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November 11, 2013

권위에 대한 단상 ─ 그 형성과 유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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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 (Authority) 란 사회적으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집단 혹은 개인을 이야기한다. 기본적 인권 (human rights) 을 생각한다면 누군가 무엇을 할 수 있는데, 누군가는 무엇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조금 모순에 가까운 논리라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사회 전체가 무엇인가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개인 혹은 집단이 그 '무엇인가를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그 권한을 가진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지 물어보면 많은 혼란과 산재한 질문들이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권위에 대해서... 우리는 익숙하게 쓰고 있고 그 권한의 능력, 한계 및 책임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지만 사실상 그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 고민하는 시간은 적었던 것 같다.


영어권 국가에서는 Authority 라는 단어를 자주 접하게 된다. 미 도시의 교통국은 거의 대부분 Authority 로 끝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스턴 일원의 교통 담당을 하는 기관이름은 Massachusetts Bay Transportation Authority 이고 시카고 교통국은 Chicago Transit Authority 과 같이 Authority 가 붙은 기관의 특징은 관련 행정 수행에 있어서 독립된 수행을 할 수 있는 권한 기관이란 점이다. 그렇다면 다른 기관들은 어떤가? 시카고 경찰, 소방 담당은 각각 (City of) Chicago Fire Department, Police Department 와 같이 말그대로 행정부의 소속 기관이다. 그런 이유로 교통 시설에 대한 행정적 권한은 Authority 가 우선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Massachusetts Bay Transportation Authority

이런 권한, 귄위는 일반적 시선에서는 정말 '권위적'으로 느끼게 된다. 그 권위적이란 말도 진정한 권위가 가지는 의미라기 보다는 특권, 권력 과 같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능력이 많은, 강한 과 같은 일종의 개인의 능력처럼 표현되고 표시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권위를 가진... 이란 말은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위신 혹은 그런 위신을 가진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런 '영향력의 영향'으로 하나의 힘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기본적으로 권위란 지극히 사회적 용어이다. 혼자서 권위를 만든다는 것은 무인도에서 왕이라고 선언하고 왕국을 건국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 영향력이란 말, 개인적 인품과 소양이 뛰어나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생기는 권위또한 마찬가지이다. 그 어떤 권위도 사실상 사회를 떠나서 성립하기 어려운 사회적 개념이 된다.

위는 어떻게 얻게 되는가? 

권위는 누가 주는가? 혹은 권위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지만 별로 생각하지 않은 하나의 주제이기도 하다. 오랜 예전 중국의 어느 왕조에 스스로 왕이 되고 절대 왕권을 누리는 왕이 "왕은 신으로부터 나온다!" 라고 선언했다면 왕의 권위는 신으로부터 나온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권위가 어디에서 나왔는가, 형성되었는가는 그 권위가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의 범위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만약 신이 아닌 옆 동네에서 왕하고 있는 내 친구가 나에게 권한을 주었다 말하는 것과는 권한이 가지는 느낌은 분명 다를 것이다. 즉, 인간은 권한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모든 일을 모든 사람이 전부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혹은 그렇게 전부가 그렇게 수행하면 발생할 수 있는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권한은 제한되고 그 제한에 의한 희소성이 발생하고 그 희소성은 결국 권한의 영향력과 능력을 높이게 되는 구조를 가지게 된다. 따라서 권한이란 누군가 '할 수 있는 것' 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해주는 도구로도 작용하게 될 것이다.

권위, 권한, 권한의 부여, 권한의 승계 모두 사회의 효율적 작동을 위한 방법이다.

다시 돌아와서 만약 왕의 권한이 신으로부터 왔다면 인간이 생각한 신이 가진 능력에 비슷한 수행 능력과 범위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쉽게 보면 이는 아주 막강한... 이란 느낌을 가질 수 있지만 그에 따라 신이 가지는 전지전능한 결과를 수행하지 못한다면 결국 그 권한을 가진 사람은 불신의 대상이 될 것이다. 즉, 신의 권한을 가지고도 제대로 비가 와야 할 때 비가 내리기 커녕 가뭄이 찾아온다면 백성들은 더이상 그 권한에 대해서 신뢰하고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신으로부터 권한을 받았다는 말은 상당히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할 것이다. 현대 사회에 이런 권한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그 권한의 양면성을 알고 있다면 단순히 권한이 가지는 능력만을 강조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현대 사회가 가지는 권한, 조금 더 좁혀서 행정, 사법, 입법 과 같은 어느정도 합의된 권한은 어디에서 발생하는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리트에게 권한이 주어지다. 

엘리트를 정의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그러나 대충 느껴지는 대로 엘리트를 생각해보자. 시대에 따라서 엘리트의 개념은 달라졌다. 대한민국만 해도 60~70년대는 소위 얼마나 공부를 잘하는가, 어떤 학교를 나왔는가에 따라 크게 좌우되었지만 요즘의 엘리트엔 이보다 오히려 선천적, 태생적 조건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뭐 중요한 문제는 아니기 때문에 일단 엘리트란 집단이 국가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많은 부분 잡고 있는 나라는 정말로 잘 돌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정말 똑똑하고 공부만 잘하는 시절의 엘리트라면 이런 질문에 대해서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라고 대답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결코 아니다" 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의 12제자는 엘리트 주의에 의하면 단 한명도 제대로 뽑히기 힘든 인물들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엘리트 주의가 나라를 어떻게 망칠 수 있는가에 대한 메카니즘 (기작) 으로 두가지를 생각한다. 첫번째는 원형경험 (Archetypal experience) 이다. 소위 어려움 없이 자라온 엘리트가 과연 어렵고 힘든 사람들의 구조적 어려움과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아마도 이런 원형경험에 대한 큰 깨달음과 그 반증적 삶을 실천해 왔던 인물로 석가모니가 있는 것은 단순히 보통 사람들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라기 보다는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려운 과정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은 상황에서 높은 권한을 가지는 위치까지 아무런 어려움없이 자라온 사람에게는 어려움의 구조를 이해하거나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연민은 거의 기대하기 힘들다. 두번째는 권한에 대한 철학적 입장이다. 앞서 질문한 것처럼 권한이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엘리트 집단은 대부분 엘리트 집단의 우수성과 일반적 사람들과 '다른' 능력이 원인이라 생각하기 쉽다는 점이다. 즉, 엘리트 집단은 자신의 우수성때문에 자신이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고 그 권한을 때로는 자신을 위해서 써도 별 문제 될 것 없다는 자기 합리적 도덕적 모순에 빠지기 쉽다. 이 모순에 빠진다면 자신이 가진 권한을 개인적 이익을 사용하면서도 이런 남용이 별 문제될 것 없다는 자기 합리화에 놓이게 된다. 그런 이유로 사회적 지탄이 다가오면 사회적으로 대외적으로 반응하는 모습과 달리 자신의 속마음은 별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한은 어디에서 오는가? 

다시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질문을 하게 된다. 권한은 어디에서 오는가? 옛 시절 왕처럼 '신에게서 온다!' 라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현대 사회가 쉽게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고 (물론 이런 말도 안되는 주장에 끌려 신흥 종교에 빠지거나 비이성적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다시 좁은 범위로 국가가 가지는 권한의 영역에서 생각해보자. 아주 간단하게 국회의원의 권한은 어디서 오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은 '국민으로부터' & '투표를 통해서' 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대답에 대해서 특별히 딴지를 걸기 힘들만큼 아주 간결하고 명확하다. 국회의원은 원칙적으로 국민의 대의 (representative) 기관이다. 즉, 국회의원 각자 모두 독립된 입법기관(authority) 가 되는 것이다. 즉, 헌법이 정한 간접민주주의 실현 방법으로 국민들이 투표를 통해서 (공선; 公選) 에 의해 선출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회의원은 국민을 대표로 입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은 것이다.


입법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은 다소 쉽게 권한의 원천(source) 을 생각해볼 수 있듯이, 행정도 비슷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조금 장애물을 만나게 된다. 대통령이야 직접민주주의 방법인 대통령 직선제에 의해서 국민들의 투표로 선출된다고 하고, 지방직 공무원 중 선출직 공무원도 선거에 의해 선출된다고 해도 행정에 직접적 실무 권한을 가지는 공무원들은 어떻게 권한이 왔는가? 물론 논리적으로 국민의 투표로 선출된 대통령에게 행정부의 주요직을 임명할 수 있는 임명권도 같이 부여했다고 하면 깔끔하고 아무런 무리가 없다. 그리고 실제로 법률도 그렇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합법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누구에게서 권한을 받았던 것과 관계없이 권한을 가진 사람이 사적 이익이나 국가의 이익에 반하는 권한을 수행한다면 나라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 권한은 어떻게 회수(?)하고 더 이상 그런 권한을 수행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장치는 무엇인가? 국가의 시스템과 제도가 복잡하게 되고 인간이 관리할 수 있는 영역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을 막기 위해서 인간은 수많은 제도를 마련하게 되었고 소위 '권한을 가진 사람들의 부정한 행동'과 '부정한 행동을 막기 위한 행동'들은 필요하지만 참 씁쓸한 제도가 되어버린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아니 최소한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책임을 가지고 도덕적으로 청렴하다면 최소한 부정한 행동을 막기 위한 행동을 위한 지출은 줄어들게 될 것이다.

회의 비효율성은 권한에서 발생한다? 

결론적으로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사회의 비효율성은 정말 인간이 비효율적이기 때문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러나 권한의 문제, 권한이 어디서 오는가의 문제를 생각하고 그 권한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지 못하는 권한 수행자들이 사적 이익을 위해 사용하게 되면서 그런 부분을 방지하기 위한 막대한 지출이 시작된 것은 아닌가? 즉, 사회적 비용의 많은 부분은...

공적 이익을 위해 사회 구성원으로 부여하기로 합의한 권한을 가진 이들이 사적 이익을 위해 사용하여 발생하는 경우가 많은 부분 차지한다. 

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다른 측면에서 비록 공적 이익을 위해 권한을 잘 사용한다고 해도 제대로 권한을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 소위 국민의 혈세는 줄줄 새고 있다는 내용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도의 미숙함, 제도 자체가 적절하게 공적 이익을 수행하지 못하는데 그대로 유지되는 많은 경우를 볼 수 있다. 따라서 권한을 가진 사람이 사적 이익을 위해 남용하는 경우 뿐만 아니라 사회의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공적 이익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권한 수행을 계속 해가는 과정에서도 권한에 의해 발생하는 수많은 비효율성과 낭비가 만들어진다.

사회의 부정 부패는 권위를 가진 사람이 남용해서 발생하고 이를 막기 위한 사회적 비용도 발생한다.

이런 비효율성과 낭비를 막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무엇보다 권한을 감시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잘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어떤 권한이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는지에 따라서 적절하게 권한을 나누거나 혹은 권한을 적절하게 제거 때로는 그 권한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보는 것이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미국의 지방 검사 (District Attorney) 제도와 같이 일부 지역에서 시행하는 것처럼 선거에 의해 시민들이 선출하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을 통해서 권한이 어디에서 나왔는지에 대한 주기적인 확인이 가능해진다는 부분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권한을 위한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그 권한의 남용에 의한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사회적 비용은 항상 발생하지만 어떻게 최소화 시킬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정책과 사회 제도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특징까지도 광범위한 최적화된 방법을 위해서도 필요할 것이다. 일반적인 해결책을 찾기는 어렵기 때문에 항상 이 부분에 대한 ─ 권한이 어디에서 왔는가? 권한의 남용으로 인한 불필요한 요소는 없는가? ─ 고민을 항상 해야 할 것이다.

위를 지키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현대 사회에서도 조금은 다른 의미의 권위는 존재한다. 일부 국가에 존재하는 왕과 왕실에 대해서는 특별히 같은 권위란 표현에 대해서 앞서 설명한 authority 가 아닌 왕에 대한 권위로 majesty 를 쓰고 이에 연결되어 왕과 비슷한 귀족혹은 고위 고관에 관련된 권위를 dignity 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떤 권위를 이야기해도 사실상 그 본질적 의미는 비슷하다. 오랜동안 역사를 통한 권위에 대한 역사를 생각해보면 결과적으로 권위를 가진 사람, 집단은 권위를 지키기 위한 상당한 노력을 해온 것을 알 수 있다. 그 노력의 내용을 정리하면 두가지 정도로 크게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폭력: 인간은 분명 불완전한 존재이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불안정하고 인간으로 가지는 피할 수 없는 인간적 실수는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인간적 실수에는 사고의 실수 혹은 잘못된 판단도 포함된다. 그런 잘못된 판단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반대할 수 있다. 여러가지 논리와 이유로 잘못된 권위자의 실수와 판단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런 반대 의견을 내놓는 사람이 소위 사회적 권위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다지 신경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의견을 내놓은 사람이 어느정도 사회적 권위를 가진 사람이라면 문제는 조금 달라질 수 있다. 이때 실수를 한 권위자의 태도에 따라 권위의 생명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폭력을 통해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감추거나 잘못이 아니라는 주장을 위해 상대방을 제거하려고 할 수 있다. 자신에게 거슬리는 존재를 제거한다는 의미에서 이는 전형적인 폭력이라 할 것이다. 

Flower Power is an historic photograph taken by photographer Bernie Boston

존경: 존경에 의한 권위는 폭력에 의한 권위와는 다르다. 권위에 대한 겉모양은 비슷할 수 있다. 폭력에 의해 유지되는 권위에도 사람들은 권위에 대한 예의를 표시할 수 있고, 반대로 존경에 의한 권위라고 해도 항상 모든 사람들이 예의를 표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절대적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항상 반대하는 집단, 개인은 존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경에 의해 권위를 유지하는 경우, 폭력에 의한 권위와 큰 차이점은 바로 권위자가 반대자에 대한 태도이다. 존경을 바탕으로 유지하는 권위는 그 권위에 대한 여유를 가진다. 그리고 권위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회적 영향력과 범위를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 힘의 크기만큼 부작용의 크기도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항상 반대의 의견을 잘 들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잘못된 지적은 자신을 옳은 길로 움직이게 하는 채찍이라 받아들일 것이다. 이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보다는 아브라함 링컨 (Abraham Lincoln, 1809-1865) 의 일화를 통해 생각해 본다. 

Someone could have a long lasting Authority even after death.

"링컨이 어느 한가한 날 시골길을 걷고 있는데 한 농부가 말을 몰아 쟁기로 밭을 갈고 있는 게 보였다.  링컨은 농부에게 다가가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그때 링컨은 말 엉덩이에 파리가 한 마리 붙어 있는 걸 보았다. 파리가 말을 귀찮게 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링컨은 파리를 쫓아버리려고 손을 들었다.  그 순간 농부가 링컨을 말리며 말했다. "그만 두세요. 그 파리 때문에 이 늙은 말이 그나마 움직이고 있답니다."

추면 낮출수록 높아지는 권위

폭력에 의한 권위 vs. 존경에 의한 권위 둘 중 어떤 권위가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더이상 이야기하거나 논리를 전개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래 지속되는가를 떠나 어떤 권위가 우리 사회를 위해 더 필요한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이 더 적절하기 때문이다. 권위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게 만든 인물이 있다. 바로 2013년 교황으로 계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시다. 그는 스스로 당연하게 누려도 되는 권한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끄럽다면 과감하게 버리는 모습을 보이셨다. 단순히 선거철에 맞춰 민심의 표를 얻기 위한 무엇인가 목적을 가지는 행동이 아닌 비록 사람들의 시선이 없다 하더라도 자신의 양심과 기준에 맞추어 행동하시는 그런 분이라는 믿음이 점점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들었던 첫 생각은 지금까지 생각한 권위에 대한 패러다임을 깨시는구나 싶었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소박한 모습은 화려함 속에서 권위를 찾으려는 무의식적인 느낌을 한순간에 지우게 만들었다.

앞서 설명한 내용 중 폭력에 의한 권위에 대해서 더 부각시켜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반대로 존경에 의한 권위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무릎을 꿇는다.  ] 을 통해 아이들 앞에서도 무릎을 꿇고 아이의 눈높이에서 바라보고,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권위를 주장하며 아버지로 대해주기를 바라는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대상으로 낮아줄 수 있는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가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모습들이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이 아닌 소위 내 자존심을 모두 버려도 별로 상관없는 어느정도 '사랑'이라는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서 가능한 작용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과정이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권위에 적용하기에는 여전히 ... 아니 어쩌면 거의 불가능한 내용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사회의 운영을 위해 권위를 만들었지만 그 권위로 결국 인간을 억압하고 폭력의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교황 프란치스코의 행동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기는 하지만 분명 교황의 안전과 경호를 맡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힘들고 피곤한 일이 되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분명 그런 모습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다 떠나서 좀 더 생각하고 싶은 내용은 '존경에 의한 권위'는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가이다. 언어적인 이유인지 모르지만 '존경'이란 말을 들었을 때 동양 사람들은 마치 계급 관계를 비롯한 어느 정도의 상하 관계가 존재하는 상황을 상상하기 쉽다. 그런데 종종 영미권에서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예의 좀 지키지" 라는 의미로 " show your respect " 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우선 respect 라는 말에는 단순히 상하관계에 적용되는 것이 아닌 인간에 대한 일반적 예의를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 respect 의 더 섬세한 뜻은 예의는 예의지만 어떤 권위와 지위 등 마땅한 가치에 대해서 인정해야 하는 대상에 대해서 표시하는 마음을 뜻하게 된다. 즉, 상하관계의 구조적 설정이 아니라 자신이 (주체) 가 가치를 가지는 대상 (객체) 에 대한 일정한 태도를 표시하는 것이다.

위에 대한 가치관을 통해 살펴본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가슴 뭉클한 모습은 대부분 '인간에 대한 연민, 사랑, 그리고 어떤 모습이라도 가치있게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다. 언젠가 신경섬유종 (neuro-fibroblastoma) 로 모습이 일반적이지 못한 사람에게 주는 축복의 모습은 생각할 때마다 가슴 벅차다. 그때 느낀 감정은 단순히 권위를 가진 사람이 내리는 하나의 자혜의 의미가 아닌 교황 프란치스코란 인간이 그동안 아픔과 슬픔, 그리고 사람들의 많은 편견에 속상했을 한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모습이었다. 즉, 교황도 그분의 슬픔 속에서 같이 아파하고 '당신이 얼마나 가치있는 사람인지 잊지 말라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었던 것 같았다. 교황님이 내린 축복은 교황의 권위로 내린 축복이기도 했지만 한 인간이 한 인간을 향한 연민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존경받고 싶다면 존경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특히 인간과 인간의 모습 속에서는 일방적인 존경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교황님이 신경섬유종 환자를 단순히 인간의 가치가 아닌 한 환자, 그리고 너무 달라서 세상 살기 힘든 가치가 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교황님은 그렇게 진심어린 따뜻한 축복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존경이란 사람에 대한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권위가 될 것이다.

신경섬유종 환자에게 축복을 내리는 교황 프란치스코

그렇기 때문에 권위가 존경에 의해 유지되기를 바란다면 스스로 존경을 받기 원한다면 권위를 가진 사람은 인간 전체라는 인류애적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따르거나 자신을 지지하거나 자신이 좋아한다는 사람들만 사랑하고 그외 사람들은 적대시하며 그들의 제거까지도 서슴치 않는다면 그 사회는 권위를 지키기 위한 수많은 폭력들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 사람들은 항상 지엽적인 사랑이 아닌 인류을 상대로 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과 고민을 해왔던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이정도 권위를 가지는데 너희들이 감히!... "
"그분이 어떤 분인데...!"
"아니 저분이 어떤 분인데 제대로 예의도 차리지 않고...!" 

나치는 절대적 권위를 이룩하기 위해 수많은 숙청과 폭력을 실행했다.

라는 말들이 결국 폭력으로 발전하기 쉬운 이유는 이런 권위의 뿌리가 대부분 존경이 아닌 폭력이기 때문이다. 만약 존경을 바탕으로 권위를 세우고 싶다면 역설적이지만 자신의 권위를 계산하지 않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여유있게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적 실수에 대해서도 인간적인 용서를 빌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권위는 ⓐ 사회의 운영을 위한 하나의 효율적 도구이기도 하고, 인간의 비열함과 나약함에 ⓑ 사회의 비효율적 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한편 그 권위가 폭력과 존경 어떤 내용으로 유지되고 있는가를 통해 ⓒ 권위자 스스로가 반성할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하고, 사회에 폭력과 존경이 어떤 균형을 유지하게 되는지 알 수 있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즉, 사회가 권위에 대해 바라보는 시선을 잘 살필 때 사회가 행복해지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바로미터 (barometer) 가 될 것이다. 그리고 권위를 가진 자에게는 자신이 가치있게 여기는 것이 권위 그 자체인지, 자신에게 권한을 준 사회에 대한 애정인지 살펴볼 수 있는 성찰의 방법이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개인적으로 권위가 존재해 발생하는 사회적 비효율성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필요악이라고 보고 싶다.

덕경 39장 

이 글의 마무리는 간단하게 노자의 도덕경 39장의 일부를 인용하여 끝내고 싶다.

높은 것은 낮은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 老子 : 제39장 -
......
天無以淸, 將恐裂.
地無以寧, 將恐發.
神無以靈, 將恐歇.
谷無以盈, 將恐竭,
萬物無以生, 將恐滅.
侯王無以貴高, 將恐蹶,
故貴以賤爲本, 高以下爲基,
是以後王, 自謂孤寡不穀.
此非以賤爲本邪, 非乎.
故致數譽無譽.
不欲琭琭如玉, 珞珞如石.

Photography by Steve Gadomski

(전략)
하늘이 맑지 못하다면 아마도 찢어질 것이고
땅이 편안하지 못하다면 아마도 꺼질 것이며
신이 영험하지 못하다면 아마도 신의 기능이 끝날 것이고
골짜기가 가득하지 못하다면 아마도 세상이 메마를 것이며
만물이 생겨나지 못한다면 아마 아무 것도 없을 것이고
만일 임금이 곧게 하지 못하고 높은 것만을 귀하게 여긴다면
  아마도 그 나라는 파멸할 것이다.
그러므로 낮은 것을 귀하게 하여 근본으로 삼고
  높은 것은 낮은 것을 밑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임금은 스스로 외롭다 덕이 부족하다
  선하지 못하다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한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칭송 받는 명예를 원하게 되면
  도리어 명예는 없어지게 되나니
  찬란하게 빛나는 옥같이 되기를 원하지 않고
  대굴대굴 돌처럼 구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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