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March 5, 2014

누가 나를 더럽힐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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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전 일이 갑자기 기억나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나는 참기 좋아하는 성질이 아닌가 싶을 때가 많았다. 가능하면 참으려고 하고 아픈 것도 일단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아보려고 했던 그런 성질말이다. 그런 성질때문일까 고등학교 시절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 있을 때 제때 들어가야 할 진통제가 들어가지 않아서 허리와 엉덩이가 끊어질 듯 아팠지만 처음 받아보는 수술이라 다들 이정도 아픈 것인가 보다 생각하며 밤새 아파하며 땀흘리며 제대로 잠도 못잤던 날이 있었다. 아침에 간호사 누나가 확인하고 호출도 안하고 참은 모습이 안쓰럽고 미안했는지 이마에 뽀뽀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음으로 기억나는 사건은 초등학교 6학년때의 일이다. 체육시간이었다. 체육시간이었지만 자유로운 분위기라기 보다는 일종의 제식 훈련과 같은 줄 맞춰 서 있었던 상황이었고 분위기도 별로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날따라 속이 안좋았고 설사가 나올 것 같은 몸 상태에 억지로 참고 참으며 힘들게 서 있었다. 감히 화장실을 가겠다는 말을 꺼내기도 힘든 분위기였던 것 같았다. 사실 그보다는 조금만 더 참으면 수업시간이 끝나겠지 기대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그렇게 일분 일초가 하루같이 길게 느껴지는 그 인내의 순간, 생리적인 한계를 넘어 가장 우려했던 일을 일어났다. 믿었던 괄약근의 힘은 무너지고 밀려내려오던 설사의 느낌은 이내 체내에서 바지를 따라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때의 느낌이 어떤지 사실 잘 기억이 안난다. 너무 부끄러워서 기억하기 싫은 것인가? 아니면 정말 지우고 싶기 때문에 마치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가 싶기도 하지만 사실 그보다는 그때 그렇게 부끄럽거나 소위 쪽팔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 사실을 알고 담임선생님은 자신의 담요를 바지 뒤로 감싸 집으로 잘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고 집에 들어와서 욕조에서 엄마의 손에 이끌려 목욕을 했던 기억이 날 뿐이다. 그리고 계속 배가 아파서 집에서 쉬었던 기억 정도가 내가 기억하는 그 날의 실루엣들이다.

robbrucker@Flickr

사실 아이들의 놀림이나 시선이 왜 그렇게 신경쓰이지 않았는지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뭐 그런 실수야 할 수 있지 않나 싶었던 것인지 어떤 생각인지 몰라도 그런 일이 있어도 항상 같이 놀고 즐기는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외 아이들의 시선이나 뒷이야기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는지 모른다. 어쩌면 지금과 같이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아서 그런 사건이 파급되지 않거나 댓글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뒷이야기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런데 나에게는 별로 존재감이 없던 한 여학생이 있었다. 공부도 잘했던 것 같은 여학생인데 그 여학생은 나와 중학교, 고등학교 심지어 대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여학생은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나에 대한 뒷이야기를 하면서 꼭 그때의 사건을 즐거운 안주거리 마냥 항상 빼먹지 않고 했다고 한다.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대학교 동문회까지도 계속 되었다. 동문회 술자리에서 내가 같은 테이블에 없는데 같이 앉은 선후배 및 동기 등에게 그때 초등학교 사건을 또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뒷자리에 옮겨 앉은 것을 모르고 이야기에 빠져 나를 거론하며 그때의 사건을 역시 이야기하였다. 이야기가 끝나고 나는 뒤돌아서서 그 여학생에게 이야기했다.

"난 그때 바지에 똥을 싸고 깨끗히 씻었는데 넌 아직도 너의 입에 내 똥을 달고 다니는구나. 이제 좀 씻고 다녀라." 

사건이 생각난 이유는 소아과 관련 논문을 보다가 일부러 배변을 보는 아이들의 케이스를 보았기 때문이다. 논문의 주요 내용은 어떤 이유에서 시작된 바지에 배변하는 것과 같이 아이들이 더럽거나 냄새나는 행동 등을 하게 되어 부모가 당황해서 아이들을 혼내거나 비난하거나 심지어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훈계를 하게 되거나 부모님 스스로가 불쾌하거나 부끄러워할 경우에도 아이들의 행동은 더욱 악화되기 쉽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공적 행동과 사적 행동이 구별되지 않는 경우 오히려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아 해결하기 보다는 아이들의 정서를 먼저 감싸줄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 정서적인 문제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지만 그때 엄마가 보여준 정서적 안정감은 잊기 힘든 경험이었다. 그리고 배설물이 묻은 바지를 손수 벗겨주시고 씻겨주던 엄마의 반응도 기억난다. 그때 엄마는 "왜 이런 짓을 했냐? 혹은 이러면 안된다" 와 같은 말은 단 한번도 없이 어디가 아픈지 그리고 무엇이 필요한지 물어보는 것 뿐이 없었다. 난 오랜동안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점점 다양한 부모들의 반응을 알게 되면서 정말 그런 반응이 그리 쉬운 반응이 아니라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더러운 것은 씻으면 되는거야. 배가 아직도 아파? 뭐때문에 그랬을까? 따뜻한 물 끓여 놓아야겠다." 

난 언제부터인가 더러운 것은 씻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지만 살아가면서 자존감이 낮아지는 순간일수록 외적으로 더러워 질수록 더 화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껌과 영수증 종이 ] 그러나 점점 외적으로 더러운 것들에 대한 의연함을 찾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의 기저귀를 치우면서 더럽거나 냄새난다고 해서 찡그리거나 거부하지 않으려 않고, 누군가 불편한 몸으로 병원에 누워있을 때 흘린 오물에도 그렇게 격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있었다. 어짜피 그런 것들은 다 씻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나에게 묻어 더러워지거나 냄새난다고 해도 결국 씻으면 괜찮아진다.

간은 무엇일까? 

오늘은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 이다. 재에서 태어났으니 다시 재로 돌아갈 우리들의 운명을 알게 된다면 우리들의 화려함과 깨끗함은 언제나 너무도 짧은 유한함이다. 인간의 고귀함과 존엄함은 화려한 옷과 향기로운 향수로 절대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인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수용소에서 순교하신 [ 막시밀리안 마리아 꼴베 ] 신부님과 같이 그 어떤 형별, 어떤 고통 속에서도 절대 더렵힐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인간에게는 있다. 재의 수요일 미사에서 신부님이 말씀하셨다.

"더러워지면 어때요! 씻으면 되는거예요. 사람의 죄란 그런 것입니다. 씻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회개란 그렇게 쉽게 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예요. 뜯어 고쳐서 회개할 수 있다면 왜 그렇지 않겠어요." 

신부님의 강론은 회개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아침에 생각했던 '더러워지면 씻으면 된다' 는 생각과 겹치면서 알 수 없는 신비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인간은 아무리 더러워지고 오물에 빠지고 심지어 온갖 모욕과 비난 속에서도 절대 더러워질 수 없는 무엇인가를 가졌다. 그것을 인성이라 불러도 좋고, 인간의 존엄성 (dignity) 라 불러도 좋다. 마치 바지에 똥싼 아들이라도 항상 곱게 차려입은 아들이라도 상관없이 바라봐 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인성은 절대 외형적인 모습으로 가치가 정해지지 않는 존재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Catholic Church of England @ Flickr

그런데 외적인 더러움으로 더럽힐 수 없는 그 인성을 더럽힐 수 있는 존재는 딱 하나 있다. 바로 본인 스스로이다. 가난해도 남루해도 그런 외형적인 조건들로 인간의 가치가 평가받지 않지만 더럽혀진 생각, 더렵혀진 말 그리고 더렵혀진 행위로 우리 스스로를 더럽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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