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November 10, 2013

구조적 폭력에 대해서 ─ Personality vs. Commun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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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가 발전하고 소통이 원활해진다면 세상 사람들은 점점 선해지지 않을까? 라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무엇이 좋은지, 무엇이 나쁜지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사실들을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사실들이 제대로 알려질 수 있는 미디어가 발달한다면 아마도 세상은 좀더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이런 생각은 거의 공상에 가까운 현실이 되었고 지금은 거의 반대의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은 더욱 더 힘들어지고 있다. 세상의 다양한 미디어가 발달하여 소위 소셜 네트워크가 발달한다면 개인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들릴 것이고 예전보다 훨씬 쉽게 자신의 이야기를 알릴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지기 때문에 이를 공감하고 이를 안타가워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결국 이에 연민을 가지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세상이 가지는 행복의 양은 증가할 수 있을까?

이러한 공상의 한 가운데는 개인적으로 꿈꾸는 하나의 잘못된 가정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은 상당히 최근의 일들이다. 사회는 그리고 대부분의 조직은 인간을 위해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즉, 결국 인간이 사라지면 그 목적도 이유도 사라지기 때문에 결국 인간을 위한 작업이고 활동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대부분 자본을 버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서는 결국 자신의 자본을 통해 활동한 재화와 서비스 (goods and services) 를 소비해줘야 하는 대상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그 소비하는 주체인 인간을 위하는 활동을 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물건을 팔기 위해서는 소비자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팔아야 하고 결국 그런 모든 활동은 인간을 위한 활동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보다 그리 논리적(?)이지 않아도 움직인다.

인의 성품과 집단의 성품에 대해서 

거의 대부분 (모두라고 말하기 조심스럽기에...) 교육은 아이들에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고 전달한다. 심지어 아이들을 전쟁터에 내 보내는 집단에서도 아이들에게 전쟁을 수행하는 목적은 '고귀하고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다...' 를 강조한다. 윤리적 기준과 그 윤리적 행동을 수행하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런 윤리적 행동 자체를 거부하거나 배척하라 하지 않는다. 물론 악마를 숭배하거나 일부 비이성적 단체의 경우 확신할 수 없으니 일반적인 경우 말이다. 이렇게 아이들에게 윤리적인 행동을 요구하고 도덕적 기준에 대한 교육을 시행하는 동일한 사회 안에서도 어른들의 세상은 조금 다르게 움직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 The Yes Men Fix the World (2009) 는 이런 질문을 직설적으로 묻는다. 영화는 아주 재미있는 방법으로 세상의 기득권을 가진 소수의 탐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회사들, 단체들의 가짜 홈페이지를 만들고 이들 홈페이지를 통해 연락해오는 학회나 언론에 가짜 신분으로 나가서 사회적 책임을 지겠다는 발표를 한다. 예를 들어 1984년 인류 역사상 (정말 인류 역사상이다. 산업  안전 분야에서 인정되는) 최악의 화학 누출 사고인 인도의 보팔 (Bhopal) 참사가 있다. 당시 피해 책임자인 화학 회사인 유니온 카바이드 (2006년에 다우 케미컬에 합병되었다.) 는 당시 2,800여명이 사망했고 인근 주민 20여만명이 피해를 입었고 이후 출생한 신생아부터 시작해 광범위한 피해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지만 당시 피해자 일인당 1,000달러도 안되는 돈을 보상금으로 제시하고 이 보상금마저도 실제 피해자에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서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실질적 피해를 보고 있지만 유니온 카바이드 (다우 케미컬) 은 당시의 피해 보상을 근거로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책임이나 보상을 수행하지 않고 있다.

보팔 (Bhophal) 참사에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거짓 인터뷰를 한다. 실제 BBC에 방송된 화면

이에 대해 영화 제작자들은 자신들이 다우 케미컬의 대변인이라고 속인 후 영국 공영 방송 BBC 에 나가서 모든 책임을 다 진다고 발표했다. 약 120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했다는 거짓 보도를 했다. 이때 아주 흥미로운 현상이 일어났다. 발표 이후 약 1시간동안 다우 케미컬이 이들이 사기꾼 (hoax) 이라고 발표할 때까지 실제 다우 주가가 폭락해서 시가 총액으로 2조 4천억원이 증발해 버린 것이다. 이때 이들은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부터 좋은 행동을 하면 보상 (reward) 를 받고 나쁜 행동을 하면 벌 (punishment, penalty) 를 받는데 왜 기업이 좋은 행동을 하겠다고 하는데 오히려 기업의 가치가 떨어지는가? 라는 질문이었다.

The Yes Men Fix the World 에서 재난 복구 사업으로 큰 수익을 얻는 특정기업 관계자로 재난 구조를 위한 개인용 구조용품을 소개한다. 물론 말도 안되는 설정이다.

이 밖에도 이들은 아주 유쾌한 방법으로 많은 사람들을 놀리고 사기 행각을 계속한다. 보팔 참사 뿐만 아니라 카타리나에 의해 재해를 입은 뉴올리언스 (New Orleans) 에 재해 복구를 위해 대형 기업들의 탐욕 등을 다루면서 그저 사실 위주의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통쾌한 여러편의 몰래 카메라로 유쾌한 반격을 가한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알기 싫은 '불편한 진실'을 진지하게 봐야 하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보고 나면 바꿀 수 없는 탐욕이 이 시대가 조금은 씁쓸하지만 그래도 그 씁쓸한 세상을 바꿀려는 노력은 유쾌한 방법으로 이어져야 계속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드는 생각은 아무리 개인의 생각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라고 해도 왜 인간의 가치를 발전시키기 위해 만든 사회, 집단은 왜 다시 인간을 억압하는 구조가 되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었다. 왜냐하면 탐욕의 주체는 사실상 집단이지만  그 집단 자체가 탐욕을 만드는 것이 아닌 그 집단의 의사결정자들이 그 탐욕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인적 탐욕을 집단의 탐욕으로 투영시키는 '나쁜 사람'들을 사라지게 한다면 사회, 집단도 충분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변할 수 있는가?

인의 성품에 대해서... 

개인의 인격, 성품을 영어로는 Personality 라 부른다. 조금은 역설적이지만 Person 의 어원은 라틴어 persona 에서 유래되었다. 이 말은 어떤 개인이란 뜻이기 보다는 개인을 감추는 가면, 탈이란 뜻이다. 즉, 개인의 인격, 성품은 사회적으로 개인을 어떻게 보이는가에 대한 내용이 더 중심이 된다. 즉, 본질적 자아 (fundamental being) 이 무엇인가보다는 그가 사회에서 어떤 가치로 어떻게 행동하는가 혹은 사회에서 어떤 자아로 보여지기를 바라는가에 대한 내용이 된다는 점이다. 즉, 개인의 성품은 만약 혼자 사는 무인도에서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누군가가 나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의식적인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성품이 어떻다는 표현은 지극히 개인적 내용이 아니라 사회적 위치에 대한 평가이고 그가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기를 바라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Personality 는 개인적 특징처럼 보이지만 사회를 제거하고 불필요한 개념이 되어버린다. 결국 어떻게 보이고 싶은가에 대한 사회적 특징으로 바라봐야 한다.

결국 개인의 성품, 인격이란 내용은 사회를 떠나서 설명하기 힘든 내용이 된다. 이는 한 개인을 평가하는 태도에 대한 상당히 중요한 기준을 제시해준다. 많은 경우 "그 사람 어떻니?" 라고 물어볼 때 "그는 어떻다.." 라고 이야기하는 대부분의 내용은 성격에 대한 내용이고 그 성격은 지극히 개인적 판단에 비춰지거나 타인의 평가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성격이다. 아무리 개인의 성품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여도 결국 그 모든 내용은 사회적 존재를 기준으로 평가하는 내용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점에 대해서 상당한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다. 즉, 개인의 인성, 품성이란 지극히 개인적이거나 심지어 유전적 요인에 의한 근본적 내용이고 쉽게 바뀌지 않는 내용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개인의 성품은 지극히 사회적이고 그런 이유로 개인이 어떤 사회에 소속되었는가에 따라서 개인의 성품은 쉽게 변할 수 밖에 없다.

또한 개인의 성품은 사회 안에서의 역할 그리고 사회에서 가지는 영향력,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이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 (탈의 모습)' 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가장 중요하게 변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철저한 위선자 (hypocrite) 는 그의 진짜 모습이 들어나기 전까지는 가장 천사에 가까운 사람' 일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Personality, 성품, 성격 무엇이라 해석을 해도 개인에 대한 평가와 해석은 지극히 사회적인 결과물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이를 마치 근원적 요소, 태어날 때부터 변하지 않는 요소로 생각한다면 착한 개인들이 만든 세상은 착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멍청한 공상에 빠지기 쉬울 것이다.

단의 성품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던 선배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만나면 성격좋고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는 그런 분이었지만 그 선배님이 회사에 소속되면서 회사의 이익과 충돌하는 혹은 딱히 이익에 충돌하지 않아도 회사의 입장에 대치되는 상황에서 피해자들을 인간적으로 몰아 세우고 그들의 생존, 생활을 파괴하는 모습을 본적이 있다. 회사, 혹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 서민들이나 약자들이 피해를 보아야 하는 많은 경우 약자들의 반대편에 서 있는 많은 지인들을 만나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라고 해도 생계를 위해 들어간 회사를 위해서 무섭게 돌변하여 약자들을 강하게 억압하는 모습, 말도 안되는 논리와 억지를 권력과 자본의 힘으로 밀어내고 때로는 그렇게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 (보상이나 무력을 위해 사용하는 용역 비용 등) 으로 충분히 보상해도 되는 상황에서도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집단에 가려진 지인 (개인) 들을 보게 될 때가 많았다.

자본과 권력은 때로는 구조적 폭력을 통해 많은 수의 생존과 생명을 위태롭게 만든다.

때로는 젊은 시절 대학교에서 사회의 약자들을 위해서 어떻게 하면 힘쓸 수 있는가를 같이 고민하던 사람들도 어느새 기득권 세력의 옹호자 혹은 대변인이 되어 그 젊은 시절에 외치던 소리와 전혀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보면 심한 배신감을 떠나 때로는 개인적 환멸을 느끼기도 한다. 개인적 신념은 때로는 생존과 생계, 그리고 권력과 자본의 달콤함 앞에서 쉽게 무너지는 대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옳다고 느끼는 것을 위해, 신념을 지키기 위해 무엇인가를 희생해야 하는 구조가 존재한다면 그 사회는 분명 정의롭지 못한 사회일 것이다. 만약 사회가 정의롭다면 자신의 신념을 행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수용되어 그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내용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개인의 인격은 집단의 인격과 동일시 할 수 없음이 아닐까 싶어서 새로운 조어 (coinage) 를 만들었다. 개인의 Personality 와 대비되는 집단의 Communality 란 용어이다. 사실 두가지 목적을 가지는 조어(造語) 과정이다. 첫번째는 앞서 개인의 성품과 대비되어 개인이 아무리 도덕적이라도 왜 같은 사람이 집단에 들어가면 달라지는가에 대한 궁금증이고, 두번째는 집단 이기주의와 같이 집단의 이익을 대변으로 왜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과 논리 구조를 버리고 집단의 환각된 (hallucinated) 행동을 취하는가에 대한 의문때문이었다.

단에 묻힌 개인의 성품 ( Personality beneath Communality)  

만약 사회가 정의롭게 움직인다면 이런 경우를 많이 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개인적으로 보이는 현재의 세상은 참 불행한 구조가 너무 많이 보인다. 두가지 가능성이 있다. 내가 보는 시선이 전혀 정의롭지 못한 경우, 내가 보는 세상 자체가 정의롭지 못한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결국 내 시선이 제대로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후자의 경우라면 내가 옳은 것을 추구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 더 세상이 잘못된 것들만 더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전자인지 후자인지에 대한 결정은 조금 뒤로 미루고 실제의 예를 통해서 생각해 본다.

용산 참사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이 사건은 너무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신속한 특공대의 투입, 그리고 결과적으로 강제 철거를 반대하는 주민 5명과 망루에 진입하던 경찰 1명이 목숨을 잃었다. 정말 눈물나는 참사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아픔은 계속 되고 있는 중이다. 대학교 입학하고 항상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서 경찰 공권력에 대한 옹호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젊은이고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도 하기 싫은데... 와 같은 이유로 그들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촛불집회가 거듭되면서 나타나는 경찰들의 진압 형태, 그리고 편파적인 모습들을 보았을 때 정말 시위 진압을 막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적대적 감정을 가지고 공격하는 것인가에 대한 구별이 가지 않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록 그들이 명령에 따르는 것이라 할지라도 집단을 위해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면책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수행하는 것도 정의롭지 못한 개인의 폭력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결국 도덕적 개인이 폭력적 집단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개인의 폭력은 개인의 성품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집단의 성품으로 보아야 하는가이다. 그런데 어떻게 바라보아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 한가지가 있다. 즉, 피해를 당하는 사람이 느끼는 폭력성이다. 그 폭력의 피해자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고, 그 폭력의 가해자가 집단이냐 개인이냐의 문제는 사실상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구조적 폭력은 사라진 생명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집단의 힘으로 책임을 회피하려고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이해하기 힘든 법적 정의, 상황적 모순을 만들어 낸다.

집단에 묻힌 개인이 행하는 폭력의 무서움은 용산참사가 그대로 보여준다. 가해자가 누구인지 정확한 해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집단이 더 힘이 있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되어버린다. 쉽게 표현해 가해자는 누구인지 해석하기 나름이 되어버리고, 피해자는 분명 존재하는 상황 그런데 그 피해의 보상이나 제대로 된 원인을 규명하기보다는 관련된 집단의 이해관계에 의해 움직이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이런 상황을 조금은 광범위하지만 '구조적 폭력' 이라고 해보자.

구조적 폭력: 집단과 집단의 충돌에서 피해를 보는 실질적 피해자가 발생을 하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 가해자는 집단의 힘의 원리로 움직이는 상황

조적 폭력과 일반적 폭력의 차이를 본다. 

구조적 폭력과 일반적 경우의 폭력을 비교한다면 구조적 폭력만이 가지는 특수한 특징이 보일 수 있을지 모를 것 같다. 우선 폭력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만 이전 블로그 [ 파괴와 폭력에 대해서 - 세상을 보는 방법 ] 을 통해 대신하고자 한다.

파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를 제거하려는 모든 행동
폭력: 존재의 대상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다루는 행위 

지극히 개인적 정의(definition) 이기 때문에 이를 따를 필요는 없다. 다만 개인적인 생각이 이렇게 다양한시선을 가질 수 있다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받아주면 좋을 것이다. 개인적 정의에 의하면 폭력은 존재의 대상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다루는 행위이고 파괴란 문제 해결을 위해서 대상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행동이라고 이야기했다. 즉, 파괴란 문제 해결을 위해서 공존을 목적으로 두지 않고 문제라고 생각되는 대상을 제거하는 것이다. 가장 쉽고 빠르고 깔끔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존재를 제거한다면 그 어떤 대상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파괴의 과정에는 폭력이 동반될 수 밖에 없다.

구조적 폭력은 피해자를 만든다. 집단의 구조적 폭력은 결국 이해 충돌이 일어나는 개인 혹은 집단이 제거되기를 바란다.

이를 구조적 폭력으로 대비해보면 다음과 같다. 구조적 폭력이란 앞서 정의로 집단의 힘에 의해 좌우되는 폭력을 말한다. 즉, 구조적 폭력은 누가 옳은가가 사회 통념이나 일반적 상식 수준에서 수용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거대 기업의 경제적 이익이 철거 대상 주민들 때문에 발생하지 않는다면 경제적 이익이란 거대 기업의 이익을 위해 철거 대상 주민들은 마땅히 제거되어야 한다. 이 상황에서 철거 주민은 한 인간, 각자의 힘든 사연은 중요한 것이 아닌 일종의 제거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이 상황에서 만약 각 주민들의 삶이 목적이 된다면 강제와 폭력의 방법을 수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대 기업에게는 철거 주민들은 경제적 이익을 위해 제거되어야 하는 수단 (수단이기도 전 방해물로 생각할 것이다.) 일 뿐이다.

그러나 집단의 폭력성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삶과 생존을 파괴하는 과정도 경제적 이익이라는 집단의 논리에 수용되고 옳다고 주장한다. 이때부터 폭력의 정당성은 경제적 이익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체에 의해 가려지고 수용된다. 문제는 이렇게 수용된 집단의 주장은 실제로 행동되는 개인의 폭력으로 이어져도 그 정당성을 이어받게 된다는 점이다. 즉, 구조적 폭력 상황의 무서운 점은 집단에 소속된 개인들도 집단의 폭력성을 대신하면서 마치 개인의 폭력이 괜찮다고 받아들여지는 순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결국 폭력의 시작은 실제로 상해를 가하는 순간이 아니라 집단의 논리로 개인에게 폭력을 허락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단의 폭력은 누구의 책임인가? 

구조적 폭력의 또다른 특징은 마땅히 그 폭력의 피해자들을 보고 가해 사실에 대한 법적 정의 (juristic justice) 를 실현하려고 해도 두가지 기작 (메카니즘) 에 의해 방해받게 된다. 실제 폭력을 가한 사람이 있다고 해도 마치 집단에 묻힌 개인으로 익명성이 되어버리는 현상이 첫번째이고 앞서 설명한 것처럼 집단의 힘에 의해 법적 정의 조차도 달리 해석된다는 두번째이다. 이는 결국 자본과 권력에 의해서 얼마든지 법적 정의는 휘둘릴 수 있고 이를 잘만 이용한다면 집단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불법 특히 구조적 폭력을 효과적으로 이용해도 된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commuality 의 개념을 생각해보고 싶은 것이다. 만약 개인과 개인의 충돌에서 발생한 폭력이 있다면 이에 대한 피해자와 가해자는 가려지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구조적 폭력은 피해자는 분명히 존재하는데 가해자는 좀처럼 명확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고 가끔은 구조적 폭력을 실제 행사한 개인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되거나 혹은 그 집단의 대표성을 가지는 사람이 책임을 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책임을 기대한다는 것은 사회가 발전하고 선해질 것이라는 공상만큼 순진한 생각이 되어버리는 세상이다. 힘의 논리, 권력과 자본의 크기가 결국 죄의 형량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 영향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이 속한 집단의 힘을 대변하는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

인권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검투사들의 죽음은 누구의 책임인가? 자신을 찔러 죽인 상대 검투사인가 아님 그 상황에 몰아 넣은 구경꾼 시민과 지도자의 책임인가

자본주의의 이중성은 여기에서 하나 찾아볼 수 있다.  자본주의는 다양한 방법으로 commuality 를 표현하는 다양한 법적 장치를 마련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법인(法人)이다. 법인이란 인간은 아니지만 법적으로 인간과 동일한 역할과 권한을 가지는 주체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실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법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즉, 법인이 사회에 부정한 행동을 하게 될 때 누가 책임지는가에 대한 부분도 있지만 이와 정반대로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 범위도 존재한다는 점이다. 즉, 아무리 법으로 인정되는 단체이지만 인간이 아니라는 근본적 차이점으로 한계를 가지기 때문에 구조적 폭력의 가해자가 되어도 충분히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구조적 폭력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분명 사회 전체의 악이 될 것이다. 결국 이런 구조적 폭력은 구조적 악이 되는 경우가 많다. 사실 구조적 악을 분석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다. 이미 구조화된 상황에 대해서 아무리 분석해도 이미 동화되어 버린 상태를 아무리 분석해도 논리적 분석에는 항상 한계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것은 우리가 영화 '대부'를 볼 때 느끼는 잔인함과 주인공들의 인간적 연민을 동시에 느끼는 멜로드라마와 비슷할지 모른다. 실제 마피아의 세상이 얼마나 잔인한지 그런 것도 충분히 영화에서 표현되어도 순간 순간 집단의 잔인성 즉, 구조적 폭력과 개인의 드라마를 얼마나 잘 분리해서 바라보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잔인한 집단의 폭력이고 그 폭력을 만든 장본인이라고 해도 그 개인이 가지는 개인적 서사성에 영화 관객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감상하게 된다. 결국 개인과 집단을 얼마나 잘 분리하는가는 우리가 구조적 폭력에 대해서 관대할 수 있는가도 역설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그런 맥락에서 구조적 폭력은 쉽게 들어나지도 않을 때도 많고, 들어나도 구체적인 가해자가 가려지는 경우도 많고 심지어 실질적인 가해자가 밝혀져도 그 가해자 개인에 집중하게 되는 과정이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구조적 폭력은 그 성공률(?)이 증가할 수록 그 매력을 점점 더 느끼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여전히 남게 되는 의문은 정말 이대로 구조적 폭력에 의해서, 점점 힘의 논리에 의해서 좌우되는 세상을 지켜만 볼 수 밖에 없는가이다.

단과 관계없는 개인의 삶에 대해서... 

집단의 구조적 폭력은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을 남기고 조금은 다른 현상을 보면 좋을 것 같다. 주변에는 개인적 신념은 거의 들어내지 않고 개인적 선함 (good & ...) 만을 보여주는 사람들도 종종 보인다. 그런 과정에서 재미있는 것은 개인의 신념과는 다르게 집단의 탐욕을 위해 도움을 주는 똑똑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탐욕적 기업을 위해 도움을 주는 변호사, 회계사 등 소위 전문직 이나 아니면 탐욕을 실현시키기 위한 소수를 위해 자신의 전문적 지식과 사실을 왜곡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돈을 벌어서 힘들게 사는 빈민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많은 기부를 한다면 이런 삶의 방식, 직업적 행동들을 계속 해야하는가? 조금은 다른 경우지만 개인적으로 조금 이해가 안되는 장면 중에 하나는 모 종교 단체가 소유한 건물의 일층에 대기업이 운영하는 마트가 있을 때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종교 단체가 그렇게 얻은 수익을 통해 좋은 활동을 할 수 있지만 그 수익의 근본적 원천이 대기업이 중소상인들의 상권과 싸워 얻어낸 수익이라면... 어떻게 해석을 해야하야 할까?

Devil's Advocate (1997) ; 영화는 개인의 양심이 집단의 구조적 악마성 안에서 어떻게 변화하며 고통받는지 보여준다. 집단과 개인은 별개인 것처럼 보이지만 분리되기 힘들다.

개인은 선한 활동을 하는데 그 선한 활동의 생계 수단은 집단의 구조적 폭력과 탐욕을 만들어 낸다면 그것은 계속 유지해도 되는 것인가? 분명 그 과정에서 구조적 폭력, 탐욕의 피해자는 발생할 것이다. 다른 경우로 집단의 정체성은 선함을 추구하지만 그 과정에서 구조적 폭력이 간접적으로 포함된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개인의 성품과 대비되는 집단의 성품을 만들려는 다른 이유는 바로 이런 복잡한 사회 활동 과정에서 얽힌 영향에 대한 구별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즉, Communality 란 것은 개인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여주었으면 하는 지향하는 모습과 비슷하게 집단이 사회 (구성원) 에 어떻게 보여주었으면 하는 지향하는 모습도 중요하다는 점이다. 즉, 어떤 집단도 구조적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란 목표로 움직이는 집단은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표현한다면 당연히 국가나 상위 조직에 의해 제한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구조적 폭력이 가지는 다른 성격이 나타난다. 그 어떤 집단도 구조적 폭력을 지향하는 집단은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구조적 폭력을 행사하는 집단은 절대 구조적 폭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폭력, 그러나 그 피해자가 발생한다면 전체적으로 보면 피해자만 발생하고 파괴되는데 그 가해자는 존재하지도 않고 인정받지도 않게 된다면 점점 이유없이 죽어가는 사회가 될 것이다.

단에 숨어버리는 개인의 성품에 대해서... 
(공인과 개인을 구별 못하는 지도자들에 대해서...

구조적 폭력의 이점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점점 개인의 성품과 자신이 속한 집단을 분리시키려고 할 것이다. 즉, 자신이 가진 Personality 와 자신이 속한 Communality 가 다르다는 것... 마치 살인을 일삼는 마피아 조직의 대장이라고 해도 한 인간의 개인적 성품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면 자신의 집단이 만드는 구조적 폭력에 대한 책임을 절대 지지 않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집단에 개인을 숨겨버리는 것은 오히려 반대의 표현으로 구성된다. 즉, 집단의 행동과 개인의 행동은 별도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집단의 대표성을 가지는 과정 속에서도 개인을 강조한다. 구조적 폭력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만드는 집단의 대표라고 하더라도 그와 대비되는 사회적 기부를 하겠다 혹은 개인적 신념으로 옳은 행동들을 해왔다는 것과 같이 집단의 책임을 멀리하고 개인의 성품을 강조하는 것은 자신이 보여주려는 Personality 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집단을 타자화 (otherizing) 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사실 이는 비겁한 행동이다. 집단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 개인적 성품을 강조하는 방법을 쓰는 사람은 그만큼 집단의 구조적 폭력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잘 알고 있는 개인이다.


집단의 구조적 폭력을 잘 이용하는 사람은 자신의 탐욕을 위해 집단을 이용하게 된다. 즉, 자신이 속한 집단 조차도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고 결국 자신의 집단 조차도 파괴하고 제거해도 양심의 문제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집단에서 가지는 권한은 충분히 가지고 있지만 이에 적절한 책임은 점점 집단의 구조적 폭력이 반복되면서 점점 집단에서 멀어지려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이런 비겁한 과정은 아주 작은 기업뿐만 아니라 국가까지도 모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집단의 구조적 폭력을 이용하면 좋은 제품을 만들고 질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기업을 만드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집단이 가지는 구조적 폭력과 그 법적 한계점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많은 투자자 (stakeholder) 들의 피해에도 자신의 탐욕을 증가시키려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거칠지만 법이 정교해지고 좀더 이런 구조적 폭력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두가지 방향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번째는 Personality 와 Communality 가 교차하는 범위를 늘려가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표현으로 개인적 권한과 책임이 거의 비슷해질 수 있는 장치와 아무리 집단의 대표성을 가진다고 해도 대표성을 가지는 개인의 책임을 강화하는 방법이다. 이는 재판관들은 노동자가 아닌 각자가 하나의 독립된 사법기관인 점과 비슷하다. 개인의 양심적 판단과 기준이 집단의 양심으로 일치하는 가장 극대화된 경우가 바로 재판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집단의 구조적 폭력에는 그 폭력에 의해 발생하는 이익구조가 있을 것이다. 그 이익구조를 나누는 사람들 모두가 직, 간접적 책임을 가질 수 있는 법적 장치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전체주의의 역설은 집단이 강조되어야 하지만 오히려 소수의 개인적 뛰어남이나 영웅적 이야기를 강조한다. 전체주의는 개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집단의 구조적 폭력이 극대화된 형태가 아닐까?

조적 폭력은 아마도 Personality 와 Communality 가 점점 분리된 것처럼 인식될 때 더 증가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 사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착각하는 것은 공인(public person) 이란 공개적으로 알려진 사람이 아닌 대중을 위해 일하는 공적 임무를 가진 사람이란 점이다. 종종 공인의 신분으로 당연히 Commuality 를 대변하는 집단의 성품에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이 개인적 성품 (Personality) 를 지키기 위해 집단에 관계없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고 말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한편 단순할 수 있다. 바로 그들이 구조적 폭력의 가해자이고 그 폭력을 통해 이익을 얻는 사적 존재 (private person) 란 것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공직의 자리를 물러나야 할 것이다. 더이상의 구조적 폭력을 막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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