려는 뜻을 밀고 나가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전에 '악한 마음을 완전히 없애어' 란 단서가 붙는다. 그리고 그런 정치의 현상적인 결과는 '모든 백성들이 '마음이 편하게 되어야 ...' 한다는 점이다. 다수결의 지지는 형식적 지지일 뿐이다. 만약 집권을 한다고 해도 정치 세력이 부정했다거나, 부정한 방법을 통해 옳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면 사회 구성원의 지지는 영원할 수 없다. 따라서 정치 세력이 가져야 하는 정당성이란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이 다수'인 사람들이 소수의 반대 의견에 관용을 배풀어 결국 반대의 소수조차도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이다.
허나 불행히도 완전 일치하는 모두가 정체 세력과 의견이 일치하는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 만약 존재한다면 정치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최상의 정치가 이루어지거나 반대 세력은 모두 제거된 전체 국가(사회)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는 비록 자신을 욕하고 반대한다고 해도 그 반대의 이유를 찾아 관용을 배풀려고 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종교가 가졌으면 하는 겸손과 용기는 모두 인간이 가지는 한계에서 시작된다. 그 한계의 가시적 결과는 죽음이다. 그런 이유에서 어떤 종교도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사회에서 위험과 폭력에 노출된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종교가 강자의 편에서 권위와 권력을 휘두를 때 맹목적 희생을 요구한다.
─ 몽달이 중간 정리 ...
개인적으로 종교와 정치는 서로 공존해야 한다고 믿는다. 정교분리에 대한 요구가 많은 경우 그 사회는 분열이 존재하는 사회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다양성과 분열은 다름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비슷할 수 있지만 정치의 관용과 종교의 겸손을 통해 다름이 서로 인정되고 서로의 가치가 존중되면 분열은 곧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풀 수 있는 다양한 혜안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정치, 종교 그 어떤 입장에서든 서로의 주장만을 강요할 때 분열은 분열로 계속 되고 그 분열은 결국 서로의 존재를 파괴하고 죽여야 하는 충분한 당위성이 된다. 반대로 정치는 사회적 약속을 통해서 사회 구성원이 지켜야 하는 공동선을 항상 고민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법률과 규제를 통해서 사회 구성원을 동일한 굴레에 넣으려는 시도가 아니라 모두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묘안을 찾기 위한 노력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정치 세력은 모든 곳을 다 볼 수 없다. 특히 정치 지도자가 엘리트들만의 집단이라면 구조적 어려움을 가진 약자들을 살피지 못한다. 그런 곳에 종교의 용기가 필요하다. 종교의 용기를 통해 정치가 더욱 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약자를 대변하는 마당발 종교인들의 이야기에 귀를 귀울여야 한다.
2013년 헌법이 정한 정교분리 국가 대한민국
정치는 관용과 약속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둘은 정치의 생명이 되어야 한다.
종교는 겸손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둘은 종교의 생명이 되어야 한다.
종교와 정치는 서로 다른 현실과 영원 이라는 도메인(영역)을 관여하는 기능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은 결국 인간의 삶 안에서 필요한 것들이다. 그리고 정치가 더욱 관용을 보이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종교의 겸손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종교인 또한 사회 구성원의 일원으로 정치의 약속을 지키고 관용가 이루어지는 관찰해야 한다. 왜냐하면 종교는 약자의 대변인으로 정치의 관용을 촉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교분리가 이루어져야 하는가? 인간이 만든 관습적 언어에 어느새 맹목적으로 당연히 옳은 것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는 없을까?
2013년 분명 대한민국은 정교분리를 명시해놨다. [ 헌법 제2장 20조 ] 그러나 정치와 종교는 분리한다 앞에는 국가가 국교를 정해 종교적 권위를 통해 타 종교를 배척하거나 종교의 권위로 국민들의 인권을 제한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다. 만약 한 신부님이 법률적 위반 사항을 지적하며 정치가 가져야 하는 약속의 생명을 어기고 있으니 그 정권의 정당성을 한번 고려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며 종교가 정치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와 같은 비중으로 [ 헌법 제5장 ] 국군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헌번이 정한 국민을 그리고 그 국민을 통해 만들어진 정치 세력이 단지 정치 세력의 전반적 의견에 반한다는 이유로 신부님의
종교가 약자의 편에서 그들을 대변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생존과 생명에 대한 종교적 연민이자 사명이다. 부정 선거로, 군사 쿠테타로 정권을 잡아도 경제를 살리고 많은 국민들 잘 살게 하면 되지 않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장의 발언지는 대부분 그런 정치 안에서 혜택을 보는 계층이다. 부정한 방법으로 정당성을 획득하려고 하면 그 부정함을 양심에 견디지 못하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 결국 부정한 방법이 정당성을 얻을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의 양심을 비참하게 만들어 정치의 시작부터 '마음이 심하게 불편한' 국민들을 만들기 때문이다. 정치를 시작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부정에 치를 떨고, 약자는 더욱 생존에 몰리게 된다면 그것은 최상의 정치와 멀어지는 정치가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 제도에서 정치 세력의 권력 획득 과정의 공정성이 확보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 대통령의 진심을 믿는다. 그분이 국정원과 국가 기관이 아무리 조직적으로 선거 여론에 개입하고 정치 생명의 한 기둥으로 약속인 법률과 헌법이 하지 말라는 정치 개입을 했다고 해도 그분이 대통령이 아니고 물러나라고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다만 단지 자신을 지지한 국민 뿐만 아닌 자신을 반대하는 국민들까지도 자신의 지지자가 될 수 있도록 관용의 정신을 보여주어 소위 '어머니의 마음으로 약자를 보살핀다면' 왜 종교가 약자의 편에서 대변하고 목소리 낼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고 국가 지도자의 당당한 위용으로 국가 기관의 선거 개입은 잘못된 것이고 그 영향으로 대통령이 되는데 득본 것이 전혀 없다고 해도 같은 사회 구성원으로 약속을 어긴 국가 기관의 수장으로 잘못이라고 차라리 따끔하게 잘못되었으니 제대로 법의 심판을 받도록 국민적 공감대를 얻어냈다면 국민들이 이처럼 정치를 통해 불편한 심기를 들어내었을 것인가?
언제나 어디서나 종교가 정치처럼 세력화 되고, 정치가 종교처럼 이념화가 짙어지면 항상 정치와 종교는 점점 혐오의 대상이 되어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치의 순기능, 종교의 순기능을 보고도 정교분리를 외치며...
- 배척과 불이행의 정치를 보고 종교가 바른 소리를 하지 못한다면 그 누가 할 수 있을까? 우수개 소리지만 정부에 대한 비판을 공개적으로 올리면 댓글로 '걱정된다' 며 정말 진지한 걱정을 하는 글들을 볼 때마다 얼마나 정치가 우리 삶에 공포처럼 다가와 있는지 느낄 때가 많다. 진정 우수개 소리였으면 좋겠다. 신부님 한명의 시국 미사 강론에서도 지도자의 관용을 보여주기 보다는 '묵과' 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모습에서 국민들은 정의로움을 느끼는가? 관용과 인내는 점점 사라진다. 국민들은 묵과하지 않음을 통해 정의를 배울 것이다. 정치는 결국 국민들이 보고 배우는 '삶의 교과서'가 될 것이다.
- 종교의 오만과 비굴함을 보고 정치가 적절한 제재를 가하지 못한다면 그 누가 할 수 있을까? 종교적 신념이 지나쳐 논리와 이성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종교적 맹신은 중독이 되고 일상의 생활을 파괴하여 사회 구성원으로 가져야 할 의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국민들을 다시 일상의 삶으로 돌아오도록 돕지 못한다면 종교의 오만으로 희생되는 많은 사람들은 희생자들이 되어버릴 것이다. 종교가 사적 이익을 취하고 도덕적 결함을 가지는데도 종교적 힘이 정치력을 가져서 제대로 처벌도 받지 않는 세상이라면 국민들에게 종교적 가르침은 위선이 되고 '약자들의 쉼터'는 점점 사라질 것이다.
마무리하며 바라며...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야 한다! 라고 말하며 정교분리를 이야기한다면 나는 반대하기를 바란다. 궁극적으로 인간이 이상하는 어떤 제도도 사실상 그 근본적 원칙을 지키면 인간에게 불행을 주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정치도 종교도 마찬가지다. 두가지 모두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삶에 녹아 있는 원소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무신론자에게 종교는 아니지 않냐고 묻는다면, 무신론자에게도 인간의 두려움, 고통 그리고 아픔을 통한 인간의 한계를 느껴본 적이 없었는지 묻고 싶다. 각자 그 인간의 한계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한번쯤 해보았다면 그 질문은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종교와 같은 컨텐츠 (contents) 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가장 보기 싫은 글의 종류가 있다. 부정적인 내용, 자신의 의견을 강조하기 위해 반대의 지엽적 내용을 강조하여 반증하는 과정을 다루는 글들이다. 그래도 그럴 수 있다고 ACCEPT 가 아닌 TOLERATE 해볼려고 노력한다. 정교분리... 오랜동안의 염증이 있다고 염증이 있는 생명체를 죽일 수 없다. 염증의 원인을 찾고 염증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염증에 강해질 수 있는 힘을 가진다. 그런데 가끔 인간의 사회 제도들은 쉽게 버려지거나 반대하거나 때로는 이를 통해 심지어 사람의 생명까지도 제거하려고 한다. 종교, 정치적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증오하고 서로가 다름을 틀리다며 관용을 보이지 않는 모습은 너무 자주 보게 된다. 국민들이 불편한 것은 이 관용이 사라져 어떻게 하면 서로를 죽일까 매달리는데 힘쓰는 모습에 지치는 것이다. 그런 사이 정치는 소위 정쟁이 되고 약자는 점점 약자의 생존에 시달리다가 죽어가게 된다. 정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일상에서 만나던 사람이 지속적으로 나에게 실망을 준다면 인간적으로 보지 않으면 되지만 국가의 지도자, 공인은 백번 실망을 해도 한번의 관용으로 많은 민심을 얻을 수 있는 특권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관용의 정신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감동의 정치가 될 수 있는데 왜 그것이 어려울까 싶지만 그것도 인간이 가진 한계가 아닐까 싶어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개인적 이해를 떠나 그것이 사회 구성원 모두의 생존과 삶이 걸린 정치의 문제라면 개인적 이해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득 복음 한 부분이 생각났다. 전달하고 싶은 내용은 가득하지만 미완 (未完) 의 희망을 가지며 인용하며 끝내어 본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마태 10,34-36)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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