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May 3, 2019

지난 몇년동안 대한민국에서 증가한 업종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단연 카페 혹은 커피전문점이 아닐까 싶다. 2002년 월드컵을 중심으로 치킨집들이 급속하게 증가했지만 최근에는 카페 창업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그에 따라 원두 수입량도 늘어나고 예전에는 쉽게 접하기 힘들었던 관련 식자재의 공급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커피는 하나의 가벼운 음료가 되기도 하지만 커피를 매개로 한 카페라는 공간은 이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임에 틀림없다. 공공도서관이 잘 발달한 도시의 경우에는 공공도서관에서 공간이 필요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반면 대한민국은 공공도서관 뿐만 아니라 다양한 공공 성격을 가지는 공간이 생각보다 없기 때문에 이런 역할을 많은 카페가 대신 해주고 있다.


어떤 카페를 해야 돈을 많이 벌 수 있고 어떤 자리가 좋은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정보를 알고 있다면 먼저 카페를 차렸을 것이다. 다만 대한민국 카페가 가지는 특징 중 하나는 거의 대부분 인터넷을 제공한다. 그리고 카페에 대한 정보 및 주요 홍보는 인터넷이란 공간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부분이다. 인터넷은 이제 아주 익숙하고 당연한 자원처럼 느껴지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사용하면 악용하는 이들에게는 희생자가 되기 쉽다. 그래서 카페를 운영하는 이들이 알아두면 좋은 그리고 공공 장소에서의 인터넷 관리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인터넷 그리고 정보 과학의 측면에서 생각해볼 몇가지 주제를 다루고자 한다. 

카페 (인터넷)의 시작 


인터넷의 연결은 필수가 된다. 예전에 스웨덴이나 미국의 몇몇 가게에 들어갔을 때 인터넷을 제공하지 않거나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는 것 심지어 자신의 핸드폰을 보지 않는 것이 하나의 에티켓같은 공간도 있었다. 그와 같은 공간에서는 사람들은 잠시 인터넷에서 벗어나 아날로그 형태의 즐거움을 즐길 수 있도록 해주는 곳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게에서 인터넷은 필수이고 무선 공유기는 기본이 되었기 때문에 무선형태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해주고 있다. 가게를 찾는 손님들이 무선 인터넷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무선 공유기에 접속해야 한다. 무선 공유기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무선으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도록 공유해주는 기기라는 뜻이다. 그래서 가게를 열고 (혹은 열기 전부터) 인터넷을 신청하고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공유기를 받거나 혹은 이미 가지고 있는 공유기를 사용하게 된다. 인터넷을 사용한다 use internet 이란 말의 정의는 '부여받은 IP 주소를 통해 네트워크에 연결된 정보 자원을 사용할 수 있다' 는 뜻이다. 너무 쉬운 말을 어렵게 풀이하지만 인터넷을 사용한다는 말에는 ⓐ 나에게 부여된 IP 가 있고 ⓑ 네트워크에 연결된 다른 자원을 사용한다는 뜻이다. 물리적으로 모든 사용자에게 IP 를 부여할 수 없기 때문에 공유기를 사용하게 된다. 공유기에서 부여받은 IP 를 가지고 공유기에 접속한 이들과 나누어 같이 쓰도록 해주는 기계이다. 그래서 공유기는 인터넷을 쓸 수 있도록 부여받은 IP 를 가지고 내부에 사용자들도 같이 쓸 수 있도록 해준다. 


그래서 공유기 내부에서는 내부 아이피 ( 192.168.0.0 – 192.168.255.255 , 172.16.0.0 – 172.31.255.255 , 10.0.0.0 – 10.255.255.255 ) 를 받아서 사용자의 기기와 공유기 간에 통신을 하고 그렇게 통신한 내용을 공유기의 대표 IP 혹은 외부 IP 를 통해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 같은 공유기에 접속한 이들은 결과적으로 같은 IP 를 가지고 인터넷을 하는 것이다. 네트워크 정보 창 WiFi 설정 혹은 인터넷 창에서 설정을 찾아보면 나오는 IP 는 내부 아이피이고 이는 공유기와의 통신을 위한 IP 일 뿐 외부 인터넷을 사용하는 용도는 아니다. 자신의 외부 IP 동시에 공유기가 부여받은 assigned IP 를 확인하는 방법은 [https://ifconfig.me] 에 접속해보면 알 수 있다. (간단하게 구글이나 네이버 검색창에서 what is my ip address? 라고 입력해도 나온다.) 


외부 IP 는 공유기에서 잘 받아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공유기도 하나의 기기이기 때문에 내부 아이피를 가진다. 그리고 내부 아이피를 가져야만 공유기를 사용하는 사용자들의 기기와도 통신을 할 수 있다. 공유기의 제조사에 따라서 다르지만 공유기 내부 IP 를 아는 방법은 네트워크 정보 (설정) 창에서 '기본 게이트웨이'라는 이름으로 찾아낼 수 있다. 아니면 명령어 창 ( cmd.exe ) 에서 ipconfig /all 를 통해서 자신의 무선랜 장치가 연결된 기본 게이트웨이 주소를 찾아낼 수 있다. 만약 기본 게이트웨이 값이 192.168.0.1 이라고 되어 있다면 자신의 내부 IP 는 192.168.0.2 ~ 192.168.0.254 중 하나의 값이다. 만약 자신의 IP 값 (IPv4 주소) 이 192.168.0.24 라면 인터넷을 사용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주고 받을 때 192.168.0.24 와 192.168.0.1 사이에서 통신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기본 게이트웨이 값은 또한 공유기 설정을 위한 (대부분) 주소이기도 하다. (일부 제조사들은 웹 브라우저에서의 접근을 제한하기도 한다.) 공유기는 하나의 컴퓨터라고 생각하면 된다. 웹브라우저 주소창에 192.168.0.1 을 입력하면 공유기를 설정할 수 있는 화면이 나온다. 제조사에 따라서 접속 방법은 다르지만 최근에는 점점 사용자 편의를 위해 거의 동일한 웹 환경이 된다. 


제조사 별로 초기 기본 게이트웨이 값은 다르지만 접근해서 들어가면 공유기 설정에 들어갈 수 있는 초기 아이디 / 비밀번호가 존재한다. 대한민국에서 많이 사용하는 제품은 admin / admin 혹은 admin / (비밀번호 없음) 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K모 통신사는 신비롭게 ktuser / homehub 이고 조금 보안을 강조한다고 해서 공유기의 물리적 주소 (MAC 주소) 를 조합해서 암호를 설정해 놓는 경우도 있지만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제조사 편의를 위해 제공되는 초기 비밀번호는 결국 공유기에 접근해서 들어가면 공유기를 관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공유기는 왜 중요한가? 


누군가 카페에 가서 무선랜 암호가 뭐예요? 물어본다. 그리고 무선 인터넷 이름 (SSID) 를 선택해서 알려준 암호를 입력한다. 그런데 무선랜 암호는 엄밀히 말하면 암호가 아니다. 공유기를 사용해도 된다는 허가를 받기 위한 암호가 아니라 공유기와 내 기기가 통신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 설정된 일종의 암호문구 passphrase 이자 키 key 이다. 단순히 써도 된다 안 된다의 허가 permission 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와 공유기가 보내는 통신 내용을 암호화해서 다른 이들이 훔쳐 볼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설명한 것처럼 무선 인터넷 이름 (SSID) 나 암호(문구)를 변경하기 위해서는 웹브라우저에서 기본 게이트웨이 주소로 들어가면 된다. 


무선랜 관련해서 설정해줘야 하는 부분은 ① 무선 인터넷 이름 (SSID) ② 무선랜 암호 문구 ③ 암호화 인증방식이다. 여기서 암호화 인증 방식으로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WPA2PSK + AES 로 설정하는 것을 권한다. 다른 방식으로 설정했을 때는 속도의 이득을 볼 수 없거나 호환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선랜은 2.4GHz 만 지원하는 모델과 5.0GHz 를 추가로 지원하는 모델이 있는데 전자렌지, 무선 마우스 그리고 특히 블루투스가 2.4GHz 영역의 주파수를 사용하기 때문에 간섭이 일어날 수 있다. 블루투스 스피커를 사용하는데 소리가 끊기거나 맘에 들지 않는다면 무선랜이나 전자렌지 등과의 전파 간섭을 생각해봐야 한다. 그래서 5.0GHz 영역을 사용하지만 2.4GHz 만 사용할 수 있다면 이때는 무선랜의 채널을 변경하면서 가장 간섭이 적은 채널을 선택하면 된다. 보통은 11~13 채널을 추천하지만 이 경우 일부 기기들은 접속을 할 수 없기도 하고 간섭이 일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경험적으로는 1,2,3 채널에서 결론이 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 역시도 가게의 환경에 따라서 선택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이 공유기의 초기 아이디 / 비밀번호를 변경하는 것이다. 이렇게 변경하면 공유기를 통해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도 공유기의 설정값을 마음대로 변경할 없다. 뿐만 아니라 공유기가 가지는 최적의 성능을 제공받을 수 있다. 앞서 설명한 블루투스 스피커와의 간섭도 줄일 수 있는 방법도 사용자 한명이 과도한 사용을 하지 못하게 속도 제한을 하는 등 공유기가 제공하는 다양한 기능을 제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대부분 매장이 포스 POS: Point of Sales 및 결재 통신을 모두 인터넷 기반으로 하기에 공유기가 중요하다. 서대문구의 아현지사 화재를 통해 알 수 있지만 인터넷이 작동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거의 모든 금융 거래 뿐만 아니라 생명에 영향을 직접적으로 줄 수 있고 많은 사회 인프라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공유기를 관리하지 못할 때... 


공유기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 실제 일어났던 예를 들어 본다. 많은 미국 드라마를 보면 인터넷으로 뭔가 할 때 자신의 집이나 사무실을 두고 인터넷 카페에 가서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인터넷 카페의 IP 를 이용해서 작업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 카페 안의 누군가 불법적인 작업을 했다면 표면적으로는 카페가 하나의 범죄 실행 장소가 된 것이다. 이를 막을 현실적인 방법은 없기도 하지만 요즘처럼 CCTV 가 잘되어 있는 세상에서는 현명하지 못한 방법이다.  


공유기의 초기 비밀번호를 통해 접근해서 공유기의 설정값을 몇가지만 바꿀 수 있다고 가정하자. 최근의 대부분 공유기는 멀티 SSID 를 제공한다. 카페에서 암호문구와 암호화 방법으로 설정을 했다고 해도 보안이 없는 SSID 를 하나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mycafeis 로 설정된 곳에서 mycafewas 로 하고 암호화 설정을 하지 않는다. 이말은 mycafeis 는 암호를 넣어야지만 mycafewas 는 암호없이도 그냥 클릭만 하면 바로 인터넷 공유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암호없이 인터넷을 쓸 수 있다는 점에서 보안없는 mycafewas 를 선택해서 인터넷을 사용하면 공유기와 사용자 사이 통신 내용은 암호화가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보안이 된 mycafeis 를 통해 연결을 하면 내가 브라우저에 myhidden.place.com 이라고 입력을 하면 해당 주소를 공유기에 보낼 때 암호화를 해서 중간에서 통신을 가로채도 알아볼 수 없다. 쉽게 말해 내가 공유기와 통신할 때 보안 / 암호화를 사용한다는 뜻은 내가 입력하는 myhidden.place.com 이라는 데이터는 공유기에 보내기지 전에 a8 00 b8 d4 cb 71 63 b3 c8 bd 66 52 f2 03 d6 91 58 9e 6e 0a 7b 6b 72 aa 51 f3 88 c5 00 e6 b7 f5 와 같은 형태로 보내지고 이를 공유기가 받아서 다시 복호화 decrypted 하게 된다. 그런데 암호화가 없는 (보안이 없는) 무선랜은 마치 공짜 인터넷 같겠지만 암호화없이 보내기 때문에 중간에 자신의 아이디 / 비밀번호 와 같은 중요한 데이터까지도 포함해서 다른 사람이 알아낼 수 있게 된다. 


DNS 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DNS 란 인터넷의 주소록 같으로 우리가 기억하기 쉽게 myhome.com 같은 도메인을 사용하지만 인터넷은 앞서 설명한 IP 를 통해서 연결되기 때문에 myhome.com 이란 도메인이 어떤 IP 를 가졌는지 알려주는 서비스이다. [인터넷의 주소록 DNS 서비스 ─ 기반기술에 대해서...] 예를 들어 은행을 사용하기 위해 mybank.com 을 입력하면 해당주소가 어떤 IP 를 가지는지 찾아서 알려준다. 정상적이라면 210.182.9.224 과 같은 IP 주소를 알려줘서 들어가라고 하게 된다. 그런데 만약에 해커들이 만든 DNS 주소를 공유기에 설정해놓으면 mybank.com 이란 주소는 14.49.30.94 으로 들어가라고 알려주고 해당 주소에는 은행 홈페이지와 동일한 형태로 사이트를 열어놓고 은행 계좌 정보나 보안키 번호와 같은 금융거래에 필요한 정보를 입력하도록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잘못된 DNS 주소를 통해 들어간 사용자는 자신은 정상적으로 은행 주소를 넣어 의심없이 개인정보를 넘길 수도 있게 된다. 통신사 별로 자동으로 할당받는 DNS 가 있지만 해당 DNS 서버가 반응이 늦으면 소위 인터넷이 느린 현상으로 느낄 수 있다. 통신사별 DNS 는 다음과 같다. 

통신사 주 DNS 보조 DNS
KT 168.126.63.1 168.126.63.2
SK 219.250.36.130 210.220.163.82
LGU+ 164.124.101.2 203.248.252.2

이외에도 지역 케이블 혹은 지역에 따라서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자동으로 받았다면 악의적인 DNS 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구글 DNS 와 같이 좀 더 안정적인 DNS 를 설정해 놓는 것을 추천한다. 자동으로 설정되어 있는 DNS 를 수동으로 변경해서 다음의 정보를 입력하면 된다. 

공개 DNS 주 DNS 보조 DNS
Google DNS 8.8.8.8 8.8.4.4
Cloudflare DNS 1.1.1.1 1.0.0.1
OpenDNS 208.67.222.222 208.67.222.222

공유기는 하나의 컴퓨터 같은 기기이기 때문에 공유기를 통해서 언론에 자주 설명된 디도스 DDoS; Distributed Denial of Service 에도 이용될 수 있다. 특정 서비스에 사용자가 급격하게 몰리면 단시간 내 처리 능력을 벗어나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고 마비되는 공격인데 여러 곳 (여러 IP) 에서 한곳에 정해진 짧은 시간내에 한꺼번에 접속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럴 때 공유기를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개별 공유기는 개별 IP 를 가지는 사용자이고 특정 시간대에 무리하게 접속하도록 많은 공유기에 설정을 해놓으면 마치 공유기가 공격에 이용되는 좀비 기기가 된다.



온라인 투 오프라인 


온라인 투 오프라인 (Online to Offline) 은 배달 서비스와 같이 온라인에서의 주문이 바로 물리적인 물건으로 제공되는 형태를 말하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를 소개한다. [개인정보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 인공지능 시대 개인정보란 무엇인가?] 을 통해 제시한 의문은 "데이터가 살인을 할 수 있는가?" 이다. 결론적으로 데이터 혹은 정보가 살인을 직접할 수 있는 주체는 아니어도 충분한 데이터와 정보는 살인 혹은 범죄를 일으킬 수 있는 충분한 계기가 된다는 점이다. 이미 많은 범죄/수사 드라마를 통해서도 소개된 적이 있지만 관리하지 않은 공유기를 통해서 살인을 일으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 중에서 공유기와 연결된 스마트 기기를 통해서 과열되게 만들어 방화를 일으키는 원격 방화 이야기도 있었고 공유기에 연결된 감시카메라를 통해서 성범죄 피해자를 찾아내는 내용도 있었다. 그리고 공공장소 (에 있는 공유기) 근처에 접근한 특정 인물을 통해서 살인 계획을 세우는 내용도 있다. 해당 에피소드들의 공통점은 사용자가 공유기 혹은 네트워크의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고 이를 악용하는 이들은 이런 기술의 맹점을 잘 알고 있었고 막연하게 피해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언제 어디에 있을지 정확한 데이터를 통해서 범죄 성공률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이다. 

Comparitech

카페의 CCTV 는 범죄의 감시와 예방의 목적이기도 하지만 잘못 사용되면 오히려 범죄의 도구로 사용된다. CCTV 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은 카메라의 영상을 저장하는 장치가 공유기와 연결되어 있고 편의를 위해 외부에서도 저장된 영상이나 실시간 화면을 볼 수 있도록 앱을 설치해준다. 공유기는 기본적으로 내부의 기기가 외부로 통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반대로 외부에서 공유기 안으로 들어오는 경우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들어올 수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카메라 영상을 보기 위해서는 공유기 내부의 기기에 접근해야 한다. 이를 위해 공유기는 외부에서 카메라 저장장치에 접근하기 위한 통로 port 를 허용해준다. 따라서 CCTV 를 보는 앱들은 공유기에 접근할 수 있는 IP 정보와 공유기가 허용한 포트를 통해서 내부의 장치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경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긴다. CCTV 를 설치하고 앱을 설치해주는데 CCTV 장치에 접근할 수 있는 아이디와 암호를 카페 관리자에게는 알려주지 않고 실행만 될 수 있도록 저장해준다. 쉽게 말해 CCTV 저장장치에 접근할 수 있는 아이디 / 암호는 보안업체에서는 알고 있고 직접 사용자들은 모른다. 일부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런 심각한 관행은 아주 보편적이다. 쉽게 말해 보안 업체에서 설정해준 아이디 / 암호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말은 볼 수 있고 별 문제 없어 보이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보안업체에서도 같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 아이디 / 암호가 아주 보편적인 관행이라면 관리하는 업체들의 CCTV 를 쉽게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보안 업체에 적극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아이디 / 암호로 설정할 수 있도록 요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의 경우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질 수 없다면 보안 업체는 번거롭지만 사용자가 직접 설정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만약 보안업체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공유기에서의 포트 번호를 변경하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다. 포트 변경은 포트 포워딩 Port forwarding 기능을 통해 변경 가능하다.

The Hacker News

공유기 안에는 다양한 정보들이 있다. 어떤 기기가 접속했는지 어떤 기기들이 얼마나 사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데이터를 통신했는지 등 다양한 내용을 알 수 있다. 자신이 스토킹하는 대상이 접속했는지 아닌지 알아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스토킹하는 상대방이 주로 가는 카페에 들어가 상대방이 어떤 기기를 사용하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는 공유기에서 상대방이 접속했는지 아닌지만 확인해보면 소위 말하는 따라다니는 스토킹이 아니라 언제 어디에 있을 것이라는 정확하게 알아내는 스토킹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런 방법을 통해서 더이상스토킹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던 어떤 여성이 자신의 익숙한 동선에서 살해된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별것 아닌 그저 인터넷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계정도로 생각할 수 있지만 관리하지 않을 때 그리고 이를 악용하게 될 때 생각할 수 있는 피해는 다양하다. 다만 설마 그럴 수 있을까 그런 방심으로 신경쓰지 않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에는 통신사에서 제공하는 무선 인터넷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는 설치 담당자들이 할 수 없다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간단히 초기화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싶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사용하는 사람이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충분한 내용을 알고 있고 기본적인 원리를 통해서 어떤 문제점이 있을 수 있는지 알고 있다면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 아직 우리나라는 정보통신의 질에 비해서 정보보안에 대한 인식은 많이 부족하다. 싱가포르의 경우에는 보안이 없는 무선랜을 제공하거나 자신의 잘못이 아닌 누군가의 악의적인 설정으로 변경되어도 그 관리를 하지 못한 사람의 책임을 먼저 묻는다. 그래서 집안의 공유기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를 알고 계신 노인들도 많고 이를 위해 공유기 제조사들은 사람들이 스스로 암호를 설정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공유기를 처음 설정하거나새로운 인터넷 라인에 접속하면 새로운 암호를 설정하거나 기존의 암호를 확인하는 아주 기본적인 방법이다.


인터넷의 자원을 활용하기 


의외로 가장 중요한 보안 설정보다 더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인스타그램 Instagram 위치태그일 때가 많다. 역시나 위치태그에 대한 수많은 의문들과 대답들이 존재하지만 막상 그대로 했을 때 제대로 설정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카페 업계의 느낌은 알 수 없지만 위치태그가 존재하지 않으면 매출에 큰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 기대감은 대한민국이나 미국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위치태그 그리고 해시태그 hashtag 를 통해서 어떻게 온라인 마케팅을 해야하는지 선전하는 업체들도 많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광고를 하려고 한다면 차라리 인스타그램에 직접 광고를 의뢰하는 것이 가장 현명할 것이다. 위치태그와 관련되어 몇가지 점검해야 할 부분들은 있다.

공유기의 위치는 어디인가? : 공유기가 위치가 있을까 생각하지만 많은 사용자들이 접속하는 데이터와 네트워크 경로 등을 통해서 위치가 파악된다. 핸드폰이나 GPS 수신기를 통해서 기기 자체가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면 그 정보를 먼저 사용하지만 참조할 수 있는 정보가 없다면 마지막으로 자신이 접속한 IP 를 통해서 위치를 추정하게 된다. 가끔 지도 서비스에 접속하면 내가 있지 않는 엉뚱한 위치가 중심으로 잡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 이전에 쓰던 사용자의 IP 가 있던 위치일 가능성이 높다. 만약 핸드폰이 공유기에 연결되어 있다면 공유기의 정보 및 IP 주소와 핸드폰의 GPS 가 제공하는 위치정보를 연결시킬 수 있다. 여기에서 공유기와의 신호 강도를 고려하면 어느정도 정확한 위치도 파악할 수 있다. 방법은 여러가지 있지만 만약 공유기와 공유기의 위치정보를 연결해서 알려주는 서비스가 있다면 공유기의 위치를 위치기반 서비스에 등록시켜 놓을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서비스가 [Skyhook] 가 있다. 구글을 비롯해 이와 같은 네트워크 서비스와 위치 정보를 연결하려는 기술을 많이 도입하고 있다.


새로운 위치 등록하기: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상호 혹은 원하는 위치태그가 없다면 우선 GPS 기능을 활성화하는 것이 좋다. (필수는 아니지만) 그 이후 새로운 등록물을 올려놓을 때 기존의 사진을 올리면 사진에 포함된 위치정보를 먼저 보여주기 때문에 사진을 새로 촬영해서 올려보는 것이 좋다. 그렇게 올릴 때 새로운 위치태그를 올리면 된다. 만약 위치태그 정보와 계속 올라오는 정보들의 문제가 생긴다면 해당 위치태그는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사라질 수 있다. 이때 계속해서 반복해서 올리면 결국 똑같은 문제만 생기고 수없이 많은 위치태그의 잔해들만 생긴다. 이때는 주소기반으로 위치태그를 형성할 수 있도록 페이스북 페이지를 이용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 해당 주소지를 증명하기 위해 간단하게 해당 주소가 포함된 고지서 등을 제출하면 등록된다. 이때 인스타그램은 비즈니스용 계정으로 전환해서 페이스북과 연결시켜 놓는 것이 좋다.


데이터 분석을 한다면 자신에게 적당한 해시태그가 뭔지 찾아내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면 생각나는대로 해시태그를 붙이는 방법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추가한 해시태그에서 자신의 게시물이 가질 수 있는 영향력을 제한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광범위한 해시태그를 포함할 때 노출될 시간이 짧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고 조금 구체적인 해시태그를 포함한다면 게시물의 노출 가능성은 높아지지만 그만큼 해당 해시태그를 검색하는 사람들이 보장할 수 없다. 가장 현명한 생각은 자신의 지역과 구체적인 대상을 포함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합정동카페 라고 해시태그를 붙이는 방법도 있지만 #합정동빵집 과 같이 적용하는 것이다. 이때는 자료 분석을 떠나 만약 내가 검색하려는 사람이라면? 이라는 생각으로 어떤 검색어로 찾을지 생각해봐야 한다. 합정동을 원하는 이들은 '합정동'이라는 검색어를 쓰는 순간 다양한 태그가 나온다. 만약 마카롱을 먹고 싶다면 '#합정동마카롱' 을 선택할 것이다. 이때 합정동카페는 15,000 여개가 넘지만 합정동마카롱은 200여개이다. 만약 자신의 가게가 마카롱을 주력으로 한다면 '합정동마카롱'은 아주 좋은 선택일 수 있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상호와 연결된 도메인 서비스와 홈페이지를 사용할 수 있다. 유료로 원하는 도메인 이름을 구매할 수도 있고 무료로 제공하는 서비스를 사용할 수 있다. 자세한 사용법은 이전 블로그 글 [나만의 인터넷 주소 ─ 도메인을 구매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가이드] 를 참조하면 된다. 그 밖에 주문서의 경우에도 상업용 플랫폼을 사용할 수 있지만 소품목 소량이라면 오히려 구글 폼 [https://forms.google.com] 과 같은 양식을 사용할 수 있다. [온라인 폼 (forms) / 조사 (survey) 도구의 활용] 인스타그램과 같은 플랫폼은 거의 모든 카페는 필수적으로 사용하지만 앞으로 어떤 플랫폼이 더 대세가 될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사용자들이 많이 쓰는 플랫폼을 이용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다양한 마케팅 업체들이 매출 증대를 해준다고 하지만 그들이 어떤 방법론을 사용하고 어떤 기법을 사용하는지 과학적이지 않다면 스스로 하는 인스타그램이 더 매력이 될지 모른다. 자신의 계정을 전문(?) 업체에 맡기는 경우도 볼 수 있다. 그런 경우 부적절하고 민망한 사진으로 가득한 계정에 들어가 "게시물들이 너무 맘에 드네요? 맞팔해요 그리고 저희 가게도 와주세요." 같은 온정어린 댓글들도 보게 된다.

카페 존재의 이유 


공부할 공간 혹은 아직 끝내지 못한 업무를 위해 카페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시원한 공간에서 좋아하는 드라마를 볼 생각으로 카페를 갈 때가 많지만 그때마다 새로운 카페를 찾기 보다는 마음이 편한 공간을 찾으려고 한다. 오래전부터 항상 아이스라떼를 좋아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소화기관이 안좋아지고 점점 라떼를 마실 떄마다 탈이 나기 시작했다. 여러번 시도했지만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결국 우유가 들어가지 않는 아메리카노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내가 좋아하는 이름을 가진 카페가 있어 아무런 생각없이 찾아간 곳이 있었다. 메뉴도 많지 않고 화려하지도 소위 말하는 감성 넘치는 카페도 아니고 테이블도 단조로왔다.


카페 이름을 아는 남자 손님을 처음 보시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커피 만드는 과정을 설명해주시며 입자가 얼마나 고운지 추출 시간에 따라 어떤 맛이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알려주셨다. 그리고 새로운 원두가 오면 시음을 해보라고 추출해주시고 맛을 같이 나누었다. 그렇게 커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알게 되면서 커피가 만드는 과학이 결국 유체역학과 분체과학 particle science 이란 사실을 느끼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단순하게 보이던 그냥 주문하면 쉽게 나오는 것 같은 커피 속에도 사람들의 입맛을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을 배울 수 있었다. 추출하고 마음에 안들면 과감하게 버리는 모습, 가장 단순해 보이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위해 정수기 물에서 바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미리 얼음물을 준비해서 만들면 청량감이 다르다는 이야기 등 음료 하나를 만드는 과정에도 생각과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 다른 카페에서 음료를 만드는 과정을 유심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에스프레소 음료를 세잔 주문했는데 그라인더 소리가 두번만 나는 경우도 들리고 우유를 보관하는 모습도 살펴보게 되고 채널링 channeling 이 생긴 맛이 느껴지면 추출할 때 나오는 줄기를 유심히 살펴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

아기들이 많은 동네였는데 아기들이 오면 자유롭게 놀 수 있도록 장난감을 가져다 놓고 아기가 실수해서 컵이라도 깨면 정말 아기가 다치지 않았을까 먼저 살피고 주변 (경쟁) 카페의 손님이 와서 자리를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어도 "커피한잔 더 드릴까요?" 하셨다. 몇번 인터넷을 고쳐드리고 꽃을 장식해드리기는 했지만 항상 갈때마다 커피값도 안 받으셔서 계산대에 현금을 올려놓기도 했다. 소위 돈벌기 위해 장사하는 세상이고 돈을 벌기 위해서 유행하는 메뉴를 만들고 더 맛있는 손님들이 탈나지 않는 음식을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이윤이 많이 남는 선택을 하는 많은 카페들을 볼 때마다 비교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어떤 곳은 커피를 맛있게 만들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타인을 위해 사용하는 곳이고 어떤 곳은 돈을 벌기 위해서 사람들이 필요한 곳이다. 내가 라떼에 대해서 겁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최선을 다해 만들어 주셨고 라떼를 마셔도 믿음이 가는 곳이 되었다. (사실 라떼 맛은 나 말고도 많은 이들이 극찬하였다.) 그 전까지는 좋은 재료가 맛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맛은 사람의 손끝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손끝이란 마시는 이를 위한 마음이란 너무도 감성적인 결론을 찾았다.

돈을 벌기 위한 도구로 카페를 쉽게 생각하는 곳에서는 몇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커피의 맛이 일정하지 않다. 매일 커피맛이 변화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매번 어떻게 뽑아야 할지 생각하고 만드시는 분과 원두 갈고 넣고 뽑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커피의 맛은 다르다. 두번째 특징은 발생하는 문제들을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 아이들이 뛰어 놀다 컵을 깼을 때 비품이 모자를 때 대처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운영적인 부분이지만 무엇을 잘 만들거나 친절한 것을 떠나 전문적인 professional 이라고 부르는 것은 의도하지 않은 문제를 잘 해결하실 때 더욱 느끼게 될 때가 많다.

많은 카페들이 디저트나 구움 과자 케익 등을 만들어 판매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만들 때 재료 특히 알러지를 일으킬 수 있는 재료가 있는지 미리 표시를 하는 카페는 보기 힘들다. 규모가 있는 곳에서는 이런 알러지 유발 물질 정보를 제공하지만 동네의 많은 카페들은 이런 섬세함을 제공해주는 경우가 많지 않다. [식품 안전이슈 20가지 - 식품안전나라] 와 같은 곳에서는 미리 알려주면 좋은 알러지 재료들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사실 이런 섬세한 정보들은 얼마나 신경쓰고 먹는 이들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불의의 사고를 미리 예방할 수 있고 만약 알러지 유발 물질에 의해서 누군가 아나필락시스가 왔을 때 미리 고지를 한 것과 하지 않은 것은 책임에서도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카페의 음료과 음식들이 맛있으면 좋지만 그것보다 마음이 편한 공간의 개념이 더 필요하고 지금처럼 많은 카페가 생길 때 마음편히 쉴 수 있는 가면 편안해지는 공간이 더 우리에게 필요할지 모른다.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집을 가면 서로 간섭받지 않고 자신의 일이나 공부를 할 수 있지만작은 규모의 카페에 소위 단골이 되면 개인적인 이야기도 나눌 수 있고 친구처럼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가깝게 되어도 너무 개인적인 부분까지 알려고 하면 그때는 큰 부담이 되기도 한다. 특히 한국은 서로 가까워지면 나이부터 서로 말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지 처음부터 나이를 묻는 경우도 많고 듣기 힘든 개인적인 편견이나 증오를 표현을 들어야 할 때도 있다. 사람과의 만남이기 때문에 친하게 될 수 있고 그렇게 친하게 되어도 어느정도 거리와 예의를 가져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친하게 되었고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그런 것을 서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또한 서로에게 편안한 공간이 될 수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가지는 예의는 다를 수 밖에 없다. 결국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이 다름에 대해서 인정해줘야 한다.

공간의 이로움 


카페 특히 동네 카페가 가지는 매력은 참 신비로울 때가 있다. 아무리 맛있는 곳이고 가까워도 가기가 싫어지는 곳도 있고 조금은 멀지만 매일 찾아가고 싶은 곳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엇을 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곳이 있다는 것은 그래도 인생의 짧은 작은 위안이 되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앞서 커피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려주신 카페에 가면 하려던 일은 모두 미루고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는 시간들이 더 많았다. 우리는 내 삶에 더 의미있는 목표를 얻어내기 위해서 참아가며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인생은 생각보다 짧다. 그리고 그 짧다는 우주의 역사에 비해서 태양계의 나이에 비해서와 같은 상대적인 표현이 아니라 우리 어떤 목표를 이루워 내기에는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아주 짧은 더 정확한 표현으로 아주 불확실한 존재이다. 어제까지 이야기 즐겁게 나누던 친구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먼저 떠날 수도 있고 예상하지 못한 질환으로 생각하지 못한 시한부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보다 더 즐기며 살아야 한다. 카페들은 많아지고 많은 카페들이 먹는 즐거움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주지만 그만큼 우리가 누군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지낼 수 있는 공간이 참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광장의 기능처럼 군중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공간도 거의 없고 대한민국 도서관은 공부를 하고 책을 보는 공간일 뿐 지역 사회가 적극적으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공간의 개념으로 부족하다. 2002년 월드컵 이후 많이 생기기 시작했던 치킨집은 초기에는 같이 먹을 수 있는 공간의 개념이였지만 이제는 점점 먹기위해서만 필요한 목적이 되고 배달이 중심이 되는 사회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목적과 의미를 가지는 카페가 많아지면 좋겠다. 지역 사회 아이들을 위해서 공부를 하고 모일 수 있는 카페, 꽃을 보며 책을 나눌 수 있는 카페, 그냥 편안한 자리에 누워 있을 수 있는 카페 그 목적이 무엇인지 몰라도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편안함을 줄 수 있는 공간으로 꾸미는 카페들이 많기 바란다.

공간의 이로움이란 결국 인간이 자신이 가진 공간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 어떤 이는 공간을 통해 사람들이 왔다갔다 해서 (회전이 되어) 재화를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고 누구에게는 그 어디에서도 느끼지 못하는 편안함을 인간에게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공간을 누구에게 이로움을 줄지 (재화 혹은 인간) 에 따라서 공간의 이로움은 달라진다. 재화를 위한 경우 재화를 위해 인간이 필요할 뿐이고 인간을 위한 경우 인간을 위해 재화가 필요할 뿐이다.

인간이 재화를 위한 도구가 될 때 항상 생각나는 문장이 있다.

‎"인간은 사랑받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물건들은 사용되기 위해서 창조되었지요. 혼돈의 세상이라 말하는 이유는 물건이 사랑을 받고 사람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존 마이클 그린, 알라스카를 찾아서 [원문]


공간의 이로움이란 자신이 베풀 수 있는 공간을 나누어 줄 때 무엇이 목적이 되고 무엇이 도구가 되어야 하는지 명확하게 이야기해준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재화의 도구가 된 것이 아닐까 느낌을 받을 때는 그 불편한 느낌은 결국 다시 찾지 않는 공간이 되고 나를 위해 자신의 공간을 아낌없이 나누어주고 그 안에서 자신의 능력 - 무엇인가 조금 더 잘 만들 수 있는 능력 - 을 통해서 사람들이 편할 수 있는 것을 통해 재화를 얻어가게 된다.


카페를 운영하는 이들을 위한 가이드 ─ 공간의 이로움

Thursday, April 25, 2019

감각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은 이성보다는 본능에 가까운 느낌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다. 감각은 본능에 더 가까운 것이고 이성과는 관계가 없는 것처럼 말할 때가 많다. 그래서 '감각적인' 이란 말은 오히려 '본능적인' 뜻으로 사용되기 쉽고 감각은 주어진 능력처럼 생각하게 된다. 시각, 청각과 같이 외부에 대해서 알아낼 수 있는 다양한 감각기관으로 생리학적인 능력으로 인식될 때가 많다. 그런데 감각이라는 말을 한자로 찾아보면 느낌 감 (感) 과 깨닫다 각 (覺) 으로 외부를 알아낼 수 있는 능력뿐만 아니라 깨닫는 작용까지 포함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제인 오스틴 Jane Austen 의 소설 Sense and sensibility 를 그대로 센스앤 센서빌리티로 표기하기도 하지만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은 「이성과 감성」 (김순영 옮김) 이다. 단순하게 sense 를 감각으로 번역했다면 아마도 소설의 내용을 떠나서 감각이 가지는 본능적인 느낌을 더 주게 되어서 소설의 내용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타인을 자신처럼 생각할 수 있는 '공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공감이 필요한 세상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공감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공감이 무엇인지' 질문을 하면 여러가지 예를 들 뿐 공감에 대한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을 적은 없었다. 그리고 오히려 세상이 복잡해지고 자신의 영역은 명확해지고 공감의 필요성은 강조하지만 정작 사회는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 남기 위해서 타인보다는 자신이 살아가는 방법으로 타인보다는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방법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역시 공감이란 어느정도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학습하고 배워야 하는 그리고 노력해야 하는 능력이라는 것은 이해하지만 막상 공감과 타인을 불쌍하게 혹은 긍휼하게 생각하는 것과의 차이점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하는 내용들은 듣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오히려 세상은 정의와 진실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타인에게 더 엄격한 진실을 요구하고 그 진실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상처와 고통에 대해서는 '필요한 과정'이라고 쉽게 생각한다.


감각, 공감


너무도 비슷한 말들이 혼재되어 사용되지만 조금이라도 그 의미를 구별하기 위해서 먼저 생각해 본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감각이라는 말은 sense 로 사용되고 외부의 자극, 현상 등을 감지해서 알아내는 곧 깨닫는 과정이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후각, 시각, 청각, 촉각 그리고 미각의 소위 오감을 통해서 외부를 알아내고 그 감지한 (sensing) 정보를 뇌로 보내 뇌에서는 이를 처리하고 정보화하게 된다. 외부에서 전달된 신호 (signal) 를 뇌에서는 정보로 처리를 하고 생각을 하거나 행동을 하도록 한다. 모든 생명체가 감각을 가지는 일차적인 이유는 자신의 생명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요소를 빨리 알아내서 이를 대처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차적인 이유는 과학의 목적과 동일할 것이다. 즉, 당장 위협의 요소는 아니지만 외부의 다양한 신호를 받아들이고 이를 체계화해서 일반화하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 연구 혹은 학문의 목적이다. 알프레드 화이트헤드 Alfred North Whitehead 가 교육의 목적에서 제시했던 낭만의 단계와 정밀화의 단계를 거쳐서 일반화의 단계를 가지게 된다. 이때 낭만의 단계에서 많은 정보를 얻는 과정에서도 정밀화의 단계에서도 감각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래서 시각적인 능력을 잃어버린 이들 더 구체적으로 태어나면서 아예 가져보지 못한 이들과 가지고 있다고 상실한 이들이 생각해보면 시각적인 내용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정보를 빠르게 받아들이는지 반대로 시각 장애를 가지고 있는 이들은 시각적 정보를 얻지 못하는지 생각할 수 있다.


마가렛 애트우드 Margaret Atwood 가 기술에 대해 했던 다음의 내용처럼

All human technologies are extensions of the human body and the human mind.  모든 인간 기술은 몸과 마음의 연장이다. 

인간 기술의 발전은 인간이 가지는 감각 그리고 그 감각을 통해서 빠르게 신호를 받아들여 정보를 만들어내고 싶은 인간의 노력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정의는 기술에 대한 성격을 더욱 정확하게 해준다. 안경이나 보청기 뿐만 아니라 현미경 망원경까지 인간이 가지는 감각을 확장해주고 일반적인 인간 능력으로는 얻어내기 힘든 영역 domains 까지도 정보를 얻어내려고 하는 인간 감각의 연장 혹은 확장이다. 감각은 본능에 가깝기 보다는 오히려 이성에 더 가까운 것이고 학문의 이유이기도 하다. 세상의 원리를 알아내기 위해서 많은 것을 감각하려고 하는 과정은 인간의 가장 활동적인 연구 내용이기 때문이다. 감각이란 상당히 능동적인 활동이다. 외부의 자극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위협적인 신호라고 해도 반응하지 않을 것이고 모든 이들이 관심을 보인다고 해도 무관심하다면 전혀 알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감각이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자연의 법칙같은 것이라기 보다는 세포가 에너지를 소모해서 세포 안으로 필요한 영양소를 가지고 오는 능동수송 active transport 에 더 가깝다.


공감에 대해 이야기하면 공감을 영어로 무엇이라 표현하는지 부터 설명하는 이들이 많다. 영어로 sympathy 와 empathy 가 있고 이 둘의 차이는 sympathy 는 '동정하다/측은히 여기다' 라고 해석하고 empathy 는 '공감하다' 이고 마치 sympathy 보다는 empathy 를 가져야 하는 감정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한때는 의사였다가 한때는 대선주자였던 누군가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이 차이점에 대해서 이야기해서 마치 사실처럼 되어버리고 마치 두가지 중 empathy 가 더 우위가 되어버렸고 하나의 편견처럼 되어버렸지만 sympathy 란 상대방의 상황 condition 이나 환경 circumstance 때문에 미안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상대방의 가족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상황에 대해서 간단하게 "I am so sorry for your loss" 라고 하는 것이 가장 간단한 sympathy 의 예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공감한다고 생각해서 상대방의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때리고 나쁜 아버지였고 최근까지도 상대방을 힘들게 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잘 안다고 해서 상대방의 속마음에 공감한다고 "이제 속시원하겠네" 라고 말한다면 괜찮을까 생각해 보자. 그래서 sympathy 를 동정하다/측은히 여기다 라고 골라 해석하지 않고 위로하다 연민을 느끼다라고 충분히 번역할 수 있는데 그 부분을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



[연민의 가치에 대해서...]

반대로 생각해 본다. 누군가를 크게 공감하는 능력이 만드는 현상이 있다. 바로 자신을 납치한 이에게 동조하고 감화되는 비이성적인 현상을 바로 스톡홀름 증후군 Stockholm syndrome 이 있다. 사회적인 법률을 떠나 자신을 납치한 이를 이해하고 크게 공감하는 능력을 가진다면 단순히 동정과 공감으로 구별해서 empathy 의 능력을 강조한다면 스톡홀름 증후군을 가지는 인질은 공감 능력의 성자일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에서 우리가 비이성적인 현상이라고 말을 하는 이유는 바로 사회라고 하는 공감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감수성에 대한 단상


시대 (역사) 와 사회 (문화) 를 떠나서 무조건 죄가 되는 것이 있을까 생각한다. 즉, 문명이 없던 원시 인류에게 죄라는 것이 존재했을까 궁금한 것이다. 생존이 목적이였던 그 때에도 모르긴 몰라도 자신과 같이 수렵을 하는 동료를 먹으면 안된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일부 생명체는 자신과 유전적으로 비슷한 개체를 잡아먹기도 하지만 심지어는 가끔 영장류에서도 같이 살아가는 공동체 같은 개체 사이에서도 죽이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생존을 위해서 잡아먹는 경우는 쉽게 볼 수 없다. 단순하게 유물론 관점에서 바라보면 주변에 있는 인간들은 그냥 단백질과 지방 등으로 이루어진 아주 괜찮은 영양 공급원이지만 극한의 상황에서 죽음을 피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거나 사람 고기를 먹는 경우는 극도의 불쾌함을 가지기도 한다. 물론 공감의 능력으로 상대방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정말 처음부터 인류는 식인에 대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피해야 하는 것이라고 존재하면서 인식하고 있었을까 의문을 가지게 된다.

문화인류학을 통해 살펴보면 식인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생존하기 위한 과정이기 전에 하나의 의식으로 이루어진 경우도 많이 살펴볼 수 있다고 한다. 파푸아뉴기아의 포어족은 장례 의식 중에 죽은 가족의 시체를 먹는 식인 문화가 있었다. 그들은 죽은이의 영혼과 같은 개념을 통해서 죽었지만 시체를 나누어 먹어 같이 살아가게 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죽은 이의 시체를 먹는 인육 섭취의 과정은 불쾌한 과정이 아닌 당연히 마무리해야 하는 하나의 과정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먹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영양학 혹은 감염의학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이런 식인 풍습은 상당히 나쁜 것이다. 우선 시체에서만 발생하는 세균에 의해서 감염될 가능성도 높고 시체의 보관 상태를 고려해도 인육의 상태가 좋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학적으로는 이 포어족의 식인 풍습은 새로운 발견을 하도록 했다. 쿠루병이라고 운동장애를 시작으로 전신에 걸친 신경학적 마비 증상이 높은 비율로 발생하는데 현재는 감염성 높은 뇌조직을 섭취해서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감염성 높은 단백질을 프라이온 Prion 이라 부르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서 한참 논란이 일었던 광우병 - 소해면상뇌증 (bovine spongiform encephalopathy, BSE) 과 사람에 발생하는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 (CJD) 등의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인간 뿐만 아니라 동종 혹은 유전적 유사성이 높은 동물들의 영양학적 섭취에서 문제가 일어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단백질은 기본적으로 모두 영양학적으로 모두 분해되어 자신에게 필요한 단백질을 다시 조합해서 만들어내는 과정을 가지고 그 단백질을 만들어 내는 설계도가 유전자인데 이미 만들지도 않은 재료 중 완성품이 있을 때 어떤 질환이 일어날지 예상하기 힘든 것이다.


다시 넘어와서 식인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놓고 보아도 이제는 식인이 인간이 저지르는 나쁜 짓이라고 모두 공감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모든 문화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존에 관련된 극한의 상황에서도 어느정도의 예외는 허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영화 하트 오브 더 씨 In the Heart of the Sea (2015) 나 얼라이브 Alive (1993) 과 같은 예가 있다. 그리고 현재도 국제법상으로는 식인은 중죄이지만 어쩔 수 없는 생존의 문제가 있을 때는 예외적으로 죄를 묻지 않기도 한다. 살인의 경우도 비슷하다. 미국과 같이 광범위한 정당방위가 인정되는 국가(주)에서는 상대방을 죽이고도 기소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 기소한다고 해도 실형을 살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때로는 살인에 의한 희생자보다 정당방위에 의한 희생자가 더 숫자가 많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과정에서 정당한 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런 정당방위는 암살을 하고도 형사 처벌을 받지 않는 이야기로도 자주 사용되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정당방위의 범위가 너무도 협소하여 때로는 자신의 아내를 지키기 위해 남편이 막은 강도가 죽어도 남편을 형사처벌을 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어느 정도의 정당방위가 허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점은 정당방위가 인정되는 범위는 인간이 가진 보편적인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문화적인 가치보다도 오히려 법률적인 적용 내용이 더욱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어느정도 정당방위에 의해서 행동해도 되는지는 형법이 정하는 범위가 어느정도인지가 중요하지 의도나 과정은 참고가 될 뿐이다. 그래서 정당방위가 상당히 넓게 인정되는 미국의 경우 총기 범죄가 많은 곳에서는 총기로 오인되는 물건을 가진 것만으로도 정당방위가 인정되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정당방위로 누군가를 죽인 사람이 가지는 죄책감이나 도덕적 감정은 나중의 문제이다.

우리가 가지는 감수성을 생각하게 된다. 감수성이란 영어로 sensibility 라고 해석하지만 이 느낌은 얼마나 감각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지 마치 볼 수 있는가? 들을 수 있는가의 sense + ability 가 아닌가 싶어진다. 그래서 감수성이란 마치 타고난 능력 그리고 가지고 있는 능력처럼 해석되기 쉽지만 식인 혹은 살인이라는 주제를 통해 살펴봐도 모든 식인이나 살인조차도 죄를 묻기가 어려울 때가 있고 오히려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죄인지 아닌지보다 인간의 행동 / 말이 가지는 사회적 감수성에 비추어 어느정도 용납이 가능한지 물어야 할 때가 더 많다. 그리고 결국 그 죄에 대해서 벌을 묻는 주체가 사회이기 때문에 사회가 가지는 감수성의 정도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종종 감수성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개인의 능력 혹은 개인이 가져야 하는 덕목처럼 느껴지지만 오히려 사회의 결과물인 경우가 더 많다.


사회적 감도


핸드폰을 쓰면서 감도가 떨어져 신호가 잘 잡혀 혹은 신호가 좋다 라는 표현을 할 때 기술적으로 자주 쓰는 단어가 감도 sensitivity 이다. 감도가 좋으면 외부의 작은 신호 변화를 감지할 수 있어서 이를 감각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청각이 좋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외부의 소리 자극에 더 반응하기 쉽다. 반대로 그렇게 감도가 높은 이들은 그만큼 외부의 자극이 많이 들어오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면 하나의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그만큼 감도는 양면적인 측면이다. 감도를 높여서 감각을 하면 많은 자극을 받아들일 수 있어 정보를 높일 수 있지만 쏟아지는 정보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처리하지 못하면 일상이 정보의 스트레스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화재 경보기의 감도가 높아 자주 잘못된 경보를 울리게 되면 화재 경보기를 꺼놓는 경우를 보기도 한다. 즉, 감도도 중요하지만 그 감각된 정보를 어떻게 잘 처리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처리하는 정보처리 과정이 그만큼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회적 감도 social sensitivity 를 생각해보아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다. 요즘에는 자주 거론되는 성감수성을 생각해보자. 성감수성이 낮았던 과거에는 성범죄에 대해서 지나치게 관대할 때가 많았다. 대부분 성범죄의 피해자였던 여성들이 주장하는 것보다는 합의된 성관계가 아니냐 혹은 합의를 보아서 다른 이득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자신의 성을 이용한 것이 아니냐는 조사를 받기도 하고 심지어는 성고문이 수사의 한 방법이라고 자랑하던 공권력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도 아니다. 아무리 강도가 높아도 성범죄에 대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공권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성감수성은 낮았을 것이고 그만큼 높은 성범죄의 피해자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는 커녕 가해자들은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가해자들이 그렇게 죄의식을 제대로 가지지 못하는 이유를 개인에게 돌릴 수 있지만 무엇보다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감도가 낮기 때문에 즉, 성범죄에 대한 감수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꺼진 화재 경보기때문에 화재가 일어나도 대피하지 못해 수많은 인명피해를 보는 것처럼 그 사회의 사회적 감수성이 없다면 결국 그 사회가 화재처럼 큰 충격으로 피해를 입는 일이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아무런 문제없이 살아가게 된다.

결국 사회적 감수성이 낮은 사회에서는 총체적인 문제가 터져 상당수의 피해자가 생기기 전까지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리고 그런 감수성의 낮은 반응은 의외로 우리들 사이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무슨 일 있겠어?", "그게 뭐 어때서?" 혹은 "너무 당연한 것 아니야?" 와 같은 반응들은 우리의 사회적 감수성을 낮추는 사회적 인식에서 나오는 표현들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새로운 감각 그리고 새로운 감수성


인간에게는 오감(五感)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오감은 가장 기본적인 것일 뿐이고 새로운 기술에 따라 새로운 감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사회관계망서비스 SNS 을 잘하는 것도 하나의 감각이 될 수 있고 인터넷의 기술을 개발하거나 만들어 내지 않아도 잘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유용할 때가 많고 잘 사용하지 않는 이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효과적으로 얻어내는 것만을 생각해도 기술을 잘 이용하는 것도 인간의 새로운 감각으로 인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마치 스타트렉 디스커버리 시리즈에 나오는 사루 Saru 와 같이 칼피언족은 자신의 대량살육을 감지할 수 있는 후두부에 있던 위험감지신경 (threat ganglia) 과 같이 다양한 종족들이 기술에 따라서 새로운 감각기관을 만들어 내는 세상같다. 그래서 아직 기술이 잘 적용되지 않거나 초기 도입 상태라면 그 기술을 통해 감각할 수 있는 이들이 적고 당연하게 그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감각할 수 있는 감수성도 거의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대표적인 예가 바로 디지털 저작권이나 개인정보가 있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소위 디지털 감수성은 기술의 속도를 절대 따라갈 수 없고 예전에는 대기업조차도 개인정보를 모으는 것에 대한 필요성은 강조하면서도 그 개인정보를 어떻게 보호하고 악용되지 않을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자신의 서버에 저장하고 있던 암호화되지 않은 개인정보들이 유출되면 결국 그 유출된 개인정보에 의해서 새로운 피해자들이 생기게 된다. 그때는 그리고 여전히 이런 개인정보에 대한 감수성이 높지 않기 때문에 개인이나 기업이나 비밀번호나 개인정보는 개인이 관리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런 범죄에 의해서 피해를 보아도 결국 개인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당연하 사회적 감수성이였다. 그런 시절에는 개인정보를 적극적으로 유출시켜 팔거나 악용하는 것이 그리 큰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많은 사람들은 수많은 피해자를 만들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낮은 디지털 감수성의 사회에서는 자신의 비밀번호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거나 심지어 타인에게 알려주는 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제대로 된 비밀번호 관리를 하지 않는 (2차 인증이나 비밀번호 관리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않는) 보안 감수성에서는 타인에게 자신의 모든 개인정보뿐만 아니라 범죄에 쉽게 이용될 수 있는 문을 쉽게 열어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쉽게 알려준 특정 사이트의 비밀번호를 통해 남자친구는 다른 서비스의 계정에 접속하고 이메일이나 대화내용 그리고 중요한 개인정보를 얻어내고 이를 이용하는 것을 보면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비밀번호 공유하는 것이 어떤가 하는 낮은 감수성과 알려준 비밀번호인데 다른 곳에 들어가는 것이 어떤가 하는 낮은 감수성으로 결국 예상할 수 없는 많은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개인정보에 대한 감수성을 바라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공간이 바로 인터넷이다. 자신의 민감한 개인정보를 목적없이 공개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개인정보를 공개하는 것이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알아야 한다. [개인정보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 인공지능 시대 개인정보란 무엇인가?] 에서 개인정보를 두가지로 구별했다. 우선 바로 알 수 있는 개인정보인 '본연적 개인정보' material privacy 이라 설명했고 바로 개인정보를 알 수 없지만 유추해서 알아낼 수 있는 근거를 포함하는 '가공된 개인정보' manufactured privacy 으로 구별했다. 자신의 집이 어디인지 알려주지 않겠지만 아파트단지 사진이나 주변의 간판 등을 통해서 알아낼 수 있는 개인정보이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올린 아이(들) 사진을 올릴 수 있지만 나쁜 마음을 먹는 납치범의 좋은 목표물이 될 수도 있다. 메신저나 닫힌 공간에서 자신의 성범죄 등을 대화하고 공유하는 이들도 개인정보 뿐만 아니라 성범죄에 대한 낮은 감수성이 만드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상에는 닫힌 공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인터넷은 더욱 그렇다. 낮은 성감수성을 가지고 인격의 수준을 의심할 수 있는 이들의 대화 내용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사회적 감수성이 그정도인데 조금 닫혀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회적 감수성의 발명 


사회가 가지는 감수성은 사회 안에서 지켜야 하는 규칙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그런 규칙을 통해서 어떤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할 수 있다를 판단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결국 법률에 의해 죄를 짓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법률이 제시하는 기준에 따라서 행동은 제한된다. 예를 들어 음란물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잘 인지한다면 그런 행동은 쉽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법률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이 혹은 그런 법률이 있어도 나는 피해갈 수 있다는 자신이 있는 이들에게는 그런 법률은 어떠한 장벽도 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사회적 감수성이 높다고 하더라도 개인이 가지는 감수성이 낮게 된다. 종종 볼 수 있는 기득권자들의 갑질 논란도 결국 자신이 법률적 테두리를 벗어나 즉 사회적 감수성과는 상관없이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감수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 감수성이 존재하는 이유는 법률 혹은 사회가 가지는 규법과 동일하다. 같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감수성이 존재하지 않는 개인은 결국 누군가를 피해자로 만든다. 갑질을 해도 어떠한 처벌을 받지 않는다고 했을 때 권력이 가지는 그 불공평함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사실 그 갑질의 피해자는 항상 존재한다. 누군가는 힘들고 고통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법률과 규칙은 누군가 불편은 받을 수 있지만 최소한 그 피해로 고통받는 이는 없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사회적 감수성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자신이 만든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만든 고통마저도 정당화하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법률과 규칙은 인간의 논리와 이성으로 만들 때 불필요하거나 현실적이지 못한 것들을 만들어 낸다. 머리로 만든 법률은 결국 인간을 비현실적인 현실에서 살게 만든다. 그래서 법률은 오히려 인간의 고통에 관심가져야 한다.

소아 당뇨를 가진 아이들을 만날 기회가 있다. 한국에서 소아 당뇨를 가진 아이들은 따돌림 당하는 아이들이 많다. 주사기를 가지고 다녀야 하고 급식시간은 쉽게 같이 하기 어렵고 심지어는 겉으로는 아무런 특별한 점이 없는데 소아 당뇨라는 말만 듣고는 설탕을 억지로 먹이는 아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아이들의 그 잔인성은 어디에서 배운 것일까 생각하게 된다.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 본성이라 생각하기에는 인간본성에 대한 배신감이 들고 주변에서 학습했다고 하면 그걸 학습하게 한 사회가 원망스럽기 때문이다. 인간본성에 대한 배신감보다는 결국 학습한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같은 소아 당뇨 아이들이지만 미국이나 싱가포르와 같은 나라에서 대하는 태도를 보고 나서였다. 주변 아이들도 소아 당뇨 아이들이 그저 눈이 안 좋아 안경쓰는 것처럼 음식을 조심해야 하고 필요하면 인슐린 주사도 맞아야 한다는 것이라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병이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잘 인식하고 같이 어울리고 필요하다면 좀 더 배려하고 도와줄 수 있는 친구라고 생각한다. 같은 질환이지만 나라에 따라 인식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것은 분명 인간 본연의 본성이 아닌 사회에 어떤 감수성을 제시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렇게 제시한 감수성은 결국 사회가 가지는 예의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 예의란 결국 타인에게 함부로 상처주지 않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소아 당뇨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아이들은 예의없는 어른들에게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단거 많이 먹었지?" "도대체 몸을 어떻게 관리했길래 그런 병에 걸려?" 라는 질문을 주변에서 특히 어른들 그리고 그 어른들에서도 자신의 가족들에게서 듣는다고 한다. 예의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예의란 나이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배려를 얼마나 배웠는지의 문제이다. 그래서 단거 많이 먹어 소아 당뇨 걸린 것 아니냐는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자신의 무식함으로 타인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내는지 모르는 무지와 무례일 뿐이다. 아직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만들기 어려운 아이들에게 그런 질문은 결국 자신에 대한 질책으로 돌아가고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하는 상처를 가지게 된다.

항암치료를 마치고 학교에 복학했을 때였다. 복학했기 때문에 나이 한살 어린 친구들과 공부해야 했고 모두 키 순서대로 번호가 부여되었기 때문에 난 마지막 번호를 받았다. 키도 작은데 항암치료로 살은 찌고 머리카락은 거의 없는 소위 볼품없는 모습이였지만 내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자존감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국어 시간이였다. 선생님은 질문을 했고 내 번호에 내가 대답을 하니 질문은 멈추고 "이반은 몸무게 순으로 번호 매겼어?" 라고 뜬금없이 말했다. 반 전체는 그 농담에 모두 웃었지만 난 웃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서러움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웃자고 한 농담이 나에게는 아직도 가끔 꿈에서 나타난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냥 잊어버릴 수 있었겠지만 내가 어쩔 수 없는 내가 선택하지 않는 모습을 가지고 그것도 항암치료로 겨우 이겨낸 그 순간에 받아들이기에는 날카로운 상처였다. 그래서 그런지 꿈에서 악몽에 그 국어 선생님이 나올 때가 있다.

결국 인간에 대한 감수성은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줄 수 있는지 아닌지를 잘 판단할 수 있는 일차적인 기준이 된다. 내가 이 말을 했을 때 어떤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흑인이라 차별하거나 성소수자여서 싫다고 생각하고 말할 때 그 말이 인간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 생각해야 한다. 성소수자니깐 싫다는 이유로 혐오를 하고 차별을 한다면 결국 성소수자는 죽어도 된다는 끔찍한 역감수성 negative sensibility 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일부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소수자들은 자신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부터 설명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성소수자는 역사와 의학으로 살펴보아도 그들의 탓이 아니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으로 차별하는 것은 예의없는 행동임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감수성이란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을 예의를 만드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런 예의를 사회적으로 합의한 것이 규칙이고 법률이 되어야 한다.


왜 인간은 상처주는가... 


인간의 상처에 대해 생각하면서 내가 주는 상처에 대해서 더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만든 원칙이 있다. 결정할 수 없는 내용과 결정할 수 있는 내용으로 구별하고 결정할 수 없는 내용으로 이유를 대어 상대방에게 이야기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 앞서 말한 성소수자들에 대한 개인적인 불쾌함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내용이라면 그 내용으로 감정적으로 대하거나 그 이유로 차별을 하지 말자는 것이다. 아주 사소해 보이지만 혈액형을 가지고 B형이니깐 어느 지방 출신이니깐 심지어는 남자이기 때문에 ... 라는 이유로 상대방을 쉽게 판단하거나 그 편견으로 다음 논리를 이어갈 때 대부분 사람들은 상처준다.

누군가 좋은 감정으로 만나려 하는데 남자 여자 나이차이가 많았다. 좋은 만남을 시작할 때 여자 부모님들은 남자를 만나서 이것저것 묻기 시작한다. 결혼 상대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더 궁금한 것이 많을 수 있지만 우선은 나이가 많은 것부터 신경쓰이기 시작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나이 많은 것으로 이어진 걱정은 바로 '결혼한 적은 없었는지 그리고 동거한 적은 없었는지' 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결혼하지 않은 것을 증명할 수 있는 호적등본을 요구했다. 물론 그러한 걱정을 해소하기 위해 한국의 행정 시스템에는 '혼인관계증명서'가 존재했다. 나이는 어떻게 결정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 나이로 인해서 결혼한 적이 없는지 묻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질문이였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결혼한적은 없는지 그리고 동거한 적은 없는지를 묻는 질문들은 무엇을 걱정하는 것인지 듣는 이는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같은 질문을 누군가 자신의 딸에게 했다면 그 기분이 어떨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역지사지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런 질문들이 상대방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생각을 하고 던진 질문인지 고민은 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두려움은 이성적인 질문보다는 두려움에서 가장 먼저 해결하고 싶은 질문을 꺼내고 그렇게 꺼낸 것은 상대방에게 큰 상처를 내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그런 질문들은 사회적 감수성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내가 어떤 질문을 해도 괜찮을 것이라는 일종의 갑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례한 질문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주 근본적으로 상처낸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이미 결혼한적 없는지 그리고 동거는 한적 없는지 결국 내 딸을 만나기 전에 어떤 이를 만나 방탕한 생활을 한 사람은 아니냐는 질문으로 들릴 뿐이고 그것은 상대방의 존재에 대한 질문이라기 보다는 상대방이 나쁜 인간이지 않은 것을 증명하라는 폭력일 뿐이다.

[인격적인 상처에 대해서 ─ 누구의 편이 된다는 것] 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전한 적이 있다.

그래서 사람의 말은
가볍게 할수록 상대방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무겁게 할수록 상대방의 마음을 가볍게 만든다.  ─ 道馬 垣俊

가볍게 한 말 무겁게 한 말이라고 표현을 했지만 지금까지 적어온 감수성을 적용하면 감수성이 낮은 말과 감수성이 높은 말로 대체해도 같을 것이다. 결국 감수성이란 사회가 만든 규칙과 법률의 테두리 안에서 사람에 대한 공감을 통해 만들어진 배려가 얼마나 훈련되고 익숙해졌는가를 뜻할 것이다. 화상입은 아이에게 "너 이게 뭐야?" 라고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화상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지 모르니 뜨거운 것을 다룰 때 도와줄 수 있는 것이고 소아 당뇨 아이들에게 "단 것 많이 먹어서 그래?" "몸을 어떻게 관리해서 그래"라는 심판자같은 말은 차라리 하지 않고 입닥치고 있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인권 감수성


인간이 인간에 대한 감수성을 훈련하고 행동하기 전에 말하기 전에 이에 비추어 해야하는 말인지 아닌지 한번 시간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감수성이 가지는 가장 큰 기능일 것이다. 소위 인권 감수성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경찰이 조사하는 과정에서 수사의 편의성을 위해 조사받는 사람들의 기분을 나쁘게 하거나 불편하게 심지어 상처를 준다면 그것은 인권 감수성이 낮은 사회의 모습이다. 그래서 인권 감수성이란 인간이 덜 상처받고 덜 불편할 수 있는 반대로 공권력을 가지는 조사기관은 조금 더 불편하고 까다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결혼을 증명하라는 것은 두려움에 의해 감수성이 무너진 상태라면 공권력이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욕심에 의해 감수성이 무너진 상태일 것이다. 결국 감수성은 인간의 두려움과 욕심 (fear and greed) 으로 낮아질 때가 많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인권 감수성이 영어로 무엇인지 물어보면 대부분은 human right sensibility 라고 대답하지만 사실 인권 감수성을 human right sensibility 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sensitization of human right 혹은 아예 training 이라는 더 명확한 설명일 것이다. 즉,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란 하나의 능력으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고 생활화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일상에서 항상 훈련해야 만들어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가 변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내용들이 변화한다면 당연히 그 변화에 따라서 달라져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대간의 갈등이란 변화한 세상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달라진 사회적 감수성을 이해하지 못할 때 생길 것이다. 예를 들어 여자가 해야하는 가족 안에서의 역할이나 위치 등으로 많은 상처를 줄 때가 많다. 아이들의 육아는 여자의 몫이고 경제적인 활동은 남자가 해야 한다는 지난 시절의 생각들은 그 당시에는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일 수 있지만 인권 감수성에 비추어 보면 개인의 행복보다는 사회안에서의 기능적 역할을 얼마나 강조해왔는지 생각하게 된다.

인권 감수성이 높은 사회에서는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집단 혹은 타인에 대한 뒷담화를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인권 감수성은 대놓고 상대방에게 예의없는 상황보다는 일반화해서 만드는 편견 예를 들어 '중국사람들은 원래 그래' 혹은 '그 지방 사람들은 ...' 과 같이 편견들을 많이 듣게 된다. 그리고 사람 들 앞에서는 예의를 중시하지만 뒤돌아서 상대방이 없을 때 함부로 평가하거나 뒷담화하는 사람들에게도 인권 감수성은 쉽게 기대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래서 인권 감수성은 밝은 곳에서보다 어두운 곳에서 더 잘 보이게 된다. 종종 자신의 SNS 계정에 자신의 연인 사진을 올리는 이들이 있다. 상대방에게 허락을 받았다고 해도 조금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초상권 뿐만 아니라 그런 경우 상대방을 하나의 인격체로 생각하기 보다는 나와 만나는 하나의 소유물 혹은 나는 이런 사람과 만나고 있어와 같이 이야기하고 싶은 악세사리처럼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개인을 하나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상대방에 대한 행복은 커녕 인권조차도 쉽게 훼손할 때가 있다. 특정 사이트 안에서는 자신의 연인이 일하는 곳을 공개하고 자신과의 은밀한 내용을 사람들에게 자랑삼아 글을 올리기도 한다. 그런 이들에게는 인권 감수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단체 대화방에서 여자들과 성관계를 맺었다는 내용을 자랑하고 그런 동영상을 올리는 행동은 결국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인간조차도 도구일 뿐이라는 기대하기 힘든 감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감수성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 


감수성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아주 간단하다. 겉으로는 예의 바르고 평화로울지 몰라도 오만과 편견으로 사람들에 대한 불신으로 결국 경쟁에 유리한 사회가 될 것이고 그런 사회의 목적은 아주 확실하다. 바로 생존일 뿐이다. 인간의 고통에는 관심가지지 않고 누군가의 아픔은 그냥 사실일 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잘 생존하다가 갑자기 빠진 불행 속에서는 그 누구의 공감도 없이 스스로의 고통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강한 진통제를 사용하면 통증이 없으니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강한 진통제를 먹으면 날카로운 물건에 손이 상처가 깊게 나고 피가 심하게 흘러도 잘 모를 때가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통증이 사라지면 좋겠다. 단 하나도 안 아픈상태였으면 좋겠고 그런 상태를 위해 참지 말고 진통제를 먹어야 한다고 하지만 통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 몸에서 어디가 불편한지 아픈지 빠르게 알아낼 수 없다. 그래서 불편하고 사라졌으면 하는 우리 몸의 반응들 중에는 꼭 필요한 것들이 많다. 염증이 생기면 아프지만 염증이 생긴 부위를 통해 어디가 문제인지 빠르게 알 수 있고 염증이 만들어진 부위에 더 집중해서 더 빨리 치료할 기회를 알 수 있다. 그래서 통증에 관심을 가지는 것처럼 타인의 고통에 사회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오만과 편견에 쌓여 많은 것들이 당연한 세상에서 조금은 아닐 수 있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의 시작은 결국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세상의 고통에 더 관심을 가지고 감지한다면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감수성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단테의 신곡은 문학적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지옥, 연옥 그리고 천국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현생에서의 삶 이후 자신의 행동들에 따라서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단순히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선행을 해야한다는 교훈을 떠나서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지옥 안에서 만나는 이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단테가 지옥을 들어가는 곳 앞에서 마주하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나를 통해 슬픔의 도시로 들어갑니다.
당신은 나를 통해 영원한 고통으로 들어갑니다.
당신은 나를 통해 파멸된 인간들 속으로 들어갑니다.
─ 단테, 신곡 3장  
Per me si va ne la città dolente,
per me si va ne l’etterno dolore,
per me si va tra la perduta gente.
─ Dante Alighieri, Divine Comedy Inferno, Canto III   
THROUGH ME THE WAY TO THE CITY OF WOE,
THROUGH ME THE WAY TO ETERNAL PAIN,
THROUGH ME THE WAY AMONG THE LOST.
─ Dante Alighieri, Divine Comedy Inferno, Canto III 


슬픔의 도시는 città dolente 으로 슬픔이란 뜻도 있지만 후회 혹은 상처만이 남은 곳이기도 하다. 영원한 고통은 회개하지 못하고 계속 반복되는 고통에 빠지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파멸된 인간들 속으로 란 말은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이들의 세상이다. 전체적으로 지옥은 단절 그리고 무관심 무엇보다 함께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공간들이다. 아마도 감수성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이처럼 관계에서 서로 상처만 남고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서로의 존재가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회적 감수성 ─ 인간의 사소한 상처에 대해서

Wednesday, August 8, 2018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

정호승

서울에 푸짐하게 첫눈내리는 날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고요히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추기경 몰래 명동성당을 빠져나와


서울역 시계탑 아래에 눈사람 하나 세워놓고
노숙자들과 한바탕 눈싸움을 하다가
무료급식소에 들러 밥과 국을 퍼주다가
늙은 환경미화원과 같이 눈길을 쓸다가


부지런히 종각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껌파는 할머니의 껌통을 들고 서 있다가
전동차가 들어오는 순간 선로로 뛰어내린
한 젊은 여자를 껴안아 주고 있다가


인사동 길바닥에 앉아 있는 아기부처님 곁에 앉아
돌아가신 엄마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다가
엄마의 시신을 몇개월이나 안방에 둔
중학생 소년의 두려운 눈물을 닦아주고


경기도 어느 모텔의 좌변기에 버려진
한 갓난아기를 건져내고 엉엉 울다가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부지런히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와


소주를 들이켜고
눈 위에 라면박스를 깔고 웅크린
노숙자들의 잠을 일일이 쓰담듬은 뒤
서울역 청동빛 돔에 올라가
내려오지 않는다
비둘기처럼.



주님, 평화의 안식을 주소서...

이땅에 사랑을 남기고 가셨듯이 하늘 나라에서 평화의 안식속에서 편히 쉬소서...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 - 정호승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등에 있는 짐 때문에 늘 조심하면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등의 짐은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한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사랑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로 남의 고통을 느꼈고 이를 통해 사랑과 용서도 알았습니다.
이제 보니 내등의 짐은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미숙하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가 내 삶의 무게가 되어 그것을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성숙시킨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겸손과 소박함의 기쁨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 등의 짐 때문에 나는 늘 나를 낮추고 소박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에게 기쁨을 전해 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물살이 센 냇물을 건널 때는 등에 짐이 있어야 물에 휩쓸리지 않고,
화물차가 언덕을 오를 때는 짐을 실어야 헛바퀴가 돌지 않듯이
내 등의 짐이 나를 불의와 안일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게 했으며,
삶의 고개 하나하나를 잘 넘게 하였습니다.

내 나라의 짐, 가족의 짐, 직장의 짐, 이웃과의 짐, 가난의 짐, 몸이 아픈짐,
슬픈 이별의 짐들이 내 삶을 감당하는 힘이 되어 오늘도 최선의 삶을 살게 합니다.





내등에 짐


대한민국은 인터넷 강국이다. 인터넷 속도만 생각해봐도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자원, 기기 등을 생각해도 분명 인터넷 강국이다. 이제 인터넷은 선택이 아닌 필수처럼 되어버린 세상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인터넷을 일부러 사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스마트폰이나 다양한 통로를 통해서 이미 인터넷의 사용자인 것을 모르고 쓰고 있는 중이다. 인터넷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미 인터넷과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기기들 devices 과 접촉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용 빈도와 사용량이 다를 뿐이지 많은 부분 인터넷에 의존하게 된다.


이렇게 인터넷이 보급되고 보편화되기까지 상당히 빠르게 발전했던 것이 사실이다. 한때 TV 에는 인터넷 서비스를 위한 업체들 ISP; Internet Service Provider 광고들이 가득했었다. 그만큼 인터넷이 기업이나 학교 뿐만 아니라 홈 네트워크를 위한 가정용 인터넷 선 보급은 급속도로 증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느정도 초기 보급이 끝나고 나면 이후 나타나는 현상은 빠른 인터넷 선으로 확장되는 과정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인터넷 서비스 업체들은 추가적인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이에 따라 가격을 적정선 유지하거나 약간 올리면서도 사용자 고객을 유지할 수 있는 전략을 세울 수 있다. 한때 100메가 속도를 자랑하던 시대에서 언제쯤 1000메가 = 1기가 선로를 보급시킬 것도 같은데 사실상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학교나 기업망은 이미 내부 선로는 1기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생각과 다르게 가정용 보급 라인이 1기가로 대체되지 않는 것도 마케팅이나 기업 전략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한번쯤 생각해볼 테마가 아닐까 싶은 부분이다.


인터넷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요즘 스마트폰도 속도가 빨라지며 자신이 쓸 수 있는 인터넷 속도가 마치 얼마나 자신이 첨단 기술에 잘 적응했는가를 나타내는 하나의 지표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은 마치 공기와 같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아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은 그에 대한 상당한 비용을 지불하며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터넷을 사용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인터넷이란 정확하고 구체적인 형태를 가진 대상인지 아닌지에 대한 생각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 시스템을 바라보는 시선 ─ 구조적 설계 사고 ] 에서 간단하게 설명했지만 단순히 사용자는 웹브라우저에서 자신이 들어가고 싶은 사이트를 입력하거나 터치하여 들어가지만 실제로 이 과정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복잡한 과정과 규칙을 거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원하는 페이지를 보여주는 것이 인터넷 사용자로 당연한 결과로 생각하지만 물리적으로 거대한 장비들이 처리해주고 그 장비들이 모두 연결될 수 있는 물리적인 선로들이 깔려 있고 그 외 필요한 통신 장비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원활하게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중 몇개의 요소만 사라지거나 작동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평소처럼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다.


이런 인터넷이 빨라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한느 것일까? 인터넷이 빨라졌다는 것은 상당히 추상적 개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객관적 내용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인터넷이란 세계 어디에 있는 서버 (서비스)에 접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터넷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상대적 결과가 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평소에 자주 들어가던 구글 메인 사이트에 들어가는데 인터넷 업체를 바꿔 보니 예전보다 더 빠르게 들어간다면 비교해서 더 빠르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른 변수도 고려해야 한다. 비교를 하던 그 순간에 구글 사이트가 내가 접속하는 요청을 빠르게 처리했는가 아닌가이다. 정말 운이 안좋아 인터넷 선로를 바꾸고 바로 구글 사이트를 들어가 보니 때마침 구글 사이트가 공격을 받아 반응이 느리다면 사용자는 구글 사이트가 느리다가 아닌 '인터넷이 느리다' 로 판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인터넷 사용에 관련된 몇가지 과정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사용자] ─ {접속 기기 (노트북 혹은 스마트폰 등) & 웹브라우저} ─ (입력: june.meson.kr) ─ {june.meson.kr 가 어떤 IP 를 가지는지 확인한다; DNS 서버} ─ {해당 IP 로 접속} ─ {인터넷 상에서 해당 IP 로 접속할 수 있는 경로는 만들어 접근한다} ─ {경로 상에 수많은 장비와 선로를 거쳐서 해당 요청을 서버에 통보} ─ {해당 서버가 요청한 내용에 맞게 결과를 보내준다} ─ {접속 기기의 웹 브라우저에서 수신받은 내용을 구성해서 표시} ─ [사용자 확인]

아주 간단해 보이는 웹사이트 접속조차도 인터넷은 복잡하고 여러 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어렵게 어렵게(?) 사용자에게 보여주고 사용자의 선택에 따라서 또 다시 적절한 페이지를 보여주는 과정이다. 이 모든 과정이 간단하게 '인터넷 쓴다' 라고 표현하는 과정을 약 1/100 정도로 축약해서 설명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복잡한 과정을 사용자는 거의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이 빠르다 느리다는 이 모든 과정에 관련된 장비, 선로, 아주 가까이는 사용자가 쓰는 기기의 성능까지도 좌우된다는 것이다.


인터넷이 빠르기 위한 조건들 

인터넷이 빠르다는 것은 내가 어떤 사이트에 접속하느냐에 따라서 좌우된다. 자주 사용되고 서버가 빠르게 대응하거나 혹은 나와 물리적인 네트워크가 가까이 있는 (예를 들어 학교 내 서버 등) 경우 인터넷의 속도는 빠르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아프리카 오지에 있는 펜티엄 4 CPU 가지고 만들어진 서버에 접속하는 경우라면 그 서버까지 도달하는 장비의 성능, 선로의 속도, 심지어 서버의 반응 속도까지도 느리다면 전체 인터넷 속도는 느려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인터넷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내가 목표로 하는 서버까지 가는 길이 느리지 않고, 그 길을 가는데 방해물이나 제한되는 요소가 없고, 사용자의 장비 (클라이언트) 와 서버의 장비 (서비스) 의 성능이 뛰어나 모든 처리를 빠르게 한다는 것이다.

가정용 인터넷이 빨라진 이유 중에 하나는 소위 백본망 backbone networks 에서 나온 가정용 선로의 속도가 100메가 (bps) 를 지원해주기 때문에 체감적으로 속도의 증가를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도 당연하지만 한번쯤 생각해야 할 내용은 100메가 라는 속도는 제한속도이고 만약 이 선로를 사용하는 사용자들이 늘어난다면 100메가를 사용자들이 나누어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가정용 선로로 들어온 인터넷을 여러명의 가족 구성원이 사용하는 기기를 '공유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공유하는 대상은 인터넷이기도 하지만 인터넷의 속도를 나누어 쓴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으로 사용자의 인터넷 지점에서 백본망까지 도달하는 속도도 빨라야 하지만 백본망에서 다른 백본망까지 연결되는 선로도 빨라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라와 나라를 연결해주는 해저 케이블 및 다양한 고속 선로를 만드는 이유이다. 실제로 일본에서 미국으로 이어지는 태평양 해저 케이블의 경우 일본에 지진이 일어나고 미국에 서버가 있는 웹사이트의 경우 심하게 느려지거나 접속이 불가능한 경우를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아무리 사용자의 컴퓨터가 성능이 좋고 서버의 성능이 좋다고 해도 해저 케이블이란 선로가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해 생긴 현상이다. 따라서 좋은 인프라 infrastructure 가 마련되어 있다면 사용자가 투자해서 인터넷을 빠르게 할 수 있는 부분은 접속 장비와 더 빠른 인터넷 업체의 서비스를 선택하는 것이다. 스마트폰 시장에서 사용자들에게 더 빠른 인터넷 속도를 이야기하는 것도 사용자의 접속 장비와 백본망까지 가는 선로 (무선망 포함) 가 얼마나 빨리질 수 있는가를 포함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이 충분히 빠르다면 사실상 인터넷은 급격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터넷이 빠른 것은 좋은 것인가? 

개인 사용자 입장에서 인터넷이 빠르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그만큼의 투자와 비용은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즉, 자신이 빠른 인터넷 속도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적절한 투자 혹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인터넷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 좋은 것인가? 라는 질문은 상당히 멍청한 질문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질문을 다르게 해본다. 모든 사용자들의 인터넷 속도가 모두 빠른 상태가 좋은 것인가? 뭐 개인의 인터넷이 빠른 것이 좋은데 모든 사용자로 확대한다고 뭐가 나빠질 것이 있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앞서 설명한 인터넷은 무한의 능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인터넷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물리적인 장비가 충분한 성능을 가진다는 것을 뜻한다. 즉, 내가 인터넷을 사용할 때 모든 장비가 충분히 뒷받침 해준다는 말은 관련된 모든 장비들이 내가 요청한 내용을 처리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정량적으로는 모든 장비들이 내가 인터넷을 쓰는데 충분한 자원을 제대로 쓰고 처리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장비는 항상 한계를 가진다. 이런 장비의 한계를 이용한 공격 중 하나가 디도스 (DDoS Distributed Denial of Service; 서비스 거부 공격) 공격이다. 예를 들어 어떤 웹사이트에 동시 처리 접속자수가 5만명이라고 하면 10만명의 사용자가 동시에 공격 웹사이트에 일시에 접속하게 하여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용량을 초과하게 하는 것이다. 결국 서버도 하나의 컴퓨터이기 때문에 CPU 및 메모리와 같은 물리적 자원 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의 성능, 관련 데이터베이스의 튜닝 정도에 따라서 동시 처리 접속자 수가 제한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점을 노린 것이다. 문제는 10만명의 동시 접속 공격자를 만드는 일인데 이것은 해커들이나 공격자들의 몫이기 때문에 특별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결국 이런 개념으로 접속하여 우리가 인터넷을 쓰는데 써야 하는 장비를 공격하는 방식을 DDoS 라고 한다. 여기에서 앞의 Distributed 란 말은 기존에는 한 클라이언트에서 여러개의 가상 클라이언트를 통해 공격을 하기도 했지만 이제 그정도쯤은 가볍게 막을 수 있기 때문에 분산된 distributed 형태로 클라이언트를 동원하는 것이다. 결국 서버에서는 전세계 각지에서 접속하는 비이상적인 클라이언트의 공격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런 서비스 거부 공격은 다양한 응용이 가능하다. 조금 네트워크 시스템 프로토콜에 대한 이해와 각 장비의 취약점 정도를 파악하면 다양한 장비의 서비스 거부 공격을 통해 인터넷 서비스를 마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응용(?)할 수 있다. 사실상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우리가 도메인으로 접속할 때 이 도메인 정보를 IP 정보로 해석해주는 DNS Domain Name Server 를 공격한다면 웹브라우저에서 입력한 도메인을 실제 IP 로 해석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사용자가 해당 서버의 IP를 직접 입력하지 않는 한 웹사이트를 사용하지 못하는 공격을 만들 수도 있다. 결국 보안이란 양날의 칼과 같은 것이라 사용자의 사용 범위를 제한하지 않으면서 악의적인 공격을 막아줄 수 있는 균형을 어떻게 잡는가의 문제이다.


식량문제를 바라보다. 

실제 전달하고 싶은 내용은 제대로 시작도 안된 상태에서 인터넷에 대한 이해를 위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서론으로 삼았다. 이제 실제로 이야기하고 싶은 식량 문제에 대한 내용이다. 인터넷이 식량문제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의구심을 가질 수 있지만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개인적인 궁금증의 시작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오늘 점심으로 더 맛있는 것, 더 건강하게 만드는 것 무엇을 먹을까 고민을 해도 마땅히 굶어 죽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사실상 많은 나라의 기아 문제 특히 심각한 출산한지 약 36개월이 되지 않아서 영양실조 및 기아 문제로 죽는 영아 사망에 대해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 심각성은 인지하기 어렵다. 얼마나 심각한지 아무리 다양한 미디어와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으로 보아도 막상 그때뿐이고 곧 이어 누군가 음식 사진을 올리면 군침을 흘리며 다시 더 맛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분명 그렇게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존재하는데 전세계 식량 중 먹지 않고 버려지는 음식 (식량을 포함하여) 은 전체의 1/3 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어떤 곳은 음식이 남아돌아 버려지고 낭비되는데 어떤 곳은 먹을 것조차 없어 죽는다는 것이다. 단순히 양의 문제를 떠나 이런 문제의 원인이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었다.


기아의 문제는 인류 역사의 문제인가? 

문제의 원인을 생각하다가 질문 한가지를 하게 되었다.

기아 문제는 인류 역사에 걸쳐 항상 존재하던 문제인가? 

이 문제에 대한 인류학적 해답을 제대로 해준 책이나 지식인은 아직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대의 역사에서 현대까지 생각해보면 항상 가난은 존재해왔고 빈곤 그리고 그 빈곤의 상태가 생계를 위협하는 '절대 빈곤'은 분명 있었다. 그 원인은 다양했다. 때로는 자연재해나 전염병에 의해서 인간이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의 한계, 때로는 이 자원을 가공할 수 있는 노동력의 절대 감소 등으로 식량화하지 못했던 시기도 있다. 그런 시기를 떠나 적절한 부와 경제력이 존재하고 식량도 존재하는 동시에 '절대빈곤'에 의한 죽음이 사회적 현상이 되었던 시기가 있었는가였다. 그리고 이제는 그 영역을 확대해서 전세계를 통해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대한민국은 '절대빈곤'에서 자유로운 국가인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가끔 도시화가 인간의 절대 빈곤을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는 도시학자들에게 물어보고 싶을 때가 많다.


반대로 역사상 절대 빈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모든 국민들이 먹고 사는 것에 별로 걱정하지 않은 경우가 있는지 생각해보고 싶다. 즉, 최소한 먹는 문제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는 그런 공동체 혹은 국가가 역사상 존재했는가를 묻고 싶다.


절대빈곤과 인터넷 

식량문제, 절대빈곤의 문제를 인터넷과 연결시키고 싶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단순히 인터넷이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뭔가 구체적인 장치로 적용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식량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아직 대답하지 못한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인터넷의 속성을 생각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여기에서 아직 대답하지 않은 질문을 다시 해본다.

인터넷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좋은 것인가? 

인터넷 사용자로 당연히 빠른 것이 좋다라고 대답하겠지만 한편 모두가 빠른 인터넷 속도라는 것은 결국 인터넷 자원은 사용할 수 있는 '사용자'에 한정된다는 사실에 집중한 내용이다. 쉽게 말해 인터넷을 전혀 사용할 수 없는 접속할 수 있는 지점 point 조차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질문은 전혀 상관조차 없는 질문이 되어버린다.


절대 빈곤에 놓인 사람들, 기아 문제를 겪는 아이들에게는 사실상 자신들이 먹을 식량이 있는가 없는가의 존재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얼마나 많은 양이 있는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결국 인터넷이 빠른가 느린가는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몫이지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즉, 우리가 항상 친근하게 인사하고 이야기 나누는 인터넷 사용자들, 소셜 미디어의 친구들은 모두 이런 인터넷 절대빈곤 (인터넷 사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과는 관계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런 사용자들에게는 더 빠른 속도의 인터넷이 세일즈 포인트 sales point 가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인터넷과 절대빈곤의 문제에서 첫번째로 끌어내고 싶은 문장은...

식량에 풍부한 접근성을 가지는 사용자 (소비자) 와 식량에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절대빈곤 사용자 (소비자) 는 인식의 대상 영역 자체가 다르다. 

따라서 식량문제 혹은 기아 문제의 해결책을 단순히 연민 혹은 인간애에 의존하는 경우에는 지속적인 관심과 문제의 해결을 위한 근본적인 접근이 어려울 수 있겠구나 싶었던 것이다.


기아 문제를 접근하기 위한 가상 실험

한가지 가상 실험을 시도해본다. 인류가 진화(?)해서 인간은 더이상 먹지 않고 일종의 인터넷 식량 internet food 를 먹으면 생존에 문제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단 하루에 정해진 서버에 접속을 해서 인터넷 식량에 접속해서 해당 페이지를 보아 확인해야 생존에 필요한 영양소를 얻을 수 있다고 가정하자. 즉, 이제 인간은 먹지 않고 심지어 영양성분이 농축된 알약을 먹지도 않고 인터넷 웹 사이트를 접속하는 것으로 충분히 살아가는데 영양소를 얻을 수 있는 최첨단 시대에 살게 되었다. (가상이지만 조금 황당하기는 하다...) 

이제 사람들은 정해진 시간에 웹 사이트에 접속해서 밥(?)을 먹는다. 하루에 필요한 영양소를 얻기 위해서 10군데의 웹 사이트를 들어가야 한다. 이런 상황이 실제 이루어진다면 자본을 많이 가진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인터넷은 생존에 꼭 필요하게 되었을 때 더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에 접속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자본의 힘으로 인터넷 사용을 제한하고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 (절대빈곤) 이 만들어질 것인가? 만약 인터넷 사용이 생존의 문제가 된다면 요즘처럼 공짜 무선랜을 사용하게 하는 일도 거의 사라지지 않을까? 심지어 흔하게 버려지는 구형 스마트폰이 쉽게 버려질 것인가? 가상 실험의 조건에는 인터넷은 현재의 기술 내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서 서버도 동시 사용 접속자수가 정해져 있고 빠른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 느린 인터넷을 사용할 수 밖에 없는 사람 등 현재와 같은 상황이라고 가정하게 된다.


희망하건데 모든 사람이 동시에 모두 빠른 속도로 접속할 수 있는 획기적인 기술이 개발되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한편 자원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는 한계성을 고려하면 어려울 것이다. 결국 인터넷 장비, 웹 사이트에 접근할 수 있는 접근성은 현재 얼마나 식량에 접근할 수 있는가와 관련되고 이는 결국 자본에 의해 얼마나 식량을 확보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연결되게 된다. 사실 현재의 인터넷도 공공재의 성격은 아니다. 인터넷 사용에도 직접, 간접적으로 사용료를 제공해야 사용할 수 있고 현재는 다만 그 사용에 있어 상당히 관대한 상황일 뿐이다. 만약 이처럼 인터넷이 식량의 문제, 생존의 문제로 연결된다면 현재처럼 관대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인류에게 인터넷을! 

인터넷을 사용하지 못해 죽어가는 빈곤층이 발생하면서 이를 보다 못한 유엔과 각국의 정상들은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모든 인류에게 인터넷을 사용하게 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기기를 보급시키고 웹 사이트도 확대하여 동시 접속자수를 충분히 확보하였다. 그렇다면 인류는 이제 기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굶어 죽는 사람들은 발생하지 않는 것인가? 이론적으로 기아는 사라질 것이다. 즉, 기술적 가능성을 떠나서 기아 문제의 근본적 문제와 해결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서 이런 황당한 가상 실험으로 인류의 전자적 진화(?)까지도 가정해보았다. 이제 온 인류가 기아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은 모든 인류에게 인터넷을 보급하는 것이다.

즉, 이런 황당한 가정과 상상을 한 이유는 인간이 빠른 인터넷을 쓰고 싶어하는 욕심과 더 넓은 범위에서 인터넷을 사용하고 싶어하는 욕심을 통해 다양한 네트워크 장비와 선로 등을 발전시켜 왔다. 즉, 보다 넓은 빠른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기술은 발전해왔던 것이다. 그렇게 네트워크를 확장시키는 과정에서의 특징과 문제점 등을 통해서 기아 문제와 같이 한정된 자원을 보다 다양한 사람들에게 보다 빠르게 전달하지 못하는가의 문제로 환원시켜 문제를 비교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즉, 인터넷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쓸 수 있도록 노력하는 문제 해결의 구조와 기아 문제의 구조가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가상적이지만 모든 인류에게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도록, 그리고 충분히 성능 좋은 서버를 제공하여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쓸 수 있도록 하면 기아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다! 야호! (에휴...)


많은 사람들이 빠르게 사용하는 인터넷 

여담이지만 어떤 자원도 한계를 지닌다. 그나마 가장 효율이 좋은 자원이라면 인간의 사고 및 생각이 아닐까 싶지만 그것 역시 신경세포를 혹사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충분한 영양과 관련되기에 이또한 제한된 자원과 연결이 된다. 따라서 모든 인류가 인터넷을 생존을 위해 사용하는 단계가 된다고 해도 인터넷 사용에 불균형은 분명 발생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다른 말은 한정된 자원을 누가 쓸 것인지 정하기 위해 누가 더 많은 토큰 token 을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라고 바라본다. 토큰은 시스템 공학이나 컴퓨터 시스템에서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웹 사이트에 접근하는데 동시 처리 접속자수가 100명일 때 어는 순간 110명이 접속을 하게 되면 이때 누구의 요청을 먼저 처리할 것인지 결정하는 방법으로 각자의 이름이 적힌 토큰을 내고 원하는 페이지를 요청하는데 이때 동시에 100명까지 처리할 수 있으니 101번째부터 요청한 사용자들은 앞선 사용자들이 다 처리될 때까지 기다리게 할 것이다. 이때 사용자들의 토큰을 제출한 순서대로 처리해주는 것이다. 즉, 한번에 처리할 수 있는 자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대기 순번을 만들기 위해서 각자 사용자들의 순서를 정하는 방식이자, 시스템 내부적으로 어떤 작업을 먼저 처리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가지 재미있는 문제가 있다. 단순히 제출한 순서에 맞춰 처리해주는 것은 사용자들이 요청한 내용이 동일한 일의 처리량을 가질 때는 충분히 효과적이다. 그런데 101번째 사용자가 요청한 내용은 자원의 10만큼 필요한 내용인데, 102번째 사용자는 단지 4만큼 쓰게 되고 앞선 사용자 중 처리가 되어 한명이 빠져 나가 가용 자원이 딱 8이 남는다면 101번째 사용자 내용을 처리하기는 부족하지만 102번째 사용자를 처리하기는 충분하게 된다. 이때 고집있게 101번째 사용자의 내용을 처리하기 위해 자원이 10의 여유가 생길때까지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102번째 사용자를 처리해줄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즉, 사용자의 대기 순서도 중요하지만 많은 사용자들이 더 빨리 사용하기 위해서 어떤 설계가 더 효과적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 ⓐ 작업 최적화 load optimization 의 궁극적 목표 ] 


두번째 문제는 특정 웹사이트에 접속하는 사람들이 상당수가 된다면 서버의 위치, 갯수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이다. 조금 현실적인 영역으로 넘어오자. 수많은 사람들이 구글에 접속한다. 동시 처리해야 하는 접속자수도 엄청난 숫자이다. 그런데 마땅히 구글 검색 엔진은 사용자가 많다고 서비스를 거부하거나 검색 결과가 늦게 처리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없었다 하기에는 분명 있긴 하였다.) 그렇다면 구글은 어떻게 이런 시스템을 가능하게 했는가? 가장 정답은 사실 자본이다. 돈이 많기 때문에 성능좋은 서버들을 많이 구매해서 가동시킨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서버의 숫자를 늘린다고 해서 scale up problem 성능이 그에 비례해서 늘어나는 것인가? 절대로 아니다. 즉 자원의 충분한 숫자만큼 그 자원이 쓰이는 곳과 필요한 수요 네트워크에 따라서 어디에 배치할 것인지에 따라서 달라진다. 구글의 경우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양한 연구 내용을 만들어 낸다. [ ⓑ 분산 시스템 distributed systems 의 배치 location 문제 ]


결국 인터넷은 결국 사용자 end user 가 어떻게 쓰는가의 문제가 중요하게 된다. 아무리 좋은 장비와 서버가 배치되어서 접속만 해도 되는 인터넷 환경이 만들어져도 사용자가 접속을 해야 가능하다. 그러나 접속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간과 인터넷을 연결할 수 있는 접촉 영역 user interface 이 필요하다. 최소한 사용자는 웹브라우저를 실행시키기 위해서 터치를 하거나 더블 클릭을 하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인터페이스에 익숙해야 한다. 컴퓨터를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용자에게 컴퓨터를 주고 무엇인가 해보라고 하는 것은 순서가 맞지 않는 비효율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사용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학습하고 교육받는 것이다. [ ⓒ 사용자의 교육 및 연습 user's training & practice ] 


모든 인류가 이제 익숙해져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인터넷은 공짜가 아니다. 이미 언급했지만 인터넷은 수많은 장비와 기기의 지원이 필요하고 이런 부분에 수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결국 인터넷은 자본이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모든 인류에게 인터넷을 쓸 수 있게 한다는 것은 자본이 있는 자들에게만! 으로 변경되어야 하는 것인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이 부분에서 공공재의 수익구조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이패드 하나를 구매하면 아이패드 하나가 만들어지는데 필요한 비용과 기업이 가져가고 싶은 이익까지 다 포함해서 최종 소비자에게 부과하고 이에 가치를 느낀 사용자는 이를 구매하는 것이다. 그러나 꼭 이런 수익 구조, 즉, 수혜자 부담의 원칙이 꼭 이루어지지 않는 곳이 공공사업 혹은 공공재이다. 예를 들어 같은 재화 혹은 서비스라고 해도 수혜자의 경제적 부담비율에 따라서 공급가를 차등 적용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구글을 검색할 때마다 돈을 내야 한다면, 실제 우리가 검색하는데 필요한 서버의 전기료, 선로 이용료 등을 모든 비용을 계산해서 우리에게 부과한다면 사람들은 인터넷을 거의 쓰지 않거나 일부 소수의 전유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 비용이 발생해도 특별히 비용을 사용자에게 부과하지 않는 이유는 검색에 의해 발생하는 비용 구조와 다른 사업을 통해 발생하는 수익 구조를 분리해서 그 이익과 손해를 보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구글 검색에서 특별히 비용을 부담시키지 않아도 다른 광고 사업이나 기업 대상 사업을 통해 수익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사실 개인정보 privacy 차원에서 사용자가 단순히 무료로 사용하는가는 심각하게 생각해볼 문제이지만 이 부분은 잠시 접어둔다.) [ ⓓ 수익구조의 다양화 alternation of business model ]


기아 문제 해결을 위해 인터넷을 생각한다. 

앞서 ⓐ, ⓑ, ⓒ, ⓓ 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빠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노력했던 몇가지 네트워크 상의 문제이다. 식량문제도 가상 실험에서 생각해보았던 것처럼 자원의 배분, 공급, 그리고 사용자의 식량 소비와 같은 네트워크 문제로 환원해서 식량문제를 보다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고 싶은 것이다.

ⓐ 로드 발란스의 문제는 한정된 자원, 특히 같은 시간에 얼마나 많은 문제를 한정된 자원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식량의 문제로 접근하자. 식량은 단순히 양의 문제 a matter of quantity 가 아니다. 시간의 문제임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첫번째이다. 즉, 식량문제를 다룰때 충분한 식량이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충분한 식량이 필요한 곳으로 얼마나 빠르게 실행되어 공급될 수 있는가의 문제라는 점이다. 따라서 식량이 필요한 지역적 문제뿐만 아니라 시간적 문제까지 포함해서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 의 문제와 같이 생각해보자. 시간의 문제로 제때 필요한 곳에 공급하기 위해서는 이를 실행하기 위한 잘 분산된 실행 시스템이 필요하다. 즉, 식량을 어떻게 공급하느냐는 얼마나 잘 정비된 공급망을 가지고 있는가도 중요하다. 사실 더 중요한 문제는 식량은 직접적으로 식량을 만들어 내는 생산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마치 분산 시스템을 적절하게 배치하는 것이 식량을 잘 공급하기 위한 공급망이 잘 되어야 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분산된 형태의 농업 생산이 가능해져야 한다는 점이다.


인류의 문제에 있어서 고민한 내용 중 하나는 왜 인류는 절대적 식량의 양은 증가하는데 왜 기아는 늘어나는가이다. 단순히 자본에 의해 식량이 아닌 연료나 가축의 사료 등에 증가하는 양을 떠나서 왜 기아가 심각한 곳으로 제대로 공급이 되지 않는가이다. 이는 단순히 공급망의 부실로 생각할 수 있지만 생산되는 곳과 기아 지역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서 분산되어 제대로 지역 내에서 처리할 수 있는 소위 지역 내 자체 식량 자급이 절재적으로 부족한 상황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도적인 차원에서 공급되는 식량에 의존하기에는 부족하고 마치 접속하고 싶은 웹사이트가 아무리 성능이 좋다고 해도 사이트까지 접근하는데 복잡하고 긴 선로가 필요하다면 인터넷 속도는 느려지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즉, 분산 시스템이 결국 전체적인 인터넷의 속도를 증가시키는 가장 큰 이유는 가까운 곳에서 처리할 수 있어 멀리까지 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식량 문제를 단순히 전체 식량의 양의 문제가 아닌 지역 단위에서 자급(自給)할 수 있는 능력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 의 문제와 같이 결국 기아 문제를 직접 경험하는 사람들에게도 충분한 교육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즉, 당장의 생존의 문제가 달려 마땅히 먼 미래까지 바라볼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중요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어느 정도 기아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과 더불어 주민들의 교육에도 힘써야 한다는 점이다. 결국 좋은 핸드폰이 있어도 사용자가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효율이 떨어지듯이 식량 문제의 효율을 증가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 중에 하나는 주민들의 인식을 바꿀 수 있는 자립을 목표로 할 수 있는 의식과 희망을 이루기 위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식량의 지속적 지원과 더불어 식량 자립 구조를 가질 수 있는 농업 기술의 조언과 주민들의 의지를 바꿀 수 있는 교육 환경도 필요할 것이다.


ⓓ 의 문제를 연결하면 식량을 단순히 인도적 차원의 지원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보다 다양한 수익 구조를 만들 수 있는 방법으로 전환할 수 있는 국제적 인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다고 해서 빈민국가를 마치 하나의 수익모델로 삼으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탐욕적 그리고 약탈적 수익모델을 막기 위해서라도 수익구조와 비용구조가 분리된 일종의 국제적 차원의 공공 사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구체적인 생각을 쓰기엔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들이 많지만 지역 공동체 단위의 생산 소비가 이루어지는 동네 경제 [ 대량 생산의 불편함 - 동네 경제를 꿈꾸며 ] 에서 비슷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분산된 시스템의 장점 중 하나는 분산된 시스템 자체로 지역이 가지는 특징에 따라 지역이 필요한 경제 구조 혹은 수익 구조를 찾아낼 데이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경제적 수요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분위기, 상황이 다른 나라, 지역과 비교했을 때 좀더 보완하거나 더 필요한 내용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조금 더 접근하면 사실 기아 문제를 경험하는 나라들이 모든 상황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국가는 기아 문제로 40% 의 국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을 때 상위 10% 는 호화로운 삶을 사는 나라도 존재한다. 아주 가까이는 우리나라도 이런 형태의 절대 빈곤의 구조가 없다고 장담할 수 없다. (분명 존재한다.) 따라서 이런 문제를 접근할 때 어떻게 수익구조와 비용구조를 설계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먹을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지 고민해 보는 것이 정책 결정권자들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내용일 것이다.


마무리하며... 

가장 중요하게 전달하고 싶은 생각의 중심은 단순히 인터넷 사용과 식량 문제를 연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빠르게 사용하도록 했던 노력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네트워크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생각할 수 있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통해서 식량 네트워크의 문제를 보다 본질적 문제에서 접근하고 싶었던 부분이다. 따라서 동일한 방법으로 혹은 비슷한 유사성 analogy 로 해결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네트워크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특징의 유사성을 통해서 인류가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쉽게 지나쳐 온 부분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식량문제를 단순히 양의 문제가 아닌 시간의 문제로 바라봐야 하고 이런 이유로 식량 문제의 해결은 하나의 시계열 문제로 처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접근이 될 수 있다는 점, 식량의 공급보다 지역 단위의 자급 시스템을 만드는데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점 등은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를 던진다고 생각한다. 한순간에 식량문제가 뽕 하고 해결되면 좋겠지만 생소했던 인터넷이 어느 순간 우리에게 보급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식량문제도 해결될 수 있는 다양한 해결책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고 싶었다.


인터넷과 식량문제 ─ 네트워크를 바라보다