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anuary 20, 2016

공부 잘해 좋은 대학을 나와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이 있었다. 안정적 직업에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지만 유흥을 자주 즐기고 부인에게는 성병까지 옮긴다. 그러나 부인에 대한 최소한의 미안함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행동이 무엇이 잘못인지 모른다. 남자들이라면 좀 더 수식어를 붙이자면 대한민국 남자들이라면... 조건을 붙이며 별로 큰 잘못을 느끼지 못한다. 
다른 이야기는 좀 더 충격적이었다. 선후배 관계가 중요한 것을 이용하여 명문대 출신의 전문직 선배가 후배에게 성적 관계를 요구하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자신의 후배마저도 도구로 만들어 버리지만 이런 요구를 하는 명문대 출신의 인물은 상대방도 원했다 심지어 후배가 자신을 유혹했다는 이유를 통해서 자신은 큰 잘못이 없음을 강조한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잘해서 항상 1등을 놓치지 않고 명문고등학교를 진학한 학생이 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실력이 상당하였던 그는 소위 아르바이트로 불법 인터넷 도박사이트를 위해 프로그래밍을 해주었다. 그러나 학생은 자신은 능력있는 것을 잘 활용해서 학비도 벌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고 강조하며 어떤 죄책감도 가지지 않았다. 


스를 보면 공부를 잘하고 똑똑했기 때문에 좋은 대학 나오고 좋은 위치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일하라고 주어진 자리를 가지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혹은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함부러 남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이들에게는 몇십만원에 감옥을 가야하지만 소위 높은 자리의 사람들은 수많은 범죄와 악행들로 수많은 사람들을 불행으로 몰고가도 오히려 떳떳하게 살아가며 심지어 자신처럼 살라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럴때마다 많은 이들은 마크 데스메트 Marc Desmet 가 표현한 '용기를 꺽는 모순들'에 좌절하고 희망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쉽게 말해 인간이 쉽게 믿었던 보편 타당한 윤리, 도덕의 문제는 항상 꺽기고 모든 법과 윤리를 지키고 살려고 하는 이들에게는 왜 지켜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서두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통해 가정, 사회 그리고 아주 사소해 보일 수 있는 개인의 규모가 가지는 규범적 요소들의 파편성 fragmentation of regulations 을 생각하게 된다. 왜 누군가에게는 옳은 내용들이 다른 이들에게는 쉽게 깨도 되는 대상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 범법 행동에 대해서도 쉽게 합리화를 시키고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제점이 없는 행동들은 외부적인 훈육에 의해서 쉽게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훈육의 강도가 높지 않거나 때로는 알리지 않게 은밀하게 행동해도 그것은 떳떳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알렸을 때 예상되는 훈육의 짜증때문에 숨기는 것이다. 즉, 무엇이 문제이다라고 아무리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해도 심지어 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해도 스스로의 똑똑함으로 무장한 이들에게는 그 법마저도 제대로 된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서 합리화를 쉽게 할 수 있다.

정치적 타락이 만드는 눈뜬 정의의 여신

분명한 피해자들이 존재하고 심지어 그들의 잘못된 행동들에 의해서 피해자는 결국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있다. 선배의 강압적인 관계를 요구하던 후배는 결국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하였지만 가해자는 오히려 그것이 자신때문이라 생각하지도 않고 강하지 못하게 자란 피해자를 탓하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다. 부인에게 성병을 옮기고 유흥을 즐기는 사람도 비슷하다. 자신이 하는 일이 힘들기 때문에 일 이외의 시간동안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즐길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누구나 부러워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을 도박 중독에 빠지는 것에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다.

덕과 윤리는 우리를 항상 즐겁게 해주는가?

많은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공통적으로 들었던 질문은 정말 그들의 행동은 문제가 없는데 사회가 괜한 문제로 만드는 것은 아닌가 질문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업을 가진 것만으로 도덕 윤리 의식도 높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 명제는 지금의 사회가 이미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고 심지어 높은 도덕 윤리를 요구하는 고위 공직자들은 오히려 적절한 범법 사실이 필요 조건이 되었다. 심지어 그 중 명백한 현행법 위반이라도 자식들을 위한 노력이 보인다면 어느정도 괜찮지 않는가 공직자 후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도덕 윤리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은 더욱 더 어렵다.


사전적 정의로 도덕이란 사회의 구성원들이 양심, 사회적 여론, 관습 따위에 비추어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 준칙이나 규범의 총체. 외적 강제력을 갖는 법률과 달리 각자의 내면적 원리로서 작용하며, 또 종교와 달리 초월자와의 관계가 아닌 인간 상호 관계를 규정한다. 영어로는 a lesson, especially one concerning what is right or prudent, that can be derived from a story, a piece of information, or an experience. 이라 나와 있지만 이처럼 정의하기 싫어 내리는 정의도 없는 것 같다. 아주 간단하게 생각하고 싶다. 도덕이란 자신이 다치지 않기 위해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나와 공동체가 지켜야 할 행동 요소라고 말이다. 결국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신체의 외상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까지) 나와 내 공동체가 지키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윤리란 도덕을 통해서 공동체 전체가 예상하고 살아가기 위해 지켜야 할 요소라고 정의하고 싶다. 쉽게 말해 도덕이란 개인적 감정의 보호막이고 윤리(倫理) 는 공동체가 굴러가기 위해 (輪; 바퀴 륜) 혹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한 공동체의 보호막이라 생각한다. 도덕 혹은 윤리가 이성적 작용이라고 많은 이들이 말하지만 상당 부분 동의하기 어려운 이유는 앞으로 설명할 것이다. 누군가 길거리에 소변을 본다고 해도 사실 나에게 물리적 직접적 피해는 없을 가능성이 더 높다. 다만 누군가 그렇게 하는 행동을 보는 것 자체가 불쾌함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불쾌함은 어디서 왔는가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반대로 자신이 소변이 급한데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한 경우 자신이 지키고 싶은 도덕의 기준은 스스로를 더욱 더 불쾌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당장 목격자들이 없다면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의 슬픈 이야기를 생각하며 자신의 노상방뇨를 적극 합리화할 것이다. [주: 티코 브라헤 (1546-1601) Tycho Brahe 는 방광파열로 사망했다는 전해진다.]

도덕 moral 의 어원은 라틴어의 mores 에서 유래된다. mores 는 행동이란 뜻이다. 즉, 도덕은 지극히 행동과 그 행동이 가지는 영향을 이야기한다. 이런 측면에서 도덕은 사회적인 개념일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물론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도덕의 이야기는 공동체를 떠나 성립하기 어렵다. 혼자 사는 이에게 도덕이란 상황극일 뿐이다. 혼자 사는 무인도에서 노상방뇨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중요한 점은 행동이 어떻게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가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인 정의를 '상처받지 않기 위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이다. 주변에 목격자가 없어도 끝까지 노상방뇨를 하지 않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일까 아니면 도덕 의식이 너무 높아서 혹시나 갑자기 나타나 기분 나빠할 수 있는 목격자를 생각한 것일까? 행동 자체로 보았을 때 자신의 참는 불쾌함을 해소하는 것이 좀 더 이성적일 수도 있다. 오히려 도덕이라는 구조 안에서 힘들게 고통을 참는 이유는 누군가 나의 행동을 보고 '감정적으로' 불쾌할 수 있다는 생각혹은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도 수치스러워 스스로도 불쾌할 수 있다는 감정의 문제로 생각해보는 것이다.

Moral 의 어원은 라틴어 mores 행동이란 뜻에서 유래된다

도덕 윤리를 모두 잘 지킨다고 그래서 모두가 행복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충동적 욕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행동에 대해서 사회가 도덕 윤리라는 이름으로 하지 말라고 하면 더욱 더 짜증날 것이다. 유흥업소를 즐겨 다니는 이에게는 적절한 거래에 의해서 내 돈 가지고 내가 그렇게 쓰는데 무엇이 문제인지 합리화시킬 것이고 후배에게 강요하는 선배는 자신의 권위는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성인 남녀의 개인적 문제라 해석할 것이다. 철모르는 고등학생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할 것이라는 것, 즉 영향을 준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할지 모른다. 정말 인간은 누군가에게 피해주지 않고 싶어할까 묻고 싶을 때가 많다. 가학적 인간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올바른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특히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행동이 직접 간접으로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도덕 윤리는 점점 변화하고 다양한 욕구의 충족을 위한 유혹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더 귀찮고 필요없는 대상이 되어버린다.

동의 문제인가 인식의 문제인가? 

뉴스는 많은 경우 시청자들의 귀과 눈을 끌기 위해 다양한 상황 circumstances 을 제시한다. 대기업 회사원, 치과의사, 한의사 등과 같은 직업적 요소뿐만 아니라 재벌집 아들, 강남 명문고 출신, 명문대 졸업자 등과 같은 부분이다. 예를 들어 명문대 졸업생이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소위 명문대가 아닌 졸업생이 살인을 저지르는 것보다 더 주목받는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높은 교육 수준은 높은 도덕 수준을 예상한다. 그러나 그건 심각한 일반화의 오류이다. 만약 사실이라면 명문대 캠퍼스 안은 거의 천국에 가까워야 한다. 현실은 반대이다.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에게 높은 도덕 수준을 예상하는 것은 사실 자연스러운 느낌이다. 교육 수준이 높다는 것은 현 시스템에 잘 순응하고 잘 따라와서 좋은 성과를 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렇다면 세상이 요구하는 일반적인 도덕적 요소를 잘 따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지옥에 가깝다. 높은 교육 수준을 이용해 타인에게 고통을 주거나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탐욕을 챙기는 등 오히려 높은 교육 수준이 가져다 주는 다양한 기회를 통해 자신의 실속을 챙기면 도덕에 어긋나는 때로는 반사회적 anti-social 행동들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명문대 출신이라면 사람들은 더 충격을 혹은 더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높은 교육 수준을 받은 사람이 저렇게 살인을 저지를까 하는 예상 밖의 결과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뉴스가 만든 상황적 분위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시선을 다른 부도덕성에 비추면 재밌는 현상이 일어난다. 높은 교육 수준의 사람들이 경제 범죄를 일으켜서 많은 이들 심지어 가족이라 생각한다는 회사 구성원들에게 피해를 주어도 사회 지도자, 경제 지도자라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무척 관대하다는 것이다. 경제사범들이 회사 경영자라는 이유로 다양한 불법 행위들을 통해서 많은 노동자들을 힘들게 했다면 분명 그들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수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로는 경제사범들을 경제 발전을 위해 노력한 영웅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놀라운 일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궁금하는 생각보다는 많은 경우 사라지는 희망같은 무력감마저 들때가 많다. 결국 힘없는 노동자들은 소수의 자본가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해결책은 정말 없는 것인가 이런 생각들이 떠돌기만 한다.

기업적 부도덕의 예를 보여준 엔론 회계부터 경영 거의 전반적 비리가 존재했다

그래서 문제를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싶었다. 인간의 도덕이란 행동의 문제인가 아니면 다른 문제인가 말이다. 현실의 복잡성때문에 만들어지는 다양한 문제들은 단순히 개인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조직과 개인 때로는 조직과 조직의 충돌 안에서 개인들은 다치게 된다. 많은 과정에서 결국 상처입는 것은 개인에게로 돌아간다. 가끔 인류가 만든 가장 악덕한 제도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개인적으로 '법인 corporate body' 라고 말한다. 법인이란 '자연인이 아니면서 법에 의하여 권리 능력이 부여되는 사단과 재단'을 말한다. 즉, 인간은 아닌데 법에 의해 마치 인간처럼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기능적으로 이런 법인은 다른 법인을 죽이기도 (망하게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때로는 결합하기도 분리하기도 한다. 가장 중요하지만 마치 인간처럼 (자연인처럼) 다른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때로는 해치기도 한다. 결국 인간대 인간의 대결에서 인간은 상상하기 힘든 규모의 기업이나 단체와 같은 법인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법인은 정말 대단한 존재이다. 자신이 피해를 주어도 그 책임은 상당히 제한적이고 때로는 그 피해의 책임을 물을 대상도 사라지기도 한다. 그리고 인간 세상에서는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많은 도덕적 내용들을 따르지 않아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해도 아무렇지 않은 존재이다.

결국 행동의 관점에서 살펴본 도덕이지만 도덕이 문제가 아니라 도덕이라는 항목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초점을 맞춰야 한다. 도덕적 기업 (법인) 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런데 그 예외의 대상은 인간을 가장 괴롭히는 대상이다. 그런 이유에서 법인의 활동은 많은 제도적인 안전 장치가 필요하다. 그것을 인간의 사회는 도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강하게 지켜야 하는 것은 법이지만 법의 차원이 아니라도 규제 regulations 라고 부른다. 개인의 차원에서 생각해도 규제란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데 해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내부적 기준이 될 수 있다. 돈이 넘치고 넘치는 욕정에 유흥업소를 다니며 돈으로 성을 매매할 수 있다고 생각해도 그렇게 하는 것이 가정을 생각했을 때 한 가정의 가장으로 해도 되는 것인지 아닌지 먼저 생각할 것이고 아무리 하고 싶고 할 수 있어도 '하지 않음'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내재적 규제 immanent regulations 가 된다. 결국 행동은 표면적인 문제이지만 그 행동을 옮기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그 행동을 평가하는 인식의 문제이다. 자신의 성욕이 후배의 존재보다 더 중요하다고 인식한다면 후배라는 인격은 그저 도구적 가치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능력이 돈을 벌 수 있고 그 돈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고 인식한다면 인터넷 도박이 아니라 돈보다 덜 가치있다 생각하는 어떤 것도 쉽게 행동할 것이다.

종교는 내재적 규제를 제시한다

결국 도덕을 행동의 문제이지만 그 원인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행동보다 '가치에 대한 인식'이 무엇인지가 더 중요하다. 설명이 길었지만 이 문제는 다른 질문으로 '시대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도덕'이란 존재할까? 란 질문으로 환원하고 싶다. 사회는 끊임없이 무엇이 가치있는지 인식을 요구한다. 그리고 개인도 끊임없이 무엇이 가치있는지 생각하고 가치를 인식한다. 노예 제도가 합법이었을 때 주인이 여성 노예에게 성관계를 요구한다면 현대의 시선을 모두 벗어 당시의 사회가 요구하고 인정하는 가치에 비추어 주인이 비도덕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도덕은 사회의 산물이라는 아주 간단한 결론을 내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도덕적일 것 같은 인간들의 비도덕적 행동 그리고 그로 인해 사회가 병들어 가는 것으로 연결짓기 어렵다.

사의 서사에서 침몰하는 개인 

괴물이란 화두는 아주 강하게 다가왔다. 괴물 monster 는 경고하다는 뜻의 라틴어 monere 에서 유래되었다. [ 괴물을 만드는 사회 ─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서 ] 괴물이란 세상의 잘못된 부분을 알려주는 일종의 경고라 생각했던 것이다. 우연히 벨기에의 정신분석학자인 파울 페르하에허 Paul Verhaeghe 의 책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 를 읽게 되었다. 책의 모든 내용을 소개할 수 없지만 가장 인상적이고 오랫동안 고민했던 문제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높은 교육 수준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 수준을 지키지 못하는가?
사회에 피해를 주는 행동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문제라 생각하지 못하는가?
인식하지 못한 부도덕한 행동들은 어떤 방법으로 해결이 가능한가? 

와 같은 질문에 책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했다. 어쩌면 현재는 폭풍처럼 지나간 (혹은 지나고 있거나 머물러 있는) 신자유주의의 희생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다양한 부분에서 나치와 같은 전체주의와 거의 비슷하다는 내용이다. 즉, 경제적 전체주의가 바로 신자유주의의 핵심이라는 점이다. 조금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몇가지 신자유주의의 특징을 생각해보면 그 유사성을 느낄 수 있다. 핵심은 신자유주의의 능력주의 meritocracy 이다. 특히 전체주의가 좋아하는 사회진화론에 근거하여 나치가 저지른 수많은 학살의 내용도 사실상 유전적 우수성에 가치를 두고 인식하여 유대인 학살의 인식적 근거가 되었다. 사회진화론은 궁극적으로 진화된 존재와 덜진화된 존재를 규정하고 그에 따라서 어떤 요소가 우수한지를 평가하게 되었다. 그 과정은 객관적 과학적 과정이 아닌 독일 아리아 혈통의 우수성을 결론내리고 유대인 및 타 인종에 대한 협오까지 만들었던 것이다.


사실 사회진화론의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공감이 가기 시작했다. 능력을 키우고 그 능력에 따라서 보상받고 얼마든지 능력만 좋다면 좋은 대우 받으면서 살 수 있다고 신자유주의는 선전한다. 아주 건전해 보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능력은 이미 이루어진 기득권 사회의 평가에 의해서 철저하게 규정되어야 한다. 즉, 무엇이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내 위에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이 구조적 문제를 떠나 단순히 '어떤 곳에서나' 능력만 있다면 출세할 것이라는 말은 능력주의를 가장한 인생을 두고 펼치는 보이스피싱이나 다름없다. 인간이 실수할 수 있거나 때로는 상황이 힘들어 자신의 제대로 된 역량을 펼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할 것이냐 물어보면 무엇이라고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은 말할까 궁금하다. 뿐만 아니라 부도덕한 지도자 및 경영자들의 부도덕한 요구가 있을 때 능력좋은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지 생각하게 된다. 결국 상위 10%는 승진하고 30%는 그대로 남게 되고 나머지는 해고된다는 규칙을 만들게 된다면 (그 규칙은 법인이라는 법이 정하는 인격체에 의해서 정해진다.) 구성원들은 어떤 행동을 해야할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다양한 기능적 역할을 수행한다. 대표적으로 사유화 [ 공공 부분의 사유화 ─ 민영화에 대한 생각들 ], 규제완화, 사회복지 축소, 복지제도의 해체 등이 있다. 이와 같은 국가 정책의 방향이지만 더 중요한 부분은 그 사회 구성원이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부분이 된다. 예를 들어 의료에 대한 복지가 줄어든다면 의료 부담이 걱정되는 사람들은 사보험이나 목돈을 마련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규제완화의 한 부분으로 사업자 측 혹은 사용자 측에서 노동자들을 해고할 수 있는 요건을 완화한다면 노동자가 사용자를 향하는 태도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심지어 사용자들이 부도덕한 행동을 요구한다면 회사에 남기 위해 노동자는 부도덕한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미 그런 다양한 예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이 목격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고 극대화할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하려고 한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살아가는가에 따라서 그 자유의 폭과 깊이는 제한될 수 밖에 없다. 이런 모순을 마르텐 판 로섬 Maarten van Rossem 은 "현대 사회의 자유는 공포와 생존이라는 두가지 사슬에 묶여 이름만이 자유인 부자유의 다른 이름이 되어간다." 로 표현했다. 또한 이러한 모순을 마이클 영 (1915-2002) Michael Young 은 "지옥으로 가는 길은 항상 최선의 의도로 포장되는 법이다" 라고 신자유주의의 성격을 설명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신자유주의의 많은 결과들은 이미 많은 나라에서 문제점을 만들어 냈다. 능력주의에 따른 소수가 자본을 독식하는 구조 그리고 그에 따른 심각한 부의 불평등뿐만 아니라 노동의 가치가 생산을 위한 하나의 비용으로 인식되면서 인간의 노동은 쉽게 대체될 수 있는 아주 쉬운 부품이 되어버렸다. 그런 가운데 어떤 국회의원은 최저임금을 외국인 노동자에게는 "외국인 근로자들 40%에 숙식을 제공하는데 숙식비에 최저임금까지 하니 외국인 근로자의 임금 수준이 높다, 선진국도 숙박비가 최저임금에 삽입이 되고 있다. 이런 얘기하면 국제 감각이 떨어진다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에 외국인 근로자들의 후생복리가 지나치게 좋아지는 것 아닌가" 라는 주장을 하며 적용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장을 한 국회의원은 환경노동위원회의 의원이었다. 이 뉴스 속에서 해당 국회의원은 노동에 대한 어떤 인식을 하고 있는지 상당히 궁금했다. 그렇다면 외국에 나가 일하는 한국사람들도 똑같은 차별을 받아도 된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속 시원한 해답을 얻을 수 없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개인적인 의문은 '국회의원까지 할 수 있는 지적 수준과 품위를 가진 분께서 왜 이런 인식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런 인식을 하게 만든 원인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리의 인식을 바꾸는 요소들 

무엇이 옳다 잘못됬다는 판단은 인간이 가지는 정상적인 그러나 상당히 비이성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이성이 옳다 잘못되었다는 판단은 이성적 작용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감정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이 더 편리하고 더 잘 맞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옳고 그름은 차라리 좋다 나쁘다로 설명하는 것이 잘 맞는 경우가 많다. 조금 학술적으로 표현해서 이것을 신념 faith 이라 부르지 않을까? 신념 faith 은 라틴어의 fides 에서 유래되었고 이 말은 믿음, 충성, 신뢰 등의 뜻이지만 이 모든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면 즉, 호의를 가지지 않는다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인식을 만드는 많은 것들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다.

신년 새해를 맞이하여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하셨다.

"전체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위협은 진실의 힘"

전체주의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진실이라 생각한다. 전체주의는 무엇이 옳은지 명확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전체주의의 힘이 하나로 모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체주의는 무엇이 진실이다 라는 명확한 명제가 많아야 가능하다.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하는 역사학계의 의견은 단지 이견일 뿐 전체가 따라야 하는 진실은 명확하게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 그래서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그리고 다양한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 사회는 쉽게 전체주의가 되기 어렵다. 따라서 전체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위협은 진실의 힘이 아니라 무엇이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는 다양성이 되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전체주의 역사 속에 묻힌 개인들은 자신들이 좋아할 수 있는 다양한 의견들을 접하기도 전에 전체주의 국가가 제공하는 진실의 힘속에서 살아야 했다. 나치 독일의 전체주의는 개인들이 유대인을 숨겨주면 자신도 범법자가 되기 때문에 혹시 유대인도 같은 인간인데 라는 양심의 외침에도 유대인은 죽어 마땅한 존재라고 주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무엇이 진실이라 말하는 사회에서는 개인이 가지는 다양성을 숨죽이게 만든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지만 심각하게 보면 개인 생존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계되기 때문이다.


비슷한 상황을 조금 작은 규모의 공동체에도 적용할 수 있다. 사실 공동체란 말을 붙일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단순히 기관이나 이익집단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기업의 경우에 적용해보면 부도덕한 행동을 하는 재벌 총수를 도와 횡령을 하고 불법을 행하는 사람은 회사에서는 살아남을 수 있지만 이를 고발하는 내부고발자는 오히려 회사에서 살아남기는 어렵다. 그리고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내부 고발자가 양심적이라고 말해도 그래서 그 결과로 회사를 떠나 직업을 잃어버려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당연하다 생각한다. 문제의 원인은 내부 고발을 하고 양심을 지킨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도덕한 행위가 해도 된다고 인식한 높은 인간의 인식 수준이라는 것에 대해서 공론화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부도덕한 행동을 해도 부자로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을 사람들은 더욱 부러워할지 모른다. 이미 재벌 총수는 재벌 기업을 운영하는데 있어서 진실이다. 무엇이 양심적이고 합법적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혹은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가 중요하다. 우리가 기대해야 하는 희망은 오직 '그'들 혹은 '그녀'들이 정의롭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기를 바랄 뿐이다. 아니 최소한 죽어가는 생명 앞에서 무감각한 괴물만 아니기 바랄 뿐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싱가포르란 나라는 전체주의 국가에 가깝다고 느낀다. 지하철에서 음식물 먹는 것도 벌금, 화분 받침대에 물이 고여 있어도 벌금이다. 이런 다양한 벌금을 통해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 할 수 있는 행동들이 다소 심하게 구별되는 나라이지만 두가지 측면에서 이런 통제의 기능을 생각하게 되었다. 첫번째는 그런 규제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한다는 점이다. 지하철에서 음식을 금지하는 것은 어느정도 이해가 되지만 화분 받침대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말라리아와 뎅기열때문에 보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모기를 퇴치하기 위한 이유라는 점을 듣고 어느정도 수긍할 수 있었다. 실제로 싱가포르에서 모기를 보기는 쉽지 않다. 두번째는 이런 통제에는 예외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고위 공직자라도 비리를 저지르면 그에 따른 조사와 처벌은 피해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얼마나 엄격한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국민들이 그런 사법체계에 대한 신뢰는 상당히 높다는 점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런데 통제 및 규제의 이유가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합리성을 가지고 소수의 권위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즉, 국가의 통제 기준이 절대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도덕적 수준이라면 개인이 느끼는 양심적 갈등은 줄어들 것이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우리의 인식을 바꾸는 요소들을 생각해본다. 싱가포르의 경우 아주 소량의 마약만으로도 사형을 당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싱가포르 사람들은 옳다고 믿는다. 그러나 정말 마약 밀반입을 하려고 한 사람인지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 그리고 한번 사형을 내린 사람들은 다시 살릴 수 없는 문제를 이야기하면 그때는 조금 머뭇거리지만 항상 마약이 가지는 사회적 문제를 떠올리며 계속 주장한다. 이런 인식은 어쩌면 마약은 무조건 나쁜 것이야라는 인식을 교육을 통해서 그리고 법을 통해서 전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상당히 자율적으로 스스로의 가치관을 결정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아닌 예들을 많이 찾을 수 있다. 내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는지는 내가 태어나기 이전 부모님이 정해주신 유전적 형질보다 어쩌면 태어난 이후 어떤 환경 안에서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냐에 따라서 더 많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제유전학육유전학 

유전학 genetics 는 인간의 질환이나 이해할 수 없던 다양한 증상에 대해서 다양한 설명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유전자의 실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시절에는 의학적 설명의 폭이 좁았던 것이다. 특히 유전자질환 genetic disorder 은 많은 부분을 설명해준다. 내과적 질환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방사선이나 약물에 의해서 특정 유전자가 기능을 하지 못해서 외형적인 부분에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도 존재한다. 유전자는 인간이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기능을 제공하는 일종의 청사진이기도 하지만 그 청사진이 변경 (변이 variation) 되는 경우에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고 그 현상이 인간 생명 활동에 치명적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유전자는 단순히 생물학적 의미에서 생명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역할을 수행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범위를 정하기도 한다. 아무리 인간 유전자에 새의 유전자 특히 날개의 기능을 하는 유전자의 일부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날개를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심지어 날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전자를 인간에게 주입된다고 해도 해당 유전자가 전체 인간 유전자 안에서 실제 형태를 만들고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거라 생각할 수 없다. 즉, 우리가 추구하는 기능이 있다고 해도 인간 유전자가 단순히 몇개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실현하기 어렵다. 유전자는 생명체가 죽을 수도 있는 치명적인 변이를 만들어 유전병을 만들 수도 있지만 가능한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필수적인 부분은 다양한 안전 장치와 보완 장치를 마련해 놓았다. 이런 의미에서 유전자란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들을 제한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을 제공하기도 하는 것이다.

Econogenetics 경제유전학

생명 활동의 규모, 범위 그리고 실체적인 행동들을 결정하는 요소로 유전자를 이야기 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안에서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이다. 이미 말한 것처럼 신자유주의의 서사 안에서 구성원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것에 더 집중해야 하고 생존을 위해서는 경제적 활동을 할 수 밖에 없다. 반대로 제대로 된 경제적 활동을 하지 못하면 삶의 질뿐만 아니라 생존의 문제까지 위협받게 된다. 신자유주의는 더욱 더 나아가 개인을 결과로 판단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정도를 평가하여 이를 통해 능력을 평가한다. 따라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거나 사고 등으로 얻게 된 경우 능력을 공정하게 평가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어떤 국회의원의 인식대로라면 자신이 선택하 수 없는 출신 국가에 따라서 최저임금을 보장받지 못할 수도 있게 된다. 같은 결과를 보여 능력이 동일해도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이처럼 인정하기 싫지만 자신이 결정할 수 없는 경제적 환경, 여기에는 자신의 경제적 능력이나 자본의 크기뿐만 아니라 자신이 태어난 곳 등과 같이 경제적 기회에 영향을 주는 다양한 요소들까지도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주게 된다. 다시 돌아가면 인간의 행동은 결과적인 문제이지 원인적으로 인간의 인식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즉, 물려 받을 수 있는 자본이 얼마나 있는지 어떤 나라에서 왔는지와 같은 자본적 환경은 내가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에 영향을 주고 행동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상품이 되어버린 인간 그리고 인간의 노동

이처럼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요소이지만 분명 우리의 인식 및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요소들을 유전학의 유사성을 생각해서 경제 econo- 유전학 genetics 이라고 부르려 한다.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표현이지만 대한민국 사회에 통용되는 소위 금수저 흙수저와 같은 인식은 결국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있는 범위는 정해져 있다는 한계적 요소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능력을 주장하지만 이미 시작점부터 다른 부의 불평등은 이미 경제적 조건조차 중요한 능력이 되었다는 사실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단순히 주어진 자본뿐만 아니라 자신의 경제 활동을 얼마나 쉽게 활동할 수 있는가와 같은 국가 안에서의 규제, 법률 등도 중요한 경제유전학의 요소이다. 예를 들어 아무리 프로그래밍 능력이 뛰어나도 인터넷 도박을 개발하는 행위는 제한되어야 한다. 능력이 뛰어나 쉽게 돈 벌 수 있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주기 때문이다. 능력과 기회가 충분하다고 해도 공동체 안에서 같이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들이 존재한다. 이처럼 공동체의 균형을 위해서 법이나 개인적인 차원의 양심은 할 수 있지만 그 행동이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고 하지 않는 과정도 경제유전학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단순히 경제가 자본을 많이 모으는 목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균형된 조직 안에서 공생이 더 가까운 의미일 것이다. 생리적 인간도 비슷하다. 간세포들이 자신들은 기능이 뛰어나다고 끊임없이 자기 조직의 세포를 분열 복제한다고 한다면 그것을 일반적으로 암세포라 부른다. 암세포 자체는 끊임없는 세포의 증가로 인해 정상적인 세포가 살아갈 여유조차도 만들지 못해 정상세포의 기능마저 할 수 없게 하여 결국 생명을 잃게 하는 것이다.

이런 경제에 관련된 활동 경제 구조에서의 생존을 위해서 어떻게 적응하고 어떻게 행동하는가는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는가를 통해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적응을 위한 행동을 통해서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재벌 총수가 횡령을 하겠다고 했을 때 회사 회계를 담당하는 한 사람이 부정한 방법의 내용을 모두 알고 있지만 재벌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불법을 저질렀을 때 자신을 불법을 저지른 범법자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이해해주길 바랄 것이다. 그러나 그 불법의 과정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피해에 대해서 보상을 제대로 해줄 것인가 의문이다. 결국 자신이 속한 다양한 사회의 구조가 가지고 있는 유전체가 무엇이고 그 유전체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어떤 기회를 줄 수 있고 심지어 자신이 원하는 행동들이 제한받게 되는가에 따라서 사회 안에서 한 개인의 행동과 인식은 변화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재벌 구조의 불법과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이 잘 맞는다면 지속적으로 공동체에 해가 되는 많은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다. 유전자가 단백질을 합성하는 과정에서도 잘못된 단백질을 생산하면 이를 중단하고 되돌리는 과정이 존재한다. 이를 유전자 발현 및 조절 gene expression & regulation 이라 부른다. 유전자의 조절을 regulation 이라 부르는 것과 유사하게 사회 구조의 환경 및 기회 등이 하나의 유전자라고 가정한다면 사회 공동체가 지속적으로 영속하기 위한 규제 regulation 의 기능도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Gene expression and regulations

Edugenetics 교육유전학 

인식이란 개인이 얼마나 많은 것을 접하고 얼마나 느끼고 얼마나 생각하여 어떤 가치관을 가지는지에 큰 관련이 있다. 가치관은 유전자처럼 이미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유전된 inherited 부분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비슷한 환경에서도 다양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나온다는 것을 보아도 가치관이란 단순히 외부로 받은 자극을 수용하는 과정이 아니라 수용이후 반응하고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편견의 명제들은 우리의 사고가 얼마나 생각하기 싫은지를 반증해주고 있다. '엄마없이 자라서 성격이 나뻐', '고아로 자라서 독립적이야' 와 같이 주어진 환경 혹은 상황에 따라서 편견의 결과를 쉽게 내리는 경우가 많다. 편견이 최소한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가설이 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경우 cases 를 경험 혹은 수집해야 하지만 대부분 자신이 가진 한두가지 내용으로 사실이라 믿어버리거나 아니면 자신이 믿고 싶은 방향대로 해석하고 진실이라 믿는다. 그래서 대부분 진실이란 수식어 안에는 증명되지 않거나 증명될 수 없는 인간의 수많은 편견이 고착화되어버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강제 성노예 위안부를 기억하기 위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집단의 논리를 접할 때가 있다. 가장 가까운 예가 일본의 지도자들이 일본 식민지 시절에 대한 해석 특히 최근 '강제 성노예'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입장이다. 일본 국민들 중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강제 성노예 문제에 대해서 일본의 아베 총리와 비슷한 입장을 가진다. 무엇이 이렇게 생각하게 만들었을까? 역사의 사건은 존재하지만 그 사건을 해석하는 그리고 해석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적절하게 감춘다면 역사를 인식하는 방법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철저하게 당시 일본 군의 직접적인 개입이 없었다 혹은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심지어 돈을 벌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위안부에 왔다는 식의 거짓 정보를 제공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현장을 목격하지도 않았던 학생들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교육이란 가르치는 사람이 가르키는 방향을 보게되어 일단 그것을 수용하기 쉽다. 즉, 교육이란 선생님의 권위를 통해서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인식을 주입하기 쉽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은 인간의 인식에 큰 영향을 주는 요소임에 틀림없다. 이런 의미에서 교육이 만드는 인식의 틀과 내용은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눈을 만들어 준다. 경제유전학 econo-genetics 와 대칭적으로 이를 교육유전학 edu-genetics 라 부르려 한다.

대다수 일본 사람이 강제 성노예에 대한 일방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아무리 일본의 교육 과정이 일방적인 인식을 강요하고 있고 교육자도 강요한다고 해도 무엇이 사실인지 알려고 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가르쳐 주지 않은 다양한 내용과 외부의 다양한 지식인들이 전하는 인권의 일반론을 접하게 되는 학생이라면 자신이 배운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이 부분이 가장 어렵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기준은 상당히 어렵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옳은지 아닌지 검증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교육은 배우는 이들이 수용하는 과정이 아니라 질문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 교육이 학생들에게 질문한다 ─ 교육의 역할에 대해서 ] 무엇이 옳다는 것을 전달하는 과정이 아니라 세상에 나아가 쏟아질 문제들을 해결하고 가치판단을 하기 위해서 최소한 자신이 이것만은 간직해야 겠다고 믿는 가치관들의 기본 요소들 fundamentals of  principles 을 얻기 위한 것이다. 수학이나 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 등의 다양한 학문은 시험점수를 잘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필요한 해석의 도구들을 배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환자가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했을 때 기적의 생수가 있다고 팔려는 사람을 보면서 물이 건강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일지 모르지만 치료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거짓이며 경제적 탐욕을 위해서 자신의 양심마저 속이며 환자들의 절박한 상황을 이용한다는 심리학적 분석을 하게 된다면 정말 치료될 수 있는 확률보다 사기꾼일 확률이 엄청나게 높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Glycosylation Process

결국 교육유전학은 세상의 세부적인 문제들을 모두 해결해주고 정답을 주는 과정이 아니라 인간이 접하게 될 수많은 문제들의 본질과 해결방법을 찾아줄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 인간의 생리학에서 면역이 담당하는 기능과 비슷하다. 즉, 외부의 셀수 없는 물질에 대해서 어떻게 방어하고 어떻게 수용할지를 선택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수많은 물질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간직하고 이에 대응하는 1:1의 반응을 하게 된다면 인간 유전자는 지금보다 확실히 큰 규모가 되거나 어쩌면 대응하지 못한 물질은 인간이 적극적으로 피해야 하는 물질들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전자는 유전자의 부분요소들을 적절하게 조합하여 당단백질과 같이 다양한 당류의 조합과 가지치기 glycosylation 를 통해서 면역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게 된다. 이런 대응에는 가급적 다양한 재료가 가지는 다양한 조합을 통해서 더 많은 기능을 수행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교육의 기능과 유사성을 가진다. 이런 이유로 교육은 좀 더 다양한 접근이나 세부적인 문제의 풀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문제도 유연하게 풀거나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물이 사는 세상

첫 부분으로 시작한 이야기들은 공동체의 선을 위해서 살아가야 할 것 같은 사람들이 왜 작은 공동체인 가정부터 경계가 무한에 가까운 공동체까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왜 해가 되지만 스스로 문제가 아니라고 인식하는 개인은 어떻게 생길 수 있을까 그리고 점점 그런 존재들이 증가하는 것만 같은지 궁금했다. 사실 그저 문제이고 그들의 문제의식을 탓하며 공동체에서 철저하게 단절시키면 되지만 근본적인 문제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결될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좀더 문제의 원인을 다른 시선에서 접근해 보고 싶었다. 부도덕한 일들을 하고도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심지어 정당화하려는 시도들은 오랜 시간 인간이 지키려고 했던 윤리 또는 인권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도 역행하는 모습이었다. 초등학교 등하교 길에는 유흥업소들이 가득하고 누구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그런 어른들의 모습을 하나의 문화처럼 수용하기도 한다. 마치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유전적 정보인 것처럼 그런 환경이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연쇄 살인범같은 살인자들이 뉴스에 나올 때 항상 나오는 단어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사이코패스 psychopath 이다. 살인을 하는 그 행동에는 분명 유전적으로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계속해서 묻는다. 그래서 살인자들은 원래 그런 유전적 특징이 있기 때문에 심지어 그런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쉽게 살인할 것이라는 끔찍한 결론을 내린다. 사실이 아니라고 믿지만 사회 대다수 혹은 소수라 할지라도 국가 기관의 지도자들이 진실이라고 믿는다면 전 국민들에게 '살인 유전자' 보유 사실을 검사하고 이를 통해 특별 감시를 할수도 있을지 모른다. 특히 후생유전학 epigenetics 을 알고 있다면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유전자가 원인이 되어 행동의 결과가 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기 더욱 어렵다. 그래서 경제유전학 econogenetics 나 교육유전학 edugenetics 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주어진 환경이나 교육의 조건에 따라서 인식이 결정되거나 행동이 정해진다는 결정론적 허무맹랑함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인간의 인식이 좀 더 합리적으로 공통선을 향한 일반적인 정의가 수립되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교육적으로 어떤 요소들이 필요한지 유전자의 유사성과 비교하면서 생각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Hannibal (TV Shows) as known psychopath

누군가를 판단하는데 있어 항상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원칙중 하나가 '존재와 행동'은 분리해서 생각하자이다. 이미 정해진 존재가 항상 정해진 행동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이유에서 자신의 행동을 정할 수 없는 요소를 통해 전적으로 변명하는 것도 모든 이유가 될 수 없다. 살인자의 이유가 (정말 있다고 해도) 살인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는 모든 이유가 될 수 없다. 비슷한 이유로 자신이 속한 회사의 환경 등과 같은 경제적 환경때문에 자신의 부도덕한 행동들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이 모든 이유가 되어서도 안된다. 회사 상사의 부당한 요구에 수용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경제적 손해를 주면서 회계 부정을 하는 사람의 상황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행동마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홍수에 빠져 있는 많은 현대인들은 이런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한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월급은 적어도 도덕적 경영을 하는 회사가 인기를 얻는 이유인지 모른다.

주입식 교육이란 마치 세상의 모든 물질들을 대응하여 면역 단백질을 만들려고 하는 시도와 비슷하다. 시험에 나오는 모든 문제들을 풀어서 해당 문제가 나오면 어떻게 풀줄은 알지만 그런 수학문제에 필요한 미적분이나 확률이 우리가 앞차와의 안전거리 유지해야 한다거나 광고에 혹하여 손해만 보는 보험에 가입한다거나 주식을 제대로만 하면 돈을 항상 벌 수 있다는 멍청이가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은 모를 것이다.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행동이 내가 속한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그 인과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속한 경제구조 환경의 특징을 알아야 하고 내가 배워왔던 교육의 다양한 요소들을 통해서 이를 해석하는 능력이 필요할 것이다.


특별히 경제유전학과 교육유전학으로 구별해서 생각하고 싶었던 이유는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존재도 경제유전자 econogene 이 바뀌고 교육유전자 edugene 이 지속적으로 접촉될 수 있다면 존재의 행동은 좀더 바람직한 공동선을 추구하고 개인도 만족할 수 있는 방향이 있을 것이란 믿음 때문이다. 풀어 설명하면 경제유전자의 기업 활동이 좀더 투명하고 다양한 참여자들이 의사결정을 하고 자본의 흐름으로 좌우되지 않는 공정성을 강조한 규제들이 확립된다면 우리 몸의 유전자들이 제 기능을 하고 잘못된 기능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조절하는 과정처럼 좀 더 체계적인 경제(환경)시스템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교육유전자는 교육기관의 교육뿐만 아니라 다양한 의견과 이론들이 전달될 수 있는 정보의 접근성 및 여론의 투명성이 보장된다면 공동체 구성원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다양한 교육유전자를 접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반복되는 부도덕한 일들에 대해서 공정하지 못한 처리 과정으로 법 체계가 모든 이에게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스스로 방어를 하기 위해 다양한 경제유전자들을 포기하고 개인대 개인이 투쟁하는 정글의 모습이 되어버릴 것이다. 결국 제대로 이룩된 경제유전자의 요소들은 우리가 불필요한데 쓸 에너지를 아낄 수 있는 효율적인 요소가 될 수 있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데이비드 흄 (1711-1776) David Hume 이 능력에 기초한 사회는 어쩔 수 없이 해체된다는 주장으로 마무리한다.


"이성을 지녔지만 인간의 본성에는 무지한 어떤 존재가 있어서, 가장 공적으로 이로우며 평화와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정의 justice 및 사유재산 property 의 규칙들이 무엇일지 고민한다고 가정해보자. 틀림없이 덕 virtue 이 많은 이들에게 가장 많은 재산을 소유하게 하고, 각자 자신의 성향에 따라 선을 행할 힘을 주려고 할 것이다. (중략) 그러나 인간들이 그런 법을 시행한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이 지닌 본래의 모호함과 각 인간들의 자만 때문에 우수함 merit 이란 지나치게 불확실한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부터 아무런 확고한 행동 규범이 나올 수 없고, 당연히 사회는 즉시 전부 해체될고 말 것이다." 


사회가 만드는 조직적 괴물에 대해서 ─ 경제유전자와 교육유전자

Sunday, July 5, 2015

episode 1.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부부가 있었다. 부부 모두 지역의 교장 선생님을 하셨고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혀 남부럽지 않은 가정이었다. 밖에서는 항상 인자하고 사람들을 위할 줄 아는 남편은 그러나 집안에서는 아내에게 폭력을 가하고 그 폭력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자신의 폭력이 잘못된 것을 알지만 습관이 되고 심지어 남들이 알지 못하게 얼굴과 같이 노출되는 부위는 때리지 않는 모습까지 보였다. 계속되는 폭력에 지친 아내는 늦은 나이였지만 견디지 못하여 이혼을 선택했다. 가정을 지키고 싶었지만 자신의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남편의 가정 폭력을 잘 알고 있던 대학생 딸에게 자신의 결정을 말했다. 그러나 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엄마가 이혼하면 제가 시집을 좋은데 갈 수 없잖아요. 그냥 참아주세요." 


episode 2.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은 중년의 부부가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별 문제없는 가정처럼 보였지만 남편은 결혼 이전부터 만나던 여인을 결혼 이후에도 만나며 아내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아들을 포함한 집안의 모든 일들을 아내에게 맡기고 외도를 계속 이어갔다. 가정 폭력은 없었지만 오히려 가정에 관심을 쓰지 않고 단지 돈 벌어오는데 무슨 문제냐며 오히려 자신의 의무를 다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내는 마음먹고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고 경제적으로 남편으로부터 독립하기로 마음먹었다. 가정 안에서도 무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한 아내는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아들과 둘이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중학생 아들에게 아버지와 이혼했으면 싶다고 말했고 아들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엄마 아빠가 이혼하면 제가 학교에서 왕따당해요. 제가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기 바라시는거예요?" 

개인적으로 최근에 들었던 가장 소름돋는 이야기였다. 이밖에도 믿기 힘든 실화를 들었지만 아주 짧게 요약해서 소개해보았다. 특정인물이 관련되지 않도록 여러가지 이야기의 구조와 등장인물을 각색한 부분도 있었지만 부모의 이혼에 대한 딸과 아들의 태도와 느낌은 가장 비슷하게 표현하도록 노력했다. 정말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선택한 엄마의 선택에 딸과 아들은 '당신의 그 선택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이 망칠 수 있으니 하지 마세요.' 와 다를 것 없는 그 말이 너무도 무섭고 이해하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딸과 아들이 말을 할 때의 목소리... 그리고 그 모습을 상상하면서 떠오른 한 단어는 바로 '괴물'이었다.

물이 사는 세상 

괴물이라고 하면 인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고 때로는 협오스럽고 보자 마자 이질적인 느낌때문에 좋은 느낌을 가지기 힘든 대상 정도로 인식된다. 영화 괴물 (2006) 을 보면 그 흉찍한 모습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공격성 때문에 인간은 무서워하고 괴물이 죽어 사라지기만을 바란다. 영화에 의해 형상화된 것이 아니라도 괴물이라는 단어를 통해 우리는 충분히 나쁜 모습들을 많이 생각해낼 수 있다. 그리고 가까이 하기 힘든 존재이며 사람들은 그 협오와 두려움으로 존재를 제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결국 인간과 괴물은 대결의 구조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왜 죽여야 하는지 모르고 서로에게 공격하게 된다. 물론 많은 경우 괴물은 인간보다 생물학적 우수성을 가지고 있어서 쉽게 죽이지 못하고 반대로 인간은 괴물에 의해 쉽게 죽는다. 모든 경우가 그런 것은 아니다. 때로는 힘없고 나약하지만 단지 겉모습 때문에 인간의 편견에 사로잡혀 인간에게 쫓기며 사는 괴물들도 있다. 나름대로 괴물의 형상이지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진 영화가 슈렉 (Shrek, 2001) 이지만 잘 생각해보면 슈렉도 상당히 인간적 형상이다.


다양한 형태의 괴물이 존재하지만 괴물이라는 대상이 가지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바로 그것은 인간 사회의 다수 social majority 에 의해서 소외당하고 배척당하는 존재이다. 그들은 주류 사회에 소속될 수도 없고 심지어 외롭게 살아가도 인간의 폭력과 공포로 인하여 끊임없이 인간의 공격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괴물은 사회의 산물 product 이다. 영화 괴물은 인간이 버린 유해 물질에 의해서 한강에서 만들어진 존재이다. 그 괴물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사회에 의해 버림받지만 사실 그 사회의 잘못된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어쩌면 괴물을 설명하는 아주 짧고 역설적인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괴물이라 부를까? 

개인적으로 앞서 소개한 예와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단순히 몇명 소수의 이야기라고 놀라고 넘어가기 보다는 내가 듣지 못한 비슷한 이야기들은 얼마나 더 많을까... 그리고 이 사회에서 이런 실화가 얼마나 평범한 것은 아닌지 마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 재판소에서 언급되었던 '악의 평범성 banality of evil' 이 생각난다. 우리가 겉모습만으로 아무렇지 않고 평범할 것이라 생각했던 많은 대상이 어쩌면 악한 본성을 너무도 잘 나타내는 대상일지 모른다는 그 잔잔한 공포가 느껴진다. 지금 내가 사는 사회의 평범한 모습인데 내가 너무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어진다.

가끔 이런 순간 무엇이 문제일까 그리고 그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막막한 순간이 있다. 글로 표현하고 싶은데 더 이상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른 그런 순간이다. 그런 순간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글쓰기 방법이 하나 있다. 현상을 듣고 설명할 수 없지만 생각나는 단어를 찾는 것이다. '괴물' 가장 먼저 생각난 단어였다. 그리고 내가 왜라는 질문은 잠시 보류하고 내가 생각한 그 단어의 어원 word origin 을 찾아보는 것이다. 익숙하게 알고 있는 괴물이란 단어는 무슨 뜻일까? 영어로 괴물은 monster 이다. 라틴어 어원을 보면 monstum , monere 로 각각 뜻은 portent , warn 이란 뜻이다. 즉, portent 는 징후 전조이고 warn 은 경고(하다) 이다. 즉, 괴물 monster 는 단순히 우리가 제거해야 할 대상 혹은 우리가 싫어하는 대상만이 아니라 괴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경고하고 있단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이미 언급한 것과 같이 괴물은 많은 경우 사회의 잘못된 부분이 만든 의도하지 않은 결과물인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괴물 스스로도 원하지 않는 삶이고 그 삶을 위협하는 인간들의 공격에 혹은 스스로 공격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의해서 자신을 만든 그 사회와 대결하며 살아야 한다. 괴물의 어원이 뜻밖에 '경고'란 뜻은 새로운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괴물이란 사회의 잘못된 부분을 경고하고 있고 그 경고는 사회가 그 경고를 방치하면 다음 괴물이 될 수 있는 희생자는 바로 나 혹은 내 주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회가 만든 괴물에 대해서... 

두 에피소드를 생각하면 딸과 아들은 엄마의 인생, 엄마의 행복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예전에 스웨덴에서 만는 가정이 생각났다. 원래는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만나 평범하게 자식들 3명을 낳고 잘 살고 있다가 남편이 갑자기 자신의 성적 정체성 sexual identity 가 이성애가 아니라 동성애임을 알게 되었고 아내와 논의 끝에 아내와 이혼을 하고 남편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자식들은 본인의 결정에 따라 엄마와 같이 살거나 두 아빠와 같이 살게 되었다. 당시 14살이었던 아들은 엄마에게 나머지 큰딸과 큰 아들은 두 아버지와 함께 살다가 대학생이 되면서 독립하며 살게 되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늦게 알게 된 아버지로부터 이야기를 듣는데 개인적으로 심한 혼란감과 많은 궁금증이 들게 되었다. 혼란감이야 익숙하지 않은 동성애에 대한 느낌이었고 심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궁금증은 당시 그런 선택에 대한 자식들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때 같이 있던 큰 아들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아버지도 아버지의 행복을 위해 선택을 해야 하지 않나? 저의 마음에 들지 않는 아버지의 선택이었다고 해도 저의 싫음때문에 포기하지 않기 바랬다. 아버지가 행복하기 바랬다." 

자신의 '더 좋은' 혼인을 위해 어머니가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그 노력을 무시하고 자신의 '더 좋은' 학교 생활을 위해 어머니의 자존감을 가지기 위한 그 많은 노력들을 보지 않았다. 누구의 행복이 더 우선이고 많은 사람들은 자식들을 위해 부모의 한 사람으로서 희생할 수 있지 않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를 위해 희생하는 문제를 떠나 자신의 혼인과 학교를 위해서 어머니의 행복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에 더 가깝다고 본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위해 누군가 목적이 아닌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망치는 것도 불행한데 이 경우들은 자신의 미래를 담보로 타인의 현재를 망치는 것이다. 어머니의 불행을 보면서 그리고 어머니는 그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어렵게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식들은 어머니의 행복한 삶을 위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가 자신이 찾고자 하는 대상을 위한 것이고 심지어 그 대상들은 정말 본인의 행복을 정말 실현해줄 수 있는 대상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이런 자식들 (욕 아님...) 을 괴물이라 부르고 싶어졌다. 어쩌면 그들은 우리 사회의 잘못된 부분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가까운 사람의 불행마저 볼모로 잡으려고 하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 누구의 삶, 행복, 생명마저도 파괴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일화들을 들으면서 느낀 그 소름끼치는 느낌들은 괴물, monster 란 단어가 가지는 라틴어 어원처럼 우리에게 많은 것을 경고하는 것은 아닐까? 그 경고를 경고로 느끼지 않는다면 심지어 그들이 괴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사회의 잘못된 부분은 볼 수 없을 것이다. 때로는 잘못된 것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심각하지 않다거나 어쩔 수 없지 않나... 와 같이 순응하며 살게 된다면 괴물이 될 수 있는 다음 사람은 당신의 자식,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일 수 있다면 그냥 순응하며 살 수 있을까 모르겠다.

쟁만이 강요되는 사회

우리 사회에서 잘못된 것들이 수없이 많겠지만 자신의 욕망,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 타인의 삶은 희생되어도 되고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가지지 못하고 타인의 생명이 사라지는 것도 괜찮다고 고민없이 사는 괴물이 왜 만들어졌는지에 초점을 맞춰 생각하게 된다. 사회의 어떤 잘못된 부분이 이들을 괴물로 만들었는지 말이다.

먼저 딸과 아들이 욕망했던 대상 먼저 생각하게 되었다. 결혼, 학교 ... 그리고 결혼은 '좋은데 시집' 가는 것, '왕따 당하지' 않는 것 둘 모두 조건의 문제였다. 두개의 에피소드 말고도 다른 이야기들 속에서 공통점은 바로 자신이 욕망하는 것은 겉으로는 대상 (결혼, 학교) 인듯 보였지만 사실 조건 (더 좋은, 왕땅 당하지 않는) 이었다. 조건의 속성 property 은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표현은 조건이었지만 항상 사회적으로 더 좋은... 덜 좋은... 때로는 가장 좋은... 과 같은 비교의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가벼운 사실을 너무도 무겁게 받아들인다. 인생의 경로는 대학을 통해서 결정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경쟁의 구조 속에서 대학이라는 대상과 '더 좋은'이라는 조건을 통해서 끊임없이 욕망하게 한다. 그 욕망 이외에는 중요하지 않다. 교육은 단순히 '더 좋은' 조건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한 기능만 할 뿐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이로움을 주는 사회 구성원을 만드는데 별 관심이 없다. 경쟁만이 강요될 뿐이다. 더 좋은 경로를 모두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 사람이 이 사회에 이로움을 줄지 온갖 해악과 더러움을 줄 수 있는지는 모른다. 왜  그토록 수많은 돈과 자원을 쏟아가며 괴물을 만들어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이려는 것인가. 이계삼 선생님의 [ 공부는 힘이 세다 ] 를 꼭 읽기를 권한다.

"공부를 잘하면 한수원 직원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자기보다 공부 못했던 하청 직원들에게 피폭 노동을 맡길 수 있다. ‘컨트롤 C에서 컨트롤 V’로 끝나는 보고서에 밀양 주민들의 생존권을 빼앗을 법적 권능을 부여해 주는 것도 바로 서울대와 미국 박사의 스펙이 엮어낸 전문가의 자격이다.

나는 지금껏 돈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실감을 갖고 살았다. 그러나 돈이 인간의 영혼을 주장하지는 못하리라는 믿음 또한 갖고 있었다. 나는 학교를 그만둔 지난 2년 사이 공부가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는 실감을 얻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공부가 인간의 영혼마저 주장하고 있다는 믿음을 얻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돈보다 공부가 더 힘이 세다.

국립묘지에 조성된 '정의의 상' 공부를 잘하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국민들을 속이고 억압했다. 그때 가장 분개하고 거리에 나온 많은 사람들 중 많은 수는 학생이였다. 지금의 경쟁 사회 속에서 가능할까 의문하게 된다. 

경쟁을 통해 잘 선발된 인재들이 우리 사회를 이롭게 하고 발전시키고 더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란 생각은 거의 반대이다. 경쟁 구조 속에서 누군가를 이겨야 하는데 타인에 대한 배려를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반대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공정한 과정보다 유리한 조건만 생각하고 같이 걸어가는 동료보다는 짓밟고 올라갈 수 있는 경쟁자만 생각한다.

과관계의 희생자 casualty of causality 

어머니의 희생을 강요하는  딸과 아들을 보면서 얼마나 교육이 중요한지 느끼게 되는 부분이 바로 인과관계에 대한 멍청함이다. 흔히 인간은 지금의 결과를 놓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분석하는 것은 잘한다. 그러나 지금의 원인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런데 쉽게 확신한다.

어머니가 이혼하면 딸은 더 좋은 결혼을 하지 못할것이라 믿고 있고 아들은 학교 생활에서 왕따 당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와 비슷한 믿음으로 많은 사람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면 서울대를 갈 것이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인성을 가질 것이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직장)을 가지고 자신이 바라는 삶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욕망의 사슬에는 건강으로 모든 것을 잃거나 한순간에 사고로 세상을 떠날 수 있는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과정의 목표들 중에는 왜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내용은 없고 '더 좋은' 조건을 위한 내용들만 존재한다.


특정 학원을 다녀야 시험 성적이 오른다 와 같은 이야기들은 인과관계를 너무도 쉽게 보기 때문일까? 인과관계가 명확하여 특정 대학을 가기 위한 조건들이 존재한다면 그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켜야만 할 것이다. 문제는 인과관계가 있다고 믿는 것도 있을 수 있지만 더 큰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의 공포와 미래의 결과가 원하는 결과가 성취되지 않을 때 과거의 그것때문에... 라는 결과론적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높다. .. 하지 않으면 .. 를 얻을 수 없다 와 같은 인과관계에 희생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인과관계를 단순화하여 바라보는 것은 앞으로의 일들을 예상하고 대비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다양성의 수용'이란 측면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특정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들이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단 하나의 원인때문에 결과가 이루어지는 것도 거의 찾기 힘들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특히 특정 결과는 특정 원인때문이야 라는 인과관계의 희생자들은 공통적으로 세상에 작용하는 다양한 원인들에 대한 수용을 하지 못한다. 어떤 학생이 중간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는데 좋은 성적을 받은 원인에는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했던 말을 기억해서 그럴 수 있고 휴식시간동안 우연히 보았던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알았던 사실이 시험에 나올수도 있고 다행히 자신이 공부한 내용에서 많이 나왔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런데 우연히 그 시기에 다녔던 학원이 있었다고 학원이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얼마나 어리석인 일인가. 하나의 결과가 만들어지는 것은 수많은 원인때문이고 원인의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목표하는 일들은 결코 우리고 원하는대로 정확하게 이루어질 수도 없고 때로는 부족하여 만족스럽지 못하게 때로는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으로 기대 이상으로 만족할 수 있게 된다.

인과관계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인간 사회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에게 가진 편견을 인정하고 자신이 가진 지식의 범위가 한계를 가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리에게 확신을 주는 것은 확실한 인식이 아니라 관습이나 선례인 것 같다. 그러나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운 진리는 여러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한 사람에 의해 발견되는 법이다. 이것은 여러 사람의 동의가 진리의 타당성을 확보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 데카르트, 방법서설

변 사람이 괴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어느 세상이나 괴물은 존재할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가 더욱 더 잘못되어 간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최근에 일어난 일이라고 보지 않는다. 많은 고위 정치인을 비롯한 사회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의 인권과 생명을 무시하는 예들만 보아도 우리 사회의 도덕적 윤리적 기준을 떠나서 얼마나 거대한 괴물이 되었는지 공감할 수 있다.

원자력 발전소 주변의 많은 주민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갑상선암 환자들이 있는데 전문가들은 원자력 발전소는 안전하고 직접적 원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인과관계의 전형적인 희생자들이다.  자신이 가진 전문적인 지식을 떠나서 다른 지역과 차별이 되는 주요 원인인 원자력 발전소를 정치적으로 제외하기 위해서 자신의 지식을 이용하는 것은 결국 지역 주민들의 아픔과 고통을 먹는 괴물이나 다름없다.

어떤 사람은 세상은 원래 그런거고 그런 괴물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은데 뭐가 문제냐고 말한다. 그럴때 대답하기 위해 만든 좀비이론 zombie theory 이 있다. 영화에서 좀비는 일정 수준이 넘어서면 그 감염 증가 속도는 조절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의 선한 의지를 믿는 착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은 선한 의지를 믿는 일부 사람이 아니라 대중의 모습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좀비가 되어서 세상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인간의 본성이 거의 사라진 상태의 존재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데 이들을 피해 다니는 일부 착한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사회가 제대로 된 모습이라 말할 수 없다. 괴물이라는 어원이 알려주듯 이상한 조짐이 보이는 좀비가 조금 보였을 때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경고로 받아들이고 이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좀비가 세상의 대다수가 되는 이유는 착한 사람들의 숫자가 적기 때문이 아니라 문제가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인 다수의 무관심이라는 점이다.


여기 앞선 이야기들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episode 1. 남편은 아내를 두고 다른 여인과 살림을 차리고 살았다. 전문직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아내와 아들의 생활비를 벌고 다른 여인과 사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남편은 아내를 인격적으로 무시하며 살았다. 여인은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지만 남편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들 키우는데 식모랑 운전기사는 필요하잖아. 근데 이혼하면 더 돈들잖아 그냥 지금이 더 싸게 들어... 어느날 아내를 무시하며 식모 취급을 하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빠 집에서 나가세요. 더 많이 배운 아빠에게서는 더이상 배울 것도 존경할 것도 없지만 덜 배운 엄마에게서는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도 아끼는 방법도 계속 배울 수 있으니깐요." 

episode 2. 남편은 해외 지사로 발령받아 떠나야 했고 아내는 직장 생활 때문에 딸 둘을 데리고 살았다. 남편은 해외에서 다른 여인을 만났고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도 계속해서 만났다. 남편은 자신이 바람피는 이유는 당신이 나에게 성적 만족을 충족시켜줄 수 없기 때문에 여인과 헤어질 수 없다고 말했다. 심지어 예수를 믿는 아내가 용서하고 남편을 이해해야 한다 말한다. 오랜 결정 끝에 이혼을 결정하고 큰딸에게 말했다. 이혼을 거부하는 남편에게 큰 딸이 말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용서하는 것과 이혼하는 것은 다른 문제예요 끊임없이 어머니가 아버지를 용서해도 끊임없이 아버지는 잘못을 저지르고 아버지가 어머니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요" 

물이라는 경고에 대해서... 

원래부터 괴물이었던 존재가 무엇이 있을까? 괴물은 우리에게 사회의 잘못된 문제가 사회 구성원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스스로 괴물이 되어 알려주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내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괴물이 될 수 있을까 계산하고 싶어졌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는 얼마나 많은 괴물들이 존재하고 있을까 혹시 나 스스로도 괴물이 아닐까 걱정하게 된다. 두개의 이야기를 더 소개했다. 그러나 글의 처음에 소개된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아들과 딸이 있다. 이 둘도 부모의 이혼때문에 겪을 수 있는 어려움 등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이 이 불행을 만들고 있는지 그리고 그 불행에서 벗어나고 싶은 어머니의 모습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라 본다.

'더 좋은' 이라는 조건의 욕망은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만든다. 더 좋은 인간이 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더 좋은 조건을 이루기 위해서 덜 좋은 인간이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많이 배운 공부를 자신의 합리화를 위해 사용한다. 인간은 왜 사회를 만들었을까 생각할 때가 많다. 같이 모여 불편하기도 많고 짜증나고 수많은 스트레스를 만드는 이 사회는 왜 만들었까? 그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다운...' 이란 단어에서 느껴지는 희망을 전하고 싶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가치를 생각하다 ─ 클라우드 서비스 ] 에서 가치에 대한 정의 definition 를 설명했다.

"가치"란 능력을 가진 사람이 가지는 연민을 통해 구현되는 이로움이라 정의하고 싶다.

이렇게 정의를 한 이유는 어떤 일을 맡아 해야할때 선택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는 기준으로 만들고 이에 부합되는지 아닌지를 생각하고 싶었다. 우선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그 일을 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로움을 얻을 수 있으며 그 동기가 개인적 욕심이나 명예가 아닌 사람들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기를 바라는 연민에 기반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부도 연구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어떤 연구를 하는데 어떤 사람들이 이로움을 얻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이렇게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경쟁사회에서는 오직 나뿐이다. 타인은 어떻게 이길 것인지만 생각하는 대상이 되어버리고 같이 협업한다는 것도 결국 내가 잘되기 위해서 잠시 같이 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자신을 제외한 사회 구성원은 그저 배경일 뿐이다. 이런데 어떻게 타인을 위한 이로움을 생각할 수 있을까 싶다. 어떤 연구소에서는 많은 특허를 만들어 돈을 많이 벌어... 와 같이 욕망이 이끄는 전차처럼 운영하는 곳도 있다. 많은 이들을 위해 자신의 발명을 특허로 가지고 있지 않고 나누었던 루돌프 디젤 (Rudolf Diesel; 디젤 기관) 와 조너스 에드워드 소크(Jonas Edward Salk; 소아마비 백신) 들은 자신의 재능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릴 수 있던 환경, 사회의 덕이라 믿고 이로움을 혼자 소유하지 않고 다시 사회 구성원에게 돌려준 것이다. 조너스 소크는 '이 백신의 특허권자는 누구죠?' 라는 질문에 '사람들이죠. 특허라고 할 것이 있나요? 태양에도 특허를 낼 것인가요?' 라고 대답했다.


자기 자식들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기에... 얼마나 많은 문제를 풀 수 있냐고 물어보는 대신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사랑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생각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도와줬는지 물어볼 수 없는 것일까? 행복에 대해서 말하고 길가의 들꽃을 보며 아름다움에 대해서 물어보면 안되나 싶다. 무엇을 잘하는지 물어보고 그 무엇이 좋은 대학가는데 얼마나 필요한지가 아니라 그 재능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지 다양한 모습을 소개시켜줄 수 있는 부모가 될 수 있다면 아이들은 분명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던 숨겨진 괴물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공통적으로 설정된 남편들이다. 이야기의 편의상 남편으로 일관되었지만 부모이지만 자신의 욕심때문에 자신의 가정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만약 그들이 사랑이 가득한 아버지였다면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위해서 누군가의 불행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들도 사회가 만들어낸 어쩌면 역사가 생각보다 깊은 경쟁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과관계의 커다란 희생자 즉, 괴물일 것이다. 그러나 소개된 네개의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후반부의 이야기들은 어머니의 아픔을 느끼고 그 아픔을 통해서 연민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기 위해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지 많은 고민을 했던 이들이다.

물이 치유받는 사회를 꿈꾸다... 

우연히 교육열이 높은 강남 지역을 지나다가 작은 캐리어를 끌고 가는 아이들을 보았다. 난 여행가는구나 싶어 보기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사실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에 배워야 하는 교재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책가방도 부족해서 캐리어에 넣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무심하게 넘어가면 상관없는 이들의 삶이지만 알 수 없는 씁쓸함이 느껴졌다.

SBS스페셜, 부모님. 당신의 선택에 따라 아이들이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중 한장면

무엇이 문제이다 속단하지도 못하고 너무 많은 문제들이 얽혀 있기 때문에 가볍게 해답을 제시하지도 못한다. 교육의 문제일까 싶어 교육의 원래 목적으로 돌아면 되지 않을까 싶어 화이트헤드 (Alfred North Whitehead) 에서 제시한 교육의 목적에 맞춰 교육을 설계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갑자기 든 생각이 어쩌면 지금의 사회는 인간다움을 배우지 않는 것은 아닐까 싶다. 단지 사랑하는 마음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미워하는 마음, 슬퍼하는 마음 ... 인간이라면 가질 수 있는 그 다양한 마음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박탈당하고 배워야 하는 것, 공부해야 하는 것... 해야 하는 것들을 하기에도 바쁘기 때문에 인간다운 감정을 제대로 느끼고 고민하고 그 고민을 통해서 무엇이 '더 좋은' 나를 만들 수 있는지 고민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학교에서 1등을 하기 위해서 반 학우의 노트를 훔치기도 하고 그렇게 훔쳤을 때 학우가 느끼는 감정을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이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결국 괴물은 타인의 감정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제대로 경험해볼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 무감각의 존재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연민의 가치에 대해서... ] 연민이 사라진 세상을 생각해본다.

젓먹이 아이가 배고파서 울어도 엄마는 먹이고 싶을 때 젓을 물릴 것이고,
누군가 쓰려저 죽어가도 내가 바쁘다면 신경쓰지 않고 갈 길을 갈 것이고,
지구 반대편 아이들이 기아로 힘들어 해도 더 맛있는 맛집을 찾을 것이고,
누군가 놀림과 오해를 받아 눈물을 흘려도 내 외모에 더 신경 쓰일 것이다. 

괴물에게는 엄마의 슬픔도 느껴지지 않는다. 괴물에게는 자식들이 느낄 슬픔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나온 좀비와 무엇이 다를까? 영화에서는 좀비는 좀처럼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지 않고 몇 편에서 그런 시도를 했지만 많이 성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 우리 사회에 있는 괴물들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야 스스로에게 좀 더 위안이 된다...) 자신에 감정에 솔찍하고 타인의 감정을 수용하고 때로는 연민을 통해 내가 그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사명감도 가지고 오랜동안 그렇게 감정을 느끼는 연습을 한다면 괴물은 언젠가 타인의 아픔과 슬픔에 같이 울어줄 수 있는 인간이 되어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사람에게 상처가 있는 이유는 그 상처를 통해 타인의 약점을 알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상처의 아픔과 슬픔을 보고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고민하라는 의미일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의 상처는 차라리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지 모른다.

괴물을 만드는 사회 ─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서

Saturday, July 4, 2015

니스트 러더퍼드 (Ernest Rutherford; 1871~1937) 는 일반인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인물이지만 과학사에서 그의 업적은 절대 없어서는 안될 과학의 전환점 같은 혁명을 만든 인물이라 평가받고 있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은 고전 물리학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했다고 이야기하지만, 러더퍼드는 실험 물리학에서 새로운 과학을 만든 인물이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모든 물리학, 화학, 생물학 뿐만 아니라 모든 공학은 느린 속도로 발전했을 것이고 무엇보다 그는 우리가 물질을 바라보는 새로운 철학적 근거를 제시해줬다.

The Lord Rutherford of Nelson, 뉴질랜드 화폐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실험은 다음과 같다. 당시 물리학의 유행처럼 방사능은 아주 중요한 발견이자 실험 도구이자 대상이었다. 방사능 물질 중 라돈과 같은 천연 방사능 물질이 가지는 능력은 대단했다. 특히 투과력은 주목할 만했다. 이런 방사능 물질을 두고 금 gold 박편을 두면 그 박편을 투과하여 반대편에 방사능 물질이 도달하는 것을 발견했다. 즉, 물리학자, 화학자들은 어떻게 금속 성분의 물질을 통과할 수 있는가에 주목하고 있을 때 러더퍼드는 제자였던 가이거 (Hans Geiger) 와 마스덴 (Ernest Marsden) 에게 통과하는 반대편이 아니라 방사선이 조사되는 incidence 방향에도 방사능을 검출되는지 확인해보라고 얘기했다. 제자들은 무척 당황해 했었다. 그런데 러더퍼드의 예상처럼 방사선 (알파 입자 헬륨 원자핵) 이 튕겨져 나오는 것을 확인했던 것이다. 이 실험으로 러더퍼드는 물질의 기본 구조가 원자핵과 그 주변을 전자가 돌고 있고 거의 텅텅 빈 원자 모형을 제시했다. 튕겨져 나오는 비율을 통해서 그 크기도 제시했는데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비율이었다. 예를 들어 인간의 몸을 빈공간을 다 제거하게 되어 원자핵만의 부피로 모아본다면 인간의 몸은 소금 결정 하나 정도로 압축될 수 있을 크기였다. 그런데 인간은 왜 줄어들지 않고 이렇게 붕괴하지 않고 유지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이후 수많은 질문들을 만들어 냈고 그 엉뚱해 보이는 질문의 시작은 결국 현대 물리학의 비약적인 발달을 가져오게 되었다.


연구를 하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다. 특별히 공부라는 표현을 떠나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사유의 과정은 질문이다. 왜? 라는 질문을 통해서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찾아가고 아직 사고되지 않은 영역까지, 검증되지 않은 영역까지 확장하려는 그 질문의 반복이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질문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두가지의 모습을 가질 수 있다. 크게 비판적 질문 subjective query 사유적 질문 objective query 이다. 비판적 질문은 이미 결론을 내고 있는데 자신의 이론을 검증하고 싶어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과 의견을 달리 하는 의견의 결함을 제시하고 싶은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사유적 질문은 그와 다르게 순수한 궁금증, 호기심의 발생이 그 원동력이 된다. 결론을 내리지 않고 사유의 흐름에 오류나 방해가 있지 않는지 검증하면서 찾아가는 과정에 필요한 질문들이다.

그래서 비판적 질문을 많아지면 많아질 수록 자신이 관심가진 영역에 대한 회의와 의심이 감소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정도 자신만의 논리로 체계화가 이루어지면 자만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해 더 이상 할 것이 없다는 결론을 만들어 버린다. 그렇게 비판적 질문은 가치있을지 모르는 영역도 가치없게 만들어 버릴 위험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사유적 질문은 하면 할수록 자신이 관심가진 영역에 대한 의문과 신비를 경험하게 된다. 질문하지 않았을 때 알지 못했던 것을 질문을 통해 알게 되는 순간 자신의 모든 사유의 폐기도 고려해야 할만큼 생각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킬 수 있고 전혀 가치없어 보이는 부분이 새로운 가치로 다가오게 되고 자신의 시야는 점점 넓혀 진다.
비판적 질문은 실용적 성격으로 변화되기 쉽다. 현실적 가치를 세속적 기존에 맞춰 살펴보고 자신의 이론과 생각조차도 끼워 맞출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정치적 판단에 전문가의 판단이 필요한 경우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판단이 마치 진리인 듯 말하게 만든다. 반대로 사유적 질문은 궁극적 성격으로 변화되기 쉽다. 아무리 현실적 이득이 자신에게 올 수 있다 해도 객관적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모호한 부분에 대해서는 모른다 말할 수 있지만 아닌 사실에 대해서는 맞다고 말하지 않게 된다. 

간에게 지혜란 한없이 의심하는 경계적 precautional 대상으로 세상이 나에게 주는 실용적 가치 기준에 맞춰 내 안의 합리적 질문조차 거세해버리고 합리적이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을 통해서 내 사유의 의심이 맹신의 늪으로 가지 않는지 항상 주의하기 위한 과정이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알프레드 화이트헤드는 지혜란 지식을 제대로 저장하고 사용하기 위한 합리적 도구라고 불렀다.


익숙한 것조차도 질문하고 그 질문에 끊임없이 대답하려고 하는 과정을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세상이 만든 기준과 가치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의 부속품이 될 수 밖에 없다. 왜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질문이 만드는 신비를 경험한다면 질문은 인류 발전에 가장 필요한 과정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질문을 두려워 하지 말아라

Tuesday, June 30, 2015

간의 삶에서 다툼 quarrel, argument, fight 이 없이 살 수 없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모두 다 다르기 때문에 아주 중립적인 대상에 대해서도 서로의 시선이 다르고 생각하는 방법이 다르고 표현하는 방식조차 다르게 된다. 어떤 하나라도 같을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 비슷한 영역이 존재하면 그래도 마음이 맞는다 생각이 비슷하다 말하게 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사람 사이의 다툼은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면 오히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다툼이 어쩔 수 없다면 그 다툼을 어떻게 해결하는지도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묘안의 해결책이 존재한다면 인간 사회는 갈등이 없을 것이다. 그 수많은 갈등 해결은 결국 누구와 누구의 다툼인가 어떤 상황이 존재하는가와 같은 외부적인 요소 뿐만 아니라 다툼의 당사자들이 가지고 있는 입장, 성격 등 내부적인 요소에 따라서 복잡한 결과를 만들어 낼수 밖에 없다. 모든 다툼의 과정을 일반화시킬 수 없지만 개인적인 경험에서 느껴지는 몇가지를 통해 그 과정을 생각해 보고 싶다.

툼의 시작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라고 알고 있지만 대부분의 다툼은 다름은 곧 틀림이라는 순간적인 충동(?)에서 시작한다. 상대방의 사소한 생각, 말 그리고 행동 중 자신의 시선에서 알수는 없지만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상대방이 아무 생각없이 말을 했지만 '자신을 무시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변기 뚜껑을 내려놓지 않은 남편의 행동이 기분 나빠서 아내는 곧 신경질 낸다. 물론 상대방이 잘못을 하는 부분도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 다툼의 시작은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 상대방의 어떤 부분이 내 감정을 건드렸기 때문에 시작한다. 냉정하게 따지면 대부분의 다툼은 냉정하지 못한 감정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그 이후 감정의 발전 단계는 조금 이상하게 연결된다. 감정적으로 시작되었지만 상대방의 생각과 말과 행동 중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변기 뚜껑을 내리라고 말했잖아' 와 같이 약속혹은 서로간의 합의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며 계약의 위반을 통해 잘못을 설명하거나 하루종일 게임을 하는 맘에 안드는 자식을 보면서 '학생이 공부를 해야지 게임만 하면 어떻게 해!' 와 같이 신분이나 위치에서의 당위적으로 해야할 본분을 행하지 못함을 말하기도 한다. 그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아무리 시작이 감정적이라고 해도 그 이후 진행은 대부분 도덕적 당위, 윤리적 책임을 포함하여 불성실, 불이행 등과 같이 상대방의 잘못을 찾아내는 상당히 논리적인 과정을 거치게 된다.

구의 탓이어야 하는가

이제 다툼이라는 사소한 표현을 떠나 조금 더 큰 범위의 '갈등'이라는 말로 대신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대부분 다툼도 갈등의 한 부분이고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은 근본적으로 인간 관계에서의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다가 다툼과 같은 아주 사소한 계기로 불이 붙기 때문이다. 넓은 범위에서 결국 인간의 사화 활동은 갈등을 어떻게 관리하고 처리하는가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갈등의 진행과정에서 재미있는 현상이 있다. 결국 갈등이 있다는 것은 같은 대상에 대해서 바라보는 시선도 다르고 그 다른 시선때문에 지금 다툼이 있는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변기 뚜껑을 내려놓지 않는 남편은 부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항상 잘못된 습관과 자신 (부인)을 배려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남편의 입장에서는 어쩌다 실수한 부분을 너그럽지 못하게 받아주지 않고 따지는 것이고 때로는 남편의 권위를 무시한다는 생각까지도 해서 더 갈등은 깊어질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있다. 바로 상대방을 생각하며 그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과정이다. 즉, 이미 갈등의 시작에서 누구 하나가 자신의 잘못을 쉽게 인정하게 된다면 그 갈등은 깊어지기 어렵다. 결국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은 양쪽 모두 자신의 탓이라기 보다는 상대방의 탓이 더 크다는 생각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제의 원인을 찾는 전문가들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은 문제의 원인은 상대방에 있다는 조건에서 시작한다. 가끔은 갈등 자체를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자책하거나 혹은 상대방의 비난을 그대로 표면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갈등은 단지 물리적으로 다툼이 존재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쌓여 항상 갈등이 터질 수 있는 화약고 같은 상태도 포함되어야 하고 사실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결론적으로 갈등이란 문제의 원인을 상대방에게서 찾으려는 힘든 과정이다.


갈등의 순간 사람들은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지 상대방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서로 다투는 과정은 사실 많은 사람들은 피하고 싶은 과정일지 모르지만 사람을 더욱 더 알아가는 과정에서는 어쩌면 더 필요한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크게 두가지 유형의 사람들의 태도를 생각해본다.

1.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은 상대방에 있고 상대방의 인격, 성격 등 근본적인 잘못으로 인해 이 모든 문제가 발생했다고 생각하는 태도

2. 상황 situation 과 상태 condition 를 파악하려 노력하고 실수 mistake 와 오해 misconception 을 구별하고 원인을 찾으려는 태도

격적인 상처를 주다...

첫번째의 태도는 생각보다 많이 경험하게 된다. 아주 단적인 예로 '너는 이기적인 인간이야', '왜 이렇게 사람이 조급해', '너는 이게 문제야 항상 조심성이 없어' ... 와 같이 상대방은 어떠하다 와 같이 상대방의 근본적인 성격, 인격 등을 단정적으로 표현하는 태도이다. 일상의 갈등에서 잘 들어보면 이렇게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려고 하는 상대방의 태도를 들을 수도 있다. 이런 근본적인 판단을 내려버리면 문제의 원인은 아주 깔끔하게 상대방의 문제이다. '너는 이기적인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은 생각하지 않고 변기의 뚜껑을 내려놓지 않고 나온다' 라고 결론을 내려버리기 때문에 자신은 이 갈등에서의 피해자일뿐 문제의 원인은 상대방에 있다고 정리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상대방의 근본적 성격, 인격적 내용을 건드리는 것은 아주 효과적이다. 상대방을 아주 나쁜 사람을 만들어 버리면 문제의 원인 뿐만 아니라 다툼의 승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듣는 입장이라면 얼마나 기분이 나쁜가. 감정이 얼마나 상하는지 상상하면 아무리 가까웠던 사이라도 이런 말에 대해서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경우 한사람 이상의 이런 태도는 갈등을 완전히 다른 형태로 전환시켜버린다. 첫번째는 최초 갈등이 무엇에서 시작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처음의 변기 뚜껑은 아내의 경우 '이기적인 남편을 합리화하기 좋은 도구'가 되고 남편은 그런 사소한 변기때문에 자신이 이기적 인간이 되었다는 억울함과 분노의 아이콘이 되어버린다. 결국 갈등은 변기에서 인격의 문제로 승화(?)되게 된다. 즉,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남편은 성격을 싹 뜯어 고치고 남편 안에 존재하는 모든 이기적 요소를 버리기 위해 수많은 고행과 번뇌를 감수해야만 할 것 같은 소위 인격 개조 프로젝트로 발전하게 된다. 반면 남편은 자신이 이기적이 않다는 것을 해명하기 수많은 예를 들며 아니라고... 말하면서 더욱 더 알수 없는 스스로의 찌질함에 빠져들게 되어버린다. 인간적인 상처를 받은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상대방을 단적으로 성격이나 인격을 단정지어 말하는 태도이다. 아무리 상대방을 잘 안다고 해도 상대방은 무엇이다, 어떻다 말하는 것은 참 거짓을 떠나 한 사람이란 우주 cosmos 를 무시하는 것이다. 한사람의 역사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에 현재의 한 사람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고통과 아픔, 기쁨과 희열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복잡하게 만들어진 한 서사시같은 존재이다. 그건 금수저를 물고 나와 화려한 삶만을 살았던 사람이나 부모없이 어렵게 자라고 힘든 여정을 거친 사람이나 상관없다. 그 복잡한 우주를 지구의 시궁창만 보고는 '우주는 시궁창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의 진실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소위 함부로 말한다는 것 중 사람의 성격이나 인격을 함부로 규정하는 것은 갈등을 심화시키고 심지어 자신의 잘못도 존재하는 갈등의 문제에서 상대방의 근본적인 문제로 인해서 발생했다고 믿고 갈등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미는 무책임한 행동도 정당화시킨다.

개인적으로 이런 태도는 '인격적인 상처' 를 만든다고 표현하고 싶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한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어한다. 최소한 개인적으로 인간은 그런 존재일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인격적인 상처는 자신을 한순간에 규정해버리고 자신이 지향하고 싶은 모습이 아닌 지양하고 싶은 모습으로 공격받는다. 이타적이고 남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던 사람이 '이기적인 인간이다' 라는 말을 들으면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지만 아주 강한 정신력을 가져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라면 그런 인격적인 상처에 쉽게 빗장을 내려 공격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런 인격적인 상처를 주는 사람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그런 말들은 힘들고 아프게 다가오기 쉽다.

등 해결의 전문가가 되고 싶다...

첫번째와 다른 두번째의 경우를 생각해 본다. 인격적인 상처를 쉽게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인간은 정적인 존재가 아니다. 동적이고 하루에도 나쁜 생각과 좋은 생각이 혼돈을 이루며 사는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은 실수를 한다. 그런데 그런 실수의 원인이 원래부터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너의 그 삐뚫어진 인격때문이야 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자존감은 얼마나 흔들리겠는가. 결국 자신만 바라봐도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다양한 모습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상대방을 평가하고 바라볼 때는 아주 단순화시킨 명제로 단정해버린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 요소와 이타적 요소 때로는 그 어느 것도 작동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무조건 저사람은 '이기적 인간'이라 바라보는 순간 갈등의 해결은 '저 이기적 인간이 바뀌지 않는다면 해결책은 없어...'가 된다.

본 인물은 글의 내용과 관계없습니다. 그냥 고민하는 모습이 맘에 들어서...

개인적으로 만난 분 중 누군가의 실수에 대해서 가장 지혜로운 모습을 보여준 분이 계신다. 이분의 대화에서 갈등 해결의 지혜로운 대처를 생각해 본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태 situation 과 상황 condition 에 따라서 자신이 선택하는 말과 행동이 정해진다. 따라서 같은 행동이라고 해도 상태와 상황에 따라서 그 원인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사람의 말과 행동은 자신이 받아들이는 감정의 해석 analysis based on acceptant's emotions 이 아닌 상황과 상태를 통한 분석 analysis based on situation & condition 을 통해 먼저 이해하려고 하고 상대방 / 본인의 실수 mistake 가 무엇이고 오해 misconception 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수는 인정하고 오해는 풀면 된다."

정확히 전달받은 내용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핵심 내용만 파악해서 전달해본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실수도 하고 실수하지 않았다 해도 상대방의 오해때문에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는데 감정에 맞지 않는 부분때문에 갈등은 시작되고 심화되기 시작한다. 이때 맘에 들지 않는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을 자신의 감정으로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지 말고 상대방이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는 상태와 상황을 먼저 생각해 본다. 물론 이는 자신의 감정을 잠시 보류하고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할 수 있는가 돌아보아야 한다. 많은 경우 갈등은 비교적 가까운 관계에서 시작한다. 친밀한 관계도 포함되지만 직장과 같은 사회적 관계를 포함하여 정서적 거리 sentimental distance 만큼 업무적 거리 operational distance 도 포함한다. 결국 이런 갈등을 한번 잘못 판단하여 '인격적인 상처'를 바탕으로 상대방을 한번 판단하면 갈등은 점점 감정적 문제로 발전하게 된다. [ 미움이란 안경과 사랑이란 안경 ] 이런 경우 상대방은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사우론에 버금가는 절대악에 가까운 존재가 된다.

인간은 항상 옳을 수 없다. 이는 실수하고 잘못된 말과 행동 그리고 나아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사람을 판단하는데도 항상 옳을 수 없다. 오히려 많은 편견과 자신만의 좁은 경험과 식견으로 다양한 삶을 살고 있는 타인의 상태 situation 을 판단하지 못한다. 그리고 확실하지 않은 정보들에 의해 타인의 상황 condition 도 알 수 없게 된다. 결국 문제 해결의 시작은 '인간의 불완전성 faultiness of human' 를 인정하고 섣부른 감정적 판단에 한숨 쉬어갈 수 있는 지혜를 통해 시작한다.

실 세상에서의 상처들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알고 싶은 연구 주제 중 하나가 가족 구성원 들 사이에서의 언어 표현의 유사성 similarity of linguistic expression 이다. 단순히 자주 사용하는 어휘나 어투의 문제가 아니라 앞서 소개한 '인격적인 상처'를 줄 수 있는 단정적인 표현의 사용이 얼마나 자주 사용되는지 알고 싶다. 자식의 실수 혹은 잘못에 대해서 부모는 훈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무엇인가 조언을 하는 순간 부모의 말을 잘 들어보면 상당히 인격적인 상처가 많이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식당에서 아이가 어떤 실수를 하면 '너는 맨날 이래!' 혹은 '어디서 못된 짓'만' 배워서' 과 같은 표현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아이들은 자신에게 부모가 말하는 표현을 배우는 것도 있지만 부모들이 아이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언급할 때 더 많이 배우는 것도 인식해야 한다. 아이를 태우고 운전하면서 자신 앞에 끼어든 차량을 향해 욕을 하거나 전혀 모르는 상대에 대해서 표현하는 것도 아이들은 좋은 교본이 되기도 한다.


가장 쉽게 살펴볼 수 있는 예는 연인 관계일 것이다. 사소한 계기로 다툼이 일어나고 나면 감정적으로 나쁜 상태에서 상대방에 대한 쉬운 판단을 한다. '너는 너무 이기적이야' 라고 말하면 이기적이란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자신이 이기적이지 않은 근거를 들기 위해 그렇지 않았던 사건들을 열거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란 했던 이기적이란 말에 그렇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다. 이런 모습도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누군가 '너는 바보야' 라고 놀리는 말에 쉽게 상처받고 '나 아니야!'라고 소리지르는 모습이나 별반 다를 것은 없다. 문제는 가까운 사이일 수록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서로의 아픈 부분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약점인지 잘 알기 때문에 상대방이 쉽게 반응하는 부분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아버지의 가정 폭력 속에서 자란 남자 친구가 다툼에 여자 친구를 밀치게 되었을 때 여자 친구가 말한다.

"너는 아버지 닮아 왜 이리 폭력적이야"

이 말 속에는 서로가 가깝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개인적 트라우마 뿐만 아니라 너는 폭력적이다 라는 단적인 상대방에 대한 인격적인 상처를 포함하고 있다. 과거의 아픔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를 서로 이야기하고 공개하는 이유는 자신이 가진 상처를 이해해달라고 했지만 오히려 그 상처를 다시 찌르고 만다.

처를 만드는 다양한 무기들... 

"너는 무엇(나쁜 내용)하다" 와 같은 형식도 있지만 사실 좀 더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는 유형은 다음과 같은 형태이다.

"너는 맨날 그렇게 밖에 못해!" , "넌 너만 잘났지!" , "니가 뭘 안다고 그래!" , "너 같은게 할 수 있을 거 같아!" , "이것도 못하니!"

(※ 예들은 정신과 임상을 하고 있는 분의 도움을 받았다.) 대부분 가벼운 실수에도 상대방의 능력이나 가치를 무시하고 전체로 확대하는 인격적인 상처이다. 즉, 원래 너의 능력이나 가치가 제대로 된 인격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확정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직접 실수를 하지 않고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에도 화풀이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많다.


한 시어머니는 자기 아들에 대한 일방적인 사랑으로 자기 아들에 대한 자부심으로 며느리의 모든 부분이 부족해 보이고 심지어는 잘난 자기 아들과 결혼해 호강하며 산다고 생각하고 학벌도 능력도 부족하다고 여기면서 항상 무시하였다. 아들이 사업을 하다가 망하게 되어도 시어머니는 "너가 내조를 못하니깐 내 아들이 이렇게 되었잖아! 도대체 너는 하는게 뭐야 우리 아들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매번 모든 일을 이 화풀이 맞춰 끊임없이 며느리를 혼낸다. 바람에 쓰러진 화분도 며느리 탓을 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런 대접을 받는 며느리 스스로 어떻게 자신을 생각하게 되는가이다. 아무리 아닌 이야기도 계속 반복해서 듣게 되고 특히 위계 질서와 권위에 의해 강압적으로 듣는 입장이라면 스스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과 부딪치며 힘들어지고 이런 현실에 내성이 생기면 정말 스스로를 '별 것 아닌 존재'로 인식하게 되면 더욱 더 상처는 깊어지게 된다. 언젠가 자기 아들의 공부를 봐주는 엄마가 과학 문제를 설명하다가 한숨을 쉬고는 "너는 어떻게 이런 것도 못 푸니?" 라고 하길래 그 엄마에게 가서 "당신 로렌스 수축과 약한핵력과 전자기파가 어떻게 통합되는지 설명해봐!" 라고 소리지르고 싶었다. 정말 세상의 [ 어떤 진리도 상처보다 깊을 수 없다. ]

운 길에는 항상 함정이 있다...

자신의 감정대로 말하고 자신이 느끼는 대로 말하는 것에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많은 인격적인 상처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필요가 있다.

래서 사람의 말은
가볍게 할수록 상대방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무겁게 할수록 상대방의 마음을 가볍게 만든다.  ─ 道馬 垣俊

그런데 자신의 감정이 느끼는대로 하는 말들의 피해자는 누구일까? 앞의 예처럼 시어머니의 독설같은 이야기들은 일차적으로 며느리에게 상처를 주지만 결국 그 가족 구성원 특히 자식들은 그 언어 표현을 쉽게 받아들인다. 말을 무겁게 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상황과 상태를 알려고 노력하고 조금은 어렵지만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어려운 길이다. 그렇다고 모든 순간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것은 아니다.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감정적 무게에 실수를 할 수 있지만 그럴 때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면 된다. 문제는 감정의 단계에서 한 숨 쉬고 시간을 가지는 것과 실수를 인정하고 때로는 용서를 구하는 것 둘 중 어떤 것이 더 힘든 것인지 모를 뿐이다.


정신과 상담받는 청소년 들 중에는 표현이 짧고 단정적인 이야기가 많은 아이들이 있다고 한다. 가끔 그런 아이들의 부모들은 주변 사람들은 어떤 표현을 쓰는지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어떤지 확인해보고 싶다. '그런 행동은 나빠요' , '그 아이는 나를 미워해요' 와 같이 예외없는 단정적인 표현들로 그 외의 상황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가족 안에서 감정따라 쉽게 한 말들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다. "너가 할 줄 아는게 뭐야!" 라는 그 감정적 표현에 상대방은 무엇인가 하려고 하기 전에 '내가 이것을 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릴 수 있고 "니가 뭘 안다고 그래!" 라는 말에는 자신의 창의적인 생각들도 '내가 생각한게 뭐 맞겠어?' 라는 의구심만으로 포기할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을 단정하고 함부로 이야기하는 쉬운 이야기들에는 상대방이 무엇을 할 수 있는 희망보다는 해도 소용없다는 포기를 먼저 만들기 쉽다. 그리고 정서적 관계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 영향은 더 크게 받는다. 특히 가족 중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더 커질 것이다.

군가의 편이 되어준다는 것...

어느 커피 전문점에서 두 여인이 이야기를 한다. 자기 남자친구가 보낸 문자를 친구에게 보여주면서 "이거 대답하는 것이 나 사랑하지 않는 것 같지 않아? 하트도 없고 이거 표현도 ... "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쓰지 않는 메신저 서비스에는 자신의 감정을 바로 보여주는 기능이 있나 싶었다. 텍스트에 불과한 문자에서도 상대방의 의도 감정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다투고 정말 노래가 좋아 공유한 노래가 상대방의 감정을 대변한다고 생각하며 가사를 집중해서 듣고 상대방의 감정을 판단하려고 한다. 많은 경우 상대방의 감정보다는 본인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은지 부터 생각하게 된다.

같은 대상도 미움의 안경을 쓰면 똑똑한 사람은 잘난 척 하는 것으로 보이고 사랑의 안경을 쓰면 잘난 척 하는 사람도 똑똑해 보이는 것이다. 가끔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나쁜 absolutely bad 행동이 무엇이 있냐고 물어본다. 그럼 '살인하다' 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가족을 죽이려고 달려든 강도를 살인했다' 라면 어떻냐고 물어본다. 한 생명이 사라지게 했다는 것은 분명 나쁜 일이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살인하다는 말 조차도 사실 상황 situation 에 따라서 절대적으로 나쁠 수만도 없다. 생각보다 인간이 너무도 허술한 존재라는 것은 법정에서 억울한 누명으로 몇십년동안 감옥에서 살다가 진범이 늦게 나타나 그 세월의 억울함을 쉽게 보상받지 못하는 경우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며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쉽게 판단하고 비난하는 순간에도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백함을 믿을 것이다.

누군가의 편이 되어준 다는 것은 동시에 그 사람은 적이 아님을 먼저 아는 것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며 다투는 모습을 보면 재미있는 부분들이 많다. 서로 좋아하는 사이지만 다툼의 순간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에 맞지 않는 부분은 어떻게든 논리적으로 상대방을 끌어내리려고 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과거 행동 말뿐만 아니라 정황적인 추측까지도 포함하여 상대방이 이 다툼에서 잘못했다는 것을 결론내리려고 노력한다. 생각해보면 논리적 과정이 아니라 단순히 감정적 소모일 뿐이다. 그것을 모르고 어떻게든 상대방을 이기려고 한다. 그러나 끊임없이 말했지만 사람의 행동과 말은 시간이라는 차원 속에서 다른 상황과 상태를 가질 수 밖에 없고 심지어 완전하지 않은 인간은 실수도 때로는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것은 실수와 잘못을 하는 상대방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그럴 수 있다.

상대방이 적이라면 이겨야 하는 대상이라면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싸우라고 해주고 싶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인격적인 상처를 덜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내 삶과 내 주변의 사람들이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기회가 된다.

랑은 서로의 모순을 찾는 것이 아니라 모순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과 슬픔에 대해서 같이 이해하고 슬퍼해주는 것... 그래서 어떤 행동도 생각도 사랑 앞에서는 설명되게 된다. 억지로 해석하고 분석하려 하지 않아도 항상 그대로 자연스럽게 수용된다.

인격적인 상처에 대해서 ─ 누구의 편이 된다는 것

Sunday, June 28, 2015

직 근골격계가 발달하지 않았지만 활발한 아이가 엄마를 돕겠다는 마음으로 그릇을 잡고 가다가 놓치고 말았다. 그릇은 바닥에 떨어져 깨지고 아이는 놀란 마음에 멈춰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릇 깨지는 소리에 엄마가 놀라 달려와 아이가 다치지 않았는지 살펴보고 다친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소 큰소리로 아이에게 말한다.

"다친데 없어? 그러니깐 조심성없이 이렇게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그랬지! 어디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이러는거야!" 


비록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라고 해도 이미 사건은 일어났다. 비록 깨진 그릇의 파편에 아이는 상처입지 않았지만 아이는 이내 엄마의 목소리에서 나온 파편에 찔려 상처입고 말았다. 믿고 의지하던, 아니 의지할 대상이 거의 엄마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아이에게 엄마의 그런 모습에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그저 더 멍하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엄마는 이제는 자신의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계속 말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이렇게 조심성없이 뭐 가지고 다닐거면 가지고 다니지마. 다 너를 위한거야 그러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려고 해!" 

엄마는 아이에게 아이를 위한 것이라며 이야기하지만 아이는 그런 엄마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엄마는 그렇게 아이를 위한 것이라면서 이야기했지만 대부분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놀라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자신의 감정 그대로 아이에게 내 뱉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자신의 그런 모습에 대해서 오히려 아이에게 이해를 구한다. 다 너를 위한 것이라고...

감의 능력은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판단하고 상황을 분석하는 능력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이의 입장에서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려는 것은 아닐까. 이미 사고는 일어났고 결론이 난 일에 대해서 잘못, 옳음을 따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아이를 공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같은 상황에서 다른 엄마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아이가 아직 신체적으로 발달하지 않았고 아이는 분명 나를 도와줄려는 좋은 마음으로 그런 것이지' 라며 아이에게

"그럴 수 있어 걱정하지마 그럴수도 있는 것이지 실수할 수도 있는데 이렇게 하면 너가 다칠 수 있으니깐 앞으로는 조심하면서 하는 것이 좋겠구나" 

라고 이야기한다면 공감의 능력이 뛰어난 것일까?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첫번째 경우보다야 훨씬 아이가 상처입지 않도록 아이의 입장에서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조심할 수 있도록 알려주는 착한 엄마일지 모르고 이해심이 많기에 아이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한번 더 생각할 수 있는 사려깊은 엄마일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순간 자신의 아이라고 해도 모든 행동에 이유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유가 존재하지 않아 이해할 수 없을 때도 공감은 작동할 수 있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감은 있는 그대로 아이(상대방)의 감정에 묻어 가는 과정일지 모른다. 어떤 반응이 적절한 공감의 반응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공감에는 나... 내 중심이 사라지고 나를 죽여야 가능한 것들이 많아진다. 아이가 지금 어떤 감정일까, 어떤 마음일까... 를 먼저 살필려고 노력하고 지금 아이의 상태는 나보다 더 놀랐을 것을 느끼며 아이가 더 이상 다치지 않도록, 안전하다는 것을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일어난 이 사건을 분석하고 아이가 다시는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깨진 그릇에 놀란 바로 앞에 있는 아이라는 존재이다.


아이들은 분명 감정적으로 다치기 존재이다. 그것은 어른들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단 한가지의 원리Principle 만 기억하자. 아이를 당신의 논리와 규칙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게 한다면 당신 아이의 감정은 점점 더 위선적으로 변할 것이다. 그것은 부모의 책임이다.

아이의 문제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공감의 문제로 확장해도 비슷하다. 인간은 자신이 이해하는 범위에서 상대방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는 사이에서도 그런 것이 공감이라 생각한다. 즉, 상대방의 상황을 다 알아야 하고 상대방의 심리상태 모든 것을 다 파악하고 그 파악된 논리 구조가 자신의 논리 구조와 합일해야 그때서 자신은 상대방을 공감해준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공감이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해도 자신의 전적인 이해를 조건으로 생각한다.

랑한다는 것은 정체를 알 수 없고,
결코 채워줄 수도 없는 상대의 고독을 어루만지는 것이다.

— 크리스티앙 보뱅 (Christian Bobin)


크리스티앙 보뱅의 이 말을 참 좋아한다. 상대방이 나를 이해시켜야지만 나는 당신을 공감할 수 있다는 오만스러움은 인간을 어떻게든 서로가 서로를 설득시켜야 인간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는 지옥으로 만들어 간다. 그래서 내가 상대방의 슬픔을, 아픔을, 고통을 극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오만과 상대방을 잘 알고 있다는 교만은 결국 '나는 너를 다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넌 왜...' 라는 공감의 폭력을 만들게 된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자신이 이해할 수 없어도 상대방의 모든 행동들과 감정들에 묻어 가며 그 사람이 힘들어 하는 그 부분을 어루만지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의 고독이 어디있는지 찾는 것이 서로를 아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상대방을 위해 내가 어떤 어루만짐을 해줄 수 있는지 끊임없이 생각하는 과정, 기도가 필요한지 모른다.

그리고 그 어렵고 힘든 ... 그 것을 크리스티앙 보뱅은 '사랑한다는 것' 이라 정의내렸는지 모른다.

Ama et fac quod vis.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라.

- 성 아우구스티노 

공감의 미학 ─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Tuesday, June 23, 2015

정은 의심을 초래할 수 있다. 가정은 대개 친근한 경험들에 근거하는 법이다. 따라서 그동안 유지해 온 과정을 적용할 때만이 가장 좋은 글을 쓰고, 가장 명확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경우엔 박자를 조절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생각하고 글을 쓰는 일이 행복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순식간에 덧없이 사라지고 말 것들은 이런 신속함을 요구한다. 만일 행인이 갑작스럽게 우리 앞에 나타난다고 하자, 당신은 우선 놀랄 것이다. 잠시 후 그를 관찰할 준비가 되고 보니, 그는 이미 당신의 시야에서 사라진 후이다. 만일 당신이 이제부터 편안한 마음으로 그를 생각해 보리라 하고 뒤 쫓아간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인가?  ─ 피에르 썅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中 

피에르 썅소 Pierre Sansot 의 책을 읽는 순간의 느낌을 기억한다. 어렵지 않은 문장 속에서 내용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잠시 머물러 기다리면 그 내용들은 쉬운 내용도 아니고 오히려 우리의 삶에서 꼭 질문해야 하는 내용들이라는 것을 느끼고 나서 그의 모든 책들에 빠지게 되었다. 그의 문장의 또 다른 매력은 글의 내용과는 다른 문제의 해결책을 주는 것 같은 기분때문이다. 그의 대표작인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가정은 의심을 초래할 수 있다. 로 시작하는 이 내용은 우리의 의심에 대한 내용처럼 볼 수 있다.


그러나 점점 한문장 읽어가면서 어쩌면 이 글은 우리가 인생에서 항상 고민하는 '선택'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누구나 현재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만들지 고민하며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인생은 결국 선택의 문제이고 그 선택을 통해 무엇을 하고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에 대한 많은 고민들의 연속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지금 하는 일들이 잘 되지 않을 때 '과거 언젠가 그 선택을 하지 않고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회상하기도 하고 심지어 선택하지 않은 다른 선택 후보에 대해서 선택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사람들의 흔한 착각은 우리가 비교적 논리적이고 모든 결과 consequence 를 예측할 수 있을거라 믿는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이렇게 될 것이야'와 같이 1차원적 인과관계의 나열이 상당히 논리적이라 믿는다. 비교적 다양한 결과를 생각한다 해도 인과관계가 복잡하게 설정된 예측이라기 보다는 순열적 sequential 추측을 이어가고 결론이 어느정도 나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여 다른 순열적 추측을 만든다. 복잡한 인과관계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나리오를 생각하는 것도 상당히 신중한 사람이다.

인간의 선택은 아무리 1차원적이라고 해도 원인-결과를 생각해 가장 좋은 선택이라 생각하는 (믿는) 선택을 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정은 의심을 초래할 수 있다... 를 통해 문제는 인간에게 선택은 무엇이 가장 좋은지 찾는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철저하게 '가정'의 영역이란 점이다.

랫동안 고민한 현상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좋은 소프트웨어를 소개해주고 어떻게 쓰는지 설명해주고 심지어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아도 몇일 후에 찾아가면 내가 알려준대로 편하게 사용하고 있겠지라는 기대와는 다르게 다시 옛날 방식으로 어렵게 쓰고 있는 것이다. 그때마다 왜 내가 알려준대로 사용하지 않는냐라고 묻지만 당연히 사용해야 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 또한 어색해지고 만다. 이와 같은 경험이 반복되면서 처음에는 '익숙한 것을 버리기 싫은' 이유라고 생각했지만 어느날 자기 표현이 강한 친구의 말은 다른 원인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편한 것은 알겠는데 혹시나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기능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사실 원하는 기능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그 막연한 '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가정은 새로운 무엇인가를 선택하는데 큰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아무리 쉽고 좋은 것이라고 해도 그 선택을 통해서 내가 무엇인가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그 가정은 검증의 절차없이 선택에서 제외하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피에르 쌍소의 표현대로 '가정은 대개 친근한 경험들에 근거하는 법이다.' 모르는 영역은 친근한 경험일 수 없고 결국 자신에게 친근한 것들을 잃어버릴 수 있는 두려움은 자신이 모르는 새롭고 더 좋은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즐거움보다 항상 클 수밖에 없다.

기에서 인간의 선택이 보여주는 새로운 특징이 있다. 복잡한 인과관계를 생각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모든 가능성을 두고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에게 친근한 경험에 근거한 가정으로 '선택하지 않음'을 더 자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정적 경험에 대한 트라우마는 인간의 선택을 축소시키고 무엇인가를 해도 좋을거란 희망을 가지기 보다 그렇게 해서 잘못되는 결과때문에 포기를 하게 된다. 그 가정의 올가미 속에서 우리의 언어는 참 신기한 작용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은 잘못되기 쉬워'라는 가정을 세우고 자신에게 친근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때 이 가정이 성립하는 것 같다 생각하면 곧 이 가정은 '모든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은 잘못되기 쉬워'라고 단순 가정은 모든이 포함된 절대 가정이 되고 이 가정은 '모든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은 잘못된다'라는 확고한 결론으로 이어지기 쉽다.


가정은 의심을 초래하고 그 의심은 우리에게 다가온 가능성의 다양한 세상을 아주 단순화 시킨다. 그래서 인간의 선택에서 가정은 필요하지만 그 가정이 자신의 직접, 간접적 경험에 제한된다면 그 이상의 가능성과 그 너머에 있을 수 있는 더 큰 기회는 이미 포기한 상태가 될 것이다. 항상 이야기하지만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영재일 수 있지만 천재일 수 없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기존의 지식과 체계에 잘 적응하고 그것을 잘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그렇게 잘 적응된 아이에게 가정은 창의적인 내용이 아니라 기존의 지식과 체계에 잘 들어맞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가정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세상을 바꾸는 새로운 인식, 철학, 체계를 생각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기존의 구조를 거부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끌어낸 사람들이다. 그래서 피에르 쌍소가 말한 가정과 아직 확신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구별해야 한다고 본다.

가능성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세상보다 더 멋진 세상이 있을거란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자신의 능력보다 더 뛰어난 것을 만들 수 있을거란 열정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모든 내 선택의 가정이 익숙하고 알고 있는 것에 한정된 의심의 범위에서 이루어진다면 그 가정은 인생의 선택에서 가능성은 제외하고 시작하게 된다. 결국 익숙한 것에 들어 맞지 않는 것은 쉽게 포기한다.

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이렇게 행동하면 너는 이렇게 된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마다 불편함을 느꼈다. 단순한 인과관계가 사실이었다면 이 세상은 이렇게 복잡하게 구성될 필요도 없었고 사회갈등도 없었고 그 단순한 인과관계를 성립시켜줄 사회제도 (법, 제도) 등만 있으면 인간은 투명한 인과관계에 의해서 행복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만들어준 많은 사건들 속에는 가정을 통한 익숙한 것에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들이 전부라고 믿고 있다. 노예 제도가 당연하다고 믿고 있던 시절 노예도 주인과 동일한 인간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의 피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노예 제도는 사라진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희생과 끊임없는 행동이 존재해야 한다. 억압과 고통은 항상 익숙한 영역이다. 그래서 한 노예가 아무리 '같은 인간이지 않을까?'란 가능성을 생각해도 그 선택을 통해 얻어지는 고통과 아픔때문에 포기해버리고 만다.

많은 경우 '그거 해봤자...' , '그렇게 해봐도...' ,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어...' 란 말을 들을 때마다 인간의 가치는 무엇일까 고민하게 된다. 누군가 억압받아도 '그래봤자 소용없어' 라고 말하는 사람들, '그 놈 그렇게 했다가 결국 자기만 죽었잖아' 와 같이 한가지 결론을 마치 모든 당연한 결론처럼 말하는 사람들, 정말 가치있는 것을 이루기 위해 작은 가능성이라도 노력하는 사람들을 향해 비웃음 짓는 사람들... 인간의 가치는 그럴 수록 익숙하고 부조리한 굴레에서 더이상 벗어나지 못할 뿐이다.

예전에 항암치료를 받을 때 주사실에서 같이 항암제를 맞는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독한 항암제때문에 무엇인가 먹으면 토했다. 그러나 또 먹고 곧 토하고 계속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그렇게 토할 걸 먹지말자." 그러자 아이는 엄마에게 힘겹게 말했다.

"엄마 이번에는 먹을 수 있을거야." 

할수 없다 될 수 없다는 희망의 포기는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

누군가 지금 어려운 선택의 순간에 있다면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불가능을 믿지 말고 가능성을 믿어요.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모험을 했는가에 따라 행복해질 가능성도 높아진다고 믿어요." 

인간의 선택에 포기에 의한 제외보다 새롭고 다양한 가능성을 그 많은 사람들이 선택했을 때 우리 세상이 더 다양해지고 좀 더 가치있는 일들이 많아질 것이란 희망이 있다. 그 누구도 안개가 자욱한 경계에 서지 않고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할 수 없다. 경계의 근처도 가지 않고 경계 넘어에는 나에게 나쁜 것이 있을거야 믿는 것은 한번 살아야 하는 인생에서 너무도 슬픈 선택이다. [ 경계에 서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자. ] [ 두려움의 현기증을 즐기자. ]



인생이 포기와 익숙한 것의 굴레에서 계속 돌아간다면 얼마나 슬픈일이 될 것인가. 같은 책에 있던 다른 글을 마지막으로 인용해본다.

래를 만들어 가는 데는 두 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는데, 이들은 서로 다른 철학에 기초하고 있다. 우선 그 첫번째 형태. 이것은 의지적인 방식에 의한 것인데, 우리 자신의 도약을 통해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의 주도권을 이용하여 우리 자신의 모습을 앞에 투영해 본다. 이때 우리가 미래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되고 싶은 모습'과 '우리의 현재 모습' 사이의 거리를 말한다. 그리고 다소 시간이 걸리는 장기 계획을 세우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토막난 짤막짤막한 시간들 사이에 끼여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삶에서 기다림이란 단지 주문한 물건이 배달되는 시간, 혹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 지나가야 할 길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사용해야 할 방법들을 계산해 보는 시간 정도일 뿐이다.

두번째 형태. 이것은 첫번째 형태보다 덜 의지적인 방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수동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방식에 의하면 우리는 마음을 여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런 태도를 갖게 되면, 우리의 인생의 큰 흐름을 결정짓는 굵은 사건들이 삶 속에 들어오기까지는 다소 오랜 기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그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가 기다리던 미래라는 수평선이 활짝 열린 모습으로, 자유롭고 텅 빈 모습으로 눈앞에 펼쳐지게 된다. 드넓게 펼쳐진 빈 공간에서는 그동안 바라오던 수많은 사건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게 된다.

─ 피에르 썅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中 기다리기

인생의 선택에 대해서 ─ 익숙하지 않은 미래란 모험

Monday, June 15, 2015

Our own experience with loneliness, depression, and fear can become a gift for others, especially when we have received good care. As long as our wounds are open and bleeding, we scare others away. But after someone has carefully tended to our wounds, they no longer frighten us or others.
When we experience the healing presence of another person, we can discover our own gifts of healing. Then our wounds allow us to enter into a deep solidarity with our wounded brothers and sisters.

To enter into solidarity with a suffering person does not mean that we have to talk with that person about our own suffering. Speaking about our own pain is seldom helpful for someone who is in pain. A wounded healer is someone who can listen to a person in pain without having to speak about his or her own wounds. When we have lived through a painful depression, we can listen with great attentiveness and love to a depressed friend without mentioning our experience. Mostly it is better not to direct a suffering person’s attention to ourselves. We have to trust that our own bandaged wounds will allow us to listen to others with our whole beings. That is healing.”

- Henri Nouwen, The Wounded Healer, 1979



로움, 우울함 그리고 두려움을 통한 우리들만의 경험은 다른 이들을 위해 재능이 될 수 있다, 특히 우리들이 잘 돌보아질 때 말이다. 우리의 상처가 들어나고 여전히 상처가 깊을 때는 우리는 오히려 다른 이들을 겁줄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 우리의 상처가 아물게 조심스럽게 도움을 준다면 더이상 다른이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치유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치유의 재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상처는 우리들이 다른 상처입은 형제 자매들과 깊은 유대감을 가질 수 있는 매개체가 된다. 

통받고 있는 사람과 유대감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가 경험한 아픔에 대해 상대방에게 이야기 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서 상처받은 치유자는 자신이 겪은 상처를 이야기할 필요없이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가 고통스런 기분을 통해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의 경험을 언급하지 않아도 고통받는 상대방에게 매우 친절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들어줄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 경우엔 고통받는 사람의 주의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게 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치유받은 상처가 최선을 다해서 상대방을 들어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치유의 과정이다. 

- 헨리 나우엔, 상처받은 치유자, 1979


전 블로그에서 옮기다가 이 글은 언제 옮기나 싶은 생각을 항상 했었다. 그냥 습관처럼 글을 옮기는 작업은 어렵지 않지만 이 글의 첫 문장을 볼때마다 왜이렇게 힘든지 글을 끝까지 읽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느낌을 기억한다. 가족들은 있지만 세상에 혼자인 것 같은 기분, 친구들은 있지만 그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누구도 좋은 치유자가 되기 위해 상처받고 고통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차라리 치유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에게는 남들이 평생 경험할 수 있을까 싶은 힘든 시기가 있었다. 주관적인 평가를 떠나 병원에서 무엇인가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그냥 힘들다. 치료의 과정도 아프지만 그 과정이 나만 겪고 있다는 외로움이 더 아프다. 아무리 주변에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어도 나를 온전히 이해하기 보다는 내가 아프다는 사실만 알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외로움은 속으로 더 커진다.

경험하지 못하면 그 아픔의 구체성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구체성을 알리고 싶지 않기도 하다. 책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자신이 겪은 상처를 이야기할 필요없이...' 우리는 그 상처와 아픔이 다가오는 그 알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를 잘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다행히 그 상처의 공포에서도 많은 이들에게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만약 그 상처의 공포가 제대로 위로받지 못했다면 아마도 나의 상처로 다른 이들의 상처를 우숩게 보고 아픔을 왜 이기지 못하냐고 말했을 것이다.

어쩌면 여러번의 병원 치료를 통해서 신에 대한 원망보다는 그때마다 내가 누군가의 상처와 고통을 제대로 들어주지 못한다고 다양한 방법으로 상처와 아픔의 원리를 알려주시려 한다고 합리화를 한다.


상처받은 치유자 ─ 헨리 나우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